디지털 자산에 대한 생각 – 2021년 8월

8월은 디지털 자산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굉장히 심장 쫄깃한 한 달이었다. 레닌의 명언 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수십 년이 있고, 수십 년이 일어나는 몇 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8월이 바로 이런 수십 년에 걸쳐서 일어나야 할 일이 4주 동안 일어난 기간이 아닌가 싶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역점 정책 중 하나인 1조 달러 규모의 인프라 법안이 얼마 전에 미국 상원을 통과했다. Infrastructure Investment and Jobs Act라는 법안은 지금 미국이 필요한 법안인 것 같다. 이 법안을 통해서 미국이 재원을 마련하고 – 여기서 말하는 재원은 미국인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겠다는 의미다 – 이 돈으로 도로와 교량, 광대역 인터넷, 전력 그리드 등을 구축하고 강화하겠다는 내용이다. 바이든이 대통령 될 때부터 이미 모두 예상했던 방향이고, 부자들한테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겠다는 것도 다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법안의 ‘Section 80603: Information reporting for brokers and digital assets.’라는 부분을 보면, 1조 달러 예산 중 280억 달러(=33조 원)는 그동안 비트코인과 같은 디지털 자산을 사고 팔 때 징수되지 않은 세금을 통해서 조달하겠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워낙 새로운 분야이고, 관련법도 계속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지금도 디지털 자산 양도세를 많은 미국인들이 내지 않고 있는 건 사실이라서 그동안 걷지 못한 세금을 징수하겠다는 정책도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엔 작은 문제 하나와, 큰 문제 하나가 있다.
일단 작은 문제는, 어떤 계산을 통해서 280억 달러라는 숫자가 나왔는지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바로 어떻게, 누가, 얼만큼의 세금을 내야 하는지 결정하는 방법에 대한 부분이다. 디지털 자산을 사고파는 곳은 코인베이스와 같은 거래소이기 때문에 거래소에는 거래 기록이 저장되고, 이들이 미국 국세청에 거래 기록을 보고하면, 국세청이 세금을 징수하면 된다. 이 법안을 보면, crypto broker는 국세청에 이런 거래기록을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적혀있고,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 crypto ‘broker’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게 정의되어 있다. 법안에서 정의하는 브로커에는 코인베이스와 같은 거래소도 포함되지만, 채굴업자와 소프트웨어 개발자까지 모두 포함된다. 거래소는 고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국세청에 보고하는 게 가능하지만, 채굴업자와 개발자는 디지털 자산의 거래에 관여하곤 있지만, 거래를 하는 사용자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국세청에 보고하는 게 불가능하다. 국세청에 협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 이 법안이 만약 통과되면 많은 채굴업자와 개발자들이 미국을 떠나지 않을까 싶다.

왜 브로커의 개념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정의됐을까? 법안을 만드는 공무원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자산이나 블록체인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그냥 여기저기서 들은 소문과 내용을 기반으로, 크립토 사용자들이 탈세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세금을 걷자는 취지로 시작했을 것이고, 그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몇 의원들이 재무부나 증권거래위원회의 입김을 받고 악의를 갖고 이 내용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실은 이 법안 자체는 2,702 페이지인데, 이 중 디지털 자산과 관련된 부분은 딱 4장이다. 제대로 보지 않았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라서, 많은 사람은 이게 그냥 슬쩍 통과시키려고 하는 날치기 법안이 아니냐는 불만도 많다.

그런데, 정부도 예상치 못한 반발에 조금 놀란 것 같다. 이번 계기로 전 세계의 디지털 자산 시장이 똘똘 뭉치고 있고, 이들은 이 법안을 개정시키기 위해서 합법적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나 같은 일반인들도 해당 구역의 의원들에게 이 법안을 개정해달라고 하는 4만 개 이상의 전화와 문자를 보냈다고 하니 조금 놀랍긴 하다.

실은, 디지털 자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과거에는 비트코인 가격이 하락하는 걸 항상 경험했었는데, 이번엔 오히려 대부분의 코인 가격은 오르고 있고, 이 분야에 집행되는 투자도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이게 정부에 대한 시장의 “엿이나 먹어라”라는 반항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크립토 시장에 믿음이 넘쳐흘러서인지는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듯 하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금은 더 신중하게, 그리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서 이 법안을 개정하길 바란다. 그 누구도 디지털 자산을 통해서 탈세하고 싶어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과 프레임을 만들어야지 혁신을 죽이지 않는 차원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세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나라에서 디지털 자산 관련 법안에 대해서 이런 생산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건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성숙도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유연성과 준비성

7월, 8월은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난 1년 반 동안 거리 두기 단계가 강화됐다가 완화되는 걸 몇 번 경험했고, 이제 위기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 생겼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누구나 다 힘들고 결국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우리 투자사들도 다시 한번 명암이 갈리는 걸 나도 목격하고 있다. 비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은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더 잘되는 곳들이 많다. 기업용 B2B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들도 잘 된다. 많은 기업이 다시 재택근무 체제로 돌아가면서, 원격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이런 솔루션을 도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프라인과 대면이 사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즈니스는 아무리 비상대책을 마련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도, 이렇게 4단계가 발표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냥 매출이나 실적이 줄어드는 걸 손 놓고 볼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우린 현재 어려운 상황의 투자사 대표들과 적극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분들에게 드리는 조언은 작년 3월 코비드 19가 시작했을 때와는 조금 다르다. 나도 그동안 여러 가지를 경험했고, 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나는 상황을 가장 보수적으로 보고, 경비는 즉시 절감하라고 우리 투자사에 조언했다. 불필요한 경비는 당연히 절감해야겠지만 매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필요한 경비조차 절감하라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 스타트업의 비용은 인건비이기 때문에, 매출과 직접 연관이 없는 분들은 해고하는 게 이 불확실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당시에 내가 쓴 글을 보면 이런 내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다.

내 말을 듣고 한 귀로 흘린 대표들도 있고 – 실은, 지금 와서 보면, 이분들이 가장 올바른 결정을 했다 –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긴 분들도 있다.
어떤 분들은 즉시 인력을 해고하고 비용을 줄였다. 어떤 팀은 참 힘들게 사람을 채용했는데, 이분들을 다시 해고했고, 어떤 팀은 인력의 80%를 해고하기도 했다. 비용은 많이 줄여서 runway는 꽤 늘어났지만, 더 이상의 개발이나 마케팅은 못 하고 그냥 오래 버티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또 다른 부류는, 사람은 해고하지 않았지만, 비즈니스를 잠시 피보팅 했고, 이 새로운 걸 하는데 기존 인력을 재배치했다. 예를 들면, 주 비즈니스 모델이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뭔가를 해야 하는 거였다면, 어차피 이걸 못 하니까, 이 모델과 관련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어떤 회사는 B2B 비즈니스를 하다가 B2C로 피보팅을 하기도 했다. 인력이 그대로여서 비용구조는 그대로 가져가지만, 그래도 뭔가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걸 해보자는 취지였다.

나는 둘 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어쨌든 이렇게 버티면 불확실성의 충격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최소 2년은 전 세계가 shut down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상황이 빨리 종료됐다. 그동안 새로운 변이도 나오고,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도 좋아졌다 심해지기를 반복하긴 했지만, 사람들도 이 패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예상보다 빨리 비즈니스 세계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우리뿐만이 아니라, 많은 투자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텐데,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완화될 때마다 투자사들이 매출 기록을 경신했을 것이다.

그러자 사람을 해고했던 회사는 다시 사람을 채용하기 시작했지만, 해고하는 것 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다른 사업으로 피보팅 했던 회사도 원래 비즈니스로 급하게 유턴을 했지만,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준비하고 감을 잡는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소위 말하는 전환비용(=switching cost)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에 그 시장의 1등 또는 2등이던 회사가, 사람을 해고하거나 다른 비즈니스로 피보팅을 하는 동안에 비슷한 사업을 시작한 신규 스타트업이 나왔다. 시장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원래 사용하던 서비스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회사가 다른데 집중했기 때문에 서비스가 더는 맘에 들지 않자, 다른 대안을 찾던 고객들이 새로운 서비스로 갈아탔다. 그러면서 시장의 판도가 금세 바뀌는 걸 우린 보기도 했다.

다시 4단계이다. 이번에는 나는 우리 투자사 대표들에게 위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그냥 돈 아끼면서 버틸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사람을 해고하거나 다른 사업을 할지, 심각하게 생각해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조처를 했는데, 상황이 너무 빨리 회복되면 다시 사람 채용하는 것도 힘들고, 본업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큰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번에는 그냥 조금만 참고 버텨보라고 한다. 하지만, 항상 유연하게, 그리고 준비된 자세로 상황을 예의주시하라고 한다. 이게 맞을지 틀릴지는, 시간이 흐르면 또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에너지 레벨

얼마 전에 대기업에서 오래 일하다가 스타트업으로 “신념의 도약“을 한 분을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일단, 요샌 일 하는 거 자체가 너무 즐겁고 매일 매일 흥분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외부에서 봤던 스타트업 라이프는 직접 경험하는 거와 너무 다르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도 대기업 생활을 한 게 2년 정도밖에 안 돼서, 이분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느낌으로만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젊은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에너지 레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스타트업은 이 에너지 레벨이 엄청나게 높은데, 결국, 이 에너지는 창업팀에서 만들어진다. 남들이 봤을 때 더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길을 포기하고, 누구도 믿지 않는 일을 시작하려면 높은 에너지 레벨이 필요하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는 외로운 세상에서 내 비전을 팔아서 이 미친 짓을 같이 할 팀을 만들려면 높은 에너지 레벨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정된 자원으로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고,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모든 걸 다 하려면 높은 에너지 레벨이 필요하다. 에너지 레벨이 높지 않으면, 절대로 이 짓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창업팀에서 뿜어 나오는 이 에너지는 다른 동료직원들에게 전염된다. 그리고 외부 파트너와 투자자에게도 전달된다.

우리도 지금까지 거의 200개 정도의 회사에 투자했는데, 회사들이 만드는 서비스나 기술을 보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건 거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제품이고, 누구나 운영 할 수 있는 서비스이긴 하다. 여기까진 누구나 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 집요하게 붙잡고, 파고들고, 완벽해질 때까지 끊임없는 실험과 반복을 하려면 높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 레벨이 높지 않으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도 아주 가끔 물어보고 – 요샌 거의 안 물어본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 수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그거 대기업이 하면 어떻게 되죠? 우린 망하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은 꽤 멍청한 질문이긴 하다. 왜냐하면 대기업에서 일하면 절대로 스타트업의 에너지 레벨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 에너지 레벨이 높은 대기업도 있지만, 스타트업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우린 대기업이 우리 투자사를 망하게 할 거라는 걱정은 별로 안 한다. 에너지 레벨의 싸움에서는 스타트업이 항상 이기기 때문이다.

대리위안과 대리만족

작년에 내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작년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한참 어려울 때 많은 창업가들이 남한테 말하기 힘든 고민을 우리와는 아주 솔직하게, 계급장 다 떼고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우린 자진해서 이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했다. 우리와 이야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분들의 걱정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흡수하고, 우리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분들이 조금이라도 가져가서 힐링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늘은 이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나랑 존도 스트롱벤처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도 창업가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만나고, 오퍼레이션을 하는 스타트업을 창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도 우리 나름의 고충과 스트레스가 있다.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만큼의 고충과 스트레스는 아니지만 – 이건 확실하다 – 그래도, 아주 자주, 나도 잠도 못 자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몇 시간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럴 때 나에게도 힐링을 주는 의식과 방법은 바로 우리와 이야기를 하면서 힐링하는, 우리 창업가들과 이야기 하는 방법이다.

얼마 전에도 이런 고민이 매우 많아서 잠을 설쳤고, 하루 종일 집중도 안 되고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일단, 우리 투자사 대표와 만났는데, 이분이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 정말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오랜 기간 동안 고생하다가, 사업이 좀 되는가 싶었는데, 팬데믹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고, 회복의 기미가 이젠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발산하는 긍정적인 에너지, never give up 자세, 그리고 그날 나도 힘들었지만,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금세 나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고, 기분이 힐링되는걸 느꼈다. 실은 나도 힘들고, 대화 상대는 나보다 더 힘들면, 이건 정말 우울한 상황이 되는 게 정상인데, 그렇지 않고 이렇게 서로 힐링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이날 나는 대리 위안을 정말 많이 받았다.

또 다른 건 우리가 오래전에 1호 펀드에서 투자했던 타파스미디어가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된 소식이었다. 꽤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남들은 대박이니 잭폿이니, 화려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 엑싯 뒤에는 얼마나 많은 땀과 피, 그리고 고생이 있었는지 내가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엑싯한건 아니지만, 마치 내가 창업해서 성공한 것처럼 크게 기뻤고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이렇게 남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만족 할 수 있는 것도, 투자하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IRR, Multiple, 그리고 DPI

우리가 스타트업을 만나면 수치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다. 팀도 중요하고, 시장도 중요하고, 제품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돈을 투자해서 다시 이 돈의 수 배를 벌기 위해서는, 스타트업에서 의미 있는 숫자가 나와줘서, 이 회사가 엑싯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회사가 엄청난 펀딩을 받아서 유니콘이 되면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만, 그 회사의 지분을 팔지 않으면 그냥 투자자들이 인정한 종이상으로 높은 밸류에이션 회사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돈을 번 건 아니다.

우리 같은 VC 펀드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적용된다. 벤처 펀드의 실적을 평가하는데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사용되는 수치가 IRR과 multiple이다. 흔히, 배수라고 하는 multiple은 단순하다. 한 펀드에서 투자한 전체 금액과 이 금액의 현재 시장 가치를 비교하는 수치이다. 예를 들어, 한 펀드에서 10개의 회사에 100억 원을 투자했는데, 이 100억 원의 현재 밸류에이션이 200억 원이라면, 배수는 2.0이다. IRR은 내부수익률이라는 건데, 펀드에 투자한 출자자들(=LP)의 실질적인 수익률이다. 이자율의 개념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배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에, 특정 회사에 투자한 후, 이 회사의 지분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IRR은 달라질 수 있다.

벤처 펀드의 수치를 트래킹하고 분석하는 자료를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수치가 많이 보이지만, 아마도 이 배수와 IRR이라는 수치는 항상 도드라지게 강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투자받기 위해서 LP들과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배수와 IRR을 물어보고, 이를 다른 펀드와 비교해보고, 이 펀드의 수익률이 높은지 별로 안 좋은지 판단을 하는 것 같다.

둘 다 아주 오래된 수치이고, 펀드의 실적을 평가하기에는 좋은 기준이긴 하지만, 배수나 IRR은 대부분 아직 실현되지 않는 수치이다(실은, 그래서 실현된 배수와 IRR, 그리고 미실현된 배수와 IRR을 구분하지만, 대부분의 수치는 미실현된 수치이다). 어떤 펀드의 배수가 5.0이면, 엄청난 숫자이지만, 그 펀드에서 투자한 회사들의 밸류에이션이 이 배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실제로 5배의 이익을 얻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IRR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된다. 높은 (미실현) 배수와 IRR을 자랑하는 펀드는 마치 높은 밸류에이션을 자랑하는 스타트업과 비슷하다. 종이 상 숫자는 좋지만, 실제로 이게 수익으로 실현될지 안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DPI라는 수치이다. Distribution to Paid in Capital의 약자인데, 투자자들에게 실제로 수익으로 지급된 현금을 계산한 지표이다. 내가 어떤 펀드에 주주로 참여해서, 10억 원을 출자했는데, 이 펀드가 투자한 회사들이 실제로 엑싯을 해서 출자금의 절반인 5억 원을 실제로 현금으로 받았다면 DPI는 0.5이고, 대박 난 회사가 하나 있어서 30억 원을 현금으로 받았다면 DPI는 3.0이 된다.

펀드 수익률이나 배수가 높으면 자랑할만하고, 펀드 만드는 데 유리하긴 하지만, 결국, 이 펀드에 출자하면, 돈을 벌 수 있냐 없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show me the money를 하기 위해선, 결국엔 수익이 실현되어 다시 출자자들에게 현금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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