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들

1970년생, 올해 50살인 프로 골퍼 필 미켈슨이 얼마 전에 메이저 골프 대회 중 하나인 2021 PGA Championship을 우승했다. 나도 골프를 좋아해서, 볼 수 있는 중계는 웬만하면 생방송으로 많이 보는데, 타이거 우즈 부상 이후에는 골프 중계는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PGA 대회 3라운드와 마지막 라운드는 상당히 흥분된 마음으로 봤다.

필 미켈슨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골퍼 중 한 명이다. 타이거 우즈 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미켈슨은 가장 미국인다운 아메리칸 골퍼다. 백인이고, 왼손잡이이고, 골프보다 가족을 항상 우선순위에 두는, 골퍼이자, 자상한 남편이자, 좋은 아빠이자, 그리고 좋은 아들이라서, 특히 미국 아저씨들이 정말 좋아하는 입담 또한 만점인 골퍼이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크게 부상 당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고,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롱러너이다. 롱러너라고하면, 대부분 실력이 별로인데 그냥 열심히만 하는 사람을 생각하겠지만, 미켈슨은 그 반대이다. 나이가 들면서 우승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그동안 엄청나게 우승을 많이 했고, 지금도 꾸준히 우승하고 있고, 실력으로만 따지면, 가장 creative하고, 힘 좋고, 재능있는 골퍼이다. 이 아저씨가 50살에 최고령 PGA 챔피언이 됐으니, 전 세계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나도 몇 년 있으면 50살이 된다. 요새 내가 많이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장기전과 꾸준함인데, 미켈슨의 이런 우승은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저하되고, 바디 코디네이션이 감소하는 건 운동선수에게는 정말 스트레스받는 일인데, 우리 같은 투자자에게도 달가운 소식은 아니다. 나이 들면서 연륜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는 장점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보다 더 젊은 인구가 지배하는 메인스트림 시장에 대한 감이 조금씩 떨어지고, 우리보다 더 젊고 똑똑한 심사역들이 과감한 투자를 하면서 시장을 리드하는 걸 보면, 더욱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와 오기도 생기지만, 또 한 편에서는 언젠가는 우리도 퇴물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뭐, 이게 슬프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현실이 이렇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직까진, 나는 더욱더 체력 관리를 잘하고, 더욱더 시장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더욱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래서 필 미켈슨의 우승 소식이 더 반가웠던 것 같다. 테니스의 노장 거물 로저 페더러에 대해서 전에 내가 을 쓴 적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 투자사 타파스 미디어 김창원 대표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했다. 미켈슨, 페더러, 김, 모두 다 노장들이지만,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아직 현업에 종사하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언론에서 많이 보도 돼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카카오가 타파스 미디어를 인수한다는 소식이 발표됐다. 금액도 6,000억 원이라는 큰 엑싯인데, 우리 투자사의 엑싯이라서 당연히 기쁘지만, 김창원 대표라서 실은 더 기쁘고 감회가 남달랐다. 나이와 체력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계속 도전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또 일어나고, 달리고, 그리고 훨훨 날 수 있었던 이분 정말 존경스럽다.

나이는 단지 숫자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데, 실은 나이는 숫자 그 이상이다. 나이 들면, 체력도 떨어지고, 시력도 떨어지고, 감도 떨어지고, 운동능력 등 모든 게 감소한다. 그리고 스포츠에는 체력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업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창업이나 투자나 결국엔 체력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다치지 않고 현역 생활을 계속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계속 현역을 뛰다 보면, 언젠간 운과 실력이 만나고, 한 번 더 우승할 수 있으니까. 필 미켈슨, 로저 페더러, 김창원, 모두 뛰어난 노장들이지만, 계속 현역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겼다.

디지털 자산에 대한 생각 – 2021년 5월

5월은 디지털 자산 분야에서 직접 일하고 있는 분들, 또는 투자자들에게는 혼란스러운 한 달이었다. 비트코인 가격의 등락에 대해서는 나는 무딘 편이고, 워낙 왔다 갔다 하므로 큰 신경은 안 쓰지만, 5월 19일 피바다로 인해 모두 가격 이야기밖에 안 하니, 어쩔 수 없이 관련 기사를 많이 접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왜 이런 폭락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겉으로 봤을 땐 기관투자자들에게는 중국효과가 가장 컸고, 개인투자자들에게는 일론 머스크 효과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중국의 비트코인 규제, 이건 솔직히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중국의 비트코인에 대한 입장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고, 요새 더 부정적인 이유는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디지털위안화와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번 중국 같은 강대국에서 비트코인 규제 관련 내용을 발표할 때마다 시장은 출렁거리고,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중국 정부가 디지털 자산 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비트코인 채굴자들에 대한 규제와 압박을 강화할수록, 그동안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던 비트코인 생태계가 탈중국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시장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의견 또한 무시할 순 없다.
일론 머스크 효과에 대해서는 자세히 코멘트하지 않겠다. 머스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도지코인을 정말로 믿는 건지, 제도권에 엿을 먹이는 건지, 정말로 환경파괴를 걱정하는 건지, 이건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여튼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외에도, 다른 나라들의 디지털 자산에 대한 규제 강화 소식도 한몫을 했을 테고, 디지털 자산과 연관된 범죄와 사기 사건도 전체적인 가격 하락에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 또한 전혀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이미 2018년도에 처음 시장의 몰락을 경험했고, 작년 3월에 비트코인 가격이 1만 불 이하로 떨어졌을 때도 피바다를 모두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비트코인 가격이 그동안 너무 올랐고, 상승 폭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하락 폭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득보단 손실에 더 민감한 게 인간의 생리라서 그런지, 이런 패닉과 공황 현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 시장은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게 개인적인 안타까움이다. 사실인지 확인도 안 되고 정확한 의미가 해석되지 않은 특정인들의 발언에 의해서 시장이 이렇게 요동치는 걸 보면, 아직 이 판은 FUD가 남발하는 시장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5월이다.

Inflection 구간

초기 스타트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장이다. 엄청난 적자가 나는 회사에 투자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밸류에이션에 큰 투자금을 투입하는 걸 보면 많은 분들이 갸우뚱하는데, 이건 아마도 이 회사의 성장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들을 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성장을 경험하는데, 성장에도 여러 유형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일단, 가장 이상적인, 투자자들이 항상 투자하고 싶어 하는 회사는, 오랜 시간 동안 매달 10% 이상 성장하는 회사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은 회사마다 다른데, 일반적으로는 이 회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KPI의 성장이다. 많은 회사에게 이건 매출인데, MAU나 PV와 같은 수치가 매출보다 훨씬 더 중요한 회사도 많기 때문에, 이건 모든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다. 우리 투자사 중에도 이런 곳들이 소수로 존재하는데, 2년 넘게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매달 10% 이상 성장한 회사가 있고, 이런 회사는 투자받을 때 본인들이 원하는 금액과 조건으로 투자받는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이렇게 매달 성장할 순 없고, 대부분 업·다운을 반복한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보면 성장 곡선이 출렁거리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잘하는 회사라면, 꾸준한 상향곡선 또는 상향직선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장기적으로 꾸준한 성장을 하는 회사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내가 ‘inflection 구간’이라고 하는 구간들이 보인다. 주로 이렇게 생겼다.

inflection 구간

Inflection 구간 (x 축 – 시간; y축 – 매출(억 원))

이 회사의 성장 그래프를 보면, 일정 기간은 매출이 특정 구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예를 들어, 2018년 2월부터 7월, 5개월 동안은 월 매출이 5억 원에서 9억 원 사이에서 등락을 거듭한다. 그런데, 갑자기 7월부터 매출이 15억 원대로 뛰고, 그 이후에 7월부터 12월까지 또 이 숫자가 15억 원에서 19억 원 사이에서 등락을 거듭한다. 그리고 2019년 1월에 매출이 30억 원대로 상승해서, 이후에는 등락을 반복하지만, 계속 월 매출 30억 원 이상을 유지한다. 그리고 회사가 계속 잘하면, 이런 패턴을 반복하면서, 단기적으로는 등락을 계속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계단과 같은 그래프를 보이면서 계속 성장한다.

위 그래프의 2018년 7월, 2019년 1월을 나는 inflection 구간이라고 부른다. 회사에는 이 순간이 아마도 깨달음의 순간이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경험을 하는 우리 창업가들에게도 물어보면, 수치가 등락을 반복하는 구간은 다양한 실험을 하는 기간이고, 이 실험으로부터 뭔가 깨닫고 배우는 게 있고, 이게 정말로 우리 성장에 도움을 주는 공식이라면, 그 이후에는 순간적으로 점프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이후에, 다시 예전 수준으로 하락하지 않기 위해서 또 실험하고, 배움을 다시 적용해서 또 점프하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성장을 하고 있는걸 발견한다고 한다.

이 inflection 구간이 왜 생겼는지, 왜 그동안 특정 구간 안에서만 움직이던 수치가 갑자기 크게 성장했는지를 수치화 할 수 있다면, 이건 우리의 공식이 되고,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때 회사에 어떤 일이 있었고, 개발팀에는 어떤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고, 마케팅 부서에서는 어떤 특정 매체에 광고했고 페이스북 광고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 영업 부서에서는 어떤 새로운 툴을 도입했는지, 이런 방법으로 회사에서는 어떤 트리거가 작용해서 이런 큰 성장이 있었는지를 최대한 정량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비슷한 공식을 계속 재활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성장을 직접 만들고 컨트롤 할 수 있는데, 비즈니스가 이 수준까지 올라가면, 새로운 시각으로 더 큰 성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투자자들도 이런 비즈니스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성장을 만들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회사이고, 성장 자체가 100% 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실력에 의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달성 가능한 목표

좋은 비즈니스 리더라면 직원들에게 명확한 명령과 가이드를 제공해줘야 하고, 달성해야 하는 KPI에 대한 구처젝인 숫자를 제시해줘야 한다. “올 해도 최고 매출을 갱신하자”와 같은 애매모호한 목표보단, 작년 대비 30% 성장, 또는 100억 원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목표설정을 하는 팀이 항상 일을 더 잘 한다는 걸 나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우리 투자사를 비롯해서, 요새 스타트업계에서도 OKR이 유행하고 있는걸 체감하고 있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결과를 추적할 수 있는 대표적인 목표 설정 프레임워크이고, 내가 네이버에서 OKR을 검색해보니, 관련된 책이 한국에만 110권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인 것 같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입증된 목표설정 프레임워크라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게 그렇게 대단한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은 OKR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건 아니고, 이런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할 때, 이 목표를 얼마나 쉽게 또는 어렵게 설정을 해야 하는지가 오늘의 주제이다. 우리 투자사들의 월간 비즈니스 업데이트를 보면, 어떤 회사는 매달 설정해놓은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있고, 어떤 회사는 목표의 절반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걸 내가 오랫동안 보면서, 느끼고 배운 점들이다. 과거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할 때도 전사적인 목표를 기반으로, 팀과 개인에게 목표가 할당됐고, 업무 평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목표 달성률이었는데, 당시에도 나한테 정해진 목표가 쉬운 건지 어려운 건지에 대해서 항상 논란이 있었고, 나는 매번 최대한 이 목표를 낮추기 위해서 매니저랑 상담을 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두 가지는, 일단 연초에 설정한 목표는 고정된 게 아니라, 내부/외부 상황에 따라서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목표는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목표를 빡세게 잡으면, 대표의 기분은 좋아진다. 마치 그 목표가 이미 달성된 것처럼 느껴지고, 회사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오는 만족감과 자기 최면 자체가 긍정의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나는 이 이론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단 목표가 너무 높으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목표이니, 그냥 안 해도 된다는 역효과가 나는 걸 많이 봤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목표가 너무 쉬워도 리더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항상 목표를 달성하기 때문에, 팀원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 하고, 매번 100% 미만의 노력으로 목표를 달성하다 보면 성취감을 못 느껴서 모티베이션이 떨어진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는 굉장한 단순한 가이드는, 1년 12개월 중 절반인 6개월은 힘들게 달성할 수 있지만, 나머지 6개월은 200% 노력하지 않으면 달성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목표를 설정하는 방법이다. 또는, 12개월 모두 힘들게 달성 가능한 수준에서 딱 20% 정도만 목표를 상향 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항상 어느 정도 수준의 모티베이션을 유지하면서, 번아웃 되지 않고, 성장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의 깊이와 너비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창업하기 전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설문조사이다. 우리 투자사 모아폼과 같은 전문 서베이 제품을 사용하거나, 간단한 구글폼을 이용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하게 되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다. 내가 만난 많은 창업가에게 혹시 제품을 만들기 전에 잠재 고객과 이야기하거나, 시장 조사를 해봤냐고 물어보면, 이런 설문 결과를 보여준다. 대부분 현재 시장에 있는 제품의 더 편한 대체 솔루션이 있다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바꿀 의향이 있거나, 이런 게 나오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돈을 지불하고 사용해볼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설문 결과를 보여준다.

일단 설문 조사는 아이디어를 검증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설문을 작성할 때, 작성자는 본인이 원하는 답변을 얻기 위해 설문을 만든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바가 있고, 설문 결과에 대해서 본인은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고,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잠재 고객의 입과 손가락에서 나온 결과는 믿으면 안 된다. 뭐, 그래도 아예 이런 설문 조사를 하지 않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해보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80% 이상의 설문 응답자들이 우리 제품이 나오면 사용할 의향이 매우 크다고 했는데, 막상 출시하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 많던 잠재 고객은 어디 갔고, 왜 아무도 설문에서 말한 대로 우리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까?

일단, 설문 조사는 시장과 고객의 진짜 지불용의를 반영하지 않는다. 입을 여는 거와 지갑을 여는 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문조사를 정말 제대로 했고, 여기서 나온 80%라는 결과가 진짜인데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포스팅의 주제인,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깊이와 너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설문 대상의 80%가 현재 시장에 있는 솔루션이 불편하다고 하면, 뭔가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는 상당히 넓은 문제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제품보다 더 뛰어난 대체 솔루션을 제공했는데도 불편함을 호소하던 80%의 고객이 더 빠르고, 더 좋고, 더 싼 우리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이 문제가 넓긴 하지만, 깊진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즉,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기엔 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완전히 새로운 제품으로 갈아탈 정도로 불편하진 않다는 뜻이다. 문제가 더 깊어야지만, 대부분의 고객이 지갑을 열고, 기꺼이 돈을 쓸 지불 의사가 생기는데, 이렇게 애매하게 불편하면, 우리가 바라던 반응이 안 일어날지도 모른다. 새로운 제품의 switching cost보다 혜택이 (월등히) 더 커야 하는데, 문제가 깊지 않고 넓기만 하면, 혜택보단 switching cost가 더 크고, 결과적으로는, 좋은 대체 솔루션을 제공하는 게 어렵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신용카드를 긁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게 이 포스팅에서 말하는 문제의 너비와 깊이이다. 카드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 카드 수수료, 플라스틱이 환경이 미치는 영향, 카드가 안되는 상점, 마그네틱 손상 등의 플라스틱 신용카드의 명확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결제 솔루션을 많은 창업가들이 연구한다. 그리고 이미 시장에 모바일 결제 등의 다양한 대체 솔루션이 존재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갑에서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서 단말기에 긁는다. 왜냐하면,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신용카드 기술이 좋고, 인프라가 너무 잘 만들어져서, 카드를 긁는 것만큼 편한 결제 방법이 없다.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신용카드의 문제점이 당연히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인정해서, 이게 굉장히 넓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모바일 결제와 같은 대체 방법으로 갈아탈 정도로 그 문제가 깊진 않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당장 대체할 수 있는 솔루션이 한국에서 대중화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건 넓고 깊은 시장의 문제를 파악해서 이걸 공략하는 건데, 이런 시장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문제 자체의 너비는 적당하지만, 굉장히 깊은 걸 선호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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