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향평준화

올해 첫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이 지난주에 끝났다. tvN이랑 티빙에서 중계했는데 tvN은 아시아컵과 같이 보여주다 보니 중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우리 투자사 피클플러스 통해서 티빙 결제를 하고 평일 밤과 주말에 만족스러울 만큼 테니스를 시청했다.

올 해 남자 단식 챔피언은 당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아들 야닉 시너였는데, 22살 밖에 안 됐다. 이 친구의 미래가 매우 기대된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남자 테니스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그리고 노박 조코비치가 이젠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은퇴하고 있고(너무 슬프다),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피’들의 싸움은 정말 재밌었고, 올해 아직 3개의 메이저 대회가 남았는데, 많은 기대가 된다. 언젠가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를 1년에 모두 직관하고 싶다.

특히 호주 오픈 시합들을 보면서 – 참고로, 나는 복식 경기와 여자 경기는 잘 안 보지만, 이번엔 여자 단식 경기를 몇 개 봤다 – 생각난 단어는 ‘상향평준화’였다. 10대 선수도 있었고, 20대 선수도 너무 많았는데, 과거의 10대, 20대 선수들과 비교해 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잘 한다. 테니스 평론가들에 의하면 인류가 진화하면서 운동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이로 인해서 선수들의 평균 나이가 더 어려졌다고 한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수들이 입는 옷과 신발은 더 가벼워지고 땀이 잘 말라서 움직임이 좋아지고, 라켓과 공의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더 빠르고 강한 서브와 스트로크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테니스가 이렇게 계속 진화하면서 선수와 코치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이터가 쌓이고, 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에 훈련 또한 개인화되고 체계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러면서 테니스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고 있다.

창업의 현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트롱이 투자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던 2012년과 12년 후인 2024년 현재 한국의 창업씬은 완전히 달라졌고, 창업가와 이들의 직원들, 그리고 이들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모두 상향평준화가 됐다. 그냥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슈퍼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내가 호주오픈에서 봤던 현상이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창업가들의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평균 나이 또한 많이 내려갔다. 과거에는 학생 창업가와 20대 중반 창업가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젠 이런 young gun들이 상당히 많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똑똑해진 창업가들은 더 똑똑하게 일할 수 있고, 과거보다 더 싸게, 더 좋게, 더 빠르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생성형 AI, 이거 하나만 잘 활용해도 생산성이 거의 10,000% 이상 올라간다. 계속 좋은 창업가들이 유니콘을 만들면서 진화하고, 이들에게 투자했던 VC들도 진화하면서 창업 생태계에는 총체적인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다양한 정성적/정량적 데이터가 쌓였고, 이 데이터를 활용해서 또 유니콘들이 더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 선순환 바퀴가 굴러가면서 창업가들은 계속 상향평준화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항상 하던 고민을 더 높은 차원에서 해야 한다. 상향평준화 되어 있는 이 시장에서 앞으로 5년~7년 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모든 게 미지수인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창업가들을 보는 안목 자체는 상향평준화가 잘 안되는 것도 현실이다.

모든 게 새로운 세상

올해는 스트롱 모든 팀원분들이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를 다녀왔다. CES 이후에 프라이머사제가 주최하는 미국의 가장 큰 한인 tech 행사인 82 Startup Summit 2024도 참석했고, 이후에 미국에서 각자 일을 보고 서울로 복귀했다.

나는 한국에 일들이 많아서 사무실을 지켰는데, 현지에서 팀 동료분들과 지인분들이 전달해 주는 CES 관련 소식과 사진을 계속 봤는데, 무척이나 futuristic한 제품과 서비스가 꽤 많았고 매우 흥미로운 회사들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올해가 참 흥미로웠던 게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CES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 이 기간에 라스베가스 인구 절반이 한국인이었다는 농담도 있었는데, 한국이 뭔가를 안 하면 안 했지, 만약에 하면 대충 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또한, CES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과 LG의 존재감은 항상 컸고, 올해도 좋은 기술과 제품을 발표했는데 이제 자동차 산업이 진화하면서 모빌리티가 CES의 큰 주제가 됐고, 이 분야의 글로벌 강자인 한국의 현대와 기아의 존재감 또한 매우 컸다. 즉, 한국의 기술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 한국인들의 글로벌 시장 참여 또한 더 좋아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나는 해석했다.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무거운 하드웨어, 이 하드웨어를 제어하는 첨단 소프트웨어, 세상을 갈아 먹고 있는 AI, 그리고 이 중심에 있는 갈수록 똑똑해지는 우리 인간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고 있고, 그 결과는 몇십 년도 아니고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우리 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 나도 자주 말하지만, 이젠 죽도록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고, 어떤 변화는 죽도록 열심히 노력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정신 차리고 내 주변을 보면 모든 게 새로운 세상이다.

내가 VC 투자를 하면서 좋아하게 된 몇 가지 명언들이 있는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인 더글라스 아담스가 이런 말을 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건 정상적이고, 이 세상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15세에서 35세 사이에 개발된 건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혁신적이지만, 이걸 잘 공부하고 연마하면 좋은 직업이 될 수 있다. 35세 이후에 개발된 건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올해 나는 50이 됐다. 위 말에 의하면, 이미 지난 15년 사이에 개발된 건 나에겐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서 어차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니 굳이 이렇게 힘들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시간 낭비라는 뜻인데, 모든 게 너무 새롭다고 느끼는 게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현실은 이 정도로 우울하진 않다. 그래도 요새 만나는 스타트업들의 비즈니스를 절반 이상은 잘 이해하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조금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잘 이해 가지 않는 기술이나 사업이 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자하지 말자는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실은, 과거에는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감이 좋은 다른 스트롱 동료분들의 의견과 판단에 맡기거나, 그냥 이해하지 않고 믿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꽤 있는데, 다행히 잘 안되는 곳 보단 잘하는 곳들이 많고, 이 창업가들을 볼 때마다 내 기준에 새로운 세상이라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새로운 세상에 내 기준을 맞춰야 한다고 다짐한다. 비록 이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벌이는 놈, 말리는 놈, 치우는 놈

우린 가급적 1인 창업팀에는 투자를 잘 안 한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업 능력의 이슈라기보단, 사업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힘듦과 외로움 때문인데, 자세한 건 이 글을 참고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가 선호하는 가장 이상적인 창업팀의 구성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을 내가 상당히 많이 받는데, 그동안 머릿속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해서 설명하는 게 어려웠다. 그냥 단순하게 개발 잘하는 사람들, 펀딩 잘하는 사람들, 본인보다 똑똑한 사람들 잘 채용하는 사람들, 뭐 이 정도였는데,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창업팀의 구성을 조금 더 명확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런 생각을 좀 정리해 봤다. 어떤 기준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수만 가지의 답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창업팀에는 인원수와는 상관없이 일을 벌이는 놈이 있고, 이걸 말리는 놈이 있고, 그리고 벌인 걸 치우는 놈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창업팀에 골고루 있어서 상호 보완하면서 동시에 상호 견제할 수 있다면, 이 팀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사업을 하다 보면, 뭔가 하나 정도는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벌이는 놈은 창업가의 전형적인 인재상이다. 모든 걸 일반화하는 건 위험하지만, 이런 분들은 대부분 E 성향이고, 머릿속에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가 생기는데, 이걸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보단 모든 걸 발산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그래서 모든 아이디어를 실행해야지만 만족하는 그런 성향의 창업가다. 문제는, 현실적으론 하나만 해도 성공하기 힘든데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제품이나 기능을 출시하려고 하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특히 벌이는 놈들의 가장 큰 단점은 벌이기만 하지 마무리를 못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걸 말리는 놈도 창업팀에 있어야 한다. 전형적인 I 성향인데, 그냥 웬만하면 일을 잘 안 벌이는 그런 성향의 창업가다. 아무것도 안 벌이는데 어떻게 창업하게 됐냐고 물어보면, 웬만하면 일을 안 벌이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하는 성격이고, 꼭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창업했다고 한다. 이런 분들의 장점은 옆에서 뭔가를 계속 벌이는 공동창업가의 앞길을 계속 막으면서 일을 못 벌이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은 일을 안 벌이기 때문에 일단 많이 시도해 봐야지만 이 중 몇 가지가 성공하는 확률 게임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벌이는 놈과 말리는 놈이 치열하게 싸우지만, 어쨌든 뭔가를 계속 해야 하는 게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결국엔 벌이는 놈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다.(크게 이기는 건 아니고, 살짝).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벌이는 놈의 단점은 마무리를 못/안 한다는 건데, 여기서 치우는 놈이 등장해서 똥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일의 매듭을 잘 짓는다.

이런 사람들이 골고루 잘 갖춰진 창업팀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은 그 어떤 팀이 하더라도 스타트업은 대부분 실패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 한대로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창업팀이 안 깨지고 오래 가는 걸 나는 경험했고, 좋은 팀이 깨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업을 같이 하다 보면 반드시 뭔가 하나는 성공하는 걸 가끔 봤다.

버팀의 미학

최근에 우리가 6~8년 전에 투자했고, 아직도 생존하고 있고, 투자 당시의 그 비즈니스를 그대로 하는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오랜만에 각각 만났다. 이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고마움, 안타까움, 그리고 걱정, 이 세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 힘든 길을 거의 10년 동안 우직하게 가고 있다는 점, 유니콘 사업은 아직 못 만들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사업을 만들었고, 어떤 곳은 흑자전환까지 했다는 점은 초기 투자자로서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의 10년이나 했는데 아직 너무 작은 스타트업으로 남아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면 안타까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10년 동안 임계 규모를 못 만들었다면, 앞으로 10년 동안도 못 만들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 투자금은 어떻게 회수할까 현실적인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전 세계의 스타트업을 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큰 성장을 못 했지만, 탄탄한 사업모델을 만든 창업가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엑싯이 만들어지는 걸 꽤 많이 봤고, 실은 우리가 투자한 회사도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곳들이 있다. 이 회사들은 대부분의 사업 성공과 성과가 엑싯하기 전 1~2년 동안 다 만들어졌다. 즉, 창업 후 10년 만에 엑싯을 했다면, 9년 동안은 아무도 모르는 회사로 매일매일 진흙밭을 굴렀고, 마지막 1년 동안 갑자기 급성장해서 모든 성과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런 창업가들은 내가 봤을 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이분들은 최소 5년 이상 사업을 했고, 사업하는 동안 한눈팔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오래 사업을 하면서 성과가 없고, 주변에 많은 동료창업가들이 메타버스나 NFT 같은 아이템에 올인 하기 시작하면 피봇팅을 해볼 만도 한데, 이분들은 그냥 자신이 하던 사업에만 계속 집중했다. 물론, 그 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작은 시도를 엄청 많이 하면서 될 것과 안 될 것을 나름 분류했다.

이렇게 오래 사업을 하다 보면 – 그리고 아예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업이 아닌 이상 – up/down이 있지만, 가끔 아주 잘 될 때가 있다. 이 잘 되는 기간에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수많은 경쟁 스타트업들이 시장에 나온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만드는 게 힘들다고 판단하는 순간 많은 경쟁사가 다른 시장으로 이탈하거나, 너무 이 사업을 쉽게 봤던 스타트업들은 문을 닫는다.

그리고 5년, 7년,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데, 어느 날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서 내 주변을 보면, 그동안 나랑 코피 터지면서 경쟁하던 스타트업들은 다 없어졌고, 어느 순간 나 혼자만 남게 되고 나 혼자만 이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와 비슷하다.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고, 등산을 시작할 땐 모두 다 자신감과 의지가 가득 찼지만, 지형이 험해지고, up/down이 심할수록 중간마다 낙오자들이 발생한다. 초반에 너무 페이스를 올렸다가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체력이 약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쳐서 산행을 중단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남 신경 안 쓰고, 꾸준히 나만의 등산을 하는 사람들만 끝까지 남는다. 이분들은 앞만 보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산 정상 근처까지 와서 뒤를 보면,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혼자 정상에 서게 된다.

스타트업도 비슷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분야에서 잘 버티던 나만 혼자 이 분야에 남았고, (아직은) 유니콘이 못 됐지만, 어느 순간 이 분야에서 일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에서 말한 우리 투자사들이 이런 회사들인 것 같다. 규모는 아직은 작지만,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버티면서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버티칼에서 일등 스타트업이 얼떨결에 되어 있는 것이다. 너무 작은 버티칼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의문도 있지만, 시장이 엄청나게 파편화되어 있는 거지 그렇게 작은 시장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런 오래된 창업가들에게 거는 희망이 크다.

무작정 버티면서 사업하는 게 정답은 아니다. 오히려 오답일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버티는 건 병신 같은 짓이다. 하지만, 느리지만 계속 성과가 만들어지고, 시장이 존재하지만 크게 파편화되어 있어서 규모가 안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면, 언젠가는 큰 사업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에는 버텨보길 권장한다. 버팀의 미학은 지금은 너무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만, 언젠가는 나를 이 시장의 유일한 절대강자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헤일메리패스는 없었다

미국 운동 경기를, 특히 미식축구, 보면 Hail Mary pass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사전적인 의미는 미식축구에서 매우 긴 앞으로의 패스로, 일반적으로 필사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힘과 도움을 구하는 가톨릭의 “Hail Mary(=아베마리아)” 기도의 Hail Mary가 붙는다. 나는 미식축구를 즐겨 보진 않지만, 응원하는 몇 개의 대학팀이 있어서 가끔 보는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봤던 10개가 안 되는 헤일메리 패스 중 기적적으로 점수로 이어져서 극적인 우승에 기여했던 게 딱 한 개 있었다. 가능성은 작지만, 가능성이 낮은 만큼 이게 성공하면 정말 짜릿하다.

작년에 많은 스타트업이 이런 헤일메리 패스를 시도했다. 우리 투자사 중에도 이런 곳들이 있는데, 대부분 자금이 다 소진됐고, 팀원들이 대부분 나간, 어떻게 보면 그냥 문을 닫는 게 더 정상인 회사들이었다. 어떤 회사는 5년 이상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이제 창업가들도 지쳤고, 직원들도 지쳐서, 그동안 정말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 있었는데 차마 돈이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서 해보진 못했지만, 그냥 마지막 헤일메리 시도로 마지막 피봇팅을 했다. 그동안 이 회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번 아이템도 안 될 것 같았지만, 당시 내 머릿속은 “오래전에 봤던 그 미식축구 경기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판 헤일메리 패스로 역전승을 거뒀던 걸 내가 두 눈으로 생생해 봤지. 어쩌면 이 회사도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과 기대감으로 꽉 차 있었다.

결과는, 이 마지막 헤일메리 시도는 실패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확률적으로 이게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헤일메리 시도가 다 실패해서 결국 대부분의 회사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고, 그냥 단순히 운이 좋아서 성공하는 스타트업도 없다는 걸 새삼 다시 한번 느꼈다. 그냥 어떻게 잘 되는 사업은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막판에 하늘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우를 범하지 말자. 미식축구도 1시간의 공식 경기 시간이 있고, 이 시간 동안 실력에 의존하면서 최대한 많은 점수를 내서 이기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다. 스타트업도 평소에 잘하는 게 가장 좋다. 이렇게 하려면 요행을 바라지도 말고, 그냥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도 말고, 그냥 매일 매일 꾸준히 해야 할 일을, 그리고 해야 할 일만 연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