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조미료

얼마 전에, 우리와 공동투자도 많이 하고, 나랑 개인적으로도 친한 다른 투자자와 한국의 초기 AI 스타트업과 창업가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요새 한국의 초기 AI 시장 분위기는 어떤지, AI 스타트업을 만드는 창업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한국은 이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지와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우리는 초기 회사들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매달 한두 개의 신규 회사에 투자한다. 요샌 아마도 10개 회사 중 7개는 AI 조미료가 가미된 스타트업이고, 미팅은 대부분 “AI 네이티브” , “AI 퍼스트” , “AI 기반” , “AI driven”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피칭을 너무 많이 듣고,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는 창업가를 너무 많이 만나니까 이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팀 동료분들에게 AI 회사 피칭 하나만 더 들으면 토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 중 아주 좋은 회사도 가끔 있다. 정말로 AI가 스타트업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이렇게 만든 소프트웨어가 고객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product market fitting이 제대로 된 제품도 있는데, 이게 되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된다. 하지만, 아직 이런 회사는 소수이고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그냥 AI 조미료를 먹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고, 비슷한 사업을 하는 미국의 어떤 회사처럼 1년 만에 데카콘을 만들겠다는 의지만 강하다.

AI 회사들의 강점은 명확하다. 그리고 아주 파워풀 한 강점이다. Web 2.0의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에 클라우드 컴퓨팅이 대세가 되면서 창업의 비용과 문턱이 현저하게 낮아졌는데, 물리적인 서버를 구매하지 않고 사용하는 만큼만 지불하는 클라우드,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지 않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오픈 소스 코드의 대세, 비싼 마케팅보단 거의 무료로 하면서 더 큰 파급력을 만들 수 있는 소셜 미디어 마케팅 등이 당시에 “창업은 비싸다”는 개념을 완전히 박살 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도 이후에 정말 많은 질 좋은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AI로 인해 이 창업의 장벽이 다시 한번 내려가고 있고, 이에 따라 창업에 대해서 고민하던 아주 똑똑하고 수준 높은 창업가들이 창업의 첫발을 내딛는 결정을 과거 대비 쉽게 하고 있다는 걸 요새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다. 이제 대부분의 노가다를 AI가 완전히상당히 많이 대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고, 우선순위는 높지 않지만, 시간과 자원이 많이 소요되는 업무에 이런 AI 대체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좋기만 한 걸까? 장점이 너무 많지만, 여기에 큰 함정도 있다. 바로 창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부작용이다. 창업의 장벽이 낮아진 것과 모두 다 유니콘을 만들 수 있는 건 여전히 완전히 별개이고, 솔직히 아예 상관없는데, 이 두 가지가 같다고 착각하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전에는 5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했다면, 이제 이보다 더 적은 팀으로 괜찮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긴 하지만, 결국 AI로 만든 이 제품을 고객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여전히 어렵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게, 이제 비슷한 제품을 똑같은 AI 모델로 누구나 만들기 때문에 고객의 기대 수준은 더 높아졌고, 이들의 지갑을 여는 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그리고 왜 이런 생각을 쉽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AI 기반의 사업을 하면 창업 첫날부터 글로벌 사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정말 큰 착각이다. 영어로 된 UI와 글로벌 제품과 비슷한 UX는 과거보다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맞지만, 결국 외국 시장에서 사업을 하려면 외국 고객들을 알아야 하고, B2B 사업이면 외국 기업 고객들에게 영업해야 하고, 그 나라에서 결국엔 팀을 만들어야 한다. AI 사업이든 아니든 그냥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해외 확장 과정을 거쳐야 한다. AI first 사업이라서 첫날부터 글로벌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창업가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냥 실체가 없는 “AI native 사업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분들은 AI 조미료를 너무 많이 처먹은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조미료로 인해 밸류에이션이 너무 높아졌다. 비슷한 팀인데, AI로 사업을 하는 팀은 오프라인 사업을 하는 팀보다 자신에게 매기는 밸류가 말도 안 되게 높고, 역시 물어보면 해외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의 밸류에이션이 그 근거이다.

AI 자체는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AI 자체에는 거품이 별로 없지만, AI 조미료가 만드는 밸류에이션과 창업가들의 허세에는 거품이 너무 많이 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AI 난리 지랄을 잘 구분하고, 기대 수준을 모두 잘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벤처 생태계에 또 한 차례의 위기가 올 것이다.

네이비씰처럼 살기

이 블로그를 통해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듣는 팟캐스트가 엘리트 운동선수들 인터뷰라고 했는데, 운동선수들 팟캐스트 외에 또 자주 듣는 건 전직 특수부대 출신 군인들의(미군) 팟캐스트다. 일단 미국의 엘리트 운동선수와 특수부대원의 팟캐스트를 들을 때마다 가장 놀라운 건, 말을 너무 논리적으로 잘 한다는 건데, 내가 아는 한국의 운동선수와 군인들과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난다. 물론, 말을 잘하니까 팟캐스트도 하고 사업도 하겠지만, 이건 미국의 교육과 환경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건강, 노화, 장수에 대한 전문가 중 한 명인 앤드류 후버만의 팟캐스트 Huberman Lab에서 네이비씰 군인 출신의 인플루언서이자 사업가인 DJ Shipley를 인터뷰했다. ‘How to Make Yourself Unbreakable’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이름의 인터뷰이지만, 내용은 너무너무 좋다. 팟캐스트를 듣고 난 후에 나도 DJ의 습관, 루틴, 사고, 태도를 그대로 따라 해서 unbreakable이 되고 싶을 정도였다.

일단 전 세계에서 가장 빡센 훈련을 거치는 특수부대 중의 특수부대 네이비씰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분은 나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정신력(=멘탈)과 체력(=피시컬)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하고,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몸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이라서 일단 일반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육체적 훈련을 거치고, 그 악명높은 BUD/S(Basic Underwater Demolition/SEAL) 6개월 훈련을 통과해서 네이비씰이 된 군인들을 기본적으로 존경한다. 또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육체가 강한 사람들은 정신력도 강하기 때문에 더욱더 특수부대원들을 존경한다.

이 팟캐스트에서 계속 언급되는 내용은 “반복” , “루틴” , “책임”이다. 특히 DJ의 루틴은 10년 이상 매일 같은 루틴을 나름 엄격하게 반복하는 나 같은 사람이 들어도 아주 짜증 날 정도로 엄격하다. 이런 사람과 같이 사는 이분의 가족이 존경스러운데, 종교보다 더 종교다운 루틴을 이분은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매일 반복하고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기상하고, 아침마다 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거의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저녁마다 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같은 시간에 잔다. 조금이라도 이 루틴이 어그러지면, 하루를 완전히 망치고, 하루를 망치면, 일주일을 망치고, 일주일을 망치면, 한 달이 힘들고,,,결국엔 인생이 불행해지고 정리가 안 되기 때문에, DJ의 가족은 정말 급한 위기 상황이 아니면 이 루틴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분의 루틴은 내가 완벽하게 따라 하기엔 무리지만, 배울 점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했다. 네이비씰이 전시에 지키는 그 엄격한 루틴을 제대한 후에도 인생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고, 이런 삶을 살면 남들보다 더 앞설 수 있다는 건 누구가 잘 알지만, 또 동시에 이런 삶을 모두가 다 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루틴은 이분의 삶의 극히 일부만 반영하고, 실제 배울 점은 이런 루틴을 기반으로 자신을 unbreakable 하게 만들 수 있는 습관, 태도, 사고방식인데, 이런 것들이 이 팟캐스트의 핵심이다.

인터뷰에서 DJ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결정한다.”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는데, 나는 이 말이 제일 맘에 들었고 이거 하나만 제대로 해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예시를 들었다.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데, 매일 아침 늦게 일어나서 허둥지둥 회사에 미친 듯이 뛰어오고, 이 와중에 지하철에서 지갑이나 폰을 분실하고, 일에 집중 못 해서 매일 깨지는,,,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왜 내 인생은 항상 이럴까?” , “왜 나는 항상 여유가 없을까?”라면서 자책한다.

근데 정말 왜 그럴까? 이런 사람들은 왜 항상 이렇게 살까? 간단하다. 본인이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이러면 평생 지각하고 평생 여유 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이런 사람이 되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고,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건 네이비씰이 아니라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노가다 먼저 해라(스케일이 안되는 일을 먼저 해라)

이 글은 이미 폴 그레이엄이 ‘Do Things that Don’t Scale’에서 제품을 만들 때 처음부터 스케일을 생각하지 말고, 한 땀 한 땀 노가다로 시작하라고 강조한 내용을 거의 재탕하는 포스팅이다. 이제 필수 고전이 된 이 글은 대부분의 창업가가 읽어 봤을 텐데, 제품과 사업의 초기 실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노가다를 하면서 초기 고객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이들이 원하는 걸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에어비앤비 창업가들이 사업 초기에 직접 집주인들을 찾아가서 본인들이 사진을 이쁘게 찍어서 공급을 확보하거나, 드롭박스 대표가 지인들의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직접 설치해 주고 사용 방법을 알려줬던 초기 노가다는 이젠 전설이 되긴 했지만, 이런 unscalable한 행동들이 미래의 scalable한 프로세스의 기반이 된다는 내용의 글이다.

내가 VC를 시작할 때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땐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뮤직쉐이크를 할 때 투자받기 위해서 VC들을 만나면 모두다 “이 사업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확장할래?”라는 질문을 했고, 나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 없었기 때문에 – 당시엔 모든 걸 수동적으로 하나씩하고 있었다 – 매번 깨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처음부터 제이 커브의 스케일을 만들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는데, 폴 그레이엄은 오히려 완전히 반대의 내용을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많은 회사에 투자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제품을 만들고 초기 고객을 확보하면서 성장하는지를 옆에서 보니, 스케일이 안 되는 노가다를 먼저 하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됐고, 이제 나도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거의 비슷한 내용을 설교한다.

B2C든 B2B든 제품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product market fitting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제품을 시장이 원하는 제품과 최대한 일치시키는 작업인데, 이걸 하기 위한 지름길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재 고객과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데, 고객의 목소리를 가장 자세히 듣는 방법은 한 번에 한 명의 고객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초기 product market fitting을 위해서 한 번에 백만 명의 고객과 이야기할 순 없다. 한 번에 여러명의 고객과 이야기하는 건 product market fit가 된 제품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후 더 많은 고객이 원하는 기능을 개발할 땐 가능하지만, 일단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고객을 한 명씩 찾아가서 이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리고 우리 제품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소상공인을 위한 B2B 솔루션을 만들고 싶다면 매일 소상공인을 찾아가서 이들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고객의 목소리를 하나씩 듣고 그들이 필요한 걸 코드로 만들어야 한다. 스타벅스보다 더 좋은 커피 비즈니스를 만들고 싶다면 매일 스타벅스 매장에 가서 스타벅스 고객들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고객의 목소리를 하나씩 듣고 그들이 필요한 걸 스타벅스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한다. 이런 스케일이 안 되는 노가다를 해야지만 스케일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다.

창업가들은 초반부터 스케일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노가다를 리스펙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요한 성장

우리는 지금까지 290개가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초기 VC가 대부분 비슷할 텐데, 이 중 75% 이상은 평생 엑싯도 못하고 그냥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나머지 25%에서 승부가 난다. 이 25% 중에서도 극소수만 엄청 잘 되고, 나머지는 그냥 평타를 치거나, 아니면 회사는 잘 먹고 잘사는 라이프스타일 사업이 되지만, 이런 회사는 우리 같이 수십 배의 수익을 바라보고 투자하는 VC에겐 썩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뭐, 그렇다고 우리가 투자하는 회사마다 별로라는 건 아니다. 좋은 성장을 하고 있는 회사도 많고, 꽤 많은 회사가 그들이 사업을 하는 분야에서는 고객이 가장 먼저, 또는 두 번째로 떠올리는 “top of the mind” 브랜드가 됐거나 되고 있는데, 이 과정을 옆에서 꽤 가까운 곳에서 본다는 건 초기 투자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자랑이다. 이 중엔 당근, 핀다, 클래스101과 같이 상당히 큰 시장에서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된 투자사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상대적으로 낯선 시장에서, 그 시장에 종사하는 관계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된 투자사도 있다.

이건 내가 말한 게 아니라 작년에 다른 분에게 들은 건데, 스트롱 투자사들은 겉으로는 요란하진 않지만, 안으로는 아주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많아서 좋다는 말이었다. 즉, 본인이 지금까지 수많은 스타트업과 대표들을 봐왔는데, 소셜미디어에서 정말 요란하게 사업하고 투자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회사들은 결국엔 큰 사업으로 성장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조용히 좋은 제품과 매출을 만들면서 고요하게 성장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회사들이 크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스트롱 투자사들이 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조용히 사업에만 집중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최근에 후속 투자를 유치하는 우리 투자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위에서 말한, 작년에 들었던 고요한 성장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대표님이 매달 이메일로 보내주는 업데이트는 잘 읽고 있지만, 직접 만나서 그동안의 사업 경과, 지표,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고, 상당히 인상 깊었던 미팅이었다. 고요한 성장을 하고 있는 딱 그런 회사였기 때문이다.

일단 이 회사가 사업하는 분야는 대부분의 투자자나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산업이다. 우리도 처음 만났을 때, “와, 한국에도 이런 시장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잘 안 알려진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안 알려진 시장이라고 하면, 대부분 아주 작은 틈새시장을 떠올리는데, 이 시장은 전혀 작지 않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조 원 되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엄청나게 큰 틈새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우리 투자사는 수년 동안 진흙탕에서 굴렀고, 그동안 솔직히 망할 뻔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회사는 절대로 죽지 않고 매번 더 강하게 살아남는 바퀴벌레처럼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면서 그 분야에서 계속 자기만의 영토를 야금야금 만들었고, 자신의 브랜드도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들이 투자자들의 돈으로 요란하게 사업하고 있을 때, 이 회사는 아주 조용히 제품을 만들었고, 고객을 확보했고, 매출을 만들었고, 심지어 수출까지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요란하지 않고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제일 좋다.

현장의 중요성

몇 주 전에 어떤 해외 투자자를 서울에서 꽤 오랜만에 만났다. 요새 스트롱벤처스의 현황과 우리가 어떤 창업가들을 만나고 있는지에 대해 업데이트했고, 한국 시장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공유해줬다. 이야기 도중 이분이 나에게 한국의 계엄 사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2025년 절반은 우리가 국가의 리더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때 내 반응은 “아, 맞다.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지…” 였다. 나는 완전히 이 일들에 대해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고, 별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분의 회사는 본사가 미국이고, 싱가폴에 아시아 지사가 있는데, 이분은 싱가폴 지사에서 일하는 파트너이다. 얼마 전에 미국 본사의 나이 든 파트너들과 한국 벤처 시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한국은 아직도 전시 국가이고, 북한이 계속 미사일을 쏘고 있는데, 한국 시장에 투자하는 게 너무 위험한 게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내 반응은 계엄 사태와 비슷하게 “아, 맞다. 우린 아직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있지…” 였다. 실은 이것도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고,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회사는 한국의 정치와 국방 리스크가 조금 더 해소되면 한국 벤처 시장을 조금 더 깊게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나에게 그다음에 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한국의 이런 리스크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한국에 오랜만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까 나라는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항상 그렇듯이, 한국인들은 아주 역동적이고 강렬한 삶을 살고 있고, 비즈니스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되는 것 같고, 우리 같은 VC들도 너무나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어서, 이 나라가 과연 본인들이 몇 주 전에 정치와 국방 리스크가 있다고 당분간 투자하지 말자고 내부적으로 결정했던 그 나라가 맞는지 의아해했다. 그리고 미국 본사의 파트너들에게 그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잘 있고, 한국인들은 평상시와 같이 잘 살고 있고, 한국 시장도 아주 좋다는 걸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제삼자를 통해서 보고 듣는 이야기와, 내가 직접 그 현장에서 보고 듣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북한의 위협은 내가 종사하고 있는 실제 투자 현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내용인데, 한국에 와보지도 않고 외신을 통해서 한국의 소식을 접하면 우리나라에서 당장 전쟁이 나고,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질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은 위에서 말 한 분 뿐만이 아니라, 이런 이유로 올해는 아예 한국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투자자들도 있는데, 이들이 한국이라는 현장에 와서 직접 시장 돌아가는 걸 보면 생각이 많이 바뀔 것이다.

우린 실제로 어떤 시장, 회사, 인물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소문이나 “~카더라” 이야기, 정확하지 않은 기사, 근거 없는 소셜미디어의 내용만을 기반으로 판단하는데, 이렇게 하면 틀린 결정을 하고, 이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말 한 투자자가 한국의 벤처 시장에 지금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몇 년 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과 비슷하게.

정답은 항상 현장에 존재한다.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직접 판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