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서비스는 왜 좋아질 수 없을까?

얼마 전에 열흘 정도 미국에 다녀왔다. 나는 미국 출장을 가면 동부로 들어가서 서부로 나오거나, 반대로 서부로 들어가서 동부로 나오는데, 미국은 워낙 큰 나라라서 이동하는 게 참 어렵다. 이번에도 미국 내에서만 방문한 곳이 꽤 많고, 땅덩어리가 커서 직행 비행기 노선이 없는 곳도 많아서 미국 내에서만 비행기를 8번 탔다. 이전에는 다양한 항공사를 이용했지만, 대한항공과 제휴되기도 하고 그나마 서비스가 나은 것 같아서 요샌 미국 내에서는 델타만 이용하는데, 이번에 좀 크게 짜증 나는 경험을 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중부 테네시주 내쉬빌에 오후 1시에 착륙했다. 나는 오후 4시에 여기서 미팅이 있었고, 저녁 8시 비행기로 다시 바로 서부 LA로 가는 일정이었다. 큰 짐이 있어서 이걸 들고 이동하는 게 좀 귀찮았지만, 저녁 8시 비행기에 짐을 체크인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델타에 물어보니 8시 비행기지만 2시에 짐을 체크인해도 된다고 해서 일단 가방은 체크인하고 내쉬빌 시내에서 미팅하고 6시쯤 다시 공항에 왔다. 이때부터 30분 단위로 출발이 계속 지연되면서 결국엔 밤 10시 정도에 LA로 가는 비행기가 취소됐다. 뭐, 미국 국내 항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취소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것까진 괜찮았다. 기상 문제로 인해서 취소돼서 자동으로 그다음 날 LA로 가는 항공편 예약이 됐는데,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도 미팅에 늦을 예정이라서, 일단 LA 미팅도 다 취소하고, 내쉬빌에서 예정에 없던 1박을 하게 됐다.

다시 짐을 찾기 위해서 수화물 칸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들 짐은 모두 다 빙글빙글 돌면서 나왔는데, 유독 내 짐만 안 보여서 확인해 보니, 이미 내 가방은 LA 공항에 도착했다는 황당한 답변을 받았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내쉬빌 공항 델타 수화물 사무소 직원분에게 LA 공항 수화물 사무소에 연락해서 내일 이 가방을 다시 내쉬빌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맨몸으로 호텔에 체크인했다. 델타 직원분은 다음 날 오전 11시 정도에 가방이 다시 올 것이고, 도착하면 나에게 전화하라는 메모를 시스템 안에 남겨 놨다. 그런데 그다음 날 델타 앱을 통해서 확인해 보니 내 짐은 아직도 LA 공항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델타 내쉬빌 수화물 사무소에도 전화를 해봤고, 델타 고객 서비스 번호로도 전화해 봤지만, 그 누구 와도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고객 서비스 번호는 최소 대기 시간이 90분이었는데, 거의 70분을 기다렸는데 전화가 끊겼다.

너무 답답해서 다시 내쉬빌 공항 수화물 사무소로 갔다. 일단 여기서도 30분 대기 후에 어제와는 다른 직원에게 그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잘 설명한 후 – 예상은 했었지만, 내부 시스템에 내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내용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음 – 내 가방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본인도 어깨를 쓱 하면서 “LA에 있네요. 이게 왜 내쉬빌로 오는 비행기에 안 실렸을까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델타 직원들이 내부 번호로 LA 공항 수화물 사무소에도 계속 전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도 안 받고, 본인들도 내부적으로 소통이 안 되는 듯했다. 어쨌든, 다음 비행기에 가방을 실어서 꼭 보내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원치 않은 일박을 내쉬빌에서 더했다.

그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다시 확인해 보니, 역시나 내 가방은 LA에 그대로 있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이 병신 같은 항공사를 믿지 말고 그냥 내가 LA로 직접 날아가서 내 가방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내쉬빌 공항으로 왔고, 수화물 서비스로 가서 역시나 새 담당자에게 내 상황을 다시 설명하고 내 가방을 내쉬빌로 보내지 말고, LA에 그대로 보관하라는 내부 긴급 지시를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이야기했다. LA에 갔는데 가방은 내쉬빌로 출발했으면 정말 델타 직원 싸대기를 때려야 할 판이니까. 그리고 실제로 델타 직원한테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이 불행한 상황이 종료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LA로 가는 직항을 못 타고 미네소타를 경유해서 미네소타에서 LA로 날아가는 동안 하늘에서 와이파이 접속을 한 후에 델타 앱을 확인해 봤다. 앱을 누르면서도 왠지 불안했는데, 앱을 리프레시 하자마자 뭔가 상태가 바뀌었고, 내 가방이 LA에서 내쉬빌로 가는 비행기에 priority booking이 되어 있다는 업데이트가 떴다. 와,,,왜 이런 일이 나한테…항공법상 하늘에서 통화는 금지되어 있어서, 온갖 델타 관련 사이트를 다 뒤지다가 결국엔 델타의 페이스북 페이지 메신저와 연결됐다. 그리고 내가 가장 처음 물어봤던 질문은, “Are you a bot?” 이었다. 다행히도 사람이었고, 다시 한번 내 상황을 최대한 짧게 설명했고, 이 가방 절대로 비행기에 탑승하면 안 되니까 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가방이 이미 비행기에 들어갔으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두 번이나 받은 후, 나는 그냥 비행기 안에서 초조하게 아름다운 구름만 보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LA에 도착하자마자 수화물 서비스 지역으로 달려갔는데, 다행히도 꿈에 그리던 내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찾자마자 다시 델타 고객 서비스 사무실에 들어가서 다시 내 상황을 설명하면서 LA까지의 항공비, 그리고 이 상황 때문에 내가 취소했던 미팅에 대해 보상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본인들은 창구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9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고객서비스로 전화해서 시도해 보라는 아주 성의 없는 답변만 받았다. 성질 같아서는 난리를 치고 싶었지만, 여기서 지랄하면 경찰을 부를 것이라는 걸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알기 때문에 그냥 화를 꾹 참고 그다음 행선지인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내 가방이 내가 타는 비행기에 실린다는 걸 확인한 후에.

이런 더러운 고객 경험은 항공사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너무 자주 경험하는 흔한 일상이다. 고객 서비스는 정말 좋아질 수 없을까? 힘들게 번 돈을 이렇게 날렸는데,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상식적인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건가?
아니,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지금보단 훨씬 개선될 수 있다. 그런데 안 좋아지는 이유는 그냥 델타의 경영진에서 고객 서비스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회사의 경영진들은 내가 항상 강조하는 자기 회사의 개밥 먹기를 안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같은 일반 고객의 비행 경험을 직접 안 하므로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고, 문제가 발생하면 본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고객서비스 직원들이 얼마나 고객들을 무시하고 거지 같은 불친절을 제공하는지 모를 것이다. 알면 이런 고객 서비스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거지 같은 서비스에 쓰는 비용도 아깝다고 많은 미국 회사가 요새 AI를 활용해서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나는 이것도 정말 맘에 안 든다. 사람도 제대로 제공할 수 없는 고객 서비스를 과연 기계가 제공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최근에 경험했던 이 상황에서 AI 봇이 나를 얼마큼 도와줄 수 있었을까?

이런 경험을 하고 – 그리고 델타 뿐만 아니라, 미국 Chase 은행에서도 아주 거지 같은 고객 서비스 경험을 많이 했다 – 한국에 돌아오니, 대한항공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항공사라는 생각을 했고, 하나은행도 너무 좋은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슈퍼앱의 허상

매우 적지만, 우리도 지금까지 몇 개의 엑싯을 경험한 적이 있다. 쿠팡 같이 IPO를 한 경우도 있지만, 더 큰 회사에 인수되거나 비슷한 규모의 회사와 합병하면서 M&A를 통해 엑싯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지 않은 M&A를 통해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좋은 엑싯을 위해서는 회사가 팔려야지,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좋은 회사는 엑싯을 굳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업만 잘하면, 누군가 연락이 와서 인수의 관심을 표시하리라는 것이다. 안 되는 회사를 억지로 다른 회사에 인수나 합병시키려고 하면 아예 안 되거나, 아주 안 좋은 조건에 딜이 성사된다.

그래서 나는 창업가를 만날 때, 이분이 회사를 시작하자마자 엑싯에 너무 꽂혀 있으면 매력도가 확 떨어진다. 이제 시작했고, 지금 매출 100만 원도 못 하는데, 사업에 집중하지 않고 3년 후에 회사를 네이버나 카카오에 얼마에 팔겠다는 생각만 한다면 이 회사는 금방 망하거나, 헐값에 팔릴 것이다. 반면에 엑싯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주 좋은 사업을 만들고, 매출을 만들고, 고객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창업가들은 언젠가는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회사가 먼저 연락이 와서 인수 의향을 밝힐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본인이 원하는 좋은 조건에 회사가 팔릴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슈퍼앱을 만들겠다는 한 창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M&A에 대한 내 배움이 떠올랐다. 이분의 목표는 그 분야에서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고, 모든 걸 다 가능케 하는 슈퍼앱이었다. 창업 첫날부터 슈퍼앱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고, 회사의 모든 결정의 – 제품, 펀드레이징, 채용 – 기준이 되는 건 슈퍼앱이었다. 아직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하는데, 처음부터 하늘을 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여기에만 꽂혀 있는 것이다. 이분의 슈퍼앱에 대한 야망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자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입을 열고 이 창업가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나 했다. “대표님, 슈퍼앱은 그렇게 처음부터 만들겠다고 해서 만들기보단, 그냥 작은 기능을 하나씩 완벽하게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에요.” 슈퍼앱에 꽂혀서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동시에 만들다 보면, 결과는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C급의 저질 앱이다. 그냥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만들지만, 그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만들다 보면, 복리의 힘이 작용하면서 결국엔 이게 슈퍼앱이 되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이 제품이 슈퍼앱이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슈퍼앱인 네이버와 카카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슈퍼 앱을 만들겠다고 만든 게 아니다. 검색과 메신저라는 기능을 그 누구보다 뾰족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더라도 기반이 되는 이 검색과 메신저 기능을 다른 경쟁사가 절대로 더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제야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본인들도 모르게 슈퍼앱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업을 시작했는데, 너무나 슈퍼앱에 꽂혀 있는 창업가들에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슈퍼 앱 이야기를 들은 후, 내게 아직도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항상 비슷한 충고를 한다. 슈퍼앱은 만들고 싶다고 만드는 게 아니라, 작은 것들을 계속 반복하면서 고객들이 좋아하는 작은 기능과 제품을 잘 만들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창업가들이 우리 제품은 슈퍼앱이라고 떠드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우리 제품은 슈퍼앱이라고 명명하면서 왕관을 씌워주는 거라고.

탁월해지기

2001년도에 출간된 짐 콜린스의 책 ‘Good to Great’은 당시에 아주 화제가 됐다. 웬만한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그 어떤 수업보다 더 생생하고,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용적인 경영 서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간됐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책의 제목이 그대로 설명해 준다. 좋은 기업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왜 어떤 기업은 그냥 좋은 기업으로 남고, 어떤 극소수의 기업은 위대한 기업이 되는지, 꽤 괜찮은 프레임워크 기반의 연구와 조사를 통해서 위대한 기업의 특징을 쉽게 설명해 준다. 시간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의 내용에도 허점이 많다는 게 계속 증명되고 있다.

이 책보다 기업의 위대함과 탁월함에 대해서 먼저 나온 책은 1982년 출간된 ‘In Search of Excellence’이다. 개인적으론, 이 책이 정말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초우량 기업의 조건’이라고 번역됐는데, 나한테 만약에 이 번역을 맡겼다면 ‘탁월한 기업의 조건’이라고 했을 것 같다. 그리고 ‘Good to Great’도 ‘좋은 기업을 넘어 탁월한 기업으로’라고 했을 것 같다.

일을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은, 대부분 탁월해지고 싶어 한다. 특히나 창업가들은 탁월해지고 싶어 하고, 모두 다 탁월한 회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 탁월하다는 걸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몇 개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extraordinary’이다. 모든 창업가들이 꿈꾸는 탁월함을 이 단어가 가장 잘 표현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traordinary 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Extraordinary 한 사람들로만 회사를 구성하거나, 보통 사람들이 모두 extraordinary 하게 일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extraordinary 한 사람이란 평범한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능력이 좋고, 지능도 높은 천재들인데, 솔직히 일반 회사를 이런 사람들로 구성하는 건 쉽지 않다. 이 방법으로 extraordinary 한 회사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너와 나 같은 보통 사람들로 회사를 구성하고 이들이 extraordinary 하게 일해서 탁월한 회사를 만드는 건 조금 더 가능한 일이다. Extraordinary 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 전 직원이 extraordinary 하게 일해야 한다. 즉,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extraordinary 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데, 막상 이들이 일하는 걸 보면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일주일에 40시간만 일한다. 남들과 똑같이 일해서 어떻게 extraordinary 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말인가?

탁월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 개 같이 일해야 한다. 아주 개 같이 탁월하게 일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고 그런 평범한 회사도 못 만들지도 모른다.

농부의 마음

스트롱을 처음 시작할 때, 주위의 선배 VC 분들이 투자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식물이 죽지 않고 잘 자라기를 바라는 농부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해줬다. 경험한 만큼만 알고, 아는 만큼만 안다는 말처럼, 그땐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13년 동안 VC를 해보니 이제 이 농부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씩 알 것 같고, 실제로 매일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투자하고, 투자사를 대하고 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라서 가장 초기에 투자하는 걸 시드(=seed) 투자라고 하는가 보다. 우리 같은 시드 투자자는 말 그대로 씨가 잘 자라기 위한 초기 자금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 씨를 뿌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농부와 같이 아주 넓은 농장이나 밭에 아주 랜덤하게 많은 씨를 뿌리고, 이 씨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한다. 일단 이 씨들이 잘 자라기 위한 필수 요소인 물과 토양은 VC들이 제공하는 자금이다.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려면 더욱더 많은 수분이 필요하고, 더 많은 영양소가 시기적절하게 필요한데, 스타트업이 성장하려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물과 비료는 농부가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선 이 외에도 많은 게 필요하다. 비도 와야 하고, 충분한 햇빛도 필요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는데 날씨는 농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시장 상황과 비슷하다. 유동성이 풍부해서 투자를 잘 받는 시장 환경이 있는가 하면, 최근 몇 년과 같이 돈이 말라서 가뭄인 환경도 있는데,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때마다 시장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고 조절해야 한다. 아무리 노련한 농부도 항상 풍년만 경험하는 게 아니다. 농사하다 보면 날씨와 같은 여러 가지 외부 요소 때문에 풍년과 흉년을 번갈아 경험하는데, 노련한 농부는 이때마다 잘 적응하고 조절한다.

농부의 마음으로 뿌린 씨가 잘 자라길 간절히 바라지만, 솔직히 이 중 어떤 씨앗이 생존해서 큰 나무가 될 진 아무도 모른다. 재수 없는 흉년이면 모든 씨앗이 전멸하고, 토양이 오염되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부족하거나, 또는 햇빛이 부족하면 씨는 작은 나무에서 성장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씨앗에도 복리의 힘이 작용하고, 작은 씨앗이 엄청나게 튼튼하고 큰 나무로 자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회사들은 아웃라이어다. 일단 이렇게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려면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리고 그 긴 기간 동안 이 나무가 중간에 죽을 수 있는 수백만 가지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농부는 매일 일어나서 하늘을 보면서 날씨를 확인하고, 나뭇잎을 확인하고, 물을 주고, 해충을 죽이고, 정기적으로 토양을 교체해 준다. 마치 우리가 경기의 맥을 확인하고, 투자사의 현금흐름을 확인하고, KPI를 확인하고, 창업가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가끔은 오랫동안 새싹이 안 올라와서 죽은 줄 알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물도 안 주고, 비료도 안 주는데, 어느 날 밭에 가보니까 잡초같이 잘 자라서 아주 큰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사업을 잘 못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거나, 손실 처리한 회사가 갑자기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아주 좋은 VC에게 후속 투자를 받는 게 이런 경우다. 솔직히 우리도 이런 잡초의 케이스를 몇 번 경험했는데, 아주 기분이 좋다. 이런 경우가 더 많으면 좋겠다.

참고로, 우리같이 많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모델을 미국에서는 ‘spray and pray’ 모델이라고 한다. 많이 뿌리고, 이 중 몇 개가 잘 되길 기도한다는 의미인데, 대화의 컨텍스트에 따라서 많이 투자하고 무책임하게 기도만 하는 도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많이 투자하고 열심히 기도한다는(=도와준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항상 농담처럼 “우린 spray and pray를 하는데, 나는 pray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라고도 한다. 그만큼 어떤 회사가 잘 될지 아무도 모르고, 워낙 초기 회사라서 VC가 아무리 이 회사들을 도와줘도 그 결과는 항상 불확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러 밭으로 향하고 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있다.

느린 죽음

바로 이전 포스팅에 이어 비슷한 맥락의 글을 또 써본다.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데도 두려움과 매너리즘 때문에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지 못하는 많은 회사들은 언젠가는 망할 확률이 높다.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서 돈을 버는 사업 구조를 만들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수익성이 엄청나게 좋진 않을 것이고, 이런 사업은 너무나 다양한 내, 외부 요소의 변화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갑자기 돈이 많은 경쟁사가 시장에 나타나서 시장점유율을 뺐을 수도 있고, 직원들이 대거 퇴사하면서 막대한 퇴직금으로 회복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비용이 증가할 수도 있고, 의존하던 유통 채널에 큰 변화가 생길 수도 있고, 그냥 너무 성장이 없어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사업의 규모가 쪼그라들 수도 있다.

또한, 이런 비즈니스는 위에서 말한 대로 면역력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매번, 매달, 매년 흑자를 내진 못할 것이다. 어떤 달은 살짝 적자가 날 수도 있고, 어떤 달은 일회성 비용이 확 증가할 수도 있다. 또한, 현금 보유량은 계속 유지되거나, 조금씩 증가할 수도 있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했을 때 임직원들의 연봉도 같이 올라야 하는데, 성장 없이 현 상태에서 이것저것 맞추다 보면 서서히 비즈니스는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새로운 경쟁사가 출현하거나, 대기업이 이 시장으로 진입하면,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단순 감기 탓에 사망할 수 있듯이, 이 사업은 한 방에 망할 수 있다.

즉, 계속 국도로만 가다 보면, 영어로 말하는 slow death를 맞이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잘 못 느낄 뿐이지, 시간이 갈수록 이 사업은 천천히 침몰하는 배와 같이 천천히 속력이 줄어서 멈출 것이다. 우리 사업도 현재 느리게 죽고 있다면, 대표들은 아주 과감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즉, 빨리 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한다.

과감한 결정을 했는데 그 방향이 잘못됐다면, 빨리 죽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게 느린 죽음보다 더 나을 수 있다. 바로 죽든, 느리게 죽든, 어차피 결론은 똑같이 망하는 것이라면, 그냥 지금 당장 망해서 대표와 임직원들이 하루라도 젊었을 때 다른 곳에 취직하거나, 다른 시도를 하는 게 모두에게 더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조금 극단적이긴 하다. 어쨌든 우리 사업이 이렇게 천천히 죽어가는 건 아닌지, 대표들은 냉정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