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성장모드로

2022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약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이 2년은 인생 최악의 지옥 같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투자를 시작한 게 2012년인데, 이후 세계 경제는 나쁘지 않았고, 아주 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대부분의 투자자는 실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 돈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실적이 나오고 성장 가능성이 증명되면 지속적으로 후속 투자를 받는 게 가능했던, 영어로 말하면 the good old days였다. 이 기간에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수익성보단 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엄청난 손실을 감행하면서도 성장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계속 투자를 받아서 성장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이상하게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이 사업은 시장에서 일등이 될 수 있었고, 그 이후엔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 분위기가 완전히 180도 바뀌면서 그동안 성장에 초점을 맞췄던 모든 창업가는 돈을 버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냥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를 줄이면서 건강하게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면서 잠시 성장이라는 페달에서 발을 놓았다. 돈이 없는 회사는 사람을 해고하면서 그냥 런웨이를 늘리면서 생존하는 쪽으로 회사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VC들도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비즈니스의 성장보단 건강, 그리고 성장보단 생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기가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어느 정도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호경기일 때도 성장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고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결국 사업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고, 지난 2년 불경기 동안에는 성장은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일단 돈 까먹지 말고 핵심 KPI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걸 강조했다. 이렇게 해도 우리의 많은 투자사들이 그동안 사라졌고, 사라지지 않은 회사들도 엄청 힘든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다.

하지만, 이 힘든 과정을 잘 견디면서 버텼던 몇몇 회사들엔 다시 한번 재도약과 성장의 기회가 오고 있다. 그동안 어떤 창업가들은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고, 이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서 오히려 우리가 투자했을 때보다 더 견고하고 건강한 사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떤 창업가들은 그냥 열심히 버티다 보니, 그동안 경쟁사들이 다 망해서 어쨌든 그 분야에서 상위권에 드는 회사가 됐다.

내년에는 시장의 상황이 어떻게 될진 잘 모르지만, 그동안 2년 넘게 숨만 고르고 내실을 다지던 창업가들은 이제 다시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창업가분들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던지는 주제가 그동안 돈을 버는 사업의 모습을 잘 만들어놨으니, 이젠 다시 한번 가속 페달을 밟아서 성장 모드로 전환해보자는 내용이다. 사업의 본질은 돈을 버는 것인데 이제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됐고, 스타트업은 결국 짧은 기간 안에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우리 투자사 대표님 몇 분과 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 명확하게 갈리는 게 재미있었다.
한 부류는 안 그래도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제 다시 가속 페달을 밟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다시 펀딩도 알아보고, 사람도 더 채용하고, 외부 활동도 조금씩 하면서 그동안 웬만하면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았는데, 이제 일을 좀 벌여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거의 매달 조금이라도 흑자를 만들었는데, 이젠 성장에 집중할 것이라서 (제어 가능한)마이너스가 조금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
다른 부류는 그동안 성장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했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뗀 지 너무 오래돼서 다시 성장 모드로 스위치 하는 게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이들에겐 다시 투자를 받고, 사람을 충원하고, 마케팅 비용을 쓰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게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됐고, 성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워진 것 같다.

나는 작년 말에 2024년 경기가 조금 좋아질 거로 예측했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제 금리도 조금씩 내려가고, 상장 시장도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내년에는 그나마 올해 보단 나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게 맞다면, 그동안 아주 조용히 내실만 다지던 많은 창업가 분들이 이제 다시 재도약과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텐데, 다시 성장모드로 전환하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준비 과정에서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안 쓰던 성장 근육을 잘 스트레칭하고 다듬기를 바란다. 아무래도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개 같이 일하기

Tech 쪽에 종사하고, 한국과 미국의 소셜미디어를 자주 확인하는 분이라면 얼마 전에 꽤 바이럴하게 퍼졌던 이 기사의 사진을 봤을 것이다. 한 스타트업 창업가가 본인의 결혼식 중, 다른 사람들이 다 재미있게 춤추고 있을 때, 노트북을 열어서 열심히 일하는 사진이다. 이 회사의 공동창업가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 찍어서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엄청나게 빠르게 확산했고, 인터넷은 이에 대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다.

사실을 확인해 보면, 회사의 다른 동료가 어떤 코드에 대한 접근이 필요했고, 그 접근 권한은 대표이사인 이 창업가만 줄 수 있어서, 결혼식장에서 이런 광경이 연출됐는데, 실제로 노트북을 열어서 작업한 시간은 1분도 안 됐다고 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상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 온갖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걸 그래도 좋게 본 사람들은 역시 회사의 주인들은 오너십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칭찬하고, 나쁘게 본 사람들은 워라밸(워크앤라이프 밸런스)이 아무리 없어도 어떻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노트북을 열어서 일을 하냐고 엄청나게 비난했다.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진을 보면서 첫 반응은 좀 어이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래, 저렇게 안 하면 회사가 돌아갈 수가 없지.”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전에 내가 스타트업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는,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 이 글에서 강조한 적이 있고,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꽤 논란이 있었다. 실은 개인적으로도 나는 이 글 때문에 hate 이메일을 몇 개 받기도 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고, 내가 쓴 글이지만, 참 안타까운 내용이라고 나도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나도 직장 생활할 때는 워라밸을 중요시했고, 실은 지금도 육체나 건강을 위해서 이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스타트업 분야에서 일한다면 그냥 무조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더 빡세게 일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공개적으로 스타트업에서 워라밸은 없고, 이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다른 곳에서 일하라고 한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이 젊은 직원들이 워라밸 때문에 스트레스 준다고 하고, 1대1 미팅하면 노무사보다 노동법을 더 잘 알고 있어서 겁까지 난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이런 직원분들과 면담하고 달래주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고 한다. 위험한 발언이지만, 나는 그냥 이런 분들 다 해고하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초기 스타트업에 기여할 수도 없고, 돈 받은 만큼 일도 안 하고, 더 중요한 건 본인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기 결혼식에서 이 미친 CEO같이 노트북을 켜서 일해야 하나?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작은 회사라면 정말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이분 같이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해야 한다. 더욱이 그 회사의 대표이사라면 어쨌든 이렇게 일해야 한다. 나도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work mode인 것 같다. 주말까지도. 그렇다고 나는 일하는 걸 즐기는 사람인가? 그건 아니다. 나도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일하기 싫다. 나도 놀고 싶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 하는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VC의 파트너는 그냥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안 그러면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도 살아남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회사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우리 투자사들은 더욱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럼 나는 이 업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된다.

이제 남들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 즉, 그냥 평타치기 위해선 –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남들이 다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성공하고 싶다면, 개 같이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남보다 앞서지 못한다.

요샌 조금 아쉬운 건, 제일 열심히, 정말 미친개같이 일해야 하는 스타트업 사람들이 실은 제일 일을 적게 하는 것 같아서 정말 슬프다. 이런 분들이 워라밸 따지면서 노동청 웹사이트에 맨날 기웃기웃하는 거 보면 가끔은 한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이 글 보고 엄청 많은 분들이 욕할 것이다. 증오와 혐오 이메일이 또 나한테 엄청나게 오겠지. 누군가는 나에게 너나 열심히 일하라고 할 텐데, 이 맥락에서는 나는 이런 글을 자신 있고 떳떳하게 쓸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진짜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의 VC 중 스트롱 분들같이 일 많이 하는 사람들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더욱더 개 같이 일한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은가? 그럼 개 같이 일해라.

바퀴벌레의 길

지난주 화, 수 이틀 동안 우리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조합원총회(AGM: Annual General Meeting)를 서울에서 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투자자분들이 많이 참석했고,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분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참 바쁘기도 했지만, 나도 재미있었고, 우리 모두 의미 있고 보람찬 48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행사에서 나는 해마다 스트롱벤처스가 그해에 했던 일들을 요약해서 투자자분들과 공유하는데, 이번 행사에서도 올해 좋았던 하이라이트와 별로 안 좋았던 로우라이트를 정리해서 발표해 봤다. 올해 내가 뽑은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우리가 투자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이었다. 12년 동안 우리의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과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incredible하고 extraordinary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내가 깊게 존경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이 없으면 스트롱이 존재할 수 없다.

올해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잘 버티면서 사업을 운영하는 우리 창업가분들을 나는 다시 “바퀴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실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바퀴벌레라는 단어가 혐오감을 준다고 싫어해서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우리 창업가들은 바퀴벌레 창업가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다. 물론, 엄청 좋은 의미에서.

바퀴벌레라고 하면 다들 싫어하지만, 이 곤충들은 대단한 특징을 몇 가지 가지고 있고, 신기하게도 우리 창업가들도 아주 비슷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강한 골격 – 바퀴벌레는 아주 견고하지만, 동시에 유연한 골격을 갖고 있다. 우리 창업가분들도 강한 정신력, 그리고 강한 체력을 갖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충격을 완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함도 있다.

2/ 강한 면역력 – 시간이 지날수록 바퀴벌레는 웬만한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우리 창업가들도 웬만한 어려움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갖고 있다.

3/ 강한 적응력 – 바퀴벌레와 창업가 모두 완벽하게 일치하는 속성이다. 바퀴벌레는 외부 환경에 따라서 DNA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실은 우리 창업가들도 외부 환경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목표와 비전은 명확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수정하고, 실행 방법을 계속 바꾸는 게, 마치 자신의 DNA를 외부 환경에 따라서 바꾸는 바퀴벌레랑 크게 다르지 않다.

4/ 강한 생존력 – 바퀴벌레는 오랜 기간 동안 음식이나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우리 창업가들은 음식이나 물 없이 살 순 없지만, 아주 적은 자원으로 매우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어쨌든,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바퀴벌레들은 머리가 날아가도 최대 일주일 동안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뭐, 사람은 이렇게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우리 창업가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5/ 강한 기동력 – 이건 내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바퀴벌레가 빠르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우리 창업가들도 엄청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가끔 이들보다 훨씬 더 돈과 인력이 많은 대기업도 이길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놀라운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바퀴벌레 창업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이다. 이들은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다시 찾아오고, 계속 성장한다. 지난 12년 동안 매일 매일 이런 바퀴벌레 창업가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대단하다는 생각과 존경심이 생긴다.

우리는 이런 바퀴벌레들을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이들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뒤에서 계속 푸쉬한다. 어떤 날은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앞에서 끌어준다. 하지만, 주로 이들이 뒤로 처지지 않고, 번아웃 되지 않게, 옆에서 같이 걷거나 뛰면서 응원해 준다. 나는 어릴 적 바퀴벌레를 정말 싫어했는데, 투자하면 할수록 이들이 대단한 생명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늘도 바퀴벌레같이 절대로 죽지 않고 허슬하는 한국의 모든 창업가들 파이팅하길. Never die!

브랜드가 되기까지

우리는 소프트웨어가 핵심인,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테크 회사에도 많이 투자하지만, 겉으로 봤을 땐 테크가 핵심이 아닌 회사에도 많이 투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구매해서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소비재 브랜드 회사들인데, 화장품, 음식, 의류 등이 이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우린 이 카테고리에 상당히 많이 투자했고, 지금도 계속 좋은 창업가가 있으면 투자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 투자하면 할수록 돈도 많이 들고, 안정적인 사업으로 성장하는 길이 멀고 험하다는 걸 매일 느끼면서 매일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다.

뭔가를 제조해서 판매한다는 건, 소프트웨어 사업의 큰 장점 중 하나인 “zero 한계 비용”의 이점이 없다는 뜻이다. 소프트웨어는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돈이 들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한 개를 판매하나 10,000개를 판매하나 생산비는 증가하지 않지만, 반려동물 사료를 만드는 사업을 하면 1개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과 10,000개 만들어서 판매하는 건, 들어가는 비용에 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초기 스타트업이 자체적인 생산 시스템을 갖추는 건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외부 공장에 OEM 제조를 위탁하는데, 이런 제조 방식에는 회사에 여러 가지로 불리한 단점이 존재한다. 일단 미래에 만들어질 매출에 대해서 오늘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제조 비용은 대부분 매출이 만들어지기 전에 100% 집행되어야 한다. 또한, 제조 수량이 많지 않으면 최소 주문 수량이라는 게 있어서 최소로 반드시 나가야 하는 비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제조 비용이 3,000원이고, 실제 판매가는 10,000원인 사료를 10,000개 만들기 위해서는 공장에 오늘 즉시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3,000만 원이다. 물론 이 3,000만 원으로 만드는 제품이 다 팔리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매출은 1억 원이라서 두 개의 숫자만 비교해 보면 좋은 사업이지만, 1억 원이라는 매출이 앞으로 3개월에 걸쳐서 입금될지, 2년에 걸쳐서 입금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현금이 잠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계속 여러 가지 제품을 제조해야 하므로 나가는 돈은 항상 발생하는데, 이게 매출로 회수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항상 재정 상태는 좋지 않다. 여기에다가 시장의 인지도가 낮은 새로운 제품이기 때문에 계속 마케팅해야 하는데, 이렇게 따져보면 어느 정도 인지도가 발생하고, 어느 정도 판매 물량이 항상 보장되기 전까지, 이런 사업은 절대로 돈을 벌 수가 없는 악성 사이클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업이 조금이라도 현금 걱정 없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 회사 자체가 좋은 브랜드가 돼야 한다. 단순히 좋은 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이 제품이 왜 좋고, 어떤 장점들이 있는지를 한없이 홍보해야 한다. 여기엔 그만큼 마케팅 비용이 필요한데,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건 회사엔 축복이지만, 그 뒤의 현금 흐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제품이 계속 팔리면, 결국엔 이 제품을 계속 주문하고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다. 그리고 계속 마케팅해야 하는데 이 또한 다 돈이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들은 가만히 있을까. 경쟁사들이 계속 출현해서 서로 더 좋은 제품이라고 마케팅하므로 마케팅 비용은 계속 오른다. 아마도 이런 사업을 하는 대표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매일매일 경험하는 현상이니까.

이 악성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리 제품이 좋다고 마케팅할 필요가 없는 뭔가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데, 이게 바로 좋은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좋은 브랜드는 좋은 제품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강력한 무형의 권력이다. 좋은 브랜드가 되어 소비자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그 브랜드가 각인되는 순간, 엄청난 해자가 만들어진다. 명품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난 생각한다.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명품은 워낙 강력한 브랜드가 됐기 때문에, 이들이 만드는 제품은 소비자들이 웬만하면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냥 구매한다. 그냥 “저 브랜드가 만드는 제품은 당연히 좋지.”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뇌리에 박히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손으로 이어지면서 지갑을 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투자사 대표들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는데, “가장 강력한 해자는 특정 분야에 대해서 생각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에요. 즉, 영어에서 말하는 household brand가 되는 것만큼 강력한 진입장벽은 없습니다.”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강력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아는 많은 명품처럼 수백 년을 기다릴 순 없다. 한정된 돈, 시간, 자원을 기반으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강력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선 나만의 방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좋은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가장 좋은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은 소비자들에게 많이 노출돼야 하고, 많이 팔려야 한다. 제품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노출돼도 잘 안 팔리지만, 좋은 제품이라면 많이 노출되면 많이 팔린다. 이런 식으로 가면서 중간마다 계속 찾아오는 현금 흐름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망하지 않고 계속 링에서 버티다 보면 결국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Good luck.

링에 오르기. 그리고 버티기.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완전히 집중해서 정독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서평은 웬만하면 안 하는데, 정말 좋은 책을 읽은 후에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끔 올리긴 한다. 이전에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간략하게 올리긴 했고,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도 나는 별 5개를 줬고, 이 책 대부분의 내용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하나도 안 읽었지만, 에세이는 많이 읽었다. 에세이들의 주제와 내용은 다르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이 뛰어난 작가의 인생철학과 원칙이 잘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향하는 인생철학, 원칙과 비슷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고, 읽을수록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 명의 작가로서 좋아하게 됐지만, 결국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정의한 하루키의 인생철학과 원칙은 ‘꾸준함’과 ‘복리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매번 강조하는 세상의 모든 큰일은 모두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라고 하면, 회사원보단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하루키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냥 일반 직장인이랑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소설이란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소수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건 오히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 링은 매우 넓고, 로프의 틈새도 넓고 편리한 발판도 있어서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링에 올라가는 걸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빡빡하게 굴지 않아서, 그냥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이 있거나, 연습을 좀 하면 다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소설이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상대적으로)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은데, 이게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쓰고, 소설로 먹고살고, 결국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말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쓴 시점 기준으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신인 작가로 등단하는 것을 봤는데, 이 중 현역 소설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분은 거의 없다고 한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걸 하기 위해선 재능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이 자격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고생하면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강조하는 이 자격이라는 건 바로 꾸준함, 끈기, 그리고 복리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VC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가 될 수 있고,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회사를 찾아서 한두 개의 좋은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링에는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계속 투자하면서, 투자로 먹고살고, 직업으로서의 투자자가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즉, 링에서 버틸 수 있는 투자자는 별로 없다. 하루키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이건 단순히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데, 이 자격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작은 일을 계속 해서 아주 큰 일로 만들 수 있는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트롱도 이제 12년을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의 12년도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계속 이렇게 링 위에 올라가서 오래 버틸 수 있는 뭔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 20년 뒤엔 이게 뭔지 알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몇 년은 투자자로서 링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야겠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한 모든 것은 비단 소설가나 투자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창업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들고, 한 번 좋은 투자를 받고, 한 번 좋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건, 다른 많은 창업가도 하지만, 이걸 계속 연속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하는 건 정말 어렵다.

결국엔 꾸준함과 그리고 그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복리의 힘을 믿고 실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