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사업의 기본은 영어

한국에서도 제대로 작동하고 돈을 버는 제품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시장에 바로 진출해서 4년 만에 매출을 1,000억 원 이상 하겠다는 회사의 자료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희망적이기보단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업의 방향성이나 팀이 괜찮으면, 이런 팀들은 일단 만나본 후에 내부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얼마 전에 이런 창업팀의 자료를 보다가 세 번째 페이지에서 그냥 PDF를 닫고 만나보지도 않고 pass 하기로 결정했다. 북미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팀이었고, 자료 자체도 모두 영문으로 만들었는데, 자료의 영어 수준이 형편없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나의 태도를 이해 못 하고, 그 정도 문법이나 철자는 틀릴 수도 있는데,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지 구박하기도 한다. 자료에서 영어 좀 틀렸다고 사업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오바한다고 뭐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솔직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남의 영문 자료에서 이런 실수를 잘 발견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건 그냥 넘어가도 창업팀과 그 사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에 굳이 피치 미팅의 흐름을 중간에 끊으면서 지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영어에서 문법이나 철자의 실수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굳이 흐름을 끊고 지적질을 한다. 왜냐하면, 사업을 이해하는 데 지장은 없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이 팀의 자세와 태도에는 이런 사소한 실수가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사업을 하고 싶다면, 가장 기본 중 기본은 영어라는 그 언어 자체이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사용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면, 그 누가 보더라도 이 제품은 비영어권 창업가들이 만들었다는 티가 전혀 나면 안 된다. 그런데 내가 만난 미국 시장을 공략하고 싶어 하는 많은 한인 창업가들이 만든 회사의 자료나 제품을 보면, 엉터리 영어가 너무 많다. 이 자료를 미국 VC들이 봤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 이 창업가들은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봤을까. 엉성한 영어로 만들어진 이 제품에 미국인들이 과연 돈을 낼지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봤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도 영어가 이 수준이면 팀의 역량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다면 이 팀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실은, 요샌 AI가 발달해서 번역의 수준은 좋아졌고, 특히나 문법적으로 틀린 영어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영어라는 게 단순히 단어만을 번역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이 단어들이 어떻게 문장을 만들고, 이 문장들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 잘 파악해야지만 진정한 영어가 완성되는데, 아직 AI는 이걸 완벽하게 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기계로 번역한 문장을 보면 단어들은 잘 번역됐지만, 미국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라고 하기엔 굉장히 어색한 게 많다.

이 현상을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자. 유럽인들이 한국 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이 응용 제품을 받아주세요.”라는 한국어를 보면 누구나 다 이건 이상한 번역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각각의 단어는 잘 번역됐지만, 한국에서 실제로 이런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 앱을 설치해 주세요”가 훨씬 더 컨텍스트에 맞는 우리말이다. 전에 한 회사의 한글 자료를 봤는데 어떤 현상이 바이럴하게 퍼진다는 문장을 단어 그대로 번역해서 “바이러스같이 퍼진다”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물론, 의미상으론 번역이 틀린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그냥 ‘바이럴’이라는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걸 모르고 번역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이 자료는 한국인이 안 만들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싶다면, 일단 영어부터 제대로 하자.

평판 만들기

작년에도 12개월이 참 빨리 지나갔는데, 올해는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우린 올해도 창업가들 많이 만나고 있고, 투자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펀드도 만들고 있는데, 요새 워낙 경기가 안 좋아서 남의 돈을 받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매번 느끼고 있다. 특히, 미국 투자자들은 미국의 주식 시장이 워낙 좋고, 미국 VC들의 성적도 좋기 때문에, 그냥 미국에 투자하면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어서, 굳이 우리같이 한국 시장에 투자하는 펀드에 투자할 이유가 매우 강하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우린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정기적으로 해외 투자자들을 만나서 열심히 영업하고 있는데, 그동안 스트롱의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투자자들을 시원하게 설득하는 게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한 2~3주 외국 나갔다 다시 한국 들어올 때 빈손이면(=돈을 한 푼도 못 받음) 힘이 많이 빠지긴 한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외국 투자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당장 돈을 주진 않지만, 아주 기분 좋은 피드백을 주는 분들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어떤 투자자가 악수하면서 “우리 이미 Strong에 대해서 들어봤어. Your reputation precedes you.”라는 말을 하는데, 먼 땅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게 좋긴 했다. 실은 이 말은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내 앞에서 이 말을 직접 했으니까 아마도 긍정적인 의미였을 거로 생각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스트롱의 평판은 익히 들었기 때문에 너희 믿을 만 한 거 알고 있어.” 정도의 의미일 것 같다.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투자를 엄청나게 잘해서라기 보단, 10년 넘게 크게 욕먹거나 나쁜 짓하지 않고 꾸준히 투자하고 있어서 들었던 것 같다. 평판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또한 내가 자주 강조하는 복리의 힘이 제대로 작용하는, 정량화하기 힘들지만, 우리 같은 VC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생/직장에서의 KPI가 아닐까 싶다.

투자하다 보면 성적표가 계속 왔다 갔다 한다. 누구나 다 아는 유니콘 회사에 투자해서 돈을 벌 수도 있고, 누구나 다 아는 대박 망하는 회사에 투자해서 돈을 잃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부침을 반복하면서도 자기만의 철학으로 투자를 꾸준히 해야지만, 투자자로서의 평판을 만들 수 있다. 그냥 계속 한 우물을 꾸준히 파다 보면,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할 수 있고,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살아남으면 항상 좋은 기회가 생기는 걸 나는 몇 번 경험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좋은 사업을 하면 평판이라는 게 조금씩 만들어진다.

이건 우리 같은 투자자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주변에는 유행만 쫓아가면서 3년 만에 돈 좀 벌어서 엑싯하고 싶어 하는 창업가들도 너무나 많고, 이 중 똑똑하고 사업 잘하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스트롱이 투자하고 싶어 하는 창업가들은 최소 10년은 바라보면서 꾸준히 사업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유행에 너무 민감해서 한 우물을 못 파는 창업가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물론,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도 이런 분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쉽게 사업을 하고 싶어 하고, 유행을 좇고, 피보팅을 끊임없이 한다. 물론, 이렇게 해서 잘 되는 경우도 가끔 봤지만, 대부분 그냥 맥없이 망한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평판이란 것 자체가 안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도 이런 말을 요새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이제 창업가들이 일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본인을 홍보하고, 소셜미디어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야 하고,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다른 회사에 개인 투자도 하고, 딴짓도 많이 해야지 사업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누구나 다 자기만의 생각이 있지만, 나는 이 말에 별로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좋은 사업을 만든 모든 창업가는 절대로 딴짓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고, 사업가로서의 평판은 본인의 사업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제품과 고객에게 집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회사로 데려오는데 시간을 쓰는 대신, 행사만 다니고 자기 홍보만 하면 초반에는 바이럴을 만들고, 어쩌면 펀딩은 크게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10년 이상 가는 사업을 만드는 창업가는 없었던 것 같다. 창업가나 VC나 펀딩을 크게 받거나 큰 펀드를 만들면 단기적으론 유명해지겠지만, 장기적인 평판을 만드는 건 좋은 사업과 좋은 투자이고, 이건 인내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복싱 연습을 열심히 해도, 실제 링 위로 올라가는 건 정말 어렵다. 하지만, 링 위에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링 위에서 12라운드 동안 계속 버티면서 싸우는 거다. 평판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전력 증강자

미국 사업가들이 자주 하는 말과 비즈니스 관련 글을 보면 가끔 등장하는 어휘 중 force multiplier라는 단어가 있다. 원래 군대에서 유래된 말인데 찾아보니 우리말의 정확한 어휘는 ‘전력 증강자’ 또는 ‘전력 승수’이고, 사전적인 의미는 전투 부대에 추가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부대의 전투력을 두드러지게 증가시키고 나아가서 부대의 임무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역량 혹은 능력이다. 이런 전력 증강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특수부대, GPS와 같은 기술, 또는 육해공군의 연합 등이다.

이 단어는 스타트업 분야에서도 꽤 다양한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데, 2주 전에 미국에서 어떤 창업가와 이야기하다가 이 force multiplier라는 말을 내가 오랜만에 언급됐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랑 절대로 말을 안 한다. 특히나 비행기에서는 조용히 가는 걸 선호해서 옆 사람이랑 눈도 되도록 맞추지 않고, 누가 말을 걸어도 두 번째 질문은 못 하게 아주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편이다. 이날은 어떤 젊은 백인 여성분이 내 옆에 앉았고, 3시간 반 비행을 같이 하게 됐다. 비행 내내 둘 다 각자의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는데 불규칙한 키보드 타격 소리와 속도로 봤을 때 아마도 글을 쓰거나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비행 내내 글이 잘 안 써지거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거나, 영감이 안 떠오르는지 혼자 계속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실은 나도 뭔가를 쓸 때, 정리가 안 되거나, 영감이 안 떠오르면 이런 행동을 하므로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이분은 이런 행동과 동작이 좀 과격했다.

그래서 이분에게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뭐 쓰고 있어요? 잘 안되나 보죠?”라고 물어봤고 그때부터 한 15분 정도 우린 이야기를 나눴다. 본인은 시카고 외곽 동네에서 수공예품을 직접 만들어서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인데, 그동안 오프라인 가게에서만 제품을 판매하다가 이제 미국의 다른 도시나 주에서 구매 문의가 와서 Shopify로 만든 사이트로 최근에 이커머스를 시작한 초보 창업가라고 소개했다.

돈이 별로 없어서, 직원 고용은 아직 생각도 못 하고 있고, 혼자서 제품을 직접 만들고, 혼자서 사이트도 운영하고, 혼자서 포장과 배송도 직접 하고 있는데, 어쨌든 힘들지만, 굉장히 재미있고 보람찬 일이라고 자랑했다. 온라인 마케팅 예산이 없어서 공짜이면서 동시에 효율이 좋다고 하는 블로그와 뉴스레터 기반의 콘텐츠 마케팅을 이제 3개월째 하고 있는데, 막상 없는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투입되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고, 이렇게 투자하는 에너지와 시간 대비 눈에 띄는 결과가 전혀 안 보여서, 이런 콘텐츠 마케팅이 정말 될까 굉장히 회의적이라고 고민을 토로했다. 그리고 지금 이 비행기에서도 다음 주에 발송할 뉴스레터에 실을 내용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고, 격주로 포스팅하는 블로그에 올릴 소재가 이미 다 떨어져서 계속 한숨만 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VC라는 말은 안 했다. 하지만, 내 블로그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해줬다. 내가 운영하는 개인 블로그를 2007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꾸준히 17년째 쓰고 있는데, 이게 확실히 개인적이든 사업적이든 force multiplier가 될 수 있다는 건 내가 경험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고 해줬다. 그런데 이게 진정한 전력 승수가 되려면, 최소 2년은 꾸준히 해야 하고,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건 블로그의 첫 2년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만드는 force multiplier가 아니라 그 반대인 force divider라는 점도 알려줬다.

전력 승수를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한 첫 2년은 콘텐츠를 만드는데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지만, 그로 인한 효과는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단 아무도 이런 콘텐츠가 있다는 걸 모르고, 아무리 좋은 포스팅이라도 이런 블로그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 이 기간 동안엔 블로그나 뉴스레터를 활용하는 콘텐츠 마케팅은 전형적인 force divider가 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결국 복리의 마법은 항상 작동한다. 꾸준히, 정기적으로,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면, 누군가는 읽을 것이고, 남들과 계속 공유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동안 꾸준히 만들었던 양질의 콘텐츠는 엄청난 전력 증강자가 될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를 비행기에서 옆 좌석 분과 했다. 그리고 이제 시작했고, 아직은 결과가 나오지 않지만, compounding과 force multiplier라는 단어를 무조건 기억하라고 했다.

누구나 다 인생에서, 또는 직장에서 이런 전력 증강자를 원할 것이다. 실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누구나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약간의 노력과 꾸준함이 필요할 뿐이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요새도 MBTI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우리가 검토했던 회사 자료의 팀 슬라이드에 각 팀원의 MBTI가 보일 정도로 이게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나는 MBTI를 맹신하진 않지만, 나름의 과학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MBTI 풀 버전을 2005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할 때 처음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내가 E 성향이 강했는데, 그동안 이게 I로 바뀌었고, 요샌 나는 아주 행복한 I의 삶을 살고 있다. 성향이 I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바빠서 그런지, 나는 외부 활동을 잘 안 하고, 사람들을 잘 안 만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아는 사람들과 친구들은 자주 만나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되도록 잘 안 만난다.

그래도 예외를 두고, 가능하면 시간을 만들면서 꼭 만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제 막 본인의 이름으로 VC를 시작해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투자자들, 그리고 우리가 투자는 안 했지만,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이다.

이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VC들을 보면 내가 12년 전에 스트롱 1호 펀드 만들 때가 생각난다. 남의 돈을 받는 건, 그때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앞으로도 항상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우린 이제 5호 펀드를 만들고 있는데, 1호 펀드보다 규모만 커졌지 돈 모으는 건 항상 더럽게 어렵다. 그런데 성적이 전혀 없는 첫 번째 펀드를 만드는 VC를 뭘 믿고 누가 돈을 줄까? 그래서 나는 이런 분들을 보면, 우리가 첫 번째 펀드 만들 때가 많이 생각난다. 그때 참 힘들고, 외롭고, 서럽기도 했는데, 그나마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나보다 먼저 이 힘든 길을 지나왔던 선배 VC들의 격려와 조언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원래 처음엔 힘든데, 계속 지치지 않고 하다 보면 더 쉬워질 거야.” , “그래도 너는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원래 펀드 못 만들 것 같아도, 계속하다 보면 다 하게 된다. 그냥 시간이 걸릴 뿐이야.” 뭐, 이런 말들이었는데, 그땐 이 조언들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근데 참 웃긴 게, 나도 이제 시작하는 후배 VC 분들을 만나면, 12년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거의 동일한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걸 내가 이미 경험했다면, 가감 없이 모든 경험을 다 공유하고, 가능한 선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연결해 준다. 그래서 이분들이 힘든 길을 가는데 조금이나마 위안과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에게도 내가 아주 오래전에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점들을 아주 솔직하게 공유해주고 이들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평화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나도 15년 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아무것도 모를 때 이미 그 길을 걸었던 선배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출장에서 수년 동안 내가 알고 지낸 잠재 투자자를 만났다. 유명하고 큰 투자자인데, 누구나 다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아주 바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내가 미국에 올 때마다 연락하면 항상 시간을 만들어서 나를 만난다. 시간이 많을 땐 밥도 같이 먹고, 정말 바쁘면 15분이라도 짧게 시간을 내서 얼굴이라도 본다. 나를 볼 때마다 20년 전에 본인이 투자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원래 남의 돈 받는 건 무지하게 어려운데, 그래도 스트롱은 아주 잘하고 있다는 큰 격려의 말을 해줬다. 그리고 본인도 시작할 때, 이렇게 만나서 긍정의 말 한마디 해주는 선배 투자자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바쁘지만, 내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자는 다짐을 한다. 나는 아직 개구리로 완벽하게 변신하진 못했지만, 올챙이 시절은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애송이 시절이 있었고, 누구나 다 올챙이를 거쳐서 개구리가 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절대로 잊지 말자는 다짐을 오늘도 해본다.

불평하지 않는 길

작년 말에는 지금쯤 되면 경기가 좀 회복되고, 투자 시장에 활기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요새 체감하는 건, 아직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아니면, 지금 이 불경기가 어쩌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뭔가 느낌이 좋진 않다.

우리 같은 투자자도 이런 느낌인데, 매일 힘든 사업을 해야 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은 오죽하랴. 정말 요새 죽을 맛이다. 특히, 자금이 떨어져서 펀딩을 해야 하는 대표들은 정말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투자사 대표들에게 런웨이가 12~18개월 정도 있으면, 웬만하면 펀딩하지 말고 사업에 집중하고, 나중에 수치들이 더 좋아지면 그때 투자유치를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래도 돈이 다 떨어졌으면, 경기랑 상관없이 투자를 받아야 한다. 우리 투자사들도 요새 펀딩하고 있는 곳들이 많긴 한데, 모두 다 힘들어하고, 회사가 원하는 투자 조건과는 한참 동떨어진, 그냥 주는 대로 받는 전략으로 가는 곳들도 많고, 우리도 기투자자로서 이런 조건이라도 투자받을 수 있으면 받아서, 일단 살아남으면서 버티자는 스탠스다.

이 중에서도 특히나 힘들게 투자유치를 하는 회사가 몇 군데 있다. 일단 펀딩 하는데 걸린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 길고, 투자를 커밋했던 VC들이 시간이 지연되면서 슬그머니 말을 번복하고, 이미 최종 투심까지 가서 결정된 곳들도 갑자기 정말 미안한 사정이 생기면서 취소되고,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확신을 갖고 후속 투자를 준비하던 기존 투자자들도 하나둘씩 말이 달라지고 있다. 대부분 6개월 정도 힘들게 투자유치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면 대표는 지치면서 번아웃되고, 런웨이가 없어지니 직원들도 불안해하면서 어떤 분들을 퇴사하고,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펀딩 전략을 새로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어떤 곳들은 투자자들과 이야기가 아주 잘 되고 있었는데, 같은 분야의 경쟁사가 상대적으로 낮은 밸류에 투자를 받으면서 그동안 합의됐던 밸류에이션이 조정되고 있고, 어떤 곳은 동종 업계의 회사가 상장했는데, 상장 후 주식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지면서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 같은 기존 주주들도 정말 힘이 빠지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대표는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냥 남 탓하면서 욕하고,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창업가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린 잘하고 있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에 유동성이 부족해서 투자받는 게 힘든 것이다. 우린 잘하고 있는데, 동종 업계의 다른 회사가 잘 못 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갑자기 투자자가 투자 결정을 철회한 것도 대표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그 투자자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을 탓하고, 불평해도 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이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건 본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또 다른 방법을 찾는다. 불평하지 않고 그냥 또 길을 찾는다.

나도 이런 힘 빠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새로운 펀드를 만들면서 너무 많은 거절을 당하고, 꼭 돈을 줄 것 같았던 투자자가 결국엔 투자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가 투자한 너무 많은 회사가 망한다. 꼭 잘될 것만 같았던 회사들이 잘 안되고, 안 될 것 같았던 회사는 항상 잘 안된다.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이로 인한 피로감이 쌓일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정말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실은,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냥 이래저래 불평만 하고 싶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쁜 놈들이고,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나 모두 불평하는 데 익숙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거절당하고, 자주 넘어지지만, 그럴 때마다 불평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나서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불평이라는 옵션이 없는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