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좋은 친구들

자주 만나고 싶지만, 원하는 만큼 자주 보지 못하는 두 분과 2주 전에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VC에게 ‘은인’은 주로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을 제공한 LP와 엑싯이라는 큰 선물을 줘서 돈을 벌게 한 창업가들인데, 이 두 분은 우리에게 초반에 좋은 엑싯을 선물해 준 스트롱의 오래된 창업가 은인들이다.

오현석 대표님은 여행업계에서는 매우 잘 성장하고 있는 온다의 창업가이자 대표이고, 김태호님은 당근마켓의 데이터 가치화팀의 리더이다. 실은 우리와 이 두 분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간략한 버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에 우리 투자사 비석세스가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테크 컨퍼런스 beLAUNCH 2012를 열었고, 존이랑 나는 마치 우리가 하는 행사처럼 굉장히 깊게 관여해서 행사 준비를 도와줬다. 이 행사에는 스타트업이 피칭하는 세션이 있었는데, 당시에 TakeTalks라는 뉴욕 기반의 한인 스타트업이 지원했다. 지금은 이와 비슷한 서비스가 워낙 많지만, 그땐 거의 없었는데, 미국 현지인을 화상으로 연결해서 온라인 영어 과외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였고, 이 회사의 코파운더가 오현석 대표와 김태호님이었다.

우린 이 회사에 투자하고 싶었는데, 결국엔 투자하지 않았다. 원래 TakeTalks라는 회사는 오현석 대표가 창업한 회사인데, 실은 오대표님은 그전에 전 세계를 여행하는 한인들을 위한 한인 민박 플랫폼 한인텔을 창업해서 꽤 좋은 비즈니스로 성장시켰다. 어떻게 보면 에어비앤비 모델을 에어비앤비보다 더 일찍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조금 더 성장 가능성이 큰 글로벌 사업을 하고 싶어서 한인텔은 다른 분들에게 잠시 맡기고 뉴욕에 와서 TakeTalks를 운영하고 있었고, 대학교 과 후배인 김태호님을 영입해서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업을 하다 보니 미국에서 스타트업을 한다는게 생각보다 너무 어렵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사업이 잘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사업을 접으면서 우리도 투자를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과 나는 이 두 분과 그동안 이야기하면서 이분들을 너무 좋아하게 됐고, 이런 사람들은 뭐를 해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돼서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일단 오현석 대표님은 다시 한인텔의 대표이사로 돌아갔고, 우린 한인텔에 투자했다. 그리고 김태호님에겐 우리가 투자할 테니 LA로 이사 와서 창업하라고 제안했다. 뭘 할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LA로 와서 생각 좀 하면서 결정하자고 했고, 태호님은 아주 흔쾌히 이를 승락했고 – 자녀들도 있어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 LA로 이사했다. 실은, 스트롱도 당시에 돈이 없었지만 어떤 행사에서 우리 한국 투자사의 피칭을 내가 대신 한 적이 있고, 여기서 대상으로 비행기표를 받은게 있어서, 그 표로 태호님이 뉴욕에서 LA로 날라올 수 있었다.

김태호 대표님은 LA 스트롱 사무실에서 Recomio라는 머신러닝/자연어처리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제품을 만들고 영어를 잘하는 코파운더 서철님을 우리가 소개해줬다. 참고로, 서철님은 나랑 뮤직쉐이크를 같이 했던 내 초등학교 친구다. Recomio는 2년 반 동안 거의 4개의 제품을 만들어서 실제로 출시까지 했지만, 그 어떤 제품도 시장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고, 정말로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결국엔 2014년 말에 쿠팡에 인수됐다. 김태호 대표님이 Recomio를 운영하면서 남긴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데, 모든 창업가/개발자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내용이 너무 많다.

어쨌든, 김태호 대표님의 Recomio는 스트롱에게 첫 번째 엑싯을 선물해줬다. 이게 없었다면 지금의 스트롱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은 같은 시기인 2014년 말에 옐로모바일에 인수되면서 오현석 대표님의 한인텔은 스트롱에게 두 번째 엑싯을 선물해줬다. 이 두 분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개의 엑싯 훈장을 갖게 됐고, 이런 엑싯이 쌓이면서 우리도 망하지 않고 스트롱의 브랜드를 계속 만들어 갈 수 있었고, 지금도 잘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두 회사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과거에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1/ 두 회사의 이야기 – part.1(Recomio)
2/ 두 회사의 이야기 – part.2(한인텔)

김태호 대표는 Recomio 엑싯 이후, 미국에서 쿠팡과 Lyft에서 근무했고, 한국으로 이사하면서 뱅크샐러드 CTO를 역임했고, 현재는 우리 투자사 당근마켓의 데이터 가치화팀 리더이다.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가 엑싯을 하고, 다시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리더로 돌아온 게 굉장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회사를 검토할 때, 개발이나 엔지니어링 관련해서 잘 모르는 게 있을 때 태호님에게 물어보곤 한다.
오현석 대표는 한인텔 엑싯 이후, 계속 여행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했고, 온다 창업 후 현재 굉장히 건실하게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여행 관련 회사를 검토할 때, 오현석 대표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한다.

나는 되도록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다. 아무래도 대부분 철이 든 후에 만난 분들이라서 학교 친구들과 같이 거리낌 없이 친해지기엔 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이 두 분과는 마치 오래된 친구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힘든 진흙밭에서 같이 굴렀고, 살아남았고, 그리고 다시 같이 구르고 있는 좋은 동료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반갑고 좋았다.

배우들이 수상하면 무대에서 “아름다운 밤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주로 새벽에 글을 쓰는데, 오늘은 밤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연이 다른 우연을 만들고, 이 우연들이 쌓이면서 또 다른 우연이 만들어지고, 이게 쌓이면서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다.

즉각적인 행동

아직 한국의 테크미디어에는 어떤 회사가 투자받았다는 펀딩 소식이 제일 눈에 많이 띄지만, 요새 테크크런치 같은 해외 테크 뉴스를 보면 펀딩 소식보단 해고 소식이 더 많이 보인다. 기사 10개 중 절반은 어떤 회사가 직원의 몇 %를 해고했다는 내용인데, 그만큼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고, 이에 대비해서 큰 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미리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는 뜻 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유니콘 기업이 직원을 대량 해고하는 기사를 읽어도 그렇게 놀랍진 않고, 한때 가장 기업가치가 높았던 유니콘 핀테크 스타트업 Stripe의 직원 14% 해고 소식도 이런 매크로 경기 트렌드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다른 해고 소식과는 조금 달라서 꽤 흥미로웠다. 스트라이프 창업가 패트릭 콜리슨이 해고 관련해서 전 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은 굉장히 직설적이고 차가울 정도로 솔직해서 인상 깊었다. 다른 회사 리더들이 대량해고의 이유를 리더나 회사의 잘못이 아닌, 매크로 경기와 같은 외부 요소를 탓하지만, 스트라이프는 상황을 오판한 본인들의 잘못을 탓하면서 이번 대량 해고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팬데믹 기간 이커머스 시장은 너무나 빨리 성장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이런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고 잘 못 판단. 그리고 항상 호경기가 지속될 것이라고 잘 못 판단
2/ 새로 출시한 제품들의 좋은 성과 때문에 운영 비용을 과다하게 사용. 이로 인해서 조정비용이 늘어나고, 운영면의 비효율성이 많이 발생.

또한, 앞으로 이런 잘못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에 대한 회사 나름의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 역시 솔직하다고 생각한 게, 요 이메일을 받은 후, 이번에 해고될 사람들은 15분 뒤에 바로 개별 통보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한국 스타트업 시장에서도 점점 더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투자사도 어려운 곳이 많고, 돈이 없어서 돈이 필요한 회사가 있고, 성장을 위해서 돈이 필요한 회사가 있다. 어쨌든, 시장은 침체되어 있지만, 회사들은 돈이 필요하다. 지금 이런 시장에서 펀딩을 구하는 건 정말 어렵기 때문에, 돈이 절실히 필요하면 경영진의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일단, 스트라이프와 같이 현재 위기의 문제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위기의 원인이 항상 불경기 또는 외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내부에서 취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안 나오고 그냥 외부 요인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전략을 취하는데, 이러다가 자칫 망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모든 위기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에, 이걸 빨리 판단 한 후 경영진의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런웨이가 빠르게 고갈되는데 매출을 못 늘리고, 펀딩을 못 받으면,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비용을 무조건 줄여야 한다. 곧 상황이 좋아지겠지 또는 곧 펀딩이 될 거라는 근거가 약한 희망을 품고 사업을 하다가 회사가 망하면 이런 희망도 못 품는다.

그리고, 비용을 줄이는 가장 쉬운 – 하지만, 고통스러운 – 방법은 스타트업 비용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력을 줄이는 것이다. 즉, 스트라이프 같이 해고를 하는 방법이다. 해고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창업가들은 나한테 이렇게 반박한다. “저도 전에 사람 내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에 해고해서 비용을 줄였는데, 몇 개월 후에 펀딩받아서 다시 한번 성장해보기 위해서 채용했는데, 사람 채용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돈은 있지만 사람을 못 뽑아서 역시 성장하는데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이런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어려운 상황이지만, 최대한 현재 인원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위험한 생각이다. 이러다가 회사가 망하면, 채용을 시도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상상보단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즉각적인 행동을 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과감하고, 더 즉각적인 창업가의 결단과 행동이 필요한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

스트롱 웹사이트에 가보면 우리 로고랑 우리가 지금까지 투자한 포트폴리오 회사들 리스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 로고를 보면 밑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Together, We are All Strong”

실은, 이 말은 굉장히 단순하고 간단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어려운 영어도 아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쉬운 이 문장에는 스트롱의 미션과 비전이 잘 내포되어 있고,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하려고 하는 많은 일을 이 한 문장이 매우 잘 설명해주기 때문에, 2년 전 워크숍에서 고안한 이 mission statement를 나는 굉장히 자주 사용한다.

특히 “All”이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이 벤처 생태계에는 스트롱 같은 VC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자금을 투자해주는 우리의 출자자인 LP분들이 있고, 이 자금이 투입되는 아주 좋은 창업가분들이 있다. 즉, 스트롱벤처스는 우리의 출자자와 창업가와 함께 모두를 위한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다 매우 스트롱해질 수 있다(Strong Ventures partners with its investors and entrepreneurs to create a better future for all. Together, We are All Strong.) All은 Strong Ventures, Strong LPs, 그리고 Strong Founders 모두를 지칭한다.

이 멋진 말을 나는 요새 더 멋있게 Together, We are ALL beautifully Strong이라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일하는 분들은 너무 아름답고 멋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일에 대한 철학,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다.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해주는 LP 분들도 너무 멋있고 아름답다. 위험투성이고, 성공보단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스트롱을 믿어주시는 분들의 사고방식과 이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하나로 묶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는 스트롱 또한 아름다운 팀이다.

이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분들과 같이 일할 수 있는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분들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는 게 가장 좋을지 항상 생각하는데, “아름답다 / beautiful”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한다.

Together, We are ALL beautifully Strong.

짧은 기회의 창

창업가들이 투자자와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받는 단골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네이버가 이거 하면 어떻게 되나요?” , “카카오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요?” , “구글이 똑같은 제품을 만들면 우린 그냥 망하는 게 아닌가요?”와 같은 대형 경쟁사들과 관련된 질문이다. 실은, 당연히 누구나 다 물어볼 수 있는 뻔한 질문이고,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실은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뭔가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창업가들이 그래도 대기업이나 경쟁사들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는지, 대형 경쟁사에 대해서 어떤 논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런 걸 물어볼 확률이 더 높다.

그런데 요새 내가 느끼는, 창업가들이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경쟁은, 대기업에서 우릴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대기업이나 큰 스타트업에서 일을 잘하는 분들이 나와서 우리와 비슷한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것이다. 당근마켓, 쿠팡, 배민, 마켓컬리 같은 회사에서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고, 본인들이 직접 그 성장에 기여를 했고, 이런 경험을 기반으로 퇴사해서 우리랑 경쟁하는 제품을 만들면, 그땐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참고로, 우리 투자사 당근마켓 초기 멤버들은 카카오에서 로컬/동네 관련 서비스를 만들었던 분들이고, 우리 투자사 세탁특공대의 경쟁사인 런드리고의 초기 멤버분들도 배달의민족 출신이라서 비대면 이커머스와 물류에 대한 경험이 많은 분들이다.

이렇게 이미 엄청난 경험을 했고, 그리고 이미 시장에 출시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철저히 벤치마킹한 후에,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좋은 경쟁 제품을 이분들이 만드는 게, 그냥 일반 대기업이 우리 제품을 카피하는 것 보단 훨씬 더 무서운 상황과 결과를 야기한다.

나는 우리 투자사가 기존 플레이어를 카피해서 창업한 공격적인 사례도 경험해봤고, 반대로 다른 경쟁사들이 우리 투자사를 카피해서 창업한 방어적인 사례도 경험해봤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그때마다 다르지만, 일단, 위에서 말한 대로 빨리 성장한 스타트업에서 엄청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무기로, 시장은 크지만, 아직 시장의 그렇다 할 선두 주자가 없거나, 또는 선두 주자가 있지만, 본인들이 봤을 때 잘 못 하고 있을 때, 이들이 경쟁제품을 만든다고 해서 기존 플레이어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면 쉬워 보이지만, 막상 직접 해보면, 이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기존 플레이어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험을 많이 해서,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상당히 무서운 진입장벽을 이미 만들었기 때문이다(다만, 직접 해보기 전까진 잘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회사에서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다고 해서 창업하고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은, 내가 경험한 건 항상 그 반대였다. 하지만, 이들이 갖는 큰 장점은, 이런 성장 경험은 주로 VC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더 좋은 조건에 더 큰 펀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펀딩을 잘 받아서 돈이 많으면, 더 좋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고, 아주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계속 실험하다 보면, 결국엔 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여기에다 선발 주자가 이미 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후발 주자의 특권이 적용되면, 엄청난 제품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펀딩 -> 채용 -> 삽질 -> 또 삽질 -> 펀딩 -> 채용 -> 더 많은 삽질 x 10 -> 엄청난 제품의 탄생, 이런 주기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는데, 이 시간이 선발주자의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 후발주자가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선발 주자는 이 기회의 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미친 듯이 제품을 잘 만들고, 미친 듯이 성장하고, 미친 듯이 전진해야 한다. 이걸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경쟁사들이 더 많은 펀딩을 받고, 더 좋은 사람을 채용하는 걸 넋을 놓고 보고만 있다가는, 이런 기회의 창이 닫히면서 완전히 도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회의 창을 잘 활용하면서 경쟁할 수 있다면, 시장 자체를 같이 키울 수 있고, 결국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엄청난 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나는 많이 봤다.

피치 덱 분석

얼마 전에 피치 덱이라는 글에서 투자받기 위한 자료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몇 자 적어봤는데, 꽤 많은 분들이 좋은 피드백을 제공했고, 좋은 질문도 개인적으로 많이 해 줬다. 그런데 그 글 쓴지 며칠 후에 TechCrunch에서 이런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한국도 요샌 가끔 Docsend로 피치 덱을 보내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미국은 꽤 많은 분들이 Docsend를 통해서 덱을 보낸다. 이렇게 하면 누가 자료를 봤고, 어디까지 봤고, 어떤 페이지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는지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드롭박스가 이 회사를 작년에 인수했고, Dropbox Docsend 팀이 수많은 피치 덱과 이 덱을 읽는 VC들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한 내용이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고 이 팀을 만날지 말지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줄고 있다. 놀랍게도 3분 이상 안 걸린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고, 더 많은 자료가 투자자들에게 발송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평균 시간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2021년 대비 2022년에는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24% 감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덱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되, 3분 안에 이 팀을 만나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아주 임팩트 가득한 내용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전 에서 나열한 내용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투자자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보는 내용도 데이터로 정리해보니까 참으로 흥미롭다. Docsend 팀이 320개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VC들이 가장 자세히 보는 내용은 첫 번째가 제품, 두 번째가 비즈니스모델, 그리고 세 번째가 Purpose인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로 자료 초반에 있는 우리 사업에 대한 한 줄 설명 또는 엘리베이터 피치와도 비슷한 내용인데, 가장 짧은 내용이지만,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또는 오랫동안 보는 부분이다. 즉, 전체 슬라이드를 다 보지 않고도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는 이런 내용을 자료에서 찾아보고, 그 짧은 설명 자체가 별로이면, 그냥 미팅조차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자료 초반에 “우리 회사는 X를 위한 Y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명확한 설명이 있으면, 훨씬 더 잘 집중하면서 자료를 완독하는 편이다. 반면에, 자료를 다 읽어도 뭐 하는 회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이 회사랑 미팅을 안 할 확률이 매우 크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은, 투자 유치에 성공하든 안 하든, 320개의 모든 자료에 있는 내용은 팀에 대한 설명인데, 모든 투자자나 창업가나 팀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만큼 중요하고, 실은 스트롱은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바로 이 팀에 대한 슬라이드다. 우린 위에서 말 한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도 보지만, 우리가 가장 자세하게 보는 부분은 팀이다.

결론은, 창업가들에겐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업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 짧고 간결하게, 최고의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투자자들에게 정성스럽게 보내도 읽힐 확률이 매우 낮고, 읽혀도 3분 이내에 미팅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미팅을 해도 실제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더 낮다.

그래도 피치 덱은 중요하니까 신경을 좀 써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