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금

약 2주 전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 관리 회사인 BlackRock의 대표이사 Larry Fink가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이분이 누구냐 하면, 2017년도에 비트코인의 용도는 돈세탁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맹렬하게 비판했던 분이고, 워낙 금융업계에서 중요한 거물이기 때문에 이 발언을 한 이후에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졌던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핑크 대표의 비트코인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180도 달랐다.

그는 비트코인은 특정 지역, 국가, 또는 통화에 대한 의존도가 없기 때문에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금보다도 더 훌륭한 디지털 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블록체인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잘 활용하면 전통 금융을 완전히 혁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물론, 이분의 생각과 의견이 하루 아침만에 갑자기 바뀐 건 아니다. 여러 가지 기사에 의하면 작년부터 블랙록의 고객들이 디지털 자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최근에 ETF 상품마저 신청한 걸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비트코인과 디지털 자산을 계속 공부하고 연구한 거로 이해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앞으로 대단한 자산이 될 거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트위터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 있다. 모두 다 비슷한 이유를 말하고, 비슷한 논리를 전개하지만,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는 말을 블랙록의 대표가 공개적으로 TV에서 했다는 건 그 무게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블랙록이라면 일반인들이 모르는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있을 것 같고, 특히나 디지털 자산에 대한 SEC의 부정적인 입장을 알면서도 ETF 상품을 신청한 걸 보면 분명히 뭔가 내가 모르는 게 있지 않겠냐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최근에 이 시장이 또 재미있어지고 있다. 블랙록이 ETF를 신청했을 때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거로 생각했는데, 이후에 많은 회사들이 줄줄이 ETF 상품을 신청하면서 SEC에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다. 또한, 얼마 전에 리플이 SEC를 대상으로 어느 정도의 승리를 한 것도 나는 개인적으로 예상치 못 했었는데, 완전히 승소한 건 아니지만 이로 인해 SEC와 전쟁 중인 코인베이스와 같은 많은 회사들에 다시 싸울 의지와 무기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아직 모든 게 미지수이고, 계속 두고 볼 일이지만,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의 수장이 TV에서 공개적으로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다시 한번 마하트마 간디의 이 말이 생각난다:

“First they ignore you, then they laugh at you, then they fight you, then you win(처음엔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할 것이고, 그다음엔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고,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길 것이다)”

24시간 대기조

한국도 기업 문화가 많이 바뀌어서, 과거와 같이 8월에 전 국민이 휴가를 가진 않지만, 그래도 많은 직장인들이 이 기간에 휴가를 간다. 우린 작은 회사라서 특별히 휴가 기간이라는 게 없고, 그냥 쉬어야 할 때 쉬는 유연한 일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모두 너무 바빠서 충분히 쉬진 못하지만, 되도록 쉬고 싶은 만큼 쉬라고 격려와 권장을 하고 있어서, 대부분 남들이 쉬는 바쁜 휴가철을 피해서 돌아가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얼마 전에 스트롱 동료분과 이야기하면서 쉼과 휴가에 대한 주제가 나왔는데, 우리가 너무 많은 회사에 투자했고, 특히나 요새 다들 힘들어하니까 휴가를 가도 계속 이메일, 전화, 카톡, 슬랙을 확인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실은 휴가를 가면 완전히 스위치를 off 해야하는데,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이렇게 못 할 것이다. 대부분 스위치를 반 정도만 꺼놓고, 중간 중간에 계속 일을 하는 거로 알고 있고, 나 같은 경우에는 휴가를 가도 항상 스위치를 켜 놓고 있다. 나는 주로 매일 특정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 급한 일들을 먼저 처리한다. 오랫동안 일을 해야 하면,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가를 가서도 계속 일을 하고, 메신저는 항상 켜 놓는다.

어떻게 보면 회사의 대표이사로서 아주 나쁜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남들은 나한테 병이라고 할 정도로 이런 루틴을 반복한다.

하지만, 투자하다 보면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Fred Wilson도 나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기업보단 사람에게 투자하고, 이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사람은 항상 스위치가 on 되어 있고, 24시간 숨을 쉬기 때문에,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도 24시간 같이 일을 해야 한다. 우리만 스위치를 완전히 off 할 수가 없다.

특히 요샌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기 때문에 더욱더 긴장하고 우리가 투자한 사람들을 지원해야 하고, 우린 한국과 미국에 투자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스위치를 완전히 끌 수가 없는, 멈출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119 소방대원같이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건 아니지만 – 하지만, 가끔은 정말로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죽이기도 한다 – 요샌 점점 더 VC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건 24시간 대기조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타트업은 24시간 돌아간다.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에게 투자하고 지원하는 VC의 업 또한 24시간 돌아가야 한다. 멈추면 안 된다.

사람에 대한 타협은 없다

이 글에서 강조했듯이, 무에서 유를 만들고, 유에서 더 많은 유를 만드는 창업가의 필수 자질 중 하나는 유연함이다.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이 계획에 따라서 일을 진행하는 건 좋은 습관이고, 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스타트업에서는 이런 계획에 따라서 일을 진행하는 게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계획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예측이 빗나가는 상황에서 원계획에 집착하는 건 회사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가설은 대부분 틀리기 때문에, 예측과 예상을 하기보단, 그냥 그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타협해야 한다.

실은, 창업가들은 ‘타협’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전에 우리가 투자한 어떤 대표는 이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타협이라고 했는데,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살지 않고, 본인이 만든 틀로 남을 인도하려고 창업한 분들이 왜 타협이라는 말을 증오하는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싫든 좋든 스타트업을 운영하거나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면서 일을 진행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창업가분들에게 세상 모든 것과 타협해도, 이거 하나는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바로 ‘사람’이다. 모든 것에 대해서 유연해야 하고, 모든 것과 타협해도, 절대로 사람에 관해서는 타협하면 안 된다. 많은 경우에 우린 제품, 수치, 시장 등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이 모든 걸 실제로 만들고 가능케 하는 사람을 과소평가하는데 실은 모든 걸 이 반대로 봐야 한다. 사람을 가장 과대평가해야 한다.

사람 채용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어느 정도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는 회사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다는 논리로 채용을 진행하는데, 특히 초기 스타트업엔 이게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이라면 조금 부족한 부분을 회사의 시스템이 채워주는 방법이 잘 작동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은 초기 팀이 회사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므로, 오히려 이 반대이다. 회사의 부족한 부분을 사람들이 채워줘야 하고, 이렇게 해서 회사의 시스템이 만들어져야지만 나중에 회사가 사람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투자사 대표들에게 나는 100% 맘에 들지 않으면 되도록 채용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타협하면 안 된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 대해서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같이 일을 좀 해보니까, 이 사람이 좀 아니다 싶으면 그 느낌이 주로 맞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런 분들이 회사에 더 오래 있을수록 팀워크는 더 망가진다. 이런 분들은 바로 내보내는 게 맞다. 약간 다른 의미지만, 이 경우에도 사람에 대해선 타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 할 때 타협은 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사람에 대한 타협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피와 땀의 진입장벽

우리 투자사 중에 페이지콜이라는 9년 된 B2B SaaS 스타트업이 있다. 우린 페이지콜에 2017년에 첫 투자를 했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투자했다. 지금은 B2B SaaS 분야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당시엔 투자를 업으로 하는 VC들에게도 이 분야는 생소할 정도로 인기도 없고, 한국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페이지콜은 B2B SaaS 분야에서도 API를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창업 초기엔 투자자들이 이 비즈니스를 이해도 못 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페이지콜은 학원이나 학교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돕는 API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애매모호한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프라인 사업을 주로 하던 교육업체들이 페이지콜의 제품을 사용하면, 쉽고 자유롭게 본인들만의 온라인 강의실과 강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즉, 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도가 높고, customization이 가능한 온라인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이 회사의 강점은 9년 동안의 피와 땀이 투자된 연구, 개발, 그리고 삽질 위에 구축한 실시간 칠판(=캔버스) 기능인데, 수학과 같이 선생과 학생이 뭔가를 계속 보고 쓰면서 학습해야 하는 과목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려운 기능이다. 척박한 SaaS와 API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이젠 이 분야에서는 강자가 됐고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설탭, 콴다, 대교, 튼튼영어 등과 같은 기업고객에서 페이지콜을 기반으로 실시간 화상 과외 솔루션을 구축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분야에서의 사업, 그리고 펀딩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B2B SaaS 시장을 한국의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보고, 특히나 API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VC도 많다. 내가 이 회사를 다른 투자자분들에게 소개하면, SaaS나 API를 좀 아는 분들도 항상 하는 질문이 “어차피 WebRTC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큰 교육업체라면 개발 인력이 내재화 되어 있을 것이고, 구글에서 오픈 소스로 제공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API인 WebRTC를 이용해서 페이지콜과 똑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외주업체에 맡겨도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누구나 WebRTC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 API를 기반으로 누구나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비슷한” 제품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페이지콜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사용성에 대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해 본다. 시장에는 비슷한 제품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이 중 제대로 돈을 버는 제품은 극소수이다. 이 극소수의 제품과 다른 비슷한 제품의 껍데기만을 보면 다 비슷하다. 아니, 대충 보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이 제품들을 조금만 더 깊게 사용해 본 사용자들은 그 차이점을 금방 파악하고 어떤 제품을 돈을 내고 사용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좋은 제품과 그냥 비슷한 제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 차이점을 표현하는 완벽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사용자 경험의 오너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분야만 꾸준히 파고들면서 축적된 수천 ~ 수만 시간의 제품 개발과 운영, 그리고 수십 ~ 수백 명의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 수백 ~ 수천 번의 product iteration 과정을 통해서 한 제품을 여러 고객이 여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축적돼야지만 우리의 제품은 사용자 경험을 소유(=own)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껍데기는 다른 제품과 비슷하지만, 사용해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사용자 경험이 내재화 되어 있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페이지콜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API를 만들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 사용하는 브라우저, PC나 모바일 플랫폼의 환경,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 사용자 실수 등, 너무나 많은 변수 때문에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수년 동안 troubleshooting을 해왔고, 사용자들의 피드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코드, 기능, UI, UX를 개선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WebRTC를 기반으로 껍데기만 비슷하게 만든 제품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이 이 분야에 들어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페이지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이젠 다른 제품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런 제품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헌신하는 팀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노가다가 필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가다는 피와 땀이 만든 진입장벽이 될 수 있고, 피와 땀이 만든 진입 장벽은 어쩌면 남들이 넘기 힘든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다.

현실과 이상 어딘가에

스타트업을 할 때 중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가 바로 유연함이다. 그 어떤것도 – 많은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모든 가설은 틀리기 마련이고, 예측과 예상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그때 상황에 따라서 매우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창업가는 사업을 위한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은 항상 갖고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그냥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계획을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특히, 요새와 같이 경기가 안 좋고, 비즈니스 환경이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을 땐, 이런 사고와 행동의 유연함이 더욱더 요구된다. 내가 얼마 전에 구면인 창업가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분을 마지막으로 2년 전에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당시엔 시장에 돈이 넘쳐흘렀고, 이땐 창업가들이 모든 레버리지를 갖고 있던 seller’s market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고,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에 투자가 진행됐다. 이 분도 내가 그때 봤을 땐, 현실보단 이상에 가까운 비전과 밸류에이션을 주장했다. 나는 패스했지만, 결국 본인이 원하는 이상적인 조건으로 다른 곳의 투자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만났을 땐, 이상보단 현실에 매우 가까운 비전과 밸류에이션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창업가가 맞나 스스로 물어볼 정도로 매우 ‘겸손’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돈이 시장에 넘쳐흐를 때 너무 높은 밸류로 너무 많은 투자를 받았고, 너무 많은 사람을 채용했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돈은 금방 다 썼고, 제품은 아직 제대로 안 나왔고, 결국 대부분의 인력을 정리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꿈과 이상 속에서 붕 떠 있다가 2년 만에 다시 현실이라는 냉혹한 세계로 돌아왔는데, 그래도 내가 놀랐던 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업을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서 최선을 다하는 이 유연함은 높게 평가해 주고 싶었다.

이분과 같이 창업가들은 항상 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할 때마다 정신력이나 체력이 고갈되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사업이 너무 잘 되거나, 경기가 너무 좋거나, 시장에 벤처 자금이 넘쳐흐를 때는, 저 높이 이상에 더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지만, 요새와 같이 사업도 안 되고, 경기도 안 좋고, 돈줄이 마르고 있을 땐 현실과 매우 가까운 곳으로 기꺼이 내려와야 한다.

사업이라는 게 항상 이렇고, 실은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업과 인생 모두 현실과 이상 그 어딘가에서 계속 분주히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최적의 결과를 가끔은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