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artup Bible – 2022 정리

해마다 12월 마지막 주에는 한 해 동안 쓴 글에 대해 정리하는데, 2022년도 이제 사흘밖에 안 남아서 이 블로그의 한 해를 정리해본다.

2022년에 난 95개의 글을 – 이 글 포함 – 올렸는데, 이는 3.8일에 한 번씩 블로깅을 한 셈이다. 매주 월요일, 그리고 목요일 포스팅을 하니까, 이 수치는 거의 같다. 긴 휴가를 가면, 정기적으로 글을 안 쓰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날 수 있다. 95개의 포스팅을 읽기 위해서 The Startup Bible 블로그를 방문한 분은 오늘을 기준으로 총 200,939명이다. 월평균 16,745명, 하루평균 551명이 방문한 셈이다. 작년 대비 트래픽이 좀 증가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글을 더 자주, 많이 포스팅하면 트래픽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 같다. 실은 더 자주 포스팅하고 싶지만, 이걸 오랫동안 지속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꾸준히 일주일에 두 번만 글을 썼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페이스를 유지할 계획이다.

2022년도에 가장 많이 읽힌 Top 10 글은 다음과 같다:

1/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 포스팅은 2022년 9월에 올린 글이다. ‘오늘회’라는 스타트업 관련된 내용인데, 나는 오늘회의 인사이더는 아니라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제삼자로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다른 분들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답답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아서 몇 자 적었는데, 공감도 많이 얻었고, 욕도 많이 먹었다. 아직도 정확한 결말은 모르지만, 오늘회는 요새 많이 어렵긴 한 것 같다.

2/ 채용에 대해
올해 1월에 쓴 글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대기업에도 적용되지만, 스타트업엔 정말로 사람이 전부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채용하는 건 스타트업에게 더 어렵다. 스타트업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채용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3/ 리더와 팔로워
위 2번 글과 비슷한 사람과 채용에 대한 내용이다. 좋은 C 레벨 인재들이 어떤 스타일로 조직을 리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4/ 한국인들의 7가지 실수
이 포스팅은 정말로 꾸준히 읽히고 있는 all-time 베스트/스테디 글이다. 2010년도 9월에 썼으니까, 12년이 넘은 글인데, 내용을 보면 아직도 대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메일 주소 부분은. 또한, 이 글은 스타트업 바이블 포스팅 중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글인데, 댓글이 거의 230개가 달렸다. 댓글들이 정말 재미있고, 웃긴데, 세상에는 진짜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는 것 같다.

5/ 루틴의 힘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뭔가를 꾸준히 반복하는 루틴이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의 예시를 들면서 인생에서 뭘 하든, 성공하기 위해선 누구나 다 루틴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6/ 남이 해주는 숙제
내 회사의 일은 남이 절대로 잘해줄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너무나 많은 대표들이 본인의 전문 분야가 아닌 마케팅이나 개발과 같은 회사의 매우 중요한 업무를 남에게 외주 주고, 이들이 마치 본인들 회사의 일처럼 잘해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내 숙제는 내가 해야 한다.

7/ 피치 덱
투자자와의 첫 만남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게 회사의 pitch deck이다.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론 화려하고 과장된 자료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투자유치를 하려면 최소한의 자료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플하지만, 투자자들이 보고 싶은 내용이 담긴 가장 이상적인 피치 덱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을 글로 적어 봤다.

8/ 매출이 다시 중요해지는 시점
본격적인 불경기로 진입하면서, 이젠 매출을 만들고, 극소수지만 이익을 만드는 비즈니스가 다시 주목받는 시점이라는 내용의 글이다. 실은 불경기든 호경기든, 기업의 본질은 돈을 버는 건데, 그동안 시장에 유동성이 너무 풍부해서 우리 모두가 이런 기본적인 본질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손실과는 상관없이 너무 성장만을 강조한 근시안적인 안목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9/ 거절하기
작년에는 8위였던 글이다. 살다 보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이게 쌓이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처음엔 두렵지만, 맘내키지 않으면 그냥 No라고 하면서 거절해야지만 스트레스 관리가 된다는 내용인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는 내용인 것 같다.

10/ 종이 한 장 차이
좋은 기업과 위대한 기업을 분석해보면,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의외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어떤 스타트업은 성공하고, 어떤 스타트업은 그렇지 못하다. 이 종이 한 장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제 분야의 강자인 Stripe의 예시를 들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 종이 한 장 차이는 바로 디테일이다. 그냥 봤을 땐 잘 모르지만, 실제로 서비스를 사용해보면, 이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는걸 알 수 있다.

이상 2022년에 가장 많이 읽힌 글 10개였다.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많이 읽힌 10개 포스팅을 정리하다 보면, 그 전 해의 탑 10개 글과 많이 겹쳤었는데, 올해는 겹치는 글이 거의 없고, 대부분 2022년도에 새로 올라온 글들이 가장 많이 읽혔다. 뭐, 어떤 글이 읽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고, 그냥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서 읽는 글도 다른 건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오래전에 쓴 글도 좋은 내용의 포스팅이 많은데, 이 글들은 세월에 묻히는 것 같아서 약간 아쉽기도 하다.

그리고, 한 해를 정리하는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서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순위 매기기는 별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는 게 나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하나의 루틴이 된 것 같다.

Happy New Year!

싸우지 않는 싸움

우리가 일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게 미팅, 대화, 토론이 아닐까 싶다. 조직에서 일하면, 리더이든 팀원이든, 아마도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미팅이고, 실은 혼자서 일하는 분이라도 고객이나 협력사와 미팅을 꽤 많이 할 것이다. 미팅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이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집단지성으로 찾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미팅을 실제로 진행하다 보면, 문제를 정의하는 방법도 개인마다 다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생산적인 대화 보단, 날이 선 언쟁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대화가 이 방향으로 흐르다 보면, 같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안중에도 없고 서로를 공격하면서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틀렸는지를 따지는 싸움으로 번질 확률이 매우 크고, 나도 이런 상황을 상당히 많이 경험해봤다. 아마도 미팅을 많이 하는 분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미팅은 주로 창업가들과 하는 외부 미팅이 훨씬 더 많지만, 투자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식 내부 미팅을 하고, 비공식적인 대화나 토론을 상시 한다. 스트롱 팀원 모두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기 때문에, 특정 사람/기술/시장/분야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우린 이런 차이점을 리스펙트하면서 동시에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도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생산적인 토론을 하진 않고, 가끔은 감정이 격해지면서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생산적인 대화가 아닌 자존심의 싸움을 하기도 한다.

나는 스트롱을 시작하고 초반에 존이랑 이런 자존심 겨루기를 꽤 많이 해봤다. 둘이 극과 극의 성격의 소유자이고 – 참고로, 존은 ENFP이고 나는 ISTJ이다 – 세상을 보는 시각이 상당히 상이해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너무 달랐고, 둘 다 나름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가능하면 이해시키고, 둘이 동의 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생산적인 대화를 위한 노력은 두 초등학교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감정싸움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고, 우리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싸워야 하는데, 결국엔 존과 내가 둘이 싸운 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왜 내가 너보다 똑똑하고 잘났고, 왜 내가 맞고 너는 틀렸는지를 설득하다 보니까, 서로 너무 피곤했고 생산성은 바닥을 치는 날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우리가 합의한 사항이 하나 있다. 내 기억으로는 존이 먼저 제안했는데, 바로 “let’s agree to disagree” 였다. 즉, 서로의 배경과 뇌의 구조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특정 사안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서로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이 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서로 생각이 달라서 동의하지 않아도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같이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골치 아픈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팀원들의 생각이 달라도, 결국 우리 공공의 적은 이 문제이지 서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이 다른 팀원들이 열심히 토론해서 공공의 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면, 언제나 매우 만족할만한 생산적인 미팅과 토론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꽤 유명한 작가이자 행동심리학자인 Liz Fosslien이 그린 게 있다. 나도 이분의 트위터에서 봤는데, 저작권 때문에 여기에 올리진 않겠다. 직접 가서 보시기 바란다. 나는 이 이미지를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좀 어려운 미팅 참석할 때마다 한 번씩 보고 대화에 임하는데 생각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또는 덜 싸우고, 원만한 해결책을 찾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모두 다 싸우지 않는 싸움을 하는 좋은 하루가 되길.

긍정의 단련

올해는 참 어려운 해였다. 그리고 내년은 투자자와 창업가의 인내심과 그릿이 진정한 시험대 위에 오르는 더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 나도 이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말했지만, 지난 3년 동안 사업했던 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존경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략 10년마다 큰 불경기가 한 번씩 오고, 이 불경기는 1년~2년 정도 지속되다가 다시 호전되는데, 창업가들이 느끼는 이번 불경기는 아마도 4년, 심지어는 5년이지 않을까 싶다.

비대면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엔 거의 3년이라는 코로나19 기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회사엔 엄청난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 팬데믹 기간이 이들에겐 이미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경기였을 것이다. 팬데믹 창궐 후, 첫 6개월 동안은 대면, 비대면 서비스할 것 없이 모두 다 당황했던 시기이고, 이후에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렀던 기간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팬데믹 초기에 떨어진 수치와 느려진 성장 때문에 이 기간에도 펀딩하는 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끝날 기미가 보이면서, 이제 뭔가 좀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10년 만에 오는 제대로 된 불경기가 온 것이다.

최근에 내가 만났던,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이 공통으로 이런 말을 한다.
“창업하고 한 2년 개고생하다가, 2019년도 말에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것 같아서, 잘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원점으로 돌아와서 정말 힘들었지만, 잘 버텼고,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가 끝나면서 정말로 제대로 한 번 사업 해보자 했는데, 불황 때문에 펀딩도 못 받고, 정말 돌아버리겠습니다. 이젠 저도 좀 지쳤고, 팀원들도 다 번아웃 돼서 약간 절망적이긴 하네요.”

이런 대표들한테 나는 곧 불경기가 끝나고 다시 좋아질 거니까 계속 열심히 하라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 아니, 하고는 싶지만,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경기가 곧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 싫었고, 과연 내가 저 대표라면, 이 시점에 다시 한번 모든 걸 불태우면서 열심히 일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라면, 못 할 것 같다. 온갖 고생 끝에 시장에서 인정해주는 제품을 만들었는데, 팬데믹이라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 요소 때문에 3년을 또 고생하고, 이제 정말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10년 만에 오는 지독한 불경기 때문에 한 번 더 숨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그냥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 자책하면서 포기하는 창업가들이 굉장히 많고, 이분들에겐 비난이 아닌 존경심을 표시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우고 7전8기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긍정을 단련했고, 긍정을 단련하는 게 아예 몸에 밸 정도로 훈련을 한 분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역경 앞에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지만, 어떤 창업가들은 계속해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를 찾아서 소중하게 단련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분들이 성공할진 잘 모르겠다. 또다시 고비가 찾아올 수도 있고, 그럴 때 이분들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요새 나는 이런 분들을 존경하다 못해, 사랑하게 됐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얼마 전에 한 상장사 대표님과 즐거운 점심을 같이했다. 나는 이 분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투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젊은 분들이 한 아이디어에 꽂혀서, 처음에는 장난으로 뭔가를 시작했는데, 이게 취미가 되고, 취미가 열정이 되고, 열정이 사업이 돼서 성공한 전형적인 스타트업의 성장 이야기를 이분에게 직접 듣는다는 건 나에겐 영광 그 자체였다. 물론,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충분히 있지만, 창업자들의 founding story는 항상 다르고,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날의 대화는 내가 올 한 해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 가장 흥미롭고 배움이 많은 대화 중 하나였고, 그 감동과 여운이 며칠 동안 지속됐다.

이분은 지금은 상장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많은 직원분과 함께 하고 있고, 사업을 하면서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래도 사업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 사업도 잘 안되고 돈도 없어서 허덕이면서 오늘, 내일 하던 그 순간이라고 한다. 그땐 정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재미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변태적인 상황인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너무 재미있었다는.

그런데 이 말이 나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왜냐하면, 나도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도와 2012년도에 나에겐 이런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LA에서 뮤직쉐이크 북미사무소를 시작했을 때가 2008년인데, 돈이 없는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인 넥슨 아메리카의 작은 방 하나에 조촐한 사무실을 차렸다. 좁은 공간이었고, 모든 가구는 이케아에서 직접 사 와서 조립했지만, 그 방에서 단위 면적당 발산했던 에너지는 세계 최고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네 명은 내일은 없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다.
그리고 2012년도는 존과 스트롱을 시작했을 때이다. LA 코리아타운의 작은 사무실에서 우린 창을 등 뒤로 하고 나란히 둘이 앉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그땐 정말로 아무것도 없고, 자신감과 체력만 있었는데, 미국 서부 시간 오후 5시면 한국 시각 오전 9시라서, 오후 5시가 되면 둘이 번갈아 가면서 한국으로 전화를 돌리고,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LA에 있는 스트롱벤처스라는 투자사의 배기홍이라고 하는데요,,,”라면서 우리도 펀딩을 하고 투자할만한 회사들을 발굴했다.

생각해보면, 2008년과 2012년은 나에겐 정말로 힘든 시기였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자신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죽고 싶을 정도로 짜릿짜릿하게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 그 당시의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작고 허름한 사무실,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그냥 그때의 분위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사정이 훨씬 좋아졌고, 현재 사무실도 너무 좋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뮤직쉐이크와 스트롱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순간, 그 사람들과 그 사무실이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이제 5명인 회사가 언제쯤 토스나 당근마켓같이 커질 수 있을지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분들에게 그런 순간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으니까,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꼭 기억하라고 한다. 나중에 성공해서 더 커지면, 5명인 지금의 이 허접하고 힘든 순간이 매우 그리워질 것이니.

미래를 위한 현실과의 불화

VC마다 다르지만, 검토하는 회사 중 투자하는 회사의 수는 상당히 낮을 것이다. 우리도 해마다 800 ~ 1,000개의 회사를 검토하지만, 실제로 투자하는 회사의 수는 5% 미만이다. 재미있는 건, 투자하는 이유도 다양하지만, 투자하지 않는 이유도 다양하다. 흑백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분야라서 명확한 기준이 있고,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트롱이라는 하나의 VC만 봤을 때도 이렇게 다양한 투자의 기준이 있는데, 다른 VC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다양한 기준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투자의 기준을 조금 더 일반화해보면, VC가 특정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하려고 하는 사업이 현실성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현실성이 없는 사업이라는 말 자체가 발산하는 이미지는 부정적이라서, 투자자의 “팀이랑 대표는 괜찮은데, 사업이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투자는 안 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가보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몇 번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현실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론 현실성이 없다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스타트업 분야에서만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고, 조금만 다르게 본다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장강명 씨의 “책, 이게 뭐라고”의 작가의 숙명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창업가들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이 잘 정리됐다. 아마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업가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제품은 현재에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아이디어와 제품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와 제품을 상상하고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사용자들에게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들에게 욕을 먹는 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스타트업이 현실성이 없다는 건,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현재 세상이 만든 틀에 본인들을 맞추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본인들이 만든 틀에 미래의 세상을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역시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하고, 투자하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비이성적인 미래지향주의자이다.

어떻게 보면, 창업가의 사명은 오히려 현재의 세상과 충돌과 불화를 만드는 데 있고, 우리 같은 투자자는 이런 충돌과 불화를 더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가끔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