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덱 분석

얼마 전에 피치 덱이라는 글에서 투자받기 위한 자료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몇 자 적어봤는데, 꽤 많은 분들이 좋은 피드백을 제공했고, 좋은 질문도 개인적으로 많이 해 줬다. 그런데 그 글 쓴지 며칠 후에 TechCrunch에서 이런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한국도 요샌 가끔 Docsend로 피치 덱을 보내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미국은 꽤 많은 분들이 Docsend를 통해서 덱을 보낸다. 이렇게 하면 누가 자료를 봤고, 어디까지 봤고, 어떤 페이지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는지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드롭박스가 이 회사를 작년에 인수했고, Dropbox Docsend 팀이 수많은 피치 덱과 이 덱을 읽는 VC들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한 내용이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고 이 팀을 만날지 말지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줄고 있다. 놀랍게도 3분 이상 안 걸린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고, 더 많은 자료가 투자자들에게 발송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평균 시간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2021년 대비 2022년에는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24% 감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덱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되, 3분 안에 이 팀을 만나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아주 임팩트 가득한 내용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전 에서 나열한 내용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투자자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보는 내용도 데이터로 정리해보니까 참으로 흥미롭다. Docsend 팀이 320개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VC들이 가장 자세히 보는 내용은 첫 번째가 제품, 두 번째가 비즈니스모델, 그리고 세 번째가 Purpose인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로 자료 초반에 있는 우리 사업에 대한 한 줄 설명 또는 엘리베이터 피치와도 비슷한 내용인데, 가장 짧은 내용이지만,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또는 오랫동안 보는 부분이다. 즉, 전체 슬라이드를 다 보지 않고도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는 이런 내용을 자료에서 찾아보고, 그 짧은 설명 자체가 별로이면, 그냥 미팅조차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자료 초반에 “우리 회사는 X를 위한 Y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명확한 설명이 있으면, 훨씬 더 잘 집중하면서 자료를 완독하는 편이다. 반면에, 자료를 다 읽어도 뭐 하는 회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이 회사랑 미팅을 안 할 확률이 매우 크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은, 투자 유치에 성공하든 안 하든, 320개의 모든 자료에 있는 내용은 팀에 대한 설명인데, 모든 투자자나 창업가나 팀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만큼 중요하고, 실은 스트롱은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바로 이 팀에 대한 슬라이드다. 우린 위에서 말 한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도 보지만, 우리가 가장 자세하게 보는 부분은 팀이다.

결론은, 창업가들에겐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업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 짧고 간결하게, 최고의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투자자들에게 정성스럽게 보내도 읽힐 확률이 매우 낮고, 읽혀도 3분 이내에 미팅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미팅을 해도 실제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더 낮다.

그래도 피치 덱은 중요하니까 신경을 좀 써서 만들어야 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창업가들

투자자들이 창업가들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창업 동기이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창업가 분들이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회사에서 일 한 경험이 있어서, 굳이 창업같이 어려운 길 말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길을 갈 수도 있는데 굳이 이 어려운 창업을 택한 이유와 동기는 항상 궁금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해도 이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창업가들이 듣기 좋은 고결한 답변을 했다. 어떤 분들은 어릴 적부터 느꼈던 사회의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세상에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어릴 적부터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창업했다고 한다. 굉장히 좋은 답변이고, 어떤 경우에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사업을 막상 보면 세상의 변화나 소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아서 후에 다시 물어보면, “그렇게 이야기 하면 투자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돈이 동기인데, 그렇게 이야기 할 순 없잖아요”, “떼돈을 벌기 위해서 창업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라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자주 듣는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창업의 목적이 돈이고, 돈 외에는 다른 동기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창업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무겁고, 고통스럽고, 공황장애스럽기 때문에, 이 길을 꼭 가야겠다는 아주 굳은 동기와 목적이 없으면 견디는 게 어렵다. 그래서,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든, 돈에 대한 개인적 욕심이든, 힘들지만 계속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거짓으로 거창한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렸을 때 너무 없이 자라서,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그냥 돈벼락 맞고 싶어서 창업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나도 실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한다. 기업 대상 강연은 잘 안 하지만, 학생들 대상으로 세미나나 강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데, 유니콘 기업과 1조 원 – 지금 환율로는 1.4조 원 – 이라는 큰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은 이 숫자에 대한 감을 전혀 못 잡는데, 주로 이렇게 추가 설명을 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인 중 한 명인 삼성전자 사장 연봉이 120억 원 ~ 150억 원인데, 이 연봉을 66년 동안 단 한 푼도 안 쓰고 100% 저금해야지 1조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즉, 남한테 월급 받아서는 절대로 큰돈을 못 번다는 뜻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으세요? 그러면 무조건 창업해야 합니다.”

이런 강연이 끝나면, 학생들이 찾아와서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본인도 돈을 벌고 싶은데 창업을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물론, 이 중 실제로 창업하는 분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이렇게 돈이 동기와 목적이 돼서 창업을 한 분들이 정말로 유니콘 기업을 만들어서 부자가 되면, 이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생관이 바뀐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생기면서, 이 분들의 동기와 목적이 돈에서 조금 덜 물질적인 것으로 바뀌고, 많은 분들이 궁극적으로는 창업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좋은 자양분

얼마 전에 내가 오늘회라는 회사에 대한 을 쓴 적이 있다. 실은, 오늘회에 대한 글이라기보단, 미디어에 나온 내용이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싶었다. 아직도 오늘회의 결말은 잘 모르지만, 이 회사의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최근에 많이 이직한 걸 보니, 회사가 많이 어렵긴 한 것 같다. 비슷한 이야기가 브룽을 운영하는 메쉬코리아, 그리고 산타토익을 운영하는 뤼이드에 대해서 들리고, 이 회사들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최근에 이직했거나, 아니면 창업한 사례를 몇 번 봤기 때문에, full story는 내가 모르지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긴 한 것 같다.

무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짧은 시간에 큰 투자를 받으면서 고속 성장했지만, 이후에 회사가 어려워져서 많은 직원들이 퇴사했다는 소식은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스타트업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더 좋지 않은 이미지가 형성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현상이 가져오는, 무시할 수 없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회사가 문을 닫으면, C급 레벨의 인재, 온갖 종류의 개발자, 마케터, 프러덕트 매니저들, 등 아주 좋은 인재들이 시장으로 방출된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인재라는 건, 단순히 투자를 많이 받고 고속 성장한 회사 출신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대규모 투자를 받아서, 고속 성장한 회사라면, 그 기간의 매시간은 엄청나게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이분들은 본인들의 직무, 또는 직무와 상관없는 다양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을 것이고, 엄청나게 다양한 내부/외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일하고, 논쟁하고,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상대했을 것이다. 초고속 성장 스타트업에서의 5년 경험은, 그냥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대기업에서의 30년 경험보다도 더 바쁘고, 값지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내가 대기업에서 30년 일해 본 경험은 없지만, 내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좀 있는데, 솔직히 어쩜 이렇게 일을 못 하는지 가끔 놀랄 때도 많다).

우리는 페이팔 마피아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페이팔에서의 성공 경험을 기반으로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해서 수많은 유니콘을 만든 사람들을 일컫는데, 내가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워낙 유명한 창업가들과 회사들이 많다. 한국의 페이팔 마피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은 다이얼패드 마피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트롱 공동대표, 공동파트너 존도 다이얼패드 출신이고, 다이얼패드 출신 분 중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신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도 네이버 마피아, 카카오 마피아, 쿠팡 마피아, 토스 마피아, 배민 마피아 등이 탄생할 것이다.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서 성장한 회사에서 보고, 듣고, 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본인들도 이런 경험을 복제해서 더 대단한 회사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회사 출신의 창업가들도 잘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망한 회사 출신 창업가들도 잘한다. 이들은 고속 성장하는 회사에서 치열하게 보고, 듣고, 한 게 많아서, 이러한 배움과 경험을 선별적으로 복제해서 더 좋은 회사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망한 회사 출신 창업가들은 “이렇게 하면 위험하다”라는 시그널들을 잘 읽는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잘 안 된 회사의 경영진, 직원, 그리고 투자자들에겐 안타깝지만, 어쨌든 이 회사 출신의 직원들이 창업하는 걸 보면, 이런 현상은 미래를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MVP 출시의 고통

요새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초기 스타트업 대표들이 몇 분 있다. 회사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성장한 후에, 이 회사를 더 좋은 회사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작업을 하고, 어떤 사람을 채용하고, 어떤 성장 전략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언을 주는 건 내가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항상 힘들지만, 지금 아무것도 없는 초기 스타트업이 소위 말하는 product/market fit을 찾는 걸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이다.

얼마 전에 이 중 한 분과 이야기하다가 MVP(Minimum Viable Product)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는데, 초기 스타트업과 만나다 보면 MVP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한다. MVP의 기본정의는 대략 다음과 같다.

MVP는 출시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한다. 보통 얼리어답터와 같은 소수 잠재 고객에게 먼저 공유를 한다. 이런 고객이 불완전한 제품의 가능성을 잘 파악하고 생산적인 의견을 주기 때문이다. MVP의 기본이 되는 사상은 고객을 발견하고 고객의 애로사항을 파악하는 것이다. 빨리 제품을 시장에 내면 고객 성향을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창업자가는 고객이 관심 없는 기능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고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제품을 빠르게 내야 한다. 그래야 남들보다 빠르게 배울 수 있다.
-출처: ‘스타트업 바이블 2‘ 23계명 – 빨리 똑소리 나는 MVP를 만들라

제품을 매일 매일 만들고, 이 제품을 시장에서 마케팅하면서 product/market fit을 찾기 위해 밤새워서 고민하는 창업가들은 MVP의 정의도 잘 알고 있고, 제품 개발을 조금 해본 분들이면 어떻게 하면 좋은 MVP를 만들어서 시장이 좋아하는 제품으로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방법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MVP’는 어떤 제품일까? 어느 정도 수준까지 만들어야지만 MVP라고 할 수 있을까? 초기 스타트업 대표들이 이런 질문을 나한테 많이 한다. MVP의 의미는 과거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정의는 “시장에서 사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제품”이다. 당근마켓은 현재 전 국민의 40%가 사용하는 국민 중고 거래/로컬앱으로 성장했지만, 창업초기에는 모바일로 아주 쉽게 내 물건을 등록하고, 이걸 판교 지역 사람들에게 사고팔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제공했다(당근마켓의 원래 이름은 판교장터 였다). 이 MVP로 실험하고자 했던 건, 과연 사람들이 지역주민이랑만 거래할 의향이 있을까였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홈서비스를 위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미소의 MVP는 웹 기반의 간단한 청소가사도우미 매칭 서비스였다. 집 청소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뒤에서 미소 직원들이 고객의 집 근처에 있는 인력사무소에 전화해서 수동으로 가사도우미를 매칭해줬는데, 이 MVP로 실험하고자 했던 건, 과연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가사도우미 서비스 신청을 할까였다.

어차피 완벽한 제품은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오래 고민하고 개발해서 10년 후에 출시한다고 시장에서 환영받는 제품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장에서 먹힐만한 제품과 시장이 실제로 원하는 제품은 다르고, 시장의 상황도 지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서 출시하는 건 시간 낭비다. 이런 문제점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린 제품 개발 방법론 중 하나가 MVP를 빨리 만들어서 출시하고, 이후에 시장의 피드백을 지속해서 다시 제품에 반영해서 시장이 원하는 것과 가장 근접하게 제품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서 한 번의 무거운 제품 출시를 하지 말고, MVP를 만들어서 가벼운 제품 출시를 여러 번 하라는 조언을 나도 자주 하는데, 최근에 내가 느끼고 있는 건 MVP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 돼서 완전한 제품의 완성도를 가진 MVP도 꽤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추세를 의식해서인지, 우리 투자사 포함, 많은 창업가들이 더 좋은 MVP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긍정적인 결과 보단, 부정적인 결과가 더 눈에 띈다. 더 좋은 MVP를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절대적인 개발 시간을 투입하는데, 어떤 회사는 MVP 만들어서 출시하는데 1년 넘게 걸리고, 예정 일정 대비 계속 출시가 지연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완성될 수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다 보면, MVP 출시 자체를 못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그리고 계속 출시 준비만 하다가 회사가 망하기도 한다. 또는, 지연을 거듭하다가 결국 출시는 했는데, 그동안 타이밍을 놓치면서 시장의 요구사항이 바뀌거나, 아니면 경쟁사가 먼저 MVP를 출시하면서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 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이런 상황을 많이 보고 경험하면서, 내가 느낀 MVP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1/ MVP의 수준이 상향평준화 된 건 확실하다. 하지만, MVP의 정의는 말 그대로 “최소한의 기능만 탑재한 제품”이다. 무조건 빨리 출시하는 게 생존과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 있다.
2/ 이렇게 빨리 출시해서 시장의 반응을 보는 게,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 더 개발할 건 빨리 개발하는걸 결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3/ “최소한의 기능”을 조금 더 확대해석해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즉,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제품이 시장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3-1/ Gmail보다 훨씬 더 사용하기 편리한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이라면, MVP는 멋진 UI와 UX, 그리고 다른 부수적인 기능 보단, 일단은 이메일을 잘 보내고, 잘 받는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이게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게 완성되면 일단 MVP를 출시하고, 이후에 시장의 피드백을 반영하면서 제품을 계속 향상해야 한다. 모든 부수적인 기능이나 디자인을 입힌 후에 MVP를 출시하려면 출시 자체를 못 할 확률이 높다.
3-2/ 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에 대한 정의를 제품 개발 시작하기 전에 잘 고민해봐야한다. 여기에서 정의가 어긋나면 MVP 자체가 산으로 간다.
4/ 그렇다고 허접한 MVP를 만들면 안 된다. 이 또한 망하는 지름길이다.
4-1/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 탑재되지 않고, 쓸데없는 부수적인 기능과 기술이 탑재된 MVP가 출시되면, 사용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MVP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5/ 즉, MVP의 핵심은,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제품의 방향을 확정하기 위한 틀을 만드는 작업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만들어서 사용 자체를 못 하는 MVP를 출시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나도 정확한 평균치를 계산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개발력과 제품 기획력이 있는 초기 스타트업이 괜찮은 MVP를 만드는데 투자하는 시간은 대략 6개월 정도인 것 같다. 6개월 이하면 원하는 제품이 안 나오고, 6개월을 넘기면 출시가 지연된다. 물론, 이건 산업마다 다르고, 시장마다 다르고, 회사마다 다르다.

역투자자

경기가 좋고, 시장에 돈이 풍부하면, 투자가 쉽게 느껴진다. 이 시기에는 그 어떤 곳에 투자해도 웬만하면 망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빌게이츠가 얼마 전에 말했던 The Greater Fool Theory에 의해서 투자 심리가 움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건 바보지만, 내가 지불한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이걸 다시 구매할 더 큰 바보가 어딘가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러서, “현금이 가장 싼 자산이다.”라는 말이 안 되는 말을 너도나도 할 때는, 정말로 바보가 아니면 투자 대상과는 무관하게,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낼 수 있다.

문제는 이 반대의 시장 상황에서 발생한다. 특히나, 전혀 예상치 못 한 방향으로 시장이 흘러가거나,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시장 상황이 악화하면, 위에서 말 한 “더 큰 바보” 이론이 작동하지 않고, “내가 가장 병신이었어” 이론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오면, 대중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지갑을 굳게 닫고 더 이상의 신규 투자는 하지 않고, 이미 투자한 자산은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팔아서 손절하는 것이다.

뭔가 익숙한 시나리오이다. 최근 4개월 동안의 시장 상황이 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올해 4월까진 시장이 과열됐고 이때까진 정말 스타트업이 부르는 게 값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젠 VC가 부르는 게 값이 되어버렸다. 벤처 생태계에서는, 미국은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투자를 동결하거나,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고, 한국은 아직은 상황이 이 정도로 나쁘진 않지만, 아마도 곧 이와 비슷해지리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VC는 아예 전 직원이 두 달 휴가를 갔는데, 그 기간에는 신규 투자는 아예 안 할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실은, 상황이 이렇다면, 대중을 따라가는 투자자들은 – 그리고, 전체 투자자의 90% 이상이 이런 성향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 다른 투자자들이 다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신규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본인들도 그냥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투자자들은 이런 불경기 상황을 역발상적으로 잘 활용해서 좋은 회사에 아주 싸게 투자를 더욱더 많이 하는 노력을 할 것이다. 워렌 버핏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남들이 욕심부릴 때 두려워하고, 남들이 두려워할 때 욕심부려라.”인데, 요새 같은 시장 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는 투자자의 태도와 자세를 이 말이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투자자들을 ‘역투자자(contrarian investor)’라고 부른다.

우리도 실은 2020년도 3월 ~ 9월 사이에 이런 역투자자의 전략을 매우 공격적으로 펼쳤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면서, 대부분의 VC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주춤했을 때가 있었다. 당시에 많은 투자자들이 신규 투자는 하지 않고, 기투자사들 관리에 집중했는데, 우린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신규 투자를 했다. 시장에 돈줄이 메말라지자,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밸류에이션을 상당히 많이 할인해서 투자유치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역발상적인 투자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서서히 종식되면서, 큰 성과를 만들고 있다.

이번 불경기도 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도 평소보단 시장을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투자하는 시드 자금을 다 쓰면, 다음 펀딩을 더 큰 VC에게 해야 하는데, 이 자금이 현재 시장에 별로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작은 투자금으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팀에 선별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밸류에이션이 작년과 올해 초 보단 현저하게 낮아졌고, 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이 좋은 회사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같은 시기에 투자를 잘하면 나중에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역발상적인 역투자를 나만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아마도 모든 투자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대부분 다 입으로는 “이럴 때 투자하면 나중에 대박인데”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막상 그런 투자를 하는 분들은 항상 극소수이다. 즉, 이럴 때 좋은 회사에 싸게 투자를 잘하면, 정말로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