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아웃라이어 VC, 아웃라이어 창업가

얼마 전에 Crunchbase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다. 의사가 되려면 의대를 가야 하고, 변호사가 되려면 로스쿨을 가야 하는데, VC가 되고 싶으면 어떤 전공을 공부해야 할지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 미국과 캐나다의 투자자 4,500명의 학력을 분석한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하버드, 스탠포드, 유펜, MIT 등의 소위 말하는 ‘탑스쿨’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VC들이 많고, 학사 학위만 있는 VC보다 석사와 박사 출신 VC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학사 – 28%; 석사 – 57%; 박사 – 16%).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에 있는 VC들만 봐도 대부분 MBA가 있는 석사 출신이 많은 걸 보면, 맞는 분석인 거 같다. 그리고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면, 57% 석사 학위 중 80%가 MBA라고 한다. MBA 학위가 VC가 되기 위한, 소위 말하는 ‘골든 티켓’인 셈이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일반 학교 MBA보다는 하버드, 스탠포드나 워튼같은 탑 MBA 학위의 VC가 많은 걸 봐서는, 한국이랑 비슷하게 미국도 뭘 공부했냐 보다는, 어디서 공부했냐가 더 중요한 거 같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VC 분야에서는. 내가 보기에는 VC의 절대다수를 상징하는, 이렇게 적당히 많이 공부한 VC들은 비슷한 성향과 시각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성향과 시각을 가진 VC들이 투자하는 회사들도 정규분포곡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거 같다. 투자 실적은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고, 그냥 평범하다.

그냥 이렇게 결론이 나면 좀 재미없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주위를 둘러보면, 실은 다른 패턴들이 보인다. 간혹 만루홈런을 치는 VC들이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회사에 투자해서 수천, 또는 수만 퍼센트의 exit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VC들은 위에서 언급한 평균적인 VC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고, 학교도 아이비리그나 서울대 나오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MBA도 없다. 아웃라이어 VC라고 할 수 있다. 창업가를 봐도 비슷한 패턴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잘 하는 창업가들을 보면, 평균적으로 좋은 학교 나왔고, 좋은 직장 경험이 있다. 좋은 회사를 만들고 운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유니콘 스타트업이 되진 않는다. 그냥 적당히 좋은 회사가 된다.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 창업가를 보면, 좋은 학교 출신이 아니거나, 아예 대학을 안 나온 사람들도 많다. 아웃라이어 창업가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이건 아주 개인적인 의견인데, 좋은 학벌이나 좋은 직장 경험과 같은 골든 티켓이 없으면, 스스로 더 노력하기 때문인 거 같다. 남들이 5천 시간 일 할 때, 이들은 1만 시간 일한다. 물론, 이들 모두 기본적으로는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이고, 자신이 하는 업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지만, 더 열심히 하므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기회를 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오른쪽으로 갈 때, 이들은 왼쪽으로 갈 수 있는 소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텀블벅 300억 돌파

텀블벅 300억 돌파작년 8월에 우리 투자사인 한국을 대표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이 누적 후원액 200억 원을 돌파했다는 내용에 관해서 썼는데, 최근에 그 후로 6개월 만에 누적 후원금 300억 원을 달성했다. 절대적인 후원금액도 상당히 인상적이지만,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성장 속도이다. 2016년 총 누적 후원금 100억 원 돌파에 이어 200억 원을 돌파하기까지는 1년이 걸렸고, 그 후로 6개월 만에 누적 후원금 300억 원을 달성했다. 계속 이 추세로 가면 올 상반기 안으로 누적 후원금 400억 원 또는 500억 원까지 가능할 거 같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의 창조적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텀블벅의 목표다”라는 염재승 대표의 말처럼 단순히 매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창작자를 지원하는 텀블벅이라는 플랫폼을 하나의 거대한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이 팀을 응원한다.

팀 빌딩과 타이밍

우린 초기 단계에 투자를 많이 하는데, 이때는 제품이 있는 팀도 있고 제품이 없는 팀도 있다. 실은 이 단계에 투자하는 건 객관적인 수치보단 –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수치가 별로 없다 – 사람, 시장, 감, 느낌 등을 기반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므로 투자 후 성공하는 회사보다는 실패하는 회사의 수가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가끔 운이 좋으면,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겨서 누가 봐도 이젠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하는 팀이 있다. 얼마 전에 이런 회사 대표의 고민거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내가 “이제 회사에 어른이 필요한 거 같네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은 회사의 성장과 각 단계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팀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주로 엔지니어 출신의)창업 팀이 시장의 허점을 발견하고, 본인들이 가진 기술을 활용해서 재미 삼아서 만든 제품이 투자를 받고, 고객이 생기고,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인 팀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부터 성장통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는 제품을 고도화하기 위해서 더 많은 개발인력이 필요하다. 기술 스타트업을 하는 분들은 모두 동의하겠지만, 그냥 개발하는 사람은 시장에 널렸지만, 제대로 된 개발인력은 정말 찾기 힘들고, 이런 사람을 찾고, 회사로 데려오기까지는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대표이사는 채용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까울 수도 있지만, 매우 중요하다. 실은, 개발인력 채용은 대표이사보다는 CTO의 영향력이 더 크고, CTO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해야 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CTO는 주로 기술과 씨름하는 걸 좋아하지, 사람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기술도 알지만, 개발인력을 잘 리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CTO와 죽이 잘 맞는 VP of Engineering이 필요하다. VP Engineering에 대한 의견은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CTO는 회사의 큰 기술과 아키텍처를 설계하고, 단기적인 것 보다는 중장기적인 기술적 이슈를 주로 다루고, VP Engineering은 개발팀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다른 부서와 개발부서의 협업을 원만하게 도모하는 일을 한다.

개발력이 보강되면서 제품이 더 단단해지고, 이 제품으로 큰 비즈니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능력, 경험, 그리고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창업가들은 대부분 뭔가 만드는 걸 좋아하고, 돈보다는 큰 비전이나 전략을 보고 움직이는데,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리와 운영 능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물론, 창업가들이 이런 스킬을 배우고, 스스로 창업가에서 관리자로 변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창업가와 관리자의 DNA는 다르기 때문에 마크 저커버그 같은 멀티플레이어는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시점에서 창업가는 회사의 운영을 담당할, 조금 더 큰 조직에서 이런 경험을 한 참모를 찾게 된다. 자신의 필요 때문에 특정 문제를 기술적으로 접근했던 창업 초기와는 달리, 조직을 관리하고, 회사에 매일 들어오는 현금을 관리하고, 잘 만들어놓은 ‘엔진’에 계속 기름칠을 하면서 유지보수까지 할 수 있는 전략을 만들 수 있는 관리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이 단계에 진입하는 우리 투자사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실은 내가 만든 회사가 이제 내가 혼자 운영하기에는 너무 커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게 쉽지 않지만, 똑똑한 창업가들은 잘 적응한다. 주로, 이 단계에서 회사로 영입하면 큰 도움이 되는 인재들이 컨설팅, 투자은행, 대기업 전략 출신이다. 나는 MBA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진 않지만, 이 단계에서는 MBA들이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직접 경험해봤다. 시장의 흐름을 보면서, 큰 전략을 만들고, 이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들을 채용하면서, 회사의 daily operation 을 담당하는 건 뭔가를 새로 만드는 거보다는 만들어 놓은 거를 잘 키우는 건데, 이건 완전히 다른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회사가 계속 성장을 하면, 창업 초기에 필요했던 인력이나 자원이 어느 순간 더 효과가 없다는 걸 느낄 것이다. 아직 비즈니스모델이 없는 작은 웹사이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원과 다양한 사용자들이 돈을 내면서 사용하는 서비스를 더 키우고, 최적화하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원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창업 초기의 인력이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환경에 필요한 스킬을 배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이 시점이 오면 다른 업무를 담당하거나, 다른 회사로 – 본인의 이런 능력을 더 필요로 하는, 더 작은 회사 – 옮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고, 모든 회사가 겪는 성장통의 일부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년에 쿠팡의 경영진을 모두 외국인으로 교체한 이유도 이와 비슷할 거 같다. 1조 원짜리 회사를 만드는데 필요한 인력과 이 회사를 5조 원 가치로 만드는데 필요한 인력은 다르다. 아마도 쿠팡을 10조 원 이상의 회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이런 이커머스 회사를 이 정도 규모로 성장시킨 경험을 보유한 사람들이 필요할 텐데, 한국에서는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아마존이나 월마트, 또는 급성장한 미국의 스타트업에서 외국인 인재를 영입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길었는데, 하여튼 강조하고 싶은 건, 회사의 단계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업에 최적화된 팀이 있는가 하면, 남이 만들어놓은 제품을 좋은 비즈니스로 성장시키는데 최적화된 팀이 있다.

신세계

1999년, 나는 실리콘밸리의 중심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몇 년 후에 1999년~2000년을 뒤돌아봤을 때, 인터넷 태동기에는 엄청난 기회가 있었고, 이를 포착한 사람들은 일생일대의 부를 축적했고,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세상을 바꾼 혁신을 일으켰다. 후회되지만, 나는 변화의 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제대로 보지 못 했고, 기회를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1999년은 인터넷이 이제 메인스트림으로 자리 잡을 때인데, 당시에는 명확한 정보의 격차(=digital divide)가 존재했다. 즉, 세상은 ‘인터넷을 아는 사람’과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은 이거는 나랑은 전혀 상관없고, 내 인생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말자 하면서 평소 하던 대로 살았다. 절대다수가 속했던 이쪽 사람들은 인터넷이 가져올 미래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아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삶이 어떻게 바뀔지는 몰랐지만, 뭔가 엄청난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고, 계속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놓고, 꾸준히 공부하면서 업계 종사자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갔다. 이렇게 하면서, 인터넷 혁명이라는 파도를 가장 앞에서 탈 수 있었고, 이들은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멀리 갔다. 상상하지 못할 속도로 전진하면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고, 세상을 바꾸는 움직임에 크게 기여했다. 나도 가끔 후회한다. 변화의 중심에, 아주 적절한 시기에 있었는데, 왜 조금 더 과감하게 실행하지 못했는지.

2018년 현재, 왠지 모르게 1999년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다. 이번에는 ‘가상화폐(토큰)’와 ‘블록체인’ 이다. 세상은 ‘가상화폐(토큰)/블록체인을 아는 사람’과 ‘가상화폐/블록체인을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는 거 같다. 인터넷이 메인스트림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이던 정보의 격차가 이 시장에도 확연하게 보인다. 다만, 이번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그냥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가상화폐를 혐오하고 있는 수준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정보의 격차는 더욱더 큰 거 같다. 얼마 전의 JTBC 비트코인 토론 이후, 내 소셜 타임라인은 비트코인이 가상화폐냐 아니냐에 대한 지인들의 의견과 포스팅으로 도배가 되고 있고, 유시민이 맞냐 김진화가 맞냐에 대한 영양가 없는 분석을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고 있다(솔직히 나는 이 토론 보다가 양쪽 다 짜증 나서 중간에 TV 꺼버렸다).

이렇게 비전문가들이 너도나도 비트코인이 화폐냐 아니냐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는 거 자체가 완전 시간 낭비인 거 같다. 실은, 이 분야에 대해서는 모두가 현재는 비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이 어떻게 될지, 이게 사기인지, 혁명인지, 그리고 이로 인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은 99년도에도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냐, 그냥 이러다 마냐에 대한 끝없는 논쟁이 있었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 PC가 세상을 바꾸냐, 그냥 비싼 장난감이냐에 대한 끝없는 논쟁이 있던 것처럼.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어쩌면 큰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이런 새로운 것에 관해 관심을 두면서 계속 공부하고, 이로 인해 어떤 신세계가 올지에 대한 상상을 계속 한 사람들이, 정말로 큰 변화가 왔을 때 돈도 많이 벌고, 혁신을 주도했다. 비트코인이 화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은 개인적으로는 화폐가 될 가능성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른다. 또한, 비트코인이 실패한 실험으로 끝나더라도, 여기서 파생된 다른 토큰이나 블록체인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게 수년 후에 “두려움, 불확실성, 의구심 때문에 발생한 그런 멍청한 사기가 있었지”라면서 회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비트코인이 가져올 수 있는 신세계에 대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미 비트코인/블록체인 개발자 네트워크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과거에 비해 엄청난 속도로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규제 때문에 이런 실험조차 못 하고 있고, 유능한 인재들은 이제 한국을 떠나 스위스나 에스토니아 같은 곳으로 나가고 있는데, 이건 그 누구도 바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은, 내 주변에는 비트코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우리같이 비트코인을 아는 사람들은 전 세계 인구의 극소수일 것이다. 인터넷을 아는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렇게 일방적인 정보의 비대칭 우위를 가진 사람들이 혁신을 일으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트코인을 책으로만 배운 사람들이 비트코인이 화폐냐 아니냐를 논쟁하고 있을 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파고 들어가야 한다. 화폐가 되면 화폐인 거고, 아니면 아닌 거다. 그런데 이건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이로 인해 펼쳐질 신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보고, 준비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름다운 UX

App fatigue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넘쳐나는 앱 홍수 속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앱 피로도’이다. 나는 작년에 우리 투자사 앱을 제외한, 새로운 앱을 5개도 안 깔았다. 이 중 실제 회원가입을 한 앱은 2개밖에 안 된다. 솔직히 요샌 앱스토의 2백만 개 이상의 앱을(애플 앱스토) 상상만 해도 토할 거 같다. 그 정도로 앱 피로도가 심하다. 이제 웬만큼 잘 만들었고, 내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앱이 아니면, 설치도 안 하고, 설치했는데 사용할 때 조금이라도 사용자 경험(UX)이 후지면, 바로 삭제해버린다. 왜냐하면, 훨씬 더 잘 만든, 비슷한 앱이 수십 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나같이 극단적이진 않겠지만, 이게 현실이긴 하다. 지금 모바일 앱을 만드는 창업가라면, 정말로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UX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해도 성공할 확률은 5%도 안 되는데, 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제품을 만들어서 시장에 출시하는 건 앱스토의 공간낭비이자 피로도 테러다. 나는 만나는 모든 팀들한테 이 ‘아름다운 제품’에 대해 많이 강조하지만, 이걸 제대로 이해하는 창업가는 많지 않은 거 같다. 내가 작년에 만난 대부분 팀은 그냥 “good enough” 제품을 만들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태도로 사업을 하는데 – 스트롱 투자사 포함 – 한 5년 전에는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아름다운 제품이 없으면 비즈니스로 성장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사용하고 싶었던 한 제품이 가입과정에서 ‘닉네임’을 필수로 요구했는데, 나는 그냥 이 앱을 지워버렸다. 작은 키보드로 새로 가입하는 거 자체가 불편한데, 왜 굳이 닉네임을 필수로 요구할까? 만든 분들은 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이해가 안 갔다.

2018년도는 더 어렵다. 과거에는 B2B 앱을 만들면 B2C같이 아주 예쁘고 쿨한 UX는 필요 없고, 그냥 기능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했던 거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젠 B2B 제품도 고객을 계속 확보하고, 확보된 고객을 락인 하려면, 반드시 아름다운 UX를 갖춰야 한다. 신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들은 회사에서 사용하는 앱들도 회사 밖에서 사용하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 앱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사용하기 편하고, 보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어떤 B2B 스타트업의 UI/UX 담당자는 화면을 확대해서 픽셀 하나하나씩까지 맞춰 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 정도 장인 정신이 있어야지 일단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대충 만들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팀이 있다면, 딱 그만큼만 대충 될 것이고, 초경쟁 사회에서 ‘대충’은 실패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