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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요새 워낙 좋은 창업가와 회사가 많아져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투자 기준 자체가 높아진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제품도 없고, 과거 창업 경험이 전혀 없는 똑똑하고 패기 있는 팀에 자신있게 투자를 하곤 했다. 요새도 안 하고 있진 않지만, 과거만큼 많이, 그리고 빨리하진 못 한다. 우리도 투자할 수 있는 총알은 한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좋은 팀들이 시장에 있기 때문에, 선별적으로 투자를 잘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VC들이 하는 게 rejection일 것이다. 많은 회사를 만나지만, 대부분의 회사에는 투자를 못 한다. 우리도 숫자를 보니, 2020년도에 약 1,000개 정도의 초기기업을 검토하고 만났는데, 실제로 투자로 이어진 회사는 50개 정도이니, 5%에만 투자를 한 셈이다. 이 숫자는 VC마다 다르겠지만, 투자하는 회사보단 투자하지 않는 회사가 더 많은 건 공통사항일 것이다.

어떤 분들은 더 많은 회사를 만나고, 더 많은 회사에 투자할수록, 더 많은 경험이 쌓이기 때문에, 투자를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 반대의 현상을 요새 자주 경험한다. 투자사가 몇 개 안 될 땐, 어떻게 투자하면 좋은 회사를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강했는데, 오히려 이 회사들이 잘 안되고, 내가 한 판단이 대부분 틀렸다는걸 숫자로 본 후부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그래서 완전 초기 회사를 만나면, 미팅 후 우리 스트롱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면, “잘 모르겠네요””라는 말을 요샌 정말 많이 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말 이 팀이 하고 싶은걸 할 수 있을지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땐,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이분들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투자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단은 패스하고 고민해본다. 이후에 이분들이 다양한걸 시도하면서 제품이 다듬어지고, 시장에서 반응이 생기고, 뭔가 찾은 것 같으면, 그때 주로 투자한다. 처음 만났을 때보단 기업가치는 조금 높아져서 아쉽긴 하지만, 이때 투자하지 않고 더 지켜보면, 이 회사가 이 단계를 지나서 제품이 더 좋아지고, 시장에서의 인지도가 더 높아지면, 그땐 훨씬 더 비싸지고, 최악의 경우 투자자 경쟁에서 밀려서 투자를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완전 초기 단계와 시장에서 인지도가 생기는 단계의 중간 지점에서 투자하는 게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들의 홈런율이 가장 높아지는데, 그럼 그 미묘한 찰나의 타이밍과 기회를 어떻게 포착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요새 시장이 워낙 과열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이고, 이 찰나의 기회를 잘 포착해야지 투자할 수 있다. 안 그러면 이미 다른 투자자들이 투자한다.

이런 찰나의 기회를 잘 포착하려면, 일단 이분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이분들이 우리에게 연락을 자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스트롱이라는 VC의 첫인상이 창업가들에게 매우 좋아야지만, 이분들이 편안하게 우리에게 자주 연락한다. 그래서 모든 미팅이 중요하고, 매사에 진지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이분들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보내주면, 항상 진지하게 읽고, 좋은 피드백과 의견을 공유해줘야 한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굉장히 좋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너무 많은 회사를 만나기 때문에, 우리가 이 회사들에게 매번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요?” , “펀딩은 어떻게 진행되나요?”를 물어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반대로 창업가들이 우리에게 계속 정기적으로 연락해서 업데이트를 해줘야 하는 구도를 이렇게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이후엔, 회사가 투자자들에게 많은 내용을 공유하고,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그 업데이트를 잘 읽고, 분석하고, 생각하다가, 투자할 찰나의 기회가 보이면, 그땐 투자하면 된다. 이 시점에는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가 구축됐기 때문에, 서로가 만족하는 조건에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과정이 없어서, 나중에 후회하는 분들을 많이 봤다. 창업가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VC 였는데, 이후에는 전혀 연락이 없었고, 이 VC가 미디어를 통해서 회사가 엄청난 투자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되면, “아, 나 저 분 법인 만들기 전에 만났었는데, 그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엄청난걸 만들었네. 근데 왜 나한테는 다시 연락을 안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후회한다.

땀 냄새

우리 투자사 중 B2B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펀이라는 회사가 있다. 위펀의 대표 서비스인 스낵24로 더 잘 알려진 회사이다. 여기 김헌 대표님이 2019년 6월에 우리에게 콜드 이메일을 보냈고, 재미있는 서비스인 것 같아서 우리 사무실에서 첫 미팅을 했다. 그리고 조금 더 회사를 알아보고 싶어서 당시 가산 디지털 단지에 있었던 위펀의 창고형 사무실을 방문했다.

오퍼레이션을 어떻게 하는지 항상 궁금했었기 때문에 창고를 먼저 방문했는데, 그땐 시스템이 거의 없는 단순한 창고였다. 창고 안에 여러 가지 과자와 스낵이 빼곡히 저장되어 있고, 선반에도 내가 즐겨 먹는 과자들이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좁은 틈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위펀의 팀원분들이 보였다. 무슨 말인진 정확히 못 들었지만, 그 안에서 서로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작업 지시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과자를 픽업하고, 다시 진열하고, 포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체 보유한 트럭은 물건이 준비되면 배달하기 위해서 차고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너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서, 창고를 보러 온 우리가 미안할 정도였는데, 같은 건물에 있는 사무실에서 김헌 대표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올라가기 전에 존이랑 나랑 서로 보면서, “여긴 땀 냄새가 물씬 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실제로 땀 냄새가 났던 건 아니지만, 우리가 눈으로 본 상황이 뇌로 전달되면서 그려졌던 이미지는 땀 뻘뻘 날 정도로 열심히 발로 뛰어 다니는 젊고 열정적인 팀이었다. 엄청 세련되고 시스템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회사도 좋지만, 솔직히 우리같이 초기 단계에 투자하는 사람은 이런 땀 냄새 나는 팀을 엄청 좋아한다. 결국 이런 분들이 발로 뛰어다니면서 엄청난 비즈니스와 회사를 만들어가는 걸 직접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코너마켓이라는 우리 투자사에 대해서도 전에 포스팅 한 적이 있는데, 이 회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고객으로부터 수거한 유아복을 분류해서 저장하는 창고형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런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실은 그 어떤 향수보다도 더 향기로웠다.

지난주 포스팅에서 실제로 잘 돌아가는 회사 내부를 보면 정말 혼란스럽고 개판이라고 했는데, 위펀 내부 또한 정말 정신없이 돌아갔다.

이제 우리는 모든 팀원이 맨땅에 헤딩하고 있고, 개판 수준으로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그 팀을 볼 때 아주 짜릿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 팀에겐 땀 냄새가 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고 이 땀 냄새가 나는 팀에게 스트롱이 투자할 확률은 매우 높다.

오늘도 모두 땀 냄새 나는 바쁜 하루가 되길.

대리위안과 대리만족

작년에 내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작년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한참 어려울 때 많은 창업가들이 남한테 말하기 힘든 고민을 우리와는 아주 솔직하게, 계급장 다 떼고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우린 자진해서 이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했다. 우리와 이야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분들의 걱정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흡수하고, 우리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분들이 조금이라도 가져가서 힐링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늘은 이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나랑 존도 스트롱벤처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도 창업가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만나고, 오퍼레이션을 하는 스타트업을 창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도 우리 나름의 고충과 스트레스가 있다.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만큼의 고충과 스트레스는 아니지만 – 이건 확실하다 – 그래도, 아주 자주, 나도 잠도 못 자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몇 시간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럴 때 나에게도 힐링을 주는 의식과 방법은 바로 우리와 이야기를 하면서 힐링하는, 우리 창업가들과 이야기 하는 방법이다.

얼마 전에도 이런 고민이 매우 많아서 잠을 설쳤고, 하루 종일 집중도 안 되고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일단, 우리 투자사 대표와 만났는데, 이분이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 정말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오랜 기간 동안 고생하다가, 사업이 좀 되는가 싶었는데, 팬데믹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고, 회복의 기미가 이젠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발산하는 긍정적인 에너지, never give up 자세, 그리고 그날 나도 힘들었지만,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금세 나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고, 기분이 힐링되는걸 느꼈다. 실은 나도 힘들고, 대화 상대는 나보다 더 힘들면, 이건 정말 우울한 상황이 되는 게 정상인데, 그렇지 않고 이렇게 서로 힐링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이날 나는 대리 위안을 정말 많이 받았다.

또 다른 건 우리가 오래전에 1호 펀드에서 투자했던 타파스미디어가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된 소식이었다. 꽤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남들은 대박이니 잭폿이니, 화려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 엑싯 뒤에는 얼마나 많은 땀과 피, 그리고 고생이 있었는지 내가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엑싯한건 아니지만, 마치 내가 창업해서 성공한 것처럼 크게 기뻤고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이렇게 남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만족 할 수 있는 것도, 투자하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팀플레이

작년 팬데믹 기간에 우린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투자를 했고, 올해도 투자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펀드를 만들고 있다. VC의 파트너라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투자하기 위한 재원 마련인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투자자들끼리 항상 농담처럼 하는 말이, “돈 쓰는 건 쉬운데, 돈 모으는 건 너무 어렵고, 돈 버는 건 더 어렵다” 인데, 우리도 9년째 이 업을 하고 있고, 이번에 4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지만, 남을 설득하고 지갑을 열게 만들어서 돈을 받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 건, 첫 번째 펀드 만들때보단 조금씩, 아주 조금씩 수월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주말에 생각을 좀 해보니까 대략 다음과 같다.

일단, 우리도 9년 동안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운 좋게 꽤 좋은 회사에 투자를 많이 했다. 이 좋은 회사들이 진짜로 잘 될지, 그리고 우리에게 수익을 가져다줄지는, 아직 수년을 기다려야겠지만, 그래도 좋은 파트너들이 만든 VC가 9년 동안 계속 펀드를 만들어서, 꾸준히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신뢰를 형성하는 것 같다.

둘째는, 아직 엄청난 성과는 없지만, 그래도 그동안 우리에게도 꽤 크고 의미 있는 엑싯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고, 후속 투자를 받는 회사들의 밸류에이션도 커지면서 VC들의 성적인 IRR, 배수, DPI 등의 수치가 나쁘지 않게 나오고 있다. 우리도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팀을 비롯한 많은 정성적인 부분에 집중하지만, 결국엔 정량적인 지표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잘 안다. 비슷하게, 우리 같은 펀드에 출자하는 투자자들도(LP) 결국엔 펀드의 수익성과 지표를 보고 출자 결정을 한다.

마지막 이유는, 우리같이 한국 시장에 투자하기 위해서 외국 기관들에게 “돈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VC에 해당하는 사항인데, 한국 시장 자체가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해외 기관 투자자들과 미팅을 하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면서 첫 6개월 동안은 스트롱의 철학, 강점, 실적 등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도 못 했고, 한국 시장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했었다. 그만큼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알려지지 않았고, 과연 한국이라는 시장에 투자하는 VC에 출자하는 게 본인들에게 매력적인지 갸우뚱했었다. 그래서 이들과 만나기 위해서 출장을 가면, 항상 한국 시장, 한국의 유니콘,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슬라이드만 엄청나게 만들어서, 몇 시간 동안 주구장창 한국 시장에 대해 영업을 했었다. 그리고 더이상의 진전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요새 내가 해외 기관 투자자들과 이야기를 하면, 한국 시장에 대한 의구심 자체는 많이 없어졌다는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 오히려 어떤 LP들은 “한국 시장에 대해서는 우리도 공부 많이 했고, 매력적이라는걸 잘 아니까, 스트롱과 너랑 존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볼래?”라고 하는데, 몇 년 동안 “한국이 얼마나 매력적인 시장인데, 왜 이 사람들은 이걸 몰라줄까?”라는 스트레스를 달고 달았던 나에게는 단비와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어떤 분들과는 2년 동안 한국 시장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했고, 인제야 우리 펀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나에게는 풀기 쉽지 않은 숙제였는데, 이제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느냐 하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알토스벤처스의 한 킴 대표님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을 외국 기관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는걸, 한 킴 대표님은 거의 10년 전부터 하고 계셨고, 해외 기관 투자자들에게 한국이라는 시장을 처음 알리기 시작한 분이기도 하다. 한 킴 대표님이 한국이라는 시장으로 가는 비포장도로에 아스팔트를 깔아 줬고,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같은 후배들이 더 쉽게 펀딩을 받아서 한국의 좋은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후에 훨씬 더 많은 분의 노력이 있었다. 중기부, 그리고 한국벤처투자와 같은 모태펀드의 역할도 매우 컸고, 디캠프와 아산나눔재단과 같은 기관의 지원도 나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돈을 받아서, 좋은 회사를 발굴한 국내외 투자자들이 있었기에 유니콘 회사들이 시작 자체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선수들인데, 엄청난 기업을 무에서 만들어 한국이라는 시장을 글로벌 무대로 올려준 자랑스러운 한국의 창업가들이 있었기에 우리 같은 VC들이 더욱더 자랑스럽게 해외 LP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새 많은 분이 올림픽 보고 계실 텐데, 운동 경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모든 게 결국엔 좋은 분들과 이해관계자들의 팀플레이다.

레이저 집중

요새도 초등학교에서 이걸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해가 떠 있으면, 돋보기를 이용해서 빛을 모아서 종이를 태우는 실험을 했다. 빛 에너지, 빛의 굴절, 빛의 집중 등과 관련된 과학의 원리를 이런 재미있는 실험을 통해서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우주에 흩어져 있는 햇빛을 이렇게 한곳에 모으면 엄청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는 걸 배우고 어린 마음에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새 내가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집중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항상 예시로 드는 게 이 돋보기로 종이 태우기 이야기다. 이런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떤 분들이 보면 “라떼는 말이야…” 하는 꼰대 같을 수도 있지만, 사업에서의 집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기 때문에 계속 이 이야기를 한다.

한 가지에만 초집중하는 걸 미국인들은 laser focus라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만 잘하면 성공한다는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돈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초기 스타트업 대표들도 모두 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손발로 실행은 항상 잘못 하는 게 이 laser focus이기도 하다. 하나만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데, 왜 항상 창업가들은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할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자신을 너무 믿어서 자신감이 넘쳐흐르면 여러 가지를 다 하는 경우가 있고, 이와 반대로 자신감이 없어서, 어디서 매출이 나오고, 어떤 제품이 잘 될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하는 경우가 있다.

B2C, B2B, B2G,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등…가끔 이 모든 걸 다 하는 인원 10명 이하의 스타트업을 만난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이런 회사가 실은 꽤 많다. 하나만 죽어라 해도 잘 안되는 게 사업인데, 이렇게 많은 일을 굳이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항상 돌아오는 답변은 비슷하다.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다 똑같기 때문에 그렇게 회사의 자원을 많이 활용하는 게 아니라는 답을 많이 한다. 또는, 다른 일이긴 하지만, 회사의 핵심은 이 중 하나이고, 나머지는 그냥 자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핵심이 아닌 5가지 일에는 대표의 시간이나 에너지를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할애한다는 내용과 비슷한 답변을 많이 듣는다.

어떤 사업이 잘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많은 걸 하는 창업가의 딜레마는, 이렇게 사업을 하면 사업이 망할 때까지도 어떤 사업이 잘될지 전혀 감을 못 잡는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타이밍이나 트렌드에 따라서 이 중 한 가지가 잘 되는 시점이 오는데, 그러면 그 사업에 집중하고, 또 이게 잘 안되고 다른 사업이 잘 되는 것 같으면, 또 그쪽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계속 근근이 먹고 사는 걸 반복하는 사이클에 빠진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 하기 때문에, 그 하나의 분야에서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뾰족함을 절대로 만들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야의 최고가 되지 못해서, 계속 이것저것 벌리기만 하고, 절대로 회사는 발전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 머리로는 알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손과 발로 실행을 잘 못 하는 게 레이저 집중이다. 스타트업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단, 덜 해야지만 성공의 확률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집중의 돋보기가 혼란의 렌즈가 되지 않도록 모두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