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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LA 스타트업

한 2주 전에 LA에 오랜만에 잠깐 다녀왔다. 4년 전에 LA를 떠나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분기에 한 번은 LA에 출장을 가야겠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한국의 생활이 바빠서 지난 4년 동안 거의 못 갔는데, 이번에 다녀오면서 앞으로는 자주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는 한국과 미국, 이렇게 두 지역의 스타트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데, 미국에 있는 스타트업도 한인 또는 한인교포들이 창업한 회사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한 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많은 미국의 투자사는 한국에서 먼저 생긴 컨셉을 미국으로 가져와 로컬라이즈해서, LA를 발판으로 삼아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모델을 도입한 회사들이다. 여기 그 몇 개를 소개한다(알파벳순).

7TILL8: 이 스타트업은 진정한 LA스러운 회사이다. 서핑할 때 입는 웨트수트를 커스터마이즈해서 판매하는 회사인데, 기존 웨트수트가 가진 여러 가지 단점을 – 특히, 몸에 잘 맞지 않는 단점 – 보완한, 고가의 고급 웨트수트 D2C 회사이다. 회사의 이름도 재미있다. 전문 서퍼들이 가장 선호하는 파도를 탈 수 있는 시간이 저녁 7시 ~ 저녁 8시 사이인데, 여기서 7TILL8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KPOP Foods: 미국인들은 소스를 참 좋아한다. 그 어떤 식당을 가도, 그리고 그 어떤 음식을 주문해도, 거의 모든 음식에 다양한 소스를 뿌려서 먹는다. 대표적인 소스가 케첩, 머스터드, 타바스코, 마요네즈, 에이욜리, 스리라차 등인데 전 세계 소스 시장은 수십조 원 크기이다. KPOP Foods는 UCLA MBA를 졸업한 교포 창업가가 창업한, 한국 소스를 만들어서 D2C로 판매하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의 대표 소스는 고추장을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 한 KPOP Sauce, 그리고 마요네즈와 김치를 절묘하게 혼합한 Kimchi Mayo다. 미국인 친구가 있는 한국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할 텐데, 미국인들이 한국의 고추장과 쌈장을 정말 좋아한다. 존이랑 나는 항상 이 생각을 했었고, 누군가 고추장과 쌈장을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제대로 마케팅하고 유통하면 타바스코보다 더 큰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회사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백인들이 햄버거에 고추장을 뿌려 먹는 모습이 벌써 상상된다.

MAKKU: 한국을 대표하는 술은 소주이지만, 소주보다 전통이 깊은 한국의 술은 막걸리다. MAKKU의 창업가는 글로벌 대형 주류회사인 AB InBev의 신사업 팀에서 일하면서, 밀레니얼들이 저알콜 음료를 선호하는 트렌드를 파악하고, 한국의 막걸리를 미국 시장에 맞게 만들어서 판매해야겠다는 아이디어로 퇴사했다. 현재 뉴욕과 LA의 다양한 도매상, 소매상, 그리고 식당을 대상으로 Korean Creamy Beer인 막걸리를 열심히 홍보하면서 판매하고 있다. 일본의 사케가 글로벌 주류가 될 수 있다면, 한국의 막걸리는 이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고 우린 믿고 있다.

Millibatt: UCLA 박사들이 만든 회사인데, 초소형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들고 있는 high-tech 스타트업이다. Y Combinator 2017년 겨울 배치를 거쳤으며, 독보적인 기술과 지적재산권을 바탕으로 아직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초소형 배터리의 상용화에 도전하고 있다. 이 배터리가 얼마나 작은지는, 이 동영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More Labs: 이 회사와 이시선 대표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숙취해소 드링크를 미국에서 Morning Recovery라는 브랜드로 로컬라이즈해서 D2C로 판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More Labs의 비전은 다양한 생산성 드링크를 만들어서, 궁극적으로는 Red Bull과 같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숙취해소를 돕는 Morning Recovery 외에, 집중력을 향상하는 Liquid Focus, 수면을 도와주는 Dream Well, 그리고 수분을 보충해주는 Aqua+ 제품이 있다.

PAIRELA: 여성용 바지를 직접 만들어서 D2C로 판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의 여성 대표님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하는 여성들이 편안하지만, 고급스럽게 입을 수 있는 바지가 시장에 별로 없다는 점에 착안해서, PAIRE-LA를 창업했다. 여성을 위한 좋은 pair of pants를 LA에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PAIRE-LA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이 회사에 뉴욕의 아주 유명한 VC랑 같이 투자했는데, Theory와 같은 좋은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Polydrops: 건축학을 공부하러 온 한인 유학생 부부가 창업한 회사이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캠핑용 트레일러를 수작업해서 D2C로 판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트레일러도 상당히 쿨 한데, 이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는 더욱더 쿨하다. 미래에는 한 명의 고용주와 계약해서 일 하는 고용의 형태가 프리랜싱 형태의 gig 방식으로 바뀔 것이고, 집을 사서 한 곳에서 주거하는 주거문화 또한 바뀔 것이다. 이렇게 주거와 고용의 형태가 바뀌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는 노마드 생활을 하는 인구가 증가할 것인데, Polydrops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이동 주거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Rael: 한국에도 사무실이 있고, 한국 미디어에서도 워낙 많이 소개되어서 친숙한 이름이다. 한국의 다양한 여성용품을 미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fem-care 스타트업이며, 한국의 유기농 면 생리대를 아마존에서 판매하면서 시작했다. 현재 미국 전역의 Target에서 라엘의 제품을 구매할 수 있으며, 아마존에서 가장 잘 팔리는 유기농 면 생리대 중 하나이다. 이젠 다양한 여성용품을 제조해서 D2C로 판매하고 있다.

실은 LA 지역에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는 훨씬 더 많지만, 위 회사들은 우리가 비교적 최근에 투자했고,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컨셉으로 사업을 하는 대표적인 스타트업들이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결과를 내면서 미국과 전 세계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한 단계 상승했는데, 할리우드가 있는 LA보다 이 기운을 더 잘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이 좋은 기운과 스트롱이 만들고 있는 한국과 북미/LA 간의 다리를 잘 활용해서, 모두 좋은 글로벌 비즈니스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Moderate Venture Markets

얼마 전에 TechCrunch에서 “Moderate Sized Market(적당한 크기의 시장)”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스타트업 펀딩 규모나 빈도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특히 실리콘밸리와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고, 투자받는 규모도 어마무시한 벤처허브들이 있고, 이와 반대로 펀딩 딜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벤처사막이 있다. 그리고 이 중간 어딘가에, 엄청나진 않지만, 그래도 계속, 꾸준히, 적당한 규모의 펀딩이 일어나는 곳이 있는데, 이런 곳을 적당한 규모의 벤처시장이라고 한다.

동일한 개념을 국가에 적용하면, 1년에 1조 원 ~ 3조 원 사이의 펀딩이 일어나는 나라를 moderate sized market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시아의 인도네시아, 한국, 홍콩, 남미의 브라질, 콜롬비아, 유럽의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호주, 이렇게 10개 국가가 여기에 속한다. 실은, 모든 펀딩이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건 아니다. 우리도 지난 12개월 동안 30개가 넘는 투자를 했지만, 이 중 공개적으로 발표된 딜은 5개도 안 되기 때문에, 테크크런치에서 분석한 내용이 완벽할 순 없지만, 다양한 데이터를 오랫동안 수집하고 분석해왔기 때문에, 이 중간 규모 벤처 시장에서의 큰 트렌드는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한 거 같다.

일단, 이 시장의 벤처펀딩의 특징은, 기복이 심하다는 것이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전체펀딩규모가 연 300% 성장하거나, 100% 감소하면, 투자자들이 난리가 날 텐데, 이 적당한 규모의 시장에서 펀딩이 년 50% 이상 성장하거나 감소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이유는, 소수의 메가딜이 다수의 작은 딜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유니콘 고젝이 2018년에 $2.4B 투자를 받았는데, 그 해 인도네시아의 전체 펀딩은 $3.88B 였다. 그 다음 해2019년도는 이런 메가딜이 없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전체 펀딩은 $1.01B로 74% 대폭 하락했다. 미국에서 수치가 이렇게 크게 감소하면, 경기가 안 좋거나, 또는 투자환경이 급격하게 나빠진 게 그 이유일 텐데,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다른 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딜이 시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남미 콜롬비아도 마찬가지다. 2019년에 소프트뱅크가 콜롬비아의 쿠팡인 Rappi에 $1B을 투자했고, 이로 인해서 이 나라의 전체 펀딩이 급상승했는데, 아마도 올 해 Rappi가 다시 대규모 투자를 받지 않거나, 또는 다른 유니콘 회사가 등장하지 않으면, 콜롬비아의 펀딩은 급하락할 것이다.

한국의 데이터는 약간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 10개 국가 중 가장 변화폭이 작다(2018 | $1.97B에서 2019 | $2.13B로, 8% 증가). 그래도 소수의 대형 딜이 전체 펀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패턴은 비슷한 거 같다. 2018년 펀딩의 대부분은 쿠팡이 받은 투자일거 같고, 2019년은 위메프나 토스의 대규모 투자이지 않을까 싶다.

또 한가지 괄목할만한 트렌드는 이 시장의 펀딩이 성장하는 이유는, 딜 당 펀딩규모가 커져서이지, 딜의 개수가 증가해서는 아니다. 10개 국가 중 절반 이상의 펀딩이 년 50% 이상 성장했다고 하지만, 펀딩된 스타트업의 숫자를 보면 변화가 거의 없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9개국의 VC가 그들이 좋아하는 회사에 더욱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지, 더 많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의 스타트업은 2019년도에 총 $100B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는데, 여기서 조사한 10개국 전체 펀딩을 합쳐도 $12B이 안 되는 걸 보면, 년간 1조 원 ~ 3조 원 펀딩하는 시장의 성장 가능성은 아직 충분히 있다는 게 이 기사의 결론인 거 같다.

개똥철학

이 글 바로 전 포스팅에서 모든 건 바뀌지만, 사람은 안 바뀌기 때문에, 사람한테 투자하는 게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투자하면, 나중에 회사가 잘 안 되더라도 우리가 개인적으로 후회 없고 마음이 편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멋진 철학으로 들릴 수 있는데, 실은 이건 그냥 나만의 개똥철학이다. 왜냐하면, 이 철학으로 투자해도 우리는 50% 이상 항상 틀린다. 아니, 이보다 훨씬 더 많이 틀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기준으로 투자하는 건, 뭔가 대단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그냥 순전히 경험, 느낌,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 때문이라서, 이제 투자를 시작하는 분들한테 투자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권장은 더더욱 못 한다.

그래도 나는 VC들이야말로 모두 자기만의 명확한 개똥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없다면 결국 회사를 검토할 때마다, “이 회사에 투자했다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하지?” 또는 “이 회사에 투자 안 했는데, 잘 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소위 말하는 FOMO 때문에 투자하게 되는데 이건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VC는 여성 창업가들한테만 투자하는데, 나는 이게 최고의 전략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철학이기에 존중한다. 어떤 VC는 서울대 출신 창업가한테만 투자하는데, 이 또한 최고의 전략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그들 나름의 개똥철학이기에 존중한다. 내가 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주관과 줏대 없이 본인의 믿음을 기반으로 투자하지 않고 항상 남의 눈치만 보고 투자하는 전략이다. 이런 VC에게는 결국, “다른 VC는 누가 참여하나요?”가 가장 중요하고, 이들은 결국엔 묻어가는 투자만 하게 된다. 뭐, 이 묻어가는 투자도 나름의 철학이라고 하면 할 말 없긴 하지만.

나는 스트롱벤처스가 투자 못 하는 VC라는 욕은 기꺼이 들을 순 있어도, 스트롱은 색깔도 없고 철학도 없다는 욕은 참지 못 할 거 같다. 그만큼 투자하는 사람은 가치, 기준, 그리고 철학이 명확해야 한다. 그게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편한 투자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항상 받는 질문이 몇 가지가 있다. 아마도 다른 VC도 다르지 않을 텐데, 이 중에서도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회사에 투자할 때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일 듯 싶다. 실은 너무나 흔하고 광범위한 질문이라서, 그 답변도 너무나 흔하고 광범위한데, 내 대답 또한 너무 흔하고 뻔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다. 실은 이 답은 거의 교과서적인 답이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 듣는 사람은 분명히 또 뻔한 교과서 같은 말만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다른 투자자도 다 똑같이 사람이 중요하고, 투자할 때 사람보고 한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왜 어떤 투자자는 성공적인 투자를 하고, 어떤 투자자는 잘 못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거 가다. 하나는 그만큼 스타트업은 힘들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 내 경험에 의하면- 모두다 사람한테 투자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 투자를 집행할 때는 ‘사람’은 조금 뒷전으로 가고, 숫자에 우선순위가 매겨지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한테 매출, MAU, 성장, 시장과 같은 지표가 안 중요한 건 아니다. 당연히 우리도 이 모든 걸 본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단계에서는 숫자 보단 역시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내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투자했을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다. 우리가 지금까지 8년 동안 투자한 130개가 넘는 회사에 대한 데이터를 아직 제대로 정리해보진 못 했지만, 이 중 가장 잘됐던 회사는 투자 당시 좋은 제품, 시장, 성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곳 들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나도 투자 경험이 별로 없던지라, 그냥 “느낌이 좋은 곳”에 투자를 했었는데, 이 느낌을 좋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바로 대표이사와 팀이었다.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좀 비과학적이고 우습지만, 첫 인상이 좋아서 느낌이 좋았고, 더 오래 만날수록 이 느낌이 강해졌기 때문에 투자한 사례가 우리는 상당히 많다.

투자자들은 리스크와 불확실성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투자의 핵심은 이 두 가지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주식투자에 비해서 벤처투자는 이렇게 하는 게 조금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불확실성을 줄여서 리스크를 최소화 한 후에 투자를 하는 게 이 분야에도 적용이 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미래가 예측 가능하면, 이 두 가지 요소를 그나마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보는데, 뭔가를 예측할 수 있으려면 변동성이 작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변동성이 없는 건 없다. 모든 게 변한다. 스타트업의 제품도 회사의 상황에 따라서 변한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도, 투자 당시에 만들던 제품이 아닌 완전히 다른 제품을 만들고 운영하는 팀들도 많다. 시장도 항상 바뀌게 마련이다. 이건 우리가 절대로 컨트롤 할 수가 없다. 즉, 스타트업은 계속 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혼돈 속에서도 그나마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은 웬만하면 잘 안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리스크가 낮고, 불확실성이 가장 적은 투자이며, 그만큼 성공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한테 투자하면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회사가 잘 안 됐을 때 이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우리가 정말 좋아하고 믿는 창업가한테 투자를 했기 때문에, 솔직히 이 경우에는 밤잠을 많이 설치진 않는다. “우리가 정말 믿는 분한테 투자를 했는데, 운이 좋지 않아서 이번에는 잘 안 됐다.”라는 상대적으로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아 물론, 그렇다고 말 그대로 우리 투자사가 망했는데 마음이 편하다는건 아니다). 만약에 전적으로 시장, 제품, 그리고 숫자를 보고 투자했다면,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는 제각각 의견이 다른 것도 잘 안다. 우리 첫 번째 펀드 만들때 강북에서 주유소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는 현금부자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사람한테 투자한다고 하니까, 버럭 화를 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믿으면 안 되는 게 사람인데 젊은 친구가 뭘 몰라도 단단히 모른다는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이 분은 어떤 사람을 지금까지 만났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는것도 잘 안다. 물론, 이 분은 우리 펀드에 출자하지 않으셨고, 만약 이 분 돈을 받았더라도 상당히 골치 아팠을 거 같다.

그래도 나는 확신한다. 모든 건 바뀌지만, 사람은 안 바뀐다. 즉, 우린 가장 확실한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다.

I don’t know

해마다 정확한 통계를 내봐야겠다고 하면서 잘 못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일 년에 만나는 창업가/회사와의 미팅 횟수에 대한 통계이다. 미팅할 때마다 카운트를 하는 게 가장 정확한 방법인데, 어느 순간 이걸 깜박한다. 작년도 정확한 카운트를 하진 않았는데,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략 세어보면, 나는 한 400~500개 회사와 미팅을 한 것 같다. 즉, 매우 많은 사람을 만났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창업가들한테 가장 듣고 싶었지만, 가장 듣지 못 했던 말 중 하나가 바로 “잘 모르겠네요(I don’t know)” 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싫어한다. 남한테 항상 본인은 강하고, 일 잘하고, 모든 걸 다 안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습성이 있다. 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잘 안다. 특히, 창업가들은 자존감도 세고, 자존심도 세고, 일반 사람들보단 능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이나 무지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걸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나 같은 투자자한테는 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창업가의 나약함이 드러나고, 이러면 투자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나약한 창업가는 투자자들이 싫어한다. 안 그래도 힘든 스타트업 인생인데, 나약한 창업가는 절대로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실은 “잘 모르겠네요”는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용기 있고, 자신 있고, 강한 사람이 오히려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모르는 거에 대해서는 “I don’t know”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창업가들과 미팅할 때 내가 물어보는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을 가진 분들을 오히려 경계한다. 이런 창업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지를 인정하면 불이익을 당할 거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이런 성향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더욱더 두드러진다고 한다. 실은 나도 과거에는 모르는걸 아는 척 한 적이 상당히 많고, 요새도 가끔 그러기도 하지만, 남이 아무리 “저 인간은 투자한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더라도, 모르면 무조건 모른다고 인정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실은, 모르는 걸 안다고 거짓말하면 그때는 남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일시적으로 속으면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말 좋지 않은 결과가 만들어 진다.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면, 내가 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스스로 제한하고, 언젠가는 상대방이 내가 거짓말 한 걸 알게 되기 때문에 신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 개 마일로가 많이 아파서 얼마 전에 큰 수술을 했다. 강남에서 가장 크고, 비싸고, 잘 한다고 소문난 동물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수술 후 수의사로부터 수술경과와 마일로 몸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들을 수 있게 상담을 했다. 그런데 뭔가 잘 모르고, 내가 물어보는 대답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계속 주지 못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에 우리는 동물병원을 바꿨는데, 어떤 조사에 의하면 의사들이야 말로 자기 자신과 환자들에게 무지를 고백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의사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자신의 능력과 권위, 그리고 전문성에 위협이 된다고 느낀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만약에 이 수의사가 나한테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했다면, 나는 오히려 계속 같은 동물병원에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영어에서 말하기 가장 어려운 세 단어는 “I love you”가 아니다. 실은 그 세 단어는 “I don’t know”라고 한다. 그만큼 자신의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건 힘들고, 어떤 사람들한테는 고층 건물에서 뛰어 내릴 때 보다 더 큰 공포심을 갖게 하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가장 중요한 건, 배워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그 인정의 시작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