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문제의 깊이와 너비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창업하기 전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설문조사이다. 우리 투자사 모아폼과 같은 전문 서베이 제품을 사용하거나, 간단한 구글폼을 이용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하게 되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다. 내가 만난 많은 창업가에게 혹시 제품을 만들기 전에 잠재 고객과 이야기하거나, 시장 조사를 해봤냐고 물어보면, 이런 설문 결과를 보여준다. 대부분 현재 시장에 있는 제품의 더 편한 대체 솔루션이 있다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바꿀 의향이 있거나, 이런 게 나오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돈을 지불하고 사용해볼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설문 결과를 보여준다.

일단 설문 조사는 아이디어를 검증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설문을 작성할 때, 작성자는 본인이 원하는 답변을 얻기 위해 설문을 만든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바가 있고, 설문 결과에 대해서 본인은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고,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잠재 고객의 입과 손가락에서 나온 결과는 믿으면 안 된다. 뭐, 그래도 아예 이런 설문 조사를 하지 않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해보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80% 이상의 설문 응답자들이 우리 제품이 나오면 사용할 의향이 매우 크다고 했는데, 막상 출시하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 많던 잠재 고객은 어디 갔고, 왜 아무도 설문에서 말한 대로 우리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까?

일단, 설문 조사는 시장과 고객의 진짜 지불용의를 반영하지 않는다. 입을 여는 거와 지갑을 여는 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문조사를 정말 제대로 했고, 여기서 나온 80%라는 결과가 진짜인데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포스팅의 주제인,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깊이와 너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설문 대상의 80%가 현재 시장에 있는 솔루션이 불편하다고 하면, 뭔가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는 상당히 넓은 문제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제품보다 더 뛰어난 대체 솔루션을 제공했는데도 불편함을 호소하던 80%의 고객이 더 빠르고, 더 좋고, 더 싼 우리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이 문제가 넓긴 하지만, 깊진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즉,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기엔 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완전히 새로운 제품으로 갈아탈 정도로 불편하진 않다는 뜻이다. 문제가 더 깊어야지만, 대부분의 고객이 지갑을 열고, 기꺼이 돈을 쓸 지불 의사가 생기는데, 이렇게 애매하게 불편하면, 우리가 바라던 반응이 안 일어날지도 모른다. 새로운 제품의 switching cost보다 혜택이 (월등히) 더 커야 하는데, 문제가 깊지 않고 넓기만 하면, 혜택보단 switching cost가 더 크고, 결과적으로는, 좋은 대체 솔루션을 제공하는 게 어렵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신용카드를 긁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게 이 포스팅에서 말하는 문제의 너비와 깊이이다. 카드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 카드 수수료, 플라스틱이 환경이 미치는 영향, 카드가 안되는 상점, 마그네틱 손상 등의 플라스틱 신용카드의 명확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결제 솔루션을 많은 창업가들이 연구한다. 그리고 이미 시장에 모바일 결제 등의 다양한 대체 솔루션이 존재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갑에서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서 단말기에 긁는다. 왜냐하면,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신용카드 기술이 좋고, 인프라가 너무 잘 만들어져서, 카드를 긁는 것만큼 편한 결제 방법이 없다.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신용카드의 문제점이 당연히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인정해서, 이게 굉장히 넓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모바일 결제와 같은 대체 방법으로 갈아탈 정도로 그 문제가 깊진 않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당장 대체할 수 있는 솔루션이 한국에서 대중화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건 넓고 깊은 시장의 문제를 파악해서 이걸 공략하는 건데, 이런 시장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문제 자체의 너비는 적당하지만, 굉장히 깊은 걸 선호하는 편이다.

The Long Game

Marques Brownlee라는 20대 유튜버/인플루언서가 있다. 이 친구의 취미는 전자제품을 리뷰하는 건데, 유튜브 초기 시절부터 리뷰 동영상을 꾸준히 올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업계에서 굉장히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크리에이터가 됐다.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글의 부사장이 이 친구에 대해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테크 리뷰어라고 한 걸 보면, 얼마나 이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지 알 수 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자제품 리뷰 동영상을 업로딩 했냐 하면, 2009년부터 했으니까, 12년 동안이다.

얼마 전에 이분의 인터뷰를 봤는데, 크리에이터 경제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미래의 유튜버들이 보면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 중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았던 건 꾸준함에 대한 부분이다. 너도 나도 “폭발적인 성장” , “제이 커브” , “유니콘” , “블리츠스케일링”과 같은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우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마르케스가 현재 1,400만 명의 팔로워가 있는데, 아마 대부분 1,400만이라는 숫자에만 관심을 두지, 이 정도의 팔로워를 확보하는데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건 간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공개한 1,400만 팔로워의 비법이 있었는데, 이건 바로 꾸준함이었다. 취미생활이 이젠 작은 기업이 됐는데, 큰 위기와 기복 없이 12년 동안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본인은 정작 순간적인 제이커브나 폭발적인 성장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가 100번째 리뷰 동영상을 올렸을 때 74명이 그의 채널을 팔로우했고, 이후에도 굉장히 더디게 성장을 했다고 한다. 요샌 웬만한 유튜버들은 팔로워 수가 이렇게 느리게 올라가면, 진작 포기하고 동영상을 더는 안 올렸을 것 같은데, 마르케스는 그냥 본인이 하고 싶고, 나름 잘한다고 생각하는 리뷰 동영상을 계속 꾸준히 올렸다고 한다.

당시엔 크리에이터와 인플루언서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시기였고, 동영상을 유튜브에 정기적으로 올리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서, 솔직히 74명의 팔로워가 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고, 74명이나 내가 만든 동영상에 관심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튜버 초기 시절에 만약에 대박을 경험했다면, 아마도 오늘의 마르케스는 없었을 거라고 한다. 그 이후에는 이 대박, 그리고 오로지 대박만을 위해 동영상을 만들 텐데, 이건 실력보단 운이 크게 작용을 하므로 자주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아서 대박 난 건데, 이후에 대박을 노리고 사업을 하면, 그렇게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계속 실망할 것이고,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낄 것이고, 그러면 꾸준함과는 멀어지고,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두 다 인생 한방, 인생 역전, 욜로 등을 외치는 혼란스러운 한방 세상에 단비 같은 통찰력이다.

창업가의 미안함

지난 9년 동안 우린 꽤 많은 회사에 투자했다. 이미 투자사 수가 150개를 훌쩍 넘었는데, 정확한 숫자를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워낙 초기 회사에 투자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이 중 많은 회사가 폐업한다. 스타트업의 실패율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연구결과가 있지만, 통상적으로 창업 1년 안으로 10% 정도가 망하고, 2년~5년 안에 70% 정도가 망한다고 한다. 우리같이 초기에 투자하면, 이 실패율은 더욱더 올라간다.

이런 생리를 잘 알고, 매일 이런 사례를 접하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가 폐업한다고 해도 우린 그렇게 놀라진 않는다. 물론, 안타깝고, 우리도 손실 처리를 해야 하는 거에 대한 걱정은 당연히 있지만, 실패와 폐업 자체는 투자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젠 VC 초년 시절같이 스트레스받고, 잠을 설치진 않는다.

하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는 상황은 다를 수가 있다. 우린 이미 이 경험을 9년 동안 많이 했기 때문에 면역력이 어느 정도 생겼지만, 대부분의 창업가들에게는 신체의 일부와 같은 스타트업의 폐업은 창업 인생 최초의 실패이고, 최초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아프다. 창업하고 스타트업 운영하는 거 자체가 큰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의 연속인데, 이게 망하면 그 스트레스는 10배가 된다는 이야기를 우리 투자사 대표들에게 자주 들어서 나도 이게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는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투자사 대표랑 이 힘든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고생했고, 이분도 스스로 잘하고, 웬만하면 본인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나한테 어느 날 할 이야기가 있다고 연락 왔을 때, 직감적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 미팅을 했다. 역시, 그동안 정말 모든 걸 다 해봤지만, 회사는 성장하지 못했고, 펀딩도 안 됐고, 이젠 이 상태에서는 본인이 제대로 된 생활을 못 하기 때문에 그만해야겠다는 말을 했다.

위에서 말 한대로, 내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그 말을 하면서 울먹거리는 걸 보니까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안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순간적으로 나도 속으로 울컥했다.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실은, 우리한테 미안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투자금을 날렸다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이, 몇 년 동안 본인의 인생을 걸고 한 스타트업이 망했을 때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더 무겁게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다.

투자를 받고, 이 돈을 헛되게 쓰지 않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사업이 잘 안 됐으면, 창업가들이 투자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는 창업가와 비즈니스를 보고 자신 있게 투자한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한테 투자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투자하고 싶어서 돈을 투입했으면, 사업이 잘 안돼서 회사가 망해도 우린 별로 할 말은 없다. 이건 창업가의 잘못도 아니고, 투자자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실패 확률이 훨씬 높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창업가도 최선을 다했고, 투자자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면, 실은 그 누구도 미안할 필요는 없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여기에서의 값진 배움을 기억하고, 다시 사업을 하면 같은 실수를 최대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한다(그런데, 내 경험에 의하면, 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긴 한다. 이 또한 스타트업의 일상이며, 인생이다).

어려운 길

4월 초중반은 문서작업이 좀 많아서 쓸데없이 바빴는데, 이후에 스스로에게 휴식을 조금 주기로 했다. 지난주 목, 금은 일부러 미팅을 많이 안 잡아서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도 있었고,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책도 읽고 기사도 읽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 건물 주변을 배회하면서, 그동안 폰만 보면서 걷느라 놓쳤던 주변의 환경이나 건물을 보면서 스스로 마음챙김을 조금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했던 미팅이 생각났다. 몇 년 전에 투자한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인데, 힘든 사업을 하다가 잘 안돼서 회사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갈림길에 왔다. 창업 초기부터 나는 봤던 팀이고, 영혼을 갈아 넣으면서 모든 걸 시도했던 그 역사를 잘 알기에, 여기서 사업을 접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해봤는데도 잘 안되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폐업하고 그냥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이 분들과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자금 손실이 발생하겠지만,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잘 안 됐기 때문에 전혀 아깝거나 아쉽다는 생각은 안 했다. 오히려, 워낙 좋은 개발력을 가진 분들이라서 나는 스트롱의 다른 투자사에 인수되는 옵션을 물색해보거나, 다른 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 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냥 본인들은 당분간 다른 일 하면서 현금을 만들고, 계속 버티면서 이 사업을 어떻게든 계속 해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무 오랫동안 고생한 분들이라서 완전히 번아웃 됐다고 생각했기에 의지와 똥고집만 너무 강한 게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계속하겠다고 하니, 나도 그냥 그 결정을 존중하고 계속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가끔 생존 신고 및 안부 인사만 하다가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정말 버티다 보니 그동안 좋은 일이 있었고, 회사는 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그리고 며칠 전에 정말 오랜만에 이 분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솔직히 사업 이야기 보다는, 그때 그렇게 힘들고 돈도 없었는데, 계속 이 사업을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도대체 그 순간 머리와 가슴 속에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지, 내가 봐도 무모한 그런 결정을 어떻게, 왜 했는지, 뭐 이런걸 물어봤다.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많아서 여기서 모든 걸 공개할 순 없지만, 그냥 어차피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조금만 더 버티다 보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버티다 보니, 정말로 뭔가 좋은 일이 생기더라가 우리 미팅의 결론이었다.

솔직히, 조금만 버티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비현실적인 무모한 생각이다. 내가 이 분들 입장에 있었다면, 나는 그냥 회사 문 닫고 다른 일을 했을 것 같다. 이렇게 근거없는 믿음으로 계속 버티다가, 완전히 망해서 다시는 재기 못 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래서 다행이지만, 어쨌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미팅 한 날 종일 했다.

이 날의 미팅은, 우리가 매일 만나고,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아주 유니크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이 인생을 사는 목적 중 하나는 내 주변의 다른 인간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칭찬받고 인정 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걸 해야 한다. 창업가들은 이걸 완전히 부인하면서,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좋고, 본인이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살면 남에게 인정 받기 힘들고, 칭찬받기 힘들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투자한 많은 창업가들이 가족들한테도 손가락질받고 욕먹으면서 창업을 했을까.

어떻게 보면 이런 고통, 스트레스, 힘듦을 즐기는 창업가들은 변태 같은 인간들이다. 이런 인간들을 좋아하고, 이들에게 투자하는 나 또한 변태 같은 놈이다. 그래도 좋다.

오늘도 남들이 틀렸고, 내가 맞는다는 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는 변태 같은 하루가 되길.

끈질긴 아마존

오늘은 누구나 알고 있는 아마존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아마존 코리아가 있긴 하고, 한국에도 AWS를 담당하는 팀은 있지만, 쿠팡과 같은 아마존 이커머스 조직은 현재 한국에 없는 거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아마존은 큰 브랜드가 되었지만, 실제 아마존의 B2C 서비스를 경험한 한국인은 아직은 별로 없다. 쿠팡이 아마존을 벤치마킹하고 여러 면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래도 쿠팡보다 아마존이 하는 일과 제공하는 서비스는 훨씬 다양하다.

작년 한 해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한 서비스도 아마존이다. 백화점도 못 가고, 슈퍼도 못 가니까 대부분 아마존에서 필요한 물건을 주문했고, 갑자기 재택근무 체제로 돌입하면서 대부분의 기업이 AWS 인프라 위에 만들어진 원격 미팅 솔루션을 사용했고, 학교도 못 간 심심한 애들을 바쁘게 했던 게임이나 콘텐츠 스트리밍 또한 아마존의 AWS 인프라 위에서 운영됐을 것이다.

얼마 전에 Stratechery의 아마존 관련된 The Relentless Jeff Bezos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아마존이라는 회사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tech CEO로 알려진 제프 베조스는 보면 볼수록 대단한 점들이 발견되는 것 같다. 솔직히 아마존이나 쿠팡을 이용해보면, 물건을 사는 게 너무 쉽게 느껴진다. 상품을 고르고, 돈을 내고, 문 앞에서 배송받고, 그리고 물건이 잘 못 왔다면 다시 반품하고 환불받는 프로세스까지, 이 모든 걸 아마존은 너무 쉽게 만들어놨다. 이런 고객의 편리함을 가능케 하는 뒷단의 모든 시스템을 아마존이 만들었고, 이 시스템은 매일매일 더 좋아지고 있다. 우리도 이커머스 회사에 투자를 많이 했고, 초창기에 창업가들이 직접 물건을 포장하고, 고객 응대하는 걸 하도 많이 봤기 때문에, 이 사업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어려운지 잘 알지만, 쿠팡이나 아마존을 사용하다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왜 우리 투자사들은 잘 못 하지?”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가끔은 스스로 한다. 그만큼 아마존이 대단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많은 창업가가 본인이 어떤 불편한 경험을 한 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창업한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product-market fit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큰 사업을 만들어낸다. 아마존은 시작부터 약간 달랐는데, 베조스는 솔루션을 먼저 정의하고, 이 솔루션이 해결할만한 가장 큰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인터넷으로 책을 판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걸 그냥 기사에서 읽으면, 그런가 보다 생각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굉장히 참신하고 대담한 접근 방법인 것 같다. 1994년도에 웹 사용량이 해마다 23,000%씩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 현상을 보고 베조스는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인터넷이 결국엔 솔루션인데, 이 솔루션이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고, 결국 온라인으로 물건을 판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오프라인에서 물건을 팔면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고,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한데, 이 비용 효율적이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솔루션이 인터넷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 많은 카테고리 중 왜 책을 선택했을까? 당시 전 세계에 300만 권 이상의 책이 존재했는데, 단일 카테고리 중 가장 숫자가 높았기 때문에 책을 선택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숫자가 높았던 카테고리가 음악인데, 당시엔 스트리밍이라는 게 없고 CD로 음악을 들었는데, 전 세계에 음악 CD가 30만 개 있었으니, 책이 월등하게 종류가 많았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진열하고 판매했던 서적이 당시 175,000권이었으니, 인터넷이야말로 이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솔루션이라고 베조스는 결론 내렸다.

그 이후에는 모두 잘 아는 것처럼, 아마존은 모든 걸 파는 Everything Store로 변화하면서 공룡으로 성장했지만, 베조스에게 계속 고민거리를 줬던 건, 아마존의 비즈니스 모델은 물리적인 공간 문제를 인터넷이 해결해줬지만, 인터넷과 소프트웨어가 주는 또 다른 엄청난 장점인 제로 한계 비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물건을 계속 구매해야 하고, 창고를 만들어야 하고, 물류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베조스가 원하는 진정한 제로한계비용의 tech economics 전략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물론, 볼륨이 커지면 이 비용이 계속 줄어들지만, 그래도 한계 비용을 0으로 만드는 건 힘들어 보였다.

이 맥락에서 봤을 때, AWS는 베조스의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비즈니스이다. 단기적으로는 아마존이 돈을 잃으면서 서버를 싸게 제공하고, 고객들을 lock-in 하는데, 결국엔 한계비용은 0으로 수렴하면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비즈니스로 성장하는 모델이었다. 초기에 아마존은 AWS에 대한 숫자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10년 만에 실적을 발표할 땐, 당시 순이익률이 거의 20%였다. 참고로, 2020년 4사분기 AWS의 매출은 $12.7 billion이었고, 순이익은 3.6 billion으로 순이익률이 거의 30%로 성장했다.

아마존은 계속 이런 식으로 인터넷이라는 솔루션이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찾아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이 기사를 읽어보니, 이 회사와 베조스에 대한 더욱더 큰 경외심이 생겼고, 우리 투자사들도 엄청 분발해야겠다는 긴장을 한 번 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베조스의 고객에 대한 끈질긴(relentless) 집착과 열정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Relentless.com을 치면 Amazon.com으로 전송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