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들

우리는 행사를 많이 하는 VC는 아니다. 적은 인력으로 많은 회사에 투자하기 때문에, 우리의 core 기능인 ‘투자’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는 대부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그래도 해야 하는 행사가 몇 개 있는데, 이 중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는 AGM이라는 행사이다. Annual General Meeting의 약자인데, 일반 기업이라면 주주총회이고, 우리 같은 VC에겐 조합원총회라고 한다. 1년에 한 번 스트롱 펀드에 출자해주신 고마운 LP 분들을 모시고, 1년 동안 스트롱이 한 일, 배운 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도 모시고 같이 이야기하는 행사인데, 스트롱의 AGM은 딱딱한 주주총회가 아니라 굉장히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총회이다.

올해 우리는 10월 18일, 19일, 이렇게 이틀 동안 AGM을 개최했다. 적은 인력으로 100명 이상 참석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고, 이번에도 스트롱 동료분들이 두 달 정도 엄청나게 고생 많으셨다. 메인 행사는 파트너인 존과 나의 간략한 발표로 시작했는데, 이번에 존은 한국 시장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고, 나는 그동안 스트롱의 활약을 숫자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런 발표 자료를 만드는데 별로 소질이 없어서 며칠 동안 이런저런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팀원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발표 자료를 만들 때 드는 기분은 마치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숙제하는 느낌인데, 이번에는 스트롱의 과거 10년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나름 재미있고 신선했다. 나도 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됐고, 그동안 우리가 했던 일들에 대해서 감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용이 막상 데이터를 보니까 틀린 것도 있었고, 더 자랑해도 되는 것도 있었다.

실제 AGM에는 100명 이상의 LP와 잠재 LP 분들이 참석했는데, 무대에서 발표하면서 이분들을 보니까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들었고, 아주 짧았지만, 우리가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스트롱을 믿어줬던 LP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대에서는 계속 발표를 해야 해서, 이 순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행사가 다 끝나고 집에서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다시 이 순간을 기억에서 소환했다.

2012년 8월 존과 내가 스트롱을 만들기로 결정했을 땐, 우리는 투자금을 모으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는지, VC 펀딩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실제로 첫 6개월 동안 단 한 푼도 못 모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실은 포기하려고 했는데, 몇 달만 더 해보고, 그래도 한 푼도 못 모으면 그냥 접자고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적같이 며칠 후에 우리의 은인이 나타났다. 존이 전 직장에서 알게 된 아르메니아 출신의 부자와 –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rich한 부자이기도 한 – 우린 꽤 친해졌는데, 이분들은 캘리포니아의 Fresno라는 지역에서 호두와 아몬드 같은 농산물을 엄청 크게 유통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분들은 tech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당시 우리 지인 중 가장 부자 중 하나였지만, 일부러 돈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펀딩이 안 돼서, 그 아들에게 우리가 하고 싶은 걸 잘 설명했고, 우리 처녀 펀드에 출자 좀 해달라고 사정했다(정말로 거지같이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같이 아주 흔쾌히 오케이했고, 본인이 출자하는 만큼 아버지도 설득해서 같이 하겠다고 했다. 우리 둘을 그동안 지켜봤는데 잘할 것 같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기쁘게 투자하겠다는 정말 고마운 말과 함께.

이분들의 이름은 Leon(아버지)과 Ago(아들)이고, 스트롱의 첫 번째 LP들이다. 2012년 스트롱 1호 펀드에 이 두 분이 너무나도 고맙게 첫 번째 출자를 했고, 이후 2호, 3호, 4호 펀드에 모두 출자했다(우리 때문에 돈도 많이 벌었다). 이번에 AGM을 준비하면서 오래전 일들을 떠올렸고, 우리의 시작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봤는데, 이들은 우리의 은인들이었다. 이 고마운 캘리포니아 농산물 유통업자들의 믿음과 첫 번째 출자가 없었다면, 스트롱도 지금 없을 텐데, 행사가 다 끝나고 혼자 맥주를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새삼 고마운 느낌이 벅차게 올라왔다.

이번에 이 두 분은 서울 행사까지 날라오진 못 했지만, 앞으로 우리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마운 은인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Cheers and thanks to Leon and Ago.

준비되지 않은 마케팅

나는 아직도 최고의 제품이 최고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걸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마케팅에 돈을 쓰는 게 정말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요샌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고, 그래도 어느 정도의 마케팅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유료 마케팅의 기본은 준비된 제품이다. 준비되지 않은 제품을 기반으로 유료 마케팅을 하는 건 여전히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몇 번 공유한 적이 있는데, 나도 준비되지 않은 제품으로 유료 마케팅을 시도했다가 큰 배움을 얻은 경험이 있다. 뮤직쉐이크 시절, 2008년 당시에 가장 잘나가는 유튜버였던 Kevjumba에게 꽤 많은 돈을 주고 뮤직쉐이크가 들어간 광고성 동영상을 하나 만들었다 (1:43에 뮤직쉐이크가 잠깐 나오고, 백그라운드뮤직도 뮤직쉐이크로 만든 곡이다). 워낙 인기가 많았던 친구라서 역시 영상이 업로딩 된 후에 엄청나게 많이 조회됐고 – 참고로, 당시엔 10만 번 이상만 조회돼도 엄청난 조회수였다 – 이를 통해서 뮤직쉐이크로 유입된 트래픽은 역대급이었다. 구글 애널리틱스를 보면 그날 갑자기 웹사이트 트래픽이 수직으로 상승했는데, 말로만 들었던 J 커브를 그때 경험했다.

이 J 커브가 나에게 일어나는걸 직접 경험해보니, 정말로 환상적이었는데, 아쉽게도 그 약발은 며칠 못 갔다. 한 사흘 후에는 놀랍고 신기하게도 트래픽이 J 커브가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왔다. 물론, 트래픽이 일시적인 마케팅으로 증가하면, 언젠가는 약발이 떨어지고, 그 이후엔 다시 감소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J 커브가 시작하기 전보단 조금이라도 더 늘어야 했는데, 이 경우에는 조금 더 늘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이전 수치로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상당히 실망스럽고, 당시 우리에겐 부담스러운 비용을 내면서 했던 야심 찬 마케팅이었는데,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원인을 파악해보니, 결국엔 우리 제품이 아직 준비가 덜 됐던 것이었다. 이 동영상을 통해서 대중이 뮤직쉐이크를 발견했고, 여기까진 너무 좋았지만, 사용성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완벽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들이 다시 이탈했고, 결국엔 야심 차게 준비한 유료 마케팅은 기대했던 결과를 전혀 만들지 못했다.

우리 모두 사용자로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기발한 광고를 보고 내가 모르던 제품을 알게 됐고, 기대를 갖고 제품을 설치하고 사용해봤는데, 기대 이하여서 그냥 다시 서비스를 탈퇴하거나 앱을 지웠던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결국엔 준비되지 않은 제품의 문제이다.

돈을 써서 마케팅하면 사용자와 트래픽은 무조건 상승하고, 돈의 단위에 따라서 상승의 기울기가 거의 1대 1로 비례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트래픽이 그 이후에 얼마큼 유지되느냐인데, 마케팅이 종료되면 트래픽이 어느 정도 떨어지지만, 준비된 제품이라면 마케팅 전 대비 마케팅 후의 트래픽과 사용자 수는 상당히 증가했을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제품이라면 마케팅 전과 마케팅 후의 트래픽과 사용자 수는 동일할 것이다. 결국엔 돈만 날린 것이다.

마케팅 전과 마케팅 후의 트래픽이 동일하다면, 제품이 준비가 안 된 거라서 제품 개발을 더 잘해야 한다. 결론은, 아무리 기발한 마케팅을 해도, 역시 허접한 제품으로는 그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

오늘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본다.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결국엔 우리 회사가 돈을 어떻게 벌지에 대한 주제이자, 생존에 대한 주제이다. 초기 스타트업이 안 망하고 계속 사업을 할 수 있게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가 외부 투자를 받는 인위적인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회사에 자금을 조달하는 유기적인 방법이다. 당연히 후자의 방법이 가장 좋지만, 무에서 시작하는 회사가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로 외부에서 자금을 투자 받아야 하는데, 되도록 외부 자금을 사용하는 기간을 최소화하면서 내부에서 돈을 버는 시점을 앞당기면 좋다. 물론, 돈 보다는 성장이 중요한 특정 산업이나 서비스도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분석도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너무나 다양하게 할 수 있는데, 오늘은 B2B랑 B2C의 측면에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일단 대부분의 B2B 사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매우 간단한데, 이 간담 명료함이 B2B 사업의 매력이다. B2B 스타트업은 핵심 제품을 기업고객에게 판매하고, 오롯이 이 제품을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매우 간단하고 정직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물론, 여기서 여러 가지 다른 돈 버는 모델이 나올 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드는 제품에서 파생되는 모델이다. 유지보수, 특정 기능 추가, 특정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커스터마이징, 제품을 도입하기 위한 컨설팅 매출 등이 그런 파생 비즈니스 모델이다. 기업 고객을 위한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걸리고, 만든 후에도 영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한 번 팔기 시작하면 꾸준한 매출이 발생하고, 이 시점부턴 우리가 만든 제품으로 돈을 벌어서 회사에 자금을 조달할 수가 있다.

B2C 사업도 B2B와 같이 스타트업이 만드는 핵심 제품을 일반 사용자에게 판매하고, 이 제품을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모델이 있다. 사진 필터 앱, 캘린더 앱, 명상 앱 등 너무나 많은 앱들이 주로 프리미엄(freemium) 모델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공짜이지만, 더 많은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B2C 앱은 일반 소비자에게 과금을 하므로, 많은 사용료를 받진 못한다. $0.99, $1.99, 많아 봤자 $14.99 정도를 과금하고 있는데, 이런 비즈니스 모델로는 엄청나게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지 않으면 스타트업에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만큼의 매출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B2C 스타트업이 핵심 제품으로 돈을 벌기보단, 이를 통해서 얻은 트래픽, 그리고 트래픽을 통해서 얻은 고객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본격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다. 우리가 매일 수십, 수백 번씩 사용하는 카카오톡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카카오의 첫 번째자, 아직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본 제품은 메신저인 카카오톡인데, 카카오톡은 유료 서비스가 아니다. 누구나 다 무료로 카카오톡을 통해서 친구, 동료, 그리고 지인과 대화할 수 있다. 카카오는 핵심 제품인 카카오톡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카톡을 통해서 얻은 트래픽과 고객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다양한 수익원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엄청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있다. 네이버도 비슷하다. 네이버의 핵심 제품은 검색엔진인데, 검색엔진은 무료다. 네이버는 메인 제품을 통해서 얻은 트래픽과 데이터를 활용해서 검색광고라는 엄청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

그럼 B2B 사업같이 핵심 제품 자체가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게 더 바람직할까, 아니면 많은 B2C 사업같이 핵심 제품 자체가 아닌, 이를 활용한 다양한 부수적인 제품이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게 바람직한 건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하지만, 핵심 제품 기반이든 부수적인 제품 기반이든, 언젠가는 외부 자본의 유입 없이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서 회사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견고한 비즈니스 모델을 확보하는 건 모든 스타트업이 풀어야 하는 지상과제이다. 결국엔, 이게 안 되면 계속 힘들게 외부 투자만 받다가 그냥 망하는 것이다.

피치 덱 분석

얼마 전에 피치 덱이라는 글에서 투자받기 위한 자료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몇 자 적어봤는데, 꽤 많은 분들이 좋은 피드백을 제공했고, 좋은 질문도 개인적으로 많이 해 줬다. 그런데 그 글 쓴지 며칠 후에 TechCrunch에서 이런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한국도 요샌 가끔 Docsend로 피치 덱을 보내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미국은 꽤 많은 분들이 Docsend를 통해서 덱을 보낸다. 이렇게 하면 누가 자료를 봤고, 어디까지 봤고, 어떤 페이지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는지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드롭박스가 이 회사를 작년에 인수했고, Dropbox Docsend 팀이 수많은 피치 덱과 이 덱을 읽는 VC들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한 내용이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고 이 팀을 만날지 말지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줄고 있다. 놀랍게도 3분 이상 안 걸린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고, 더 많은 자료가 투자자들에게 발송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평균 시간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2021년 대비 2022년에는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24% 감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덱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되, 3분 안에 이 팀을 만나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아주 임팩트 가득한 내용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전 에서 나열한 내용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투자자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보는 내용도 데이터로 정리해보니까 참으로 흥미롭다. Docsend 팀이 320개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VC들이 가장 자세히 보는 내용은 첫 번째가 제품, 두 번째가 비즈니스모델, 그리고 세 번째가 Purpose인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로 자료 초반에 있는 우리 사업에 대한 한 줄 설명 또는 엘리베이터 피치와도 비슷한 내용인데, 가장 짧은 내용이지만,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또는 오랫동안 보는 부분이다. 즉, 전체 슬라이드를 다 보지 않고도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는 이런 내용을 자료에서 찾아보고, 그 짧은 설명 자체가 별로이면, 그냥 미팅조차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자료 초반에 “우리 회사는 X를 위한 Y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명확한 설명이 있으면, 훨씬 더 잘 집중하면서 자료를 완독하는 편이다. 반면에, 자료를 다 읽어도 뭐 하는 회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이 회사랑 미팅을 안 할 확률이 매우 크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은, 투자 유치에 성공하든 안 하든, 320개의 모든 자료에 있는 내용은 팀에 대한 설명인데, 모든 투자자나 창업가나 팀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만큼 중요하고, 실은 스트롱은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바로 이 팀에 대한 슬라이드다. 우린 위에서 말 한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도 보지만, 우리가 가장 자세하게 보는 부분은 팀이다.

결론은, 창업가들에겐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업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 짧고 간결하게, 최고의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투자자들에게 정성스럽게 보내도 읽힐 확률이 매우 낮고, 읽혀도 3분 이내에 미팅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미팅을 해도 실제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더 낮다.

그래도 피치 덱은 중요하니까 신경을 좀 써서 만들어야 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창업가들

투자자들이 창업가들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창업 동기이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창업가 분들이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회사에서 일 한 경험이 있어서, 굳이 창업같이 어려운 길 말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길을 갈 수도 있는데 굳이 이 어려운 창업을 택한 이유와 동기는 항상 궁금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해도 이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창업가들이 듣기 좋은 고결한 답변을 했다. 어떤 분들은 어릴 적부터 느꼈던 사회의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세상에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어릴 적부터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창업했다고 한다. 굉장히 좋은 답변이고, 어떤 경우에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사업을 막상 보면 세상의 변화나 소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아서 후에 다시 물어보면, “그렇게 이야기 하면 투자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돈이 동기인데, 그렇게 이야기 할 순 없잖아요”, “떼돈을 벌기 위해서 창업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라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자주 듣는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창업의 목적이 돈이고, 돈 외에는 다른 동기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창업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무겁고, 고통스럽고, 공황장애스럽기 때문에, 이 길을 꼭 가야겠다는 아주 굳은 동기와 목적이 없으면 견디는 게 어렵다. 그래서,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든, 돈에 대한 개인적 욕심이든, 힘들지만 계속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거짓으로 거창한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렸을 때 너무 없이 자라서,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그냥 돈벼락 맞고 싶어서 창업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나도 실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한다. 기업 대상 강연은 잘 안 하지만, 학생들 대상으로 세미나나 강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데, 유니콘 기업과 1조 원 – 지금 환율로는 1.4조 원 – 이라는 큰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은 이 숫자에 대한 감을 전혀 못 잡는데, 주로 이렇게 추가 설명을 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인 중 한 명인 삼성전자 사장 연봉이 120억 원 ~ 150억 원인데, 이 연봉을 66년 동안 단 한 푼도 안 쓰고 100% 저금해야지 1조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즉, 남한테 월급 받아서는 절대로 큰돈을 못 번다는 뜻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으세요? 그러면 무조건 창업해야 합니다.”

이런 강연이 끝나면, 학생들이 찾아와서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본인도 돈을 벌고 싶은데 창업을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물론, 이 중 실제로 창업하는 분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이렇게 돈이 동기와 목적이 돼서 창업을 한 분들이 정말로 유니콘 기업을 만들어서 부자가 되면, 이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생관이 바뀐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생기면서, 이 분들의 동기와 목적이 돈에서 조금 덜 물질적인 것으로 바뀌고, 많은 분들이 궁극적으로는 창업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