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참으로 희한한 한 해였다. 희한하다는 게 좋은 설명이 될진 모르겠지만, 2020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형용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좋은 일보단, 좋지 않을 일들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한 한 해였던 거 같다. 솔직히 어떤 측면에서 보면, 완전 개판이었던 2020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개인적으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엄청 많은 한 해이기도 했다. 다 나열할 순 없지만, 그 중 몇 가지만 이 블로그에 공유하고 싶다.

나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한 번도 싫증 내지 않고, 코비드19 때문에 삼시 세끼를 다 준비해 준 사랑하는 와이프 지현이에게 감사한다. 항상 나를 응원하는 우리 가족, 장인, 장모님, 그리고 13년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한 마일로에게 감사한다. 우리 스트롱 모든 식구들, 우리 창업가들, 그리고 우리 투자자들에게도 감사한다. 많은 걸 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많은걸 할 수 있었기에 감사한다. 많은 걸 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긍정적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년은 더 좋은 한 해 일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올해 정말 많은 일을 했고, 많이 넘어졌지만, 매번 일어났음에 스스로에게 감사한다. 힘들었지만, 힘든 만큼 매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하드 트레이닝

2015년 6월 3일, 나는 와이프랑 한국에 잠깐 나와 있었는데, 미국 옆집 이웃 브라이언한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이 왔다. “집에서 물이 새는 거 같아서 수도국에 전화해서 물 공급을 중단시켰어요. 차고랑 정문 밑에서 물이 나오는 걸 봤는데, 이제 멈췄네요.” 정원 스프링클러가 고장 나서 물이 좀 샜나보다 생각하고 넘겼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국 나오기 전에 집 키를 맡긴, 같은 동네에 사는 와이프 친구에게 집에 가서 상황 좀 확인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한국 시각으로 밤늦게 이 친구분한테 급하게 전화가 왔고, 와이프가 통화하는 분위기를 보니 뭔가 큰일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끊고 와이프 왈, “오빠, 우리 집 x됐어”. 친구분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온 집 안에 물난리가 났고, 당시 거실 사진을 찍어서 보낸준게 있는데, 이렇다.

2135-1

2135-2

2층 집이었는데, 마루 천장이 무너졌고, 와이프 친구분 말 그대로 온 집에 홍수가 나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한국 일정을 다 취소하고, 그다음 날 혼자서 LA로 돌아왔다. 일단 상황 파악을 하고, 기초적인 건 내가 수습할 계획이었다.

오자마자 주택 보험회사에 전화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젖어 있는 집 구석구석을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층 안방 화장실에서 원인을 발견했다. 비대와 변기의 물 저장소를 연결하는 호스의 이음새가 약해져서 파열됐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이 상태로 48시간 이상 물이 누수됐고, 이 물이 이 층 바닥의 카펫에 모두 흡수됐다. 그리고 목재로 지은 건물이라서 천장이 물을 흠뻑 먹은 카펫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집 모든 곳에 물난리가 났고, 우리 집 이웃이 수도국에 전화하기 전까지 거의 5일 이상 계속 물이 샜던 것이다.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때 정말 황당했고, 머리가 하얘지는 거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라서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랐지만, 보험 회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하나씩 일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국은 이런 보험이 비교적 잘 되어 있어서, 2015년 10월 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기 전까지 5개월 동안 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말 힘들었고, 막판에는 거의 번아웃이 됐다(실은 이 사건 때문에 우리의 한국 귀국이 예정보다 빨리 앞당겨졌다). 여기서 다 나열하진 못 하지만, 물에 파손되지 않은 나머지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절반이 분실되고, 이 회사랑 법적 소송까지 갈 뻔했고, 보험금 합의하느라 한국 와서까지도 엄청 많은 에너지 낭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물난리 때문에 3주 동안은 일을 거의 못 하면서 이때 많은 기회비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난리를 다 처리하고, 보험금까지 다 받은 후에, 물난리가 있고 난 뒤 약 1년 후에 이 포스팅의 사진을 와이프랑 다시 보면서, 우린 그래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이 경험에 대해서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처음 겪는 일이라서 정신이 없었지만, 만약에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타지에서 오롯이 둘이서 이 큰일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이 일이 우리에게는 큰 모험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 하드 트레이닝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도 실은 이 일을 겪은 후부턴, 웬만한 어려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고, 덤덤하고, 침착하게 일을 하나씩 해결하려는 태도로 모든 것에 임한다. 실은, 이 물난리가 났을 때, 첫 일주일은 짐 옮기고, 집을 청소하고 건조하는 인부들을 관리해야해서 보험사에서 마련해줬던 호텔에서 집으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그리고, 세탁기가 있던 다용도실 – 다행히도 이 방은 물 피해가 없었다 – 구석에 있는 세탁기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틈 날 때마다 일을 조금씩 했다. 그 난리 통에 AuditBoard라는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가 요새 엄청나게 잘 하고 있다.

2020년도에 아마도 많은 창업가들이 내가 경험한 물난리와 같은, 인생 최악의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에 투자하고, 다양한 회사와 창업가들과 일하는데 코로나 거리 두기 단계가 바뀔 때마다 울고 웃는, 정말 웃지 못할 상황이 끝없이 펼쳐졌던 2020년이었다.

운이 없는 회사는 올해 문을 닫았고,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를 이분들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하지만, 올해 살아남았다면, 그리고 내년에도 계속 싸울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길. 여러모로 봤을 때, 역사상 최악의 한 해였고, 아마도 회사가 경험할 수 있는 나쁜 시나리오는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강해졌을 것이다. 물난리가 나를 하드 트레이닝 했듯이, 코비드19는 창업가들을 하드 트레이닝 했을 것이다. 올해를 잘 살아남았다면 앞으로 겪을 시련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모두 수고했고,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이제 훨훨 날기만 하면 된다.

화이팅 의지

1607659412876

이미지 출처: Ntt8811 / 크라우드픽

우리가 투자한 회사 창업가, 그리고 만나는 창업가들 중 극히 일부만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들지만, 성공하는 창업가와 실패하는 창업가 모두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투지와 의지는 엄청나다. 실은, 이 투지와 의지, 즉 우리가 말하는 “화이팅”이라는 게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게 힘들다. 그래도 나는 제대로 된 창업가라면, 이들에게 제일 본받고 싶은 점 하나를 뽑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이 화이팅이라고 하고 싶다. 엄밀히 말하면 ‘화이팅 의지(=fighting spirit)’라서 화이팅은 콩글리시지만, 그냥 모두 다 이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여기선 화이팅이라고 하겠다.

창업과 시작 자체는 큰 화이팅을 필요로 한다. 요새 스타트업이라는 드라마가 – 나는 한편도 안 봤다 – 꽤 인기 있다고 들었고, 실제로 주변에 창업한 사람들이 한두 명 정도는 있어서 그런지, 이 창업이라는 걸 대수롭지 않게 보는 분들이 많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옵션을 버리고 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하고, 가슴은 떨리지만,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어쩌면 인생 최고 난이도의 결정이라는 걸 대부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지저분하고 어려운 길을 가기로 한 선택 자체가 차원이 다른 화이팅이 필요한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동안 투자한 회사들과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같이 일 한 경험을 통해서 내가 배운 건, 그 어떤 비즈니스도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업 초기에 세운 가설 중 20% 정도만 맞아도 상당히 성공적인 예측을 했다고 할 정도로, 비즈니스는 미식축구공과 같아서 어디로 튈지는 그 누구도 모르고, 눈앞에서 어디로 튀는지 보이지만, 그걸 제시간에 손으로 잡는 게 쉽지가 않다. 실은, 많은 일반 사람들은 그냥 시작조차 못 했을 것이고, 시작했어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사업이 진행되는 걸 보고 경험했다면, 그냥 여기서 백기를 들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사업을 하다가 힘에 부쳐서 도저히 못 하겠다면, 일단 잠깐 멈추지만, 얼마 후에 다시 시작한다. 어떤 분들은 꿈을 실현하기에는 본인의 지식이 너무 약하다는 걸 느끼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학교 가서 지식을 연마하거나, 스스로 틈틈이 공부하고,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많은 창업가가 초기에 생각했던 비즈니스에서 180도 피보팅을 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대단하다. 대부분 그냥 사업을 접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이렇게 일보 전진할 때마다 이 보 후퇴하면 도대체 언제 성장할까 걱정하고 비웃지만, 내가 아는 창업가는 대부분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쓴다. 그리고 솔직히 이런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다 보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고, 언젠간 전진하는 걸 나는 많이 봤다. 이분들은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 끈기, 그리고 의지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데, 이건 정말로 아는 사람들만 안다.

나는 이런 화이팅 의지가 항상 부럽고, 본받고 싶다.

기본기

Woman's hand opening a gray metallic refrigerator door

이미지 출처: Nassamluv / 크라우드픽

올해는 여행을 거의 못 갔는데, 10월에 여수에서 10일 정도를 보냈다.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의 몇 가지 원칙 중 하나가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은 되도록 구색만 갖추고 저렴한걸 갖춰놓는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자기 집이 아니라서 그런지 막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숙소도 웬만한 건 다 있지만, 대부분 저렴한 제품들이었다. 냉장고도 삼성이나 LG가 아닌, 대우 냉장고였고, 터치스크린이나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최신 제품이 아닌, 그냥 문짝만 달린, 냉장과 냉동이 되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이 냉장고를 내가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냉장이 너무너무 잘 됐기 때문이다. 음료수나 맥주를 이렇게 시원하게 보관하는 냉장고를 최근에 접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 냉장고는 5년 전에 구매한 건데, 당시에는 최신식 LG 냉장고였다. 아직도 내가 다 사용할 줄 모르는 다양한 기능이 있고, 얼음기와 정수기가 외부로 나와 있고, 터치스크린으로 많은걸 조절할 수 있는, 냉장고 문 3개, 냉동고 문 2개의 아주 어마무시한 스마트 가전이다. LG 전자 매장에서 샀는데, 그때 판매원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 기능 중 내가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게 거의 없지만, 어쨌든 전자제품도 진화하고 있고,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어쩌면 냉장고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냉장고가 나한테 추천해주는 음료와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잠깐 했다.

이렇게 비싼 첨단 제품인데, 문제는 냉장고의 가장 기본인 냉장이 아쉽다는 점이다. 온도를 조절해도 음료수나 맥주를 먹으면 내가 원하는 그 시원한 느낌보다 항상 부족한데, 문짝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어딘가에 틈이 있어서 냉기가 조금씩 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짝에 달린 터치스크린 오류가 가끔 나서 AS 센터에 문의해보니, 그건 문짝 자체를 새로 교환을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좀 황당하긴 했다.

우리 집 세탁기도 비슷하다. 세탁기 또한 5년 전 최신 LG 전자 제품이다. 실은 나는 세탁을 잘 안 하지만, 너무 많은, 필요 이상의 빨래모드, 사이클, 기능이 있다. 그런데 세탁 품질이나 결과물을 보면 그냥 20년 전에 미국 아파트에 있던, 아무런 기능도 없고 그냥 빨래만 되는 동전 세탁기랑 비슷한 것 같다. 실은 이런 다양한 기능을 잘 활용하면 편리하긴 하지만, 냉장고의 기본은 냉장이고, 세탁기의 기본은 세탁이다. 이 기본적인 기능이 잘 돼야지만, “스마트”나 “IoT”와 같은 화려한 기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가 검토하는 회사도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본업을 그 누구보다 더 잘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 후에, 다른 기능이나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맞다고 생각하는데,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기보단, 그 외의 부수적인 부분과 포장에 더 신경을 쓰는 창업가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제품, 서비스, 음식, 운동 등, 일단, 이 기본기에 충실한 게 좋다. 기본기가 탄탄해야지만, 그 위에 다른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내자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2020년은 힘든 한 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항상 힘들지만, 올해는 정말로 그 어떤 해보다 신기하고, 다르고,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요새 운동할 때 영화 록키의 사운드트랙을 듣는다. 유튜브에서 계속 추천하는 록키 관련 음악을 듣다 보면, 지친 육체와 영혼이 긍정적인 힘을 많이 받는걸 느끼는데, 이 중 요새 나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동영상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4분이 안 되는 동영상이니, 모두 한 번씩 감상하길 바란다.

록키 시리즈에서 록키 발보아가 아들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는데, 이 각본을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힘들고 힘이 빠질 때, 그리고 정신이 나태해졌을 때 항상 자신을 각성하고 영감이 충만하게 해준다.

“Let me tell you something you already know. The world ain’t all sunshine and rainbows. It’s a very mean and nasty place and I don’t care how tough you are, it will beat you to your knees and keep you there permanently if you let it. You, me, or nobody is gonna hit as hard as life. But it ain’t about how hard you hit. It’s about how hard you can get it and keep moving forward. How much you can take and keep moving forward. That’s how winning is done! Now if you know what you’re worth then go out and get what you’re worth. But you gotta be willing to take the hits, and not point fingers saying you ain’t where you wanna be because of him, or her, or anybody! Cowards do that and that ain’t you! You’re better than that!”

실은 이 말을 록키가 아들한테 해주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창업가들에게 해주는 외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은 아름답지 않고 정말 빡세고, 내가 아무리 잘나도 항상 나를 좌절시킬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남 탓하지 말고 오롯이 내가 모든 걸 책임져야한다. 우리가 삶을 이길 순 없고, 매번 패배하고 넘어질 것이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서 계속 전진하는 거, 이런걸 winning이라고 한다.

나도 올 해 여러 번 넘어졌고 패배했지만, 죽지 않고 일어나서 계속 전진했다. 아마 모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모두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