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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와 있는 미래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골고루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윌리엄 깁슨

공상과학 소설가 William Gibson의 명언이다. 안철수 씨가 대선 출마 선언문에도 인용했고, 잭도시도 인용을 해서 더욱더 유명해졌다. 요새 나는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특히나 미래지향적인 기술이나 비즈니스를 검토하면서 “이거 분명히 될 텐데, 과연 언제 현실화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면서 냉정하지만, 어느 정도의 주관을 갖고 곰곰이 생각해본다(참고로, “이게 과연 될까?”라는 의문을 갖는 비즈니스들도 많지만 이런 비즈니스는 또 다른 부류이다).

우리가 굳게 믿는 비트코인도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 아예 안 될 거라는 투자자들도 많지만 나는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은 대량 상용화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가상현실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전문가나 투자자들은 앞으로 VR의 시대가 활짝 열릴 거라고 하지만, 선뜻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 5년 후가 될지, 50년 후가 될지 그 시기에 대해서는 각각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챗봇에(bot) 대해서 공부를 좀 해봤는데, 이 또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페이스북이 챗봇에 대해서 발표했을 당시만 해도 앞으로 봇이 사람을 대체하고, 이게 미래이기 때문에, 모든 개발자가 이 분야로 뛰어들 거 같았지만, 아직 봇의 현실은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거 같다. 봇과 인간이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많은 스타트업의 약속이 일상생활 일부가 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 분야 많은 사람이 참고하는 가트너 그룹의 Technology Curve에 의하면 모든 새로운 기술은 비슷한 진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새로운 기술이 시장에 나오고, 믿을만한 전문가들이나 기업들이 이 기술을 밀어주고 홍보를 하면 거품이 끼면서 엄청난 hype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이 초기에 한 약속들을 지키지 못하고, 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곧이어 실망의 과정이 시작된다. 대량 투자가 중단되고, 신기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던 많은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개발을 진행하던 회사들이 문을 닫는 이 시기에는 “이거 사기 아냐”라는 의심까지도 나온다. 물론, 사기라면 거기서 끝나지만 그렇지 않고 정말로 뭔가 있는 기술이라면 바닥을 찍은 바로 이 시점부터 본격적인 개발과 가속이 붙으면서 대중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상용화 과정이 시작된다. 위에서 언급한 기술들이 모두 이 단계에 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미래의 기술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서도 각각 의견들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들의 장기적인 투자, 좋은 인력들로 구성된 개발자 네트워크의 활성화,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기 위한 개방된 코드 베이스의 발전, 기술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하드웨어와 클라우드 인프라의 발전 등이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killer app의 등장이다 – 마치 포케몬고가 지난 수년 동안 되니 안 되니 말이 많던 AR을 대중 속으로 끌고 들어왔던 거와 같이.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굉장히 운이 좋고 특권을 누리고 있는 소수집단이라고 생각을 하는 게, 이런 미래의 기술들을 남들보다 훨씬 더 먼저 접하기 때문이다. 큰 힘과 자본이 있는 투자자들은 미래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1997년 뉴욕 타임스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컴퓨터가 바둑에서 인간을 이기려면 100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이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인공지능은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19년 후인 2016년도에 컴퓨터는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들을 이겼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미래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소수만 미래에 살고 있다.

유니콘 성장과 마이너스 매출총이익

작년에 USV의 Fred Wilson이 마이너스 매출총이익(negative gross margin) 성장에 대해 굉장히 통찰력 깊은 글을 썼다. 실은 나도 이와 비슷한 각도에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생각난김에 몇 자 적어보고 싶다.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의 비상장 소프트웨어 유니콘 회사들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말들이 많다. 곧 거품이 터지고 모든 유니콘이 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초 부정론자들이 있는가 하면, 현재 174개로 알려진 유니콘 기업들의 숫자는 몇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초 긍정론자들도 있다. 참고로, 나는 조심스러운 긍정론자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그 기반에는 프레드 윌슨이 말하는 ‘마이너스 매출총이익 성장’이 있다. 마이너스 매출총이익은 간단히 말해서 물건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그 물건을 팔았을 때 버는 매출보다 큰 구조이다. 실은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온디맨드 O2O 서비스들이 이런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제품을 팔 때마다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잃는 비즈니스를 하는 이유는 대표이사가 멍청해서가 아니다. 일단 남들보다 싸게 서비스를 제공해서 수요를 창출하고, 사용자들을 확보해서 그 플랫폼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이다. 규모가 생기고, 이 규모를 일단 플랫폼에 가두면 나중에 가격을 올리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논리이다(또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업가치 70조 원의 1등 유니콘 회사 우버 또한 이런 비용구조 위에 만들어진 비즈니스이고, 온디맨드 플랫폼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유니콘 회사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이런 성장 방법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온디맨드 플랫폼 비즈니스 자체는 진입장벽이 높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쟁사가 출현할 수 있는 리스크를 내재하고 있는데 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경쟁사들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더 많은 유저를 확보하는 것이다. 진입장벽이 낮은 분야에서 천천히 성장을 하다 보면 다른 경쟁사들이 쉽게 들어와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진입장벽이 낮아서, 아직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없다면 누군가 탄탄한 자본력을 가지고 밀어붙이면 시장의 1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어쩌면 기술의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분야에서 창업한 스타트업들이 유니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마이너스 매출총이익 전략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수익구조를 희생하면서라도 최대한 싸게 팔고, 최대한 많은 유저를 확보하고, 최대한 빨리 성장을 해야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등 비즈니스가 바로 유니콘 기업들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팀과 돈이다. 워낙 오랫동안 돈을 태우면서 성장해야 하는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자자의 돈이 필수다. 그리고 이 팀의 비전을 끝까지 믿고 언젠가는 이 회사가 돈을 벌 거나 더 큰 회사에 인수될 거라는 믿음을 가진 투자자를 잘 만나야 한다.

수익도 만들지 못하는 스타트업들이 투자만 계속 받고, 외형적으로만 성장하는 걸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많지만, 위에서 말한 이런 생리를 이해하면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제품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100원인데 이 제품을 90원에 팔아서 물건 하나 팔 때마다 10원의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 그리고 이 마이너스 나는 10원을 투자자의 돈으로 메꾸는 그런 게 무슨 비즈니스냐 라고 하시면 솔직히 나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런 회사에 계속 자금을 대주는 투자자들이 있고, 이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모든 고객을 확보해서 업계 1위의 유니콘 플랫폼으로 성장한다면 결국 돈을 버는 비즈니스가 될 수도 있다.

지분형 크라우드펀딩에 대한 단상

crowdsourcing-1024x4402016년 5월 16일부터 미국에서도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이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고, 시점에 대한 논쟁도 많았지만 이제 미국에서 창업하면 불특정 다수에게 회사의 지분을 주고 투자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자세히 파고 들어가 보면 투자할 수 있는 금액, 투자 받을 수 있는 금액, 등록 과정 등의 세부사항들은 은근히 복잡하지만, 과거에는 특정 다수만이 가지고 있던 ‘특권’을 이제는 우리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도 가질 수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미국보다 더 빨리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 법안을 통과시켜서 우리나라는 2016년 1월 25일부터 일반인들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들을 통해서 스타트업에 지분투자가 가능하게 되었다. 실은 나도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실제 투자자 또는 창업가의 경험은 없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한국과 미국의 캠페인들을 보면서 느낀 점들에 대해서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창업가나 투자자의 입장에서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은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이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2개의 적당히 이름이 알려진 VC들로부터 5억을 투자 받는 거랑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100명의 불특정 다수로부터 각 500만 원씩 투자를 받는 거랑은 차이가 좀 있다. 물론, 다 같은 돈이다. VC한테 받은 5억이랑 일반인들한테 십시일반으로 모은 5억은 똑같은 돈이다. 하지만, 소액주주들이 많으면 cap table이(자본구조표. 즉, 회사의 주주들과 이들의 지분관계를 표시한 도표) 지저분해 지고, 제대로 된 투자자들이라면 이렇게 지분구조가 복잡한 회사에 투자하는 걸 꺼리기 때문에 후속투자 받을 때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회사의 대표이사도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액 주주들을 관리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회사 지분의 0.1%를 가지고 있더라도 주주이며, 법적 의무가 없더라도 이 주주가 회사의 업데이트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뭔가를 부탁하면 무시하는 게 쉽지 않다. 이런 작은 주주들이 수십에서 수백 명이 있다면 – 대부분 그냥 조용하지만, 간혹 회사를 굉장히 귀찮게 하는 주주들도 있다 –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좋지 않다. 모든 스타트업들은 투자자들에게 월별 또는 분기별로 비즈니스 업데이트를 공유한다. 이사회 멤버라면 이사회에 직접 참여도 하지만, 대부분의 주주들은 이메일로 공유받는다. 실은 대표이사의 입장에서 이런 내용을 취합하고 정리하는 게 좀 귀찮고 시간이 드는 일이다. 업데이트를 투자자들과 공유하면, 많은 투자자들은 본인들이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물어보는데 만약에 위에서 말한 회사의 소액 주주들이 질문을 한 개씩만 해도 100개의 질문이 되고 이로 인해서 스타트업의 업무가 마비될 수도 있다.

지분형 크라우드펀딩을 통해서 투자하는 일반인들의 성향도 너무 다양하다. 벤처투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분야이다.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건 대출이 아니라 투자이며, 돈을 날릴 확률이 90% 이상인 고위험 투자이다. 그런데 우리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런 투자의 속성에 대해서 잘 모르고, 원금을 언젠가는 회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가 참여할 수 있으므로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일반인 중에는 질이 좋지 않은 투자자들도 존재한다. 이건 내가 소문으로 들은 말이라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못 했지만, 조폭들도 지분형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분들이 투자한 회사가 망해서 돈을 회수하지 못 하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어쩌면 내가 영화를 요새 너무 많이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소액투자자들이 회사에 돈 이외의 그 어떠한 도움이나 부가가치도 줄 수 없다는 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도 리스크는 존재한다. 내가 한국과 미국의 모든 스타트업을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해에 600개 이상의 회사들을 검토하고, 주위에 좋은 회사들이 많기 때문에 괜찮은 스타트업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분형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 등록된 회사들 중 내가 아는 회사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회사들이 과연 투자할만한 회사들인지 잘 모르겠다. 실은 투자자로서의 내 입장은, 지분형 크라우드펀딩은 일반 VC들한테 거절을 받아서 도저히 투자를 받지 못 하는 회사들이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좀 극단적인 생각이라서 아마도 많은 분들의 비난과 부정적인 댓글이 벌써 걱정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회사가 전문적인 투자자들에게 돈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지분구조를 지저분하게 만들면서 지분형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정상적인 투자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VC 들이 투자를 못 하는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예를 들면, 마리화나 재배 또는 도박성 비즈니스) 딱히 옵션이 없는데 미국에서는 이런 비즈니스들이 지분형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진행하는 걸 봤다.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들은 VC 투자를 받는다. 일류 VC 투자를 받는 회사들도 있고, 그렇지 못 하는 회사들도 있겠지만, 좋은 팀원들이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전문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주로 이 경쟁에서 밀려난 스타트업들이 지분형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으로 가기 때문에 여기에 투자해도 – 특히나 의미있는 지분율이 아닌 소수지분이기 때문에 – 투자자들은 돈을 버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 제도를 통해 투자자에게는 새로운 투자기회를 제공하고 스타트업들에게는 자금 조달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홍보를 한다. 겉으로 보면 그럴싸하지만, 실제로는 투자자와 창업가 모두에게 그렇게 장밋빛 플랫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완전공시 – 우리는 한국의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의 투자자이다. 텀블벅은 지분형 크라우드 펀딩이 아닌 보상형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이다.

<이미지 출처 = http://knowledge.wharton.upenn.edu/article/promise-perils-equity-crowdfunding/>

새로운 게임

89-chang나랑 친한 분들은 잘 알 텐데, 나는 테니스를 매우 좋아한다. 실은 어릴 적 내 꿈은 테니스 선수였다(아직도 꿈은 가지고 있다). 테니스가 전통적으로 강한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테니스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았지만, 어느 순간 키가 더 크지 않아서 이제는 취미로만 치고 있다. 얼마 전에 끝난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 오픈을 보면서 느낀 점들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과거에 마이클 창이라는 중국계 미국 테니스 선수가 있었다. 175cm 라는 단신이었지만 1989년도 프랑스 오픈을 17살의 나이에 우승한 위대한 챔피언이다. 이 선수는 솔직히 그렇다 할 무기가 없었다. 단신이기 때문에 폭발적인 서브도 없었고, 포핸드와 백핸드도 특별하게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좋은 체력과 빠른 발이 있었고 머리가 좋아서 테니스를 영리하게 쳤다. 서양인들에 비해서 체격 조건이 뒤처진 나 같은 동양인들은 마이클 창을 보면서 큰 용기를 얻었다. 키가 작고 파워풀한 스윙이 없어도 끈질기고 발 빠르게 공을 치다 보면 이길 수 있다는걸 그가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테니스 게임과 선수들은 계속 발전을 했다. 선수들의 체격 조건은 더 좋아졌고, 코트의 재질도 발전했고, 라켓과 공 같은 장비도 비약적인 발전을 해서 선수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체력을 극대화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클 창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은퇴를 했지만, 그가 전성기 때의 실력 발휘를 한다고 해도 이제는 현재의 테니스에서는 더 이상 우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하고 열심히 친다고 해도 테니스라는 게임 자체가 업그레이드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평균 신장, 체격, 그리고 체력적인 면에서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모든 선수들이 월등해졌다. 이런 새로운 판에서는 마이클 창과 같은 선수는 더 이상 경쟁 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분야만 다르지만 스타트업도 마찬가지이다. 5년 전만 해도 ‘MVP’ 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제품의 껍데기만 대충 만들고 기본적인 기능만 구현하면 매출도 조금 만들 수 있고 운 좋으면 투자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테니스의 게임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듯이 스타트업과 창업자들의 수준은 그동안 엄청나게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제는 ‘MVP’ 라는 우산으로 제품의 불완전함을 정당화 할 수가 없다. 제품의 수준 자체가 높아졌고, 내가 최근에 본 MVP들은 왠만한 중견기업에서 만드는 제품에 비교해도 손상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물론 이런 수준높은 베타 제품들을 가능케 하는건 그동안 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소프트웨어, API, 하드웨어 등이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는 창업팀들이 만든 완성도가 높은 제품들과 경쟁하려면 이들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만큼 좋은 제품의 기준이 높아졌고, 유저확보와 매출발생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요새 시작하는 팀들은 더욱 더 고민하고, 더욱 더 잘 만들어서 완제품과도 비슷한 베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매일 매일 전세계에서 생성되는 수 천개의 새로운 제품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미지 출처 = http://www.princetennis.com/inside-prince/history/1989/>

비트코인 은행

hyphen다시 한번 비트코인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250 – $300 선을 잘 유지하고 있는걸 보면서 오히려 새로운 화폐로써의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번 주에 $700를 찍고 현재 이 선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 비트코인 가격 변동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가장 일반적인 원인으로는 항상 ‘중국’을 말하지만 이게 맞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비트코인에 대해서 가끔씩 포스팅을 하고, 거의 매주마다 조금씩(아주 조금씩) 사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물건도 구매하고, 해외 송금도 해보면서 정말로 편리하다는걸 항상 느끼고 있지만 아직 mainstream 통화가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 3년 전에 우리가 코빗에 투자했을 당시만 해도 나는 비트코인이 단시간내에 은행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은행의 미래를 매우 어둡게 만들지 않을까 라는 확신을 했다. 한 5년이 걸릴걸로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틀린 예측이었다. 오히려 당분간은 –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 은행과 비트코인은 공존하면서 때로는 서로를 돕지만 때로는 견제하면서, 이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할거 같다. 현실적으로 봐서는 은행도 장기적으로는 비트코인/블록체인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비트코인이 은행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속 은행 및 전통적인 금융기관들과 잘 협업을 하면서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가지 명확한 트렌드가 보인다. 우리가 코빗에 투자할때는 단순히 비트코인을 사고 팔 수 있는 거래소였지만 이제 코빗은 점점 더 은행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은행과 비슷하게 코빗의 지갑에 돈을 저축할 수 있다(이자는 없지만, 더이상 이자율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 checking과 savings 계좌가 따로 존재하고, Coinbase와 같은 서비스는 checking 계좌 역할을 하는 Wallet 기능을 제공하고, savings 계좌의 역할을 하는 Vault 라는 기능을 제공한다. 코빗의 경우 ‘지갑’ 자체가 예금계좌이다.

은행업무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거래’는 코빗이 정말 잘 하는 분야이다. 친구한테 빌린 돈을 계좌이체 하려면 친구의 은행과 계좌번호가 필요하고, 이걸 온라인으로 하려면 공인인증서, 보안카드 또는 OTP가 필요하다. 내가 내 돈을 다른 사람한테 보내는 간단한 업무인데 그 절차는 너무 복잡하다. 코빗에서 비트코인을 남한테 보내는건 쉽다. 이메일 주소나 비트코인 주소만 알면 매우 쉽게 보낼 수 있다. 송금 수수료도 훨씬 저렴하다. 이는 국내 송금에도 적용되지만 해외로 돈을 송금할때는 그 진가가 더욱 더 빛나고, 특히 소액을 해외송금할때 굉장히 편리하다. 계좌이체 업무는 이미 코빗이 은행들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트코인을 움직일때 큰 장애물이 하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한테 비트코인을 보내려면 그 사람이 비트코인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비트코인 계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트코인을 모르는 사람한테 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정을 만들게 하는건 마치 컴맹한테 공인인증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만큼 어렵다. 최근에 코빗에서 ‘글로벌 송금’ 서비스를 출시했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 아직까지 송금이 가능한 나라가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씩 늘려나갈 계획이다. 코빗의 Hyphen 이라는 새로운 API를 적용한 서비스인데 돈을 보내는 사람은 그 나라 통화로 보내면 되고, 받는 사람은 받는 나라의 통화로 받을 수 있다. 송금의 백엔드 시스템은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이 해결해주고 있지만 돈을 보내고 받는 사람은 비트코인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된다. 이 글로벌 송금 서비스로 이제는 매우 손쉽게 해외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한테 돈을 보낼 수 있다. 이 또한 왠만한 은행보다 훨씬 더 앞선 기술과 기능이다.

현재 코빗에서 사용가능한 통화는 세가지이다.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 그리고 원화(KRW)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는 일반 은행에서 제공하는 ‘외화’ 서비스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가상화폐들이 등장할텐데 코빗에서 이 모든 화페들을 보관하고, 사고, 팔고, 그리고 송금할 수 있다면 꽤 린하고 효율적인 은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실적으로는 코빗을 사용하려면 주거래 은행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대로 은행과 같이 공존하면서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리고 생각보다 더 빨리 이 판이 바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