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ategorized

50권 – 2021

사진 2021. 12. 3. 오전 7 05 22작년 이 맘 때쯤, 1년 독서량 50권을 돌파하면서 이런 을 썼다. 목표를 달성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고, 지식이 쌓이는 것 같아서 더욱더 뿌듯했다. 독서는 남들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축적한 지식을 짧은 기간 안에 내 지식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너무 쉽고 간단해서, 이렇게 쉽게 지식을 습득하는 게 가끔 미안할 정도이다.

올 초에도 50권을 목표로 세팅했는데, 올해는 이 목표를 조기 초과 달성해버렸다. 해가 다 가기 전에 2권 정도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올해는 이미 52권의 책을 읽었다. 자랑하려고 이런 포스팅을 하는 건 아니지만, 바쁜 일정 속에도 마음의 양식을 많이 먹었다는 점, 그리고 고민 끝에 세운 목표를 계속 달성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스스로 대견해서 나에게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여러 번 쓴 내용이지만, 내 책 읽는 패턴은 단순하다. 소셜미디어, 언론, 그리고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은 책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 앱의 ‘읽고 싶은 책’ 카테고리에 등록한다. 이 책들을 먼저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에서 검색해서, 대여할 수 있으면 여기서 대여하고, 못 찾은 책은 동네 도서관에서 직접 대여한다. 국민도서관에도 없고 동네 도서관에도 없으면, 다른 분들에게 빌려보거나, 아니면 대여 가능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냥 한 권 사서 읽으면 되는데, 나는 더는 책을 사서 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책을 안 산지 한 4년이 넘은 것 같다.

올해는 동네 도서관을 직접 방문해서 책의 냄새를 맡고 – 요샌 마스크를 써서 책 냄새를 맡기가 힘들지만 – 물리적인 도서관만이 줄 수 있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많이 경험하면서, 책 시장은 완전히 이북으로 넘어가진 않을 것 같고, 리테일이 망하고 있다고 하지만 도서관은 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정신없고 바쁜 일상 속에서 도서관 방문은 나에게 마음의 여유와 정신적 평온을 주는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1년에 50권을 읽으려면,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1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요새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그렇지, 이게 대단한 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에게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을 잘 활용해야 하고, 가끔 다른걸 희생해야한다. 나는 웬만하면 저녁 약속을 올해도 잡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일 수도 없었지만, 사람 많은 걸 싫어하고 술도 즐기지 않아서, 그냥 가급적이면 저녁을 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집에서 저녁도 먹고, TV도 보고, 책도 읽고, 이렇게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의 책을 읽게 된 것 같다.

올해도 스타트업이나 비즈니스 관련된 책은 거의 읽지 않고, 소설, 에세이, 그리고 수필 위주로 읽으면서 다양한 글쟁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고, 소소한 내용을 읽으면서 스스로 생각도 정리하고 정화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에게 독서는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하고 저렴한 최고의 도구이다.

좋은 책을 올해 많이 읽었는데, 홍정욱 씨의 에세이 50에서 발견한 다음 문구가 매우 맘에 들었다.

“5년 후의 나를 결정하는 두 가지는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

Amen to that.

무한 배팅(batting)

내가 쓴 첫 번째 책 ‘스타트업 바이블‘이 2010년도에 출간되었으니, 벌써 12년이 된 고전이 됐다. 특히 모든 게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책이라서 그런지, 지금 보면 틀리거나, 또는 현실적이지 않은 내용이 꽤 있다. 아니, 정정해보면, 내용이 틀렸다기보단, 그동안 환경이 바뀌거나 아니면 내 생각이 바뀌어서, 더는 현실적이지 않고, 적절하지 않다고 하는 게 가장 맞을 것 같다. 이런 부분이 좀 많아서, 여기서 하나씩 다 나열하진 않겠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이 내용을 기반으로 ‘스타트업 바이블 3’을 써보라고 제안한 적은 있다. 새로운 책 작업은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이 맥락과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한다. 즉,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굳은 생각과 신념 중 시대의 변화 때문에 바뀐 게 뭐가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다. 스트롱을 9년 넘게 운영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는데, 이 경험이 내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신념과 철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했지만, 반대로,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오늘은 그 중에서 투자의 속도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나는 워렌 버핏의 팬이다. 이 분에 대한 글도 여러 번 쓰긴 했는데, 버핏의 투자 철학 중 이런 게 있다:

“공이 지나갈 때마다 휘두르지 마라(Don’t Swing at Every Pitch)”

투자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에 맞지 않으면, 굳이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버핏은 이 철학을 매우 잘 지켜서,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버크셔해서웨이의 투자 기준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 거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 건의 투자를 집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개의 회사에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실은 나도 이 철학을 오랫동안 존경해왔고, 나 또한 이와 비슷한 플레이를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우리의 투자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건 팀이지만, 그 외에도 다른 기준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팀을 만나도 우리의 스윗 스팟에 들어오지 않으면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진화하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이 철학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들은 대부분 확률 게임을 한다. 워낙 초기에 투자하고, 어떨 땐 아무것도 만들어 놓은 게 없는 팀에 투자하기 때문에 이 회사가 어떻게 진화할지, 어디로 튈지, 어떻게 끝날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다. 투자를 시작했을 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예측하고 상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게 쓸데없고 부질없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승률을 올리기 위해서 우린 요새 최대한 많은 투자를 하려고 노력한다. 야구로 따지면, 최대한 배트를 많이 휘두르는 것이다. 너무 뻔하게 벗어난 공은 그대로 지나가게 두지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올 만한 공이면 무조건 휘두른다. 공이 지나갈 때마다 배트를 휘두르는 건데, 이건 위에서 말 한 워렌 버핏의 철학과 반대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계속 배트를 휘둘러야지만, 뭐라도 치기 때문이다.

목표는 항상 홈런이지만, 오히려 삼진을 정말 많이 당한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가끔 안타도 치고, 정말 가끔 홈런도 친다. 이런 철학으로 우린 2020년도에 정말 많은 투자를 집행했고, 올 해는 아직 한 달이 남았지만, 2021년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초기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멈추지 않고 계속 투자하는 것이다. You have to keep swinging, and you have to keep investing.

밸류에이션 과부하

2020년과 2021년 사이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 기간에 벤처 시장이 변한 걸 생각해보면 한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그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고, 아주 큰 변화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초기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VC들에게 물어보면, 요새 스타트업이 너무 비싸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활동하는 초기 투자 시장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가 투자하는 시드, 또는 프리 시리즈 A 단계는 아이디어를 기본적인 제품으로 만들었고, 많은 유저는 아니지만 소수의 초기 사용자들이 제품을 사용해봤고, 좋든 나쁘든, 어느 정도의 피드백이 생기고 있는, 그런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회사 중, 잘 해서 PMF(Product Market Fit)를 찾는 팀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투자금으로 PMF를 찾아가는 팀도 있는데, 어쨌든 대략 이런 단계가 시드나 프리 시리즈 A 라고 생각한다.

한 2년 전만 해도 이 단계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은 20억 원 – 50억 원 사이였다. 이런 스타트업이 50억 원 밸류에이션에 투자를 받으면 꽤 잘 받은 거였는데, 짧은 시간 동안 시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최근에 만난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거의 2배가 된 것 같다. 제품은 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수치가 없는데, 기본적으로 밸류에이션은 50억 원 이고, 이 단계에서 조금 더 발전했으면 100억 원이 넘는다. 내 기억으론 월 매출이나 거래액이 3억 원 이상 되는 회사들이 기업가치 100억 원에 투자받으면, 꽤 잘 받았었는데, 이젠 초기 제품과 시장의 긍정적인 초기 반응만 있으면, 100억 원에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세월이 됐다.

과거에 이런 회사와 미팅을 하면, 팀과 사업은 무척 맘에 들지만, 밸류에이션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투자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엔, 우리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투자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높은 밸류에 당장 투자가 진행되지 않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기업가치가 낮아지고, 이때 투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적당한 밸류에이션에 투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샌 이 밸류에이션이 별로 안 비싸다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가 비싸서 망설이고 있는 동안, 투자를 받는 회사가 많아졌다. 비싸다는건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이 스타트업들이 엄청나게 크게 성장하면, 초기 밸류에이션 100억 원이 그렇게 비싼 게 아니지만, 이건 시간이 지나야지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초기 회사의 밸류에이션이 갑자기 비싸진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모든 게 비싸지고 있어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도 비싸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장에 돈이 너무 많아서 이 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인해서 비싸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상이 바뀌고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속도로 바뀌고 있지만, 이렇게 스타트업 밸류에이션이 오르기 시작하면, 모두에게 해피 엔딩으로 끝날진 잘 모르겠다.

요샌 정말 20억 원 밸류에이션 스타트업이 그립다. 이런 회사들 찾기가 워낙 어려워서, 나에겐 기업가치 20억 원 스타트업이 새로운 유니콘이다.

습관에 대해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1월 중순이 지나면, 실은 일이 조금씩 줄어들고, 1년을 마무리하면서 내년을 준비하기 때문에 조금은 덜 바빠지는 게 정상적인데, 올해는 그럴 기미가 안 보인다. 오히려 검토해야 할 회사는 더 많고, 돈 없어서 힘들어하는 기투자사도 더 많고, 써야 할 이메일도 더 많아서, 브레이크를 못 밟고 계속 악셀러레이터를 밟아야하는 바쁜 연말을 보내야 할 것 같다. 행복한 고민이지만, 그래도 가끔 벅찬 느낌이 들때가 있다.

밸류에이션이 요새 하늘로 치솟는 점을 제외하면 – 그리고, 관련해서는 내가 따로 글을 한 번 쓸 계획이다 – 한국 벤처 생태계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더욱더 많은 똑똑한 창업가들이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고, 시장엔 과할 정도로 돈이 넘쳐흐르고 있어서 그런지, 내가 보기엔 잘 안될 것 같은 사업도 여기저기서 투자를 잘 받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창업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우리보다 더 못한 다른 사업도 기업가치 100억 원에 펀딩을 받았으면, 우린 더 높게 투자받아야 하고, 더 잘 할 수 있다.”라는 논리를 자주 듣고 있다.

최근에 만난 스타트업 중 기술력이 상당히 뛰어난 팀들이 몇 있었다. 기술력은 회사의 장기적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훌륭한 해자(垓字)가 될 수 있지만, 가끔 본인들의 뛰어난 기술력에 심취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는 단점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너무나 대단한 기술을 이용해서, 너무나 간단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간단한 문제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이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불편하기보단 귀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조금 귀찮긴 해서, 뭔가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돈을 내거나 또는 앱을 귀찮게 깔아서 해결할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걸 엄청나게 복잡하고 개발이 쉽지 않은 기술을 활용해서 해결하려고 하면 사업으로 성공하는 게 쉽지 않다. 송곳으로 살짝 뚫으면 되는 구멍을 굳이 전기 드릴로 뚫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분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술로 큰 문제를 한 번 해결해보라고 권장한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말하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습관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문제이다. 습관을 바꾸는 건 정말 어렵다. 나도 내 습관을 바꾸는 게 쉽지 않은데, 내가 만든 기술과 솔루션으로 남의 습관을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래서 이걸 가능케 하면 대단한 사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존은 세상의 모든 것을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사고팔도록 소비자들을 훈련했고, 수백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을 바꿨다. 그 과정은 쉽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이렇게 한 번 바뀐 습관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음성인식 기술에 대해서 을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손으로 기계를 제어하던 오래된 습관에서 음성으로 넘어가는 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이 습관을 바뀌면 다시는 예전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시장의 습관을 바꾸는 건 정말 어렵다. 처음엔 고객의 저항도 있고, 경쟁사의 저항도 있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뭔가를 하도록 시장을 훈련하는 비즈니스는 결국 시장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바꾸기 힘든 걸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 바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선 좋은 기술력이 필수이다.

좋은 기술력이 있다면, 너무 작은 불편함보단, 습관을 바꿀 수 있는 더 큰 문제에 도전해 보는걸 추천하고 싶다.

벤처 정신

11월 말까지 프라이머 20기 선발 인터뷰/미팅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기수에는 서류지원 이후 50개 이상의 회사를 후보로 뽑았고, 이 중 10개 정도의 회사를 3주 동안 선발하는 일정으로 진행된다. 매번 할 때마다 느끼는 건, 굉장히 힘들다는 점이다. 다 좋은 창업가이고, 다 좋은 비즈니스인데, 이 중 20%만 선발하는 것도 힘들지만, 일단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분들과 만나야 하는 것 자체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 나도 바빠서 주 중에는 주로 밤 9시 이후에 미팅하고 있고, 주말은 가급적이면 쉬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말에도 미팅하고 있는데, 나도 쉽지 않지만, 미팅하는 창업가들도 힘들 것이다. 다시 한번 밤늦게, 그리고 주말에 시간 내주셔서 나랑 미팅한 창업가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달하고 싶다.

매번 힘들지만, 매번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이렇게 강행군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기수도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서,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었고, 너무나 뻔한 아이디어라서 “또 이런 사업이야?”라고 갸우뚱하면서 만났지만, 막상 이야기해보면 너무 잘하는 분들이 많았다. 엘리트 길만을 걸어온 전형적인 엄친아 창업가, 유학파 창업가,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스텔스’ 창업가, 어릴 적부터 사업을 해왔던 분들, 집안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창업을 선택한 분들 등, 너무나 다양했다. 이 중 대부분이 떨어지겠지만, 프라이머 선발되고 투자 받는 게 사업의 목표가 아니기에, 모두 다 마음속으로는 응원한다.

스트롱도 초기에 투자하지만, 프라이머는 우리보다 더 앞 단계에 투자하기 때문에 1년에 두 번씩 여러 명의 창업가를 짧은 기간 안에 만나보면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요샌 어떤 서비스와 제품이 시장에서 유행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사업이 커질지 계속 스스로 상상해볼 수 있는 좋은 재료를 프라이머 인터뷰는 나에게 제공해준다.

각 회사와 45분 정도의 짧은 미팅을 하는데, 마지막에 내가 항상 물어보는 게 프라이머 지원 동기이다.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창업가 분들이 프라이머의 코칭때문에 지원했다고 한다. 내가 이 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건, 우리는 그냥 옆에서 응원하고 보조를 맞춰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 사업의 길을 보여줄 순 없다고 한다. 그동안 수 많은 사업과 창업가를 봤기 때문에, 각자 파트너의 경험과 시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해줄 순 있지만, 프라이머 선발되면 안 되던 사업이 갑자기 잘 되는 걸 바라면 완전히 틀리게 알고 있다는 조언을 여러 번 해 준 적이 있다.

악셀러레이터 선발, 또는 굉장히 유명한 VC로부터의 투자 유치, 이런 건 모두 사업에 있어서 부수적인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업의 본질은 시장이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이다. 조언, 코칭, 투자는 이걸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재료이지, 본질이 될 순 없다. 결국 메인은 창업가가 알아서 만들어 가는 것이고, 이건 아무리 경험 많은 투자자나 멘토도 대신 해 줄 수 없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결국, 사업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지, 투자를 받고, 어떤 투자자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이 지저분하고 힘든 길을 가는 건 아니지 않냐.

어제도 밤 11시에 줌 미팅을 끝내면서, 아직 한국의 벤처 정신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