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심

벤처 투자뿐만이 아니라, 세상만사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인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경계해야하는게 바로 자만심이라는 몹쓸 녀석이다. 나도 투자를 처음 시작할 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초짜의 모습, 겸손 그 자체로 일을 했다. 전혀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전혀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경험이 조금씩 쌓이고, 적당히 쓴 맛도 보고, 아주 가끔 작은 성공도 맛보면서, 자연스럽게 나만의 철학이 생기고, 나만의 관점이 생겼고, 의도치 않게 자만심이라는 게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어떤 미팅을 하면서, 속으로 계속 “저 분야는 전에도 투자해봤고, 나도 좀 공부를 해서 내가 좀 아는데, 저거 정말 힘들어서 잘 안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처음 접하는 사업에 대해서 내가 이미 그 분야에 대해서 잘 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섣부른 편견을 갖거나, 판단해버리는 이런 순간을 우린 아주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사업은 결국 사람이 하는거라서, 같은 분야에서 같은 사업을 해도 그 결과는 항상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미래를 너무 예측하려고 하고, 가끔 그 결과가 운 좋게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실력이 좋다고 자만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계속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정말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같이 많은 회사를 만나고 투자하는 투자자나, 매일매일 힘든 결정을 해야 하는 창업가는, 경험이 쌓이면서 일이 조금씩 잘 풀려서, 자신감에 차 있을 때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이 자신감이라는 존재와 자만심은 종이 한 창 차이인데,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턴, 더 이상의 발전은 없고, 퇴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뭘 좀 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더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만심 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항상 속으로 이런 다짐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항상 겸손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면, 경험과 짬밥이 쌓이면서, 이런 자만심이 조금씩 생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요샌 그냥 일부러 스스로 주문을 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니, 항상 배워야 한다. 자만심을 경계하자.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새긴다.

내가 좋아하는 VC인 Benchmark의 빌 걸리가 항상 버릇처럼 하는 말이 “좋은 판단을 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경험은 나쁜 판단을 많이 해야지 생긴다.”인데, 나도 너무 좋아하는 명언이다. 그런데, 이 말을 조금 더 확장 해석해보면, 나쁜 판단을 많이 해서 경험이 생기면, 좋은 판단을 하는데, 좋은 판단을 너무 많이 하면 더 이상의 경험이 축적이 안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정도 경지에 올라가면, 자만심이라는 녀석을 항상 경계해야 하고, 계속 열린 마음으로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지만, 더 많은 경험이 생기고, 더 많은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팀플레이

작년 팬데믹 기간에 우린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투자를 했고, 올해도 투자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펀드를 만들고 있다. VC의 파트너라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투자하기 위한 재원 마련인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투자자들끼리 항상 농담처럼 하는 말이, “돈 쓰는 건 쉬운데, 돈 모으는 건 너무 어렵고, 돈 버는 건 더 어렵다” 인데, 우리도 9년째 이 업을 하고 있고, 이번에 4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지만, 남을 설득하고 지갑을 열게 만들어서 돈을 받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 건, 첫 번째 펀드 만들때보단 조금씩, 아주 조금씩 수월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주말에 생각을 좀 해보니까 대략 다음과 같다.

일단, 우리도 9년 동안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운 좋게 꽤 좋은 회사에 투자를 많이 했다. 이 좋은 회사들이 진짜로 잘 될지, 그리고 우리에게 수익을 가져다줄지는, 아직 수년을 기다려야겠지만, 그래도 좋은 파트너들이 만든 VC가 9년 동안 계속 펀드를 만들어서, 꾸준히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신뢰를 형성하는 것 같다.

둘째는, 아직 엄청난 성과는 없지만, 그래도 그동안 우리에게도 꽤 크고 의미 있는 엑싯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고, 후속 투자를 받는 회사들의 밸류에이션도 커지면서 VC들의 성적인 IRR, 배수, DPI 등의 수치가 나쁘지 않게 나오고 있다. 우리도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팀을 비롯한 많은 정성적인 부분에 집중하지만, 결국엔 정량적인 지표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잘 안다. 비슷하게, 우리 같은 펀드에 출자하는 투자자들도(LP) 결국엔 펀드의 수익성과 지표를 보고 출자 결정을 한다.

마지막 이유는, 우리같이 한국 시장에 투자하기 위해서 외국 기관들에게 “돈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VC에 해당하는 사항인데, 한국 시장 자체가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해외 기관 투자자들과 미팅을 하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면서 첫 6개월 동안은 스트롱의 철학, 강점, 실적 등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도 못 했고, 한국 시장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했었다. 그만큼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알려지지 않았고, 과연 한국이라는 시장에 투자하는 VC에 출자하는 게 본인들에게 매력적인지 갸우뚱했었다. 그래서 이들과 만나기 위해서 출장을 가면, 항상 한국 시장, 한국의 유니콘,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슬라이드만 엄청나게 만들어서, 몇 시간 동안 주구장창 한국 시장에 대해 영업을 했었다. 그리고 더이상의 진전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요새 내가 해외 기관 투자자들과 이야기를 하면, 한국 시장에 대한 의구심 자체는 많이 없어졌다는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 오히려 어떤 LP들은 “한국 시장에 대해서는 우리도 공부 많이 했고, 매력적이라는걸 잘 아니까, 스트롱과 너랑 존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볼래?”라고 하는데, 몇 년 동안 “한국이 얼마나 매력적인 시장인데, 왜 이 사람들은 이걸 몰라줄까?”라는 스트레스를 달고 달았던 나에게는 단비와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어떤 분들과는 2년 동안 한국 시장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했고, 인제야 우리 펀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나에게는 풀기 쉽지 않은 숙제였는데, 이제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느냐 하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알토스벤처스의 한 킴 대표님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을 외국 기관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는걸, 한 킴 대표님은 거의 10년 전부터 하고 계셨고, 해외 기관 투자자들에게 한국이라는 시장을 처음 알리기 시작한 분이기도 하다. 한 킴 대표님이 한국이라는 시장으로 가는 비포장도로에 아스팔트를 깔아 줬고,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같은 후배들이 더 쉽게 펀딩을 받아서 한국의 좋은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후에 훨씬 더 많은 분의 노력이 있었다. 중기부, 그리고 한국벤처투자와 같은 모태펀드의 역할도 매우 컸고, 디캠프와 아산나눔재단과 같은 기관의 지원도 나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돈을 받아서, 좋은 회사를 발굴한 국내외 투자자들이 있었기에 유니콘 회사들이 시작 자체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선수들인데, 엄청난 기업을 무에서 만들어 한국이라는 시장을 글로벌 무대로 올려준 자랑스러운 한국의 창업가들이 있었기에 우리 같은 VC들이 더욱더 자랑스럽게 해외 LP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새 많은 분이 올림픽 보고 계실 텐데, 운동 경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모든 게 결국엔 좋은 분들과 이해관계자들의 팀플레이다.

밸류에이션 – 경험 많은 창업가

우린 워낙 다양한 분야의 회사를 만나다 보니, 비슷한 규모의 회사라도 그 밸류에이션은 천차만별인걸 자주 본다. 실은 비상장 회사의 가치는 정해진 산정 공식이라는 게 없어서, 말 그대로 갖다 붙이는 게 밸류에이션이긴 하다. 여기에서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데, 좋은 회사 또는 펀딩을 잘 하는 회사는 주로 투자하고 싶어 하는 VC들이 많기 때문에, 펀딩 시작할 때부터 이미 밸류에이션은 높고, 한정된 라운드 금액에 많은 분들이 투자하고싶어하기 때문에, 경쟁이 발생하고, 경쟁의 결과로 결국 밸류에이션이 올라간다. 이와 반대로, 수치가 안 좋은 회사 또는 펀딩을 상대적으로 못 하는 회사는 투자하고 싶어 하는 VC가 아예 없거나, 딱 하나가 있다. 그러면, 이 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밸류에이션이 내려갈 확률이 높다. 투자하는 VC도 본인 외에 다른 투자자가 없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밸류에이션을 주로 깎고, 이에 대해서 창업가가 방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펀딩이 잘 안되는 우리 투자사 대표가, 제품도 없고 이제 팀 만들어서 아이디어 하나 있는 주변의 스타트업이 200억 원 밸류에이션에 투자를 받았는데, 왜 우린 제품도 좋고 매출도 나쁘지 않은데 투자 받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하소연을 했다. 이분 말씀대로 이제 한국에서도 제품도 없고 수치도 없고, 이제 막 창업을 했는데 수 백억 원의 밸류에이션에 투자받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회사들을 보면 거의 다 이미 과거에 창업 경험과 나름 성공적인 엑싯 경험이 있는 창업팀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주로 이런 분들은 연쇄창업을 하면서 계속 더 큰 시장을 공략하는 경향이 있는데, 큰 시장과 수많은 up – down을 이미 경험한 창업팀이 만나면 제품과 수치가 없어도, 이 만남 차제로 밸류에이션은 올라간다. 어차피 모든 건 사람이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자금도 이런 좋은 사람에게 투입되기 때문에, 회사의 값을 객관적으로 매길 수 없는,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이런 private한 시장에서는 밸류에이션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제품, 시장, 회사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경험을 이미 한 창업팀이라면 무조건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내 경험에 의하면, 이게 틀리는 경우도 많지만, 맞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기에 이미 내가 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없는 회사의 가치가 1,000억 원대를 넘는 경우도 미국에서는 자주 본다. 아직 한국은 이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반대로 이런 경험이 없는 팀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수치가 애매하다면 밸류에이션은 상대적으로 낮고, 펀딩이 녹녹하진 않다. 이런 이유로 어떤 회사는 매출이 어느 정도 나는데도 50억 원 밸류에 투자를 받고, 어떤 회사는 이제 법인 설립 했는데 – 또는, 아직도 법인설립 전인데 – 200억 원 밸류에 투자를 받는 것이다. 이 경우,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오롯이 창업가에 대한 밸류에이션이고, 여기에 제품이 좋고 수치가 나오면, 더 높아진다.

물론, 경험이 있다고 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창업에 성공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데이터를 분석해보진 않았지만, 이 성공 확률은 50% 또는 이보다 조금 낮을 것 같다. 내가 과거에 몇 번 포스팅한 Quibi라는 회사가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엄청난 밸류에 엄청난 투자를 받았지만, 잘 안 됐고, 이런 사례가 찾아보면 너무 많다.

좋은 제품과 수치가 있는데도 투자를 못 받는데, 이렇게 이제 막 시작하는 다른 회사가 높은 밸류에 투자를 받는 걸 보면 좀 기운이 빠지고, 열 받지만, 이미 말 한대로, 이 게임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

디지털 자산에 대한 생각 – 2021년 7월

이번 달은 개인적으로 아주 바빴고, 회사에서도 여러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디지털 자산 분야에 많은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냥 중요한 소식만 읽고, 한 달 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일들을 팔로우만 했던 7월이었다.

일단, 가장 안 중요하지만, 많은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비트코인 가격은 부정론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3만 불 선을 지키고 있다(최근에 또 가격 점프가 있었지만, 이 또한 다시 내려올 수 있다). 솔직히 3만 불이냐, 2만 불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지만, 7월 내내 3만 불 언저리에서 비트코인 가격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걸 보면서, 7월이 어쩌면 근래 들어와서 가장 변동폭이 낮았던 기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20% 올라가고, 그 다음날 다시 30% 내려가는 것 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기간 이었고, 나는 절대적인 가격보단 상대적인 변동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항상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이 존재하듯이, 이 시장도 비슷하다. 가격만 보면 디지털 자산 시장에 추운 겨울이 온 것 같지만, 다른 쪽을 보면, 아직도 긍정적인 시그널들이 많이 보인다. 7월 한 달 동안 이 분야에서는 더욱더 많은 혁신이 있었고, 디지털 자산 분야에서 활동하는 개발자 네트워크는 더 빠르고 크게 성장했고, 이 분야 스타트업들에 계속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특히 a16z의 $2.2B 규모의 3번째 크립토 펀드는 더욱더 좋은 기술, 제품, 그리고 창업가들이 이 시장에서 혁신을 만들 수 있는 유동성을 공급하리라 생각한다.

올해 들어와서 중국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많은 채굴업자들이 탈중국을 선언했는데, 실제 Bitcoin Hash Rate을 보면, 이 현상이 숫자로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탈중국화 현상은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데, 떨어진 해시 레이트가 최근에 다시 상승하는 걸 보면 장기적으로는 크립토의 중국 의존도가 낮아지는 건 모두에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농담처럼 이야기 하지만, tech 역사를 보면 농담이 아닌 “중국이 억압하는 게 있다면, 거기에 무조건 투자해라”라는 말을 나도 항상 한다. 중국은 인터넷 자체를 컨트롤 하려고 하고, 페이스북과 유튜브도 중국이 억압하는데, 모두 다 엄청난 회사가 됐다. 비트코인도 비슷한 길을 가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

한가지 개인적으로 궁금한건, 작년 말과 올해 초에 비트코인에 투자하겠다고 결정한 많은 기관들이 관련 절차를 거치고, 내부 승인을 받는 과정이 끝났다면, 하반기에는 구매를 시작해야하는데, 아직은 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 이 부분은 계속 예의주시할 계획이다.

시장과 시간 벌기

창업가가 사업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을 하는데, 시장의 크기가 그중 하나다. 아무리 좋은 비즈니스라도 팔아야 할 시장이 너무 작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투자자들도 창업가들에게 가장 자주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시장의 크기에 대해서이다. 아무리 좋은 창업가가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도, 이걸 살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10명 밖에 없다면, 투자할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크기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진법적으로 현재의 시장이 작으면 무조건 나쁘고, 시장이 크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자주 주장하고, 실은 직접 그동안 경험한 것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장 크기 또한 유기적으로 변한다. 지금은 작은 시장이 앞으로 엄청나게 커질 수 있고, 지금은 너무 큰 시장이지만, 갈수록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력 있는 회사라면, 태생적으로 작은 시장을 직접 키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시장 크기가 중요하다곤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너무 연연하진 않는다.

공략하고자 하는 시장이 수십조 원짜리면 엄청나게 큰 시장이다. 이런 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조금만 잘하면, 투자자들이 엄청나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이렇게 시장이 크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관심을 두고, 결과적으로 경쟁이 살벌하다. 이런 구조에서는, 시장점유율 1% 먹는 것도 힘들다(하지만, 수백조 원짜리 시장에서는 1%만 점유해도 수조 원이다). 그래서 우리도 회사를 검토할 때, 엄청난 시장 크기만 강조하는 창업가들은 조금은 경계한다. 아무리 시장이 커도, 그 시장의 0.001%도 못 먹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면, 정말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장이 너무 작다면, 이 시장이 태생적으로 작고, 앞으로도 성장하지 않을 작은 시장인지, 또는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시장인지 아주 잘 생각해봐야한다. 만약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는 성장할 시장이라고 판단을 한다면 – 실은, 이런 판단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작은 시장이 앞으로 커질 시장인지는, 예측하기가 힘들다 – 이런 회사에는 투자하는 게 맞다. 현재는 시장이 워낙 작아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특히 경쟁사가 거의 없다. 시장이 너무 작으니, 이 분야에 있는 소수의 회사에 관심을 보이는 투자자도 거의 없어서, 모두 다 고만고만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 시장은 매우 매력적인 시장이고, 5년~10년 안으로 시장이 커질 수 있다면, 지금 이 분야에서 사업을 하는 창업가는 상당히 유리할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 초반에는 시장이 매우 천천히 성장하기 때문에, 잠재 경쟁사나 투자자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챌 것이고, 그동안 시간을 많이 벌 수 있다. 여러 가지 실험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고, 대부분 안 될 것이지만, 이에 따른 실패할 수 있는 시간 또한 벌 수가 있다.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시장이 커지길 기다리거나, 또는 내가 시장 자체를 키우면 된다.

물론, 이런 현상 또한 이렇게 제삼자의 입장에서 글로 쓰는 건 쉽지만, 직접 실행하고, 그리고 시장이 커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잘 살아남았는데, 시장이 엄청나게 커지면, 웬만한 경쟁사가 진입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