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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실종

2022년 하반기에 많은 분들이 나에게 앞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이고, 언제쯤, 이 불경기가 회복될지 물어봤다. 물론, 나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미래학자도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했지만, 속으론 2024년 상반기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보면, 그냥 2024년 상반기엔 좋아지지 않겠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2023년 상반기가 되자, 여러 가지 분위기와 정성적인 지표는 – 예, 해외 투자자들과의 이야기와 느낌 – 2024년 경기도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내가 했던 말을 번복하고, 2025년이 돼야 시장의 상황이 더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작년 사사분기에, 이런 내 생각에 한 번의 전환이 더 있었고, 내 말을 한 번 더 번복했다. 2025년은 어쩌면 우리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한국은 그동안 국제적인 이미지가 너무 좋았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국가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외국인들에게 항상 자랑스럽게 주장했던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 중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USD에 대한 환율이 강한 국가라는 점이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내가 완전히 양치기 소년이 됐다. 어쨌든, 이 좋지 않은 세계 경제 상황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한국은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 모두 아주 힘든 한 해를 경험할 것이다.

2025년에는 사라지는 회사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너무 다 힘들고, 이미 폐업 준비하는 대표들이 내 주변에도 너무 많아지고 있다. 가장 먼저 문 닫을 회사들은 원래 2024년도에 폐업을 해야 했는데, 2025년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오로지 이 희망 하나로 작년 한 해를 버틴 회사들이다.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2025년도 크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매출은 작고, 돈은 없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해고되거나 나갈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더 이상 희망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과 돈은 없다.

펀딩 시리즈 스펙트럼의 다른 극에 있는 유니콘 회사들도 많이 망하거나, 아니면 유니콘 왕관을 스스로 내려놔야 할 것이다. 돈도 못 벌고, 마이너스만 만들고 있는 유니콘들이 꽤 많은데, 이들이 작년 한 해 유니콘 밸류에이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도 2025년은 시장이 더 좋아져서 다시 한번 유니콘 밸류에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힘든 2024년을 버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회사에 마지막으로 투자한 VC들이 어떻게든 기업 가치를 유지해서 본인들 투자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이 회사들을 하드캐리 했는데, 더 이상 이걸 할 순 없을 것이다. 실은, 이 VC들도 2025년에 대한 희망을 품고 힘든 2024년을 보냈는데, 더 이상 이런 희망으로 버틸 순 없을 것이다.

2025년에는 스타트업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 투자하는 VC들도 돈이 없어서 활발한 투자를 보긴 힘들 것이다. VC들도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해야 하는데, 이들에게 돈을 주는 LP들이 매우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펀드를 만드는 게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큰 도전이자 과제다. 돈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이 여러 면에서 막혀 있는 게 VC나 스타트업의 2025년도 현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벤처업계 역사상 최악의 한 해가 될 것이다. 인생 최고 공포의 롤러코스터 라이드가 될 것이니까, 안전띠 꽉 조이고, 허리띠는 더 꽉 조여야 할 것이다.

고객에게 미친 사람들

창업하려면 약간 미쳐야 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해 보면,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키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키기 때문에, 모든 변화와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고 하는 것 차제가 약간 미친 짓이고, 미치지 않으면 그냥 세상에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살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길로만 다닌다는 것인데, 내가 아는 창업가들은 대부분 비이성적이라서, 본인들이 만든 길에 세상을 적응시키려고 한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도 모두 다 약간 미쳐 있는데, 나는 이분들에게 이왕 미치려면, 다른 곳에 미치지 말고 일단 고객에게 미치라고 한다. 영어로 하면 being crazy about customers이다. 부정적인 게 아닌, 아주 좋은 의미에서 미치라는 의미인데, 항상 고객의 목소리, 의견, 행동, 그리고 시장의 신호를 예의주시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냥 예의주시만 하는 게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게 있다면, 그리고 그 요구가 우리가 봐도 합당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제공하고 만족시켜 주라는 의미다.

우리가 지금까지 280개 정도의 한국과 미국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많은 회사 중 고객의 목소리에 집착하는 팀은 10개 남짓한 것 같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 포트폴리오 중 5%가 안 되는 작은 숫자다. 재미있는 건, 대부분의 나머지 회사들도 우리랑 미팅 할 땐, 모두 다 고객에게 집착하고, 고객에게 미쳐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외부에서 본인들도 그렇게 홍보하고 다닌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의 회사들이 고객에게 집착하는 대신, 다른 곳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어떤 대표는 경쟁사에 미쳐있다. 24시간 경쟁사의 동향에만 집중하고, 경쟁사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한다. 어떤 대표는 PR에 집착한다. 어떤 대표는 펀딩에만 집착한다. 펀딩, PR, 경쟁사, 실은 모두 다 중요하지만, 고객 없는 비즈니스는 존재할 수 없고, 고객이 지갑을 닫거나, 우리를 멀리하는 그 순간 사업은 죽기 시작하기 때문에 모든 스타트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고객에게 미쳐 있어야 한다.

고객에게 집착하는 회사들은 주로 product-driven 회사들이다. 하루 24시간 고객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서 제공해 주려면, 정말로 좋은 제품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고객에게 미쳐 있는 만큼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미쳐 있다. 벤치마킹할 수 있는 외국 제품이 있다면, 이 제품을 1에서 100까지 전부 다 써보고, 전부 다 분석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고객이 새로운 요구를 할 때마다, 배운 것을 응용해서 제품을 업데이트한다. 그러므로 고객에게 미친 팀은 하루에도 여러 번 제품을 업데이트한다. 이건 이들이 뭔가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의지가 제품 업데이트로 표출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고객에게 제대로 미치려면, 개발력이 압도적으로 좋아야 한다.

고객에게 집착하는 회사들은 고객 응대(CS: Customer Support)도 너무 잘 한다. 고객의 전화, 이메일, 카톡, 문자, 심지어 회사로 방문까지, 모든 소통 채널을 열어 놓고 24시간 고객과 대화한다. 고객에게 미쳐 있는 회사는 전 직원이 번갈아 가면서 고객 응대를 하는데, 운영팀이든 개발팀이든, 고객의 요구라면 그 어떤 시간에도 즉각 응대할 수 있는 ‘5분 대기조’ 마인드가 전사적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우리 투자사 중 고객에 미친 회사치고, 잘 안되는 회사가 별로 없다. 반대로, 정말 잘 되는 회사는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고객에게 미쳐있다. 고객에게 집착하지 못하는 회사는 고객이 지갑을 여는 제품을 만들 수 없고, 이게 안 되면 회사는 절대로 커지지 못한다.

나만의 의식

작년 말부터 읽기 시작해서, 2주 동안 완독한 ‘리추얼’이라는 책으로 올해의 독서를 시작했고, 50권 목표의 첫 테이프를 이 책으로 끊게 돼서 2025년 독서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 책의 저자인 메이슨 커리는 일상과 창조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은 분이고, 항상 “모든 사람이 똑같은 24시간을 사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일까?” , “소수의 창조적인 사람들은 일반인에 비해 특별한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 “창조적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효율적이고, 더 주도적이고, 더 훈련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스스로 찾아보기 위해서 그는 지난 400년간 가장 위대한 창조자로 손꼽히는 소설가, 작곡가, 화가, 안무가, 시인, 철학자, 영화감독, 과학자들의 하루를 정리하는 Daily Routines 라는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블로그를 통해서 위대한 사람들의 하루 시간표와 작업 습관을 정리하면서, 이들을 일반인들과 확연하게 구분하는 수면, 작업, 연습, 휴식 패턴을 찾고, 혹시 일상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창조자들만의 가이드라인이 있는지 파악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정리한 게 ‘리추얼’ 이라는 책이다.

리추얼은 위대함을 달성하기 위한 습관과 루틴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우리가 잘 아는 예술가나 과학자 중 아주 괴팍한 작업 습관을 가진 분들도 많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어떤 창조자들은 반복되는 패턴보단 순간의 느낌과 영감에 의해서 아주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갔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훨씬 더 많은 창조자들이 순간의 느낌과 영감보단,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반복으로 인해 생긴 습관과 루틴에 따라서 지속성 있는 창조를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꾸준함에 대해서 읽다 보면, 이들이 위대한 창조자라기 보단 수십 년 동안 매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운동선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고, 매일 같은 회사로 출근해서 수십 년 동안 같은 업무를 하는 직장인의 삶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리추얼에서 소개된 위인들의 삼 분의 이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남긴 창조물은 책, 음악, 그림, 영화 등으로 앞으로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에 영감을 줄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서 내가 이들과 직접 이야기할 순 없지만,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이들의 위대함은 타고난 유전자나 번뜩이는 영감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매우 지루한 습관, 동작, 그리고 루틴을 거의 평생 기계적으로 무한 반복했고, 이로 인한 내공이 쌓이고 그 내공의 포텐이 터지면서 위대함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항상 나만의 정교한 루틴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 책은 나에게도 많은 꿈과 희망을 줬다. 내 이름 석 자를 남길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보단 그냥 내가 현재 하는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습관과 루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데, 이 책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습관에 대한 정의를 발견했다.

“습관은 제한된 자원, 예컨대 시간(가장 한정된 자원)은 물론이고 의지력과 자제력, 낙천적인 마음마저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정교하게 조정된 메커니즘이다. 좋은 습관은 정신적 에너지를 몸에 밴 반복 행위에 쏟고, 감상의 폭정이 끼어들 틈을 차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일을 잘하고 싶으면, 인생을 더 단순화해야 하고, 복잡한 인생을 단순화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좋은 습관과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보람, 책임감, 그리고 사명감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는 당연히 모두 다 좋아하지만, 투자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도 처음 투자했을 때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고, 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창업 초기와 같은 에너지 레벨로 사업하고 있는 분들을 나는 더욱더 좋아한다.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그동안 큰 성장을 해서 유니콘이 된 회사들보다, 고생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오히려 성장을 많이 못 한 회사들이 나는 더 반갑고 정겹긴 하다. 왜냐하면, 그 오랜 기간 동안 회사가 큰 성장을 못 했음에도 아직 살아남아 있고, 제이 커브는 아니지만 계속 고객들을 확보하고 있고, 큰 펀딩 없이 생존 하는 법을 터득한 것 자체가 많은 스타트업이 하지 못하는 큰 업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떻게 보면 이 회사가 아니더라도 갈 곳이 있는 똑똑하고 일 잘하는 팀원들을 대표이사와 경영진이 오랜 시간 동안 설득하고 동기 부여하면서 모두가 한 방향을 볼 수 있게 이끈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작년 12월에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우리 투자사 대표를 오랜만에 만났다. 2016년도에 우리가 첫 투자를 한 회사이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소액의 후속 투자를 했지만, 회사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진 못하고 있고, 대규모 투자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꽤 괜찮은 제품을 만들고 있고, 시장에서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판단해서, 우리의 8년 된 기투자사를 마치 처음 만나서 검토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회사 설명을 들어보고, 이런저런 질문도 하는 자리를 오랜만에 가져봤다.

회사 슬라이드에 아주 재미있는 사진이 있었다. 2016년도에 우리가 첫 투자 하고, 당시 팀원분들 5명과 내가 선릉역 골목 어느 식당에서 축하 저녁을 먹으면서 찍었던 오래된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니 기분이 참 좋았고, 짠하기도 했다. 일단 사진 속의 다른 사람보단 내 모습이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멍청하고, 조금 더 순진하고, 아직은 VC가 뭔지 잘 모르는, 그래서 더 용감해 보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속으로 “이때가 좋았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다음에 사진 속의 이 회사의 공동창업가들과 초기 멤버 5명의 얼굴을 하나씩 봤다. 사진으로만 봐도 모두 에너지가 넘치고, 조금은 더 앳되고, 이들에게 닥칠 미래가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로 가득 찼고, 10년이 넘게 큰 성장 없이 같은 사업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표정이라서 그런지 마냥 행복해 보였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저 때가 좋았죠”라는 말을 과거의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참 놀라웠던 건, 그 사진 속 멤버 5명 중 4명이 아직도 회사에서 현역으로 매일 최선을 다해서 같은 방향을 보고 정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처음 투자했던 8년 전과 똑같이 말이다. 우리가 투자한 진 8년이 지났지만, 이들이 같이 일 한진 10년인데, 10년째 같은 사업을 같은 에너지 레벨로 한결같이 하고 있다는 게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짜릿하기까지 했다. 더 짜릿한 건, 이 사진 속의 이들은 당시 모두 미혼이었는데,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을 다니는 동안 모두 다 결혼도 했고, 이 중 엄마, 아빠가 된 분들도 있다.

투자한 회사가 유니콘이 되거나, 좋은 엑싯을 해서 우리도 돈을 많이 벌면 기분도 좋고 보람차기도 한데, 그렇지 않아도 투자자로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이날이 그런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투자한 이 대단한 분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보람차기도 했지만, 이런 분들에게 투자한 스트롱 또한 자랑스럽고 보람찼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큰 책임감과 사명감, 뭐 이와 비슷한 기분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좋은 생각으로 시작하는 2025년이 벌써 기대된다.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

지난 주말에 영화 ‘머니볼’을 다시 봤다. 탄핵 관련 의견과 시각이 궁금해서 여러 가지 뉴스 채널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영화 채널을 지나쳤는데, 마침 이 오래된 클래식을 상영하고 있고,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인생의 모든 게 그렇듯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게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미 그 원작이 꽤 유명한 책이라서 영화가 만들어질 때부터 많은 관심이 집중됐고, 2011년에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나도 봤는데, 그때도 너무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13년 후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이전엔 나에게 없었던 인생과 사업의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돼 있었다. 영화의 모든 장면,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이런 개인적인 경험, 지식과 계속 비교하면서 봤는데, 이것도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 머니볼을 2011년도에 봤을 때도 명작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 시청했을 땐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철학, 자세와 태도가 담긴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는 감탄을 하면서 단톡방에서 친구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예찬을 하기도 했다.

특히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 빌리 빈의 남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부분의 리더와 조직원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얼마 전에 읽었던 기사는 좋은 리더의 대표적인 인재상이 바로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한테 인정받는 직원이 좋은 직원이고,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있는데, 빌리 빈의 모든 대사와 행동은 이 고정관념과 반대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서 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쓴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단주를 지향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고, 오클랜드 A’s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믿는 길을 택했고, 남이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계속했다.

나도 요새 이런 생각을 꽤 많이 하고 있다. 둘이 시작했던 스트롱벤처스가 이제 나를 포함해서 8명의 조직으로 성장했고, 이제 나는 좋든 싫든 7명의 동료이자 팀원들의 리더가 됐다. 리더십이라는 말을 우린 너무나 남발하는데, 열 명에게 좋은 리더에 관해서 물어보면, 이 중 아홉은 아마도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리더에 대한 강한 고정 관념을 갖고 있다.

솔직히 나는 우리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고민하진 않는다. 우리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결정을 하지도 않는다. 스트롱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그리고 외부 환경이 변하고 모든 것이 바뀌어도 우리가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중요한 존재로 남을 수 있기 위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 고민한다. 이런 결정을 계속하다 보면, 남이 나를 인정할 때도 있고,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덴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데 관심이 많다. 리더로서는, 내가 리더로서 한 결정들로 인해서 우리 조직이 계속 번창했으면 좋겠다. 이거 하나밖에 없다.

우리도 이건 모두 한 번씩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특히, 한국같이 남에게 인정받아야지만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과연,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직장 동료가 좋은 동료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보단, 오히려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아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