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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테 인정받는 사람

지난 주말에 영화 ‘머니볼’을 다시 봤다. 탄핵 관련 의견과 시각이 궁금해서 여러 가지 뉴스 채널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영화 채널을 지나쳤는데, 마침 이 오래된 클래식을 상영하고 있고,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인생의 모든 게 그렇듯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게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미 그 원작이 꽤 유명한 책이라서 영화가 만들어질 때부터 많은 관심이 집중됐고, 2011년에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나도 봤는데, 그때도 너무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13년 후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이전엔 나에게 없었던 인생과 사업의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돼 있었다. 영화의 모든 장면,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이런 개인적인 경험, 지식과 계속 비교하면서 봤는데, 이것도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 머니볼을 2011년도에 봤을 때도 명작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 시청했을 땐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철학, 자세와 태도가 담긴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는 감탄을 하면서 단톡방에서 친구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예찬을 하기도 했다.

특히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 빌리 빈의 남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부분의 리더와 조직원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얼마 전에 읽었던 기사는 좋은 리더의 대표적인 인재상이 바로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한테 인정받는 직원이 좋은 직원이고,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있는데, 빌리 빈의 모든 대사와 행동은 이 고정관념과 반대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서 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쓴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단주를 지향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고, 오클랜드 A’s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믿는 길을 택했고, 남이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계속했다.

나도 요새 이런 생각을 꽤 많이 하고 있다. 둘이 시작했던 스트롱벤처스가 이제 나를 포함해서 8명의 조직으로 성장했고, 이제 나는 좋든 싫든 7명의 동료이자 팀원들의 리더가 됐다. 리더십이라는 말을 우린 너무나 남발하는데, 열 명에게 좋은 리더에 관해서 물어보면, 이 중 아홉은 아마도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리더에 대한 강한 고정 관념을 갖고 있다.

솔직히 나는 우리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고민하진 않는다. 우리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결정을 하지도 않는다. 스트롱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그리고 외부 환경이 변하고 모든 것이 바뀌어도 우리가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중요한 존재로 남을 수 있기 위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 고민한다. 이런 결정을 계속하다 보면, 남이 나를 인정할 때도 있고,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덴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데 관심이 많다. 리더로서는, 내가 리더로서 한 결정들로 인해서 우리 조직이 계속 번창했으면 좋겠다. 이거 하나밖에 없다.

우리도 이건 모두 한 번씩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특히, 한국같이 남에게 인정받아야지만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과연,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직장 동료가 좋은 동료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보단, 오히려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아닌진.

62권 – 2024년

이번 주에 올해 내가 6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자랑을 했다. 해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하고, 책 종류와 분야는 특별히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를 하는데, 올해도 좋은 책을 많이 읽었고, 현재까지 62권을 읽었으니, 아마도 64권으로 올해를 마무리할 것 같다.

실은 50권의 목표를 설정한 첫해에는 그냥 내가 그 해에 실제로 몇 권을 읽을 수 있을지 실험해 보려고 독서 관련 포스팅을 했는데, 이제 해마다 연말에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글을 쓰는 게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독서에 대한 글을 쓰면 책을 많이 읽으라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데, 이건 나에겐 아주 좋은 스트레스다.

생각해 보면 작년도 정말 바빴는데, 올해는 2023년 보다 더 바빴다. 일도 더 많았고, 출장도 더 많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게 올해 나는 더 많은 독서를 했고, 운동도 더 많이 해서,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더 건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바빠서 책을 못 읽었고, 바빠서 운동을 못 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건 내 의지의 문제이고,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고, 독서하고 운동하겠다고 계획하면 둘 다 할 수 있다.

이전 포스팅이 현대의 창업가 정주영 씨 이야기였는데, “하면 된다.” 관련해서 이분이 했던 두 개의 명언을 여기서 소개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하는 데 달려 있다. 적자가 나게 계획하면 적자가 나고, 망하게 계획하면 망하는 법이다.”

내 독서 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일단 나는 더 이상 책을 구매하지 않는다. 종이책, 전자책 모두 최근 몇 년 동안 구매한 적이 없고, 빌려만 본다. 내 기본 대여 플랫폼은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이다. 여기에 없는 책은 집 근처 도서관에서 직접 빌려본다. 이 두 개를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면서 중간마다 우리 사무실 구글캠퍼스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도 책을 대여하면, 1년 365일 손에서 책이 떨어져 있는 날이 없다. 옛날 어른들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항상 몸에 책을 가까이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좋다. 나는 그냥 항상 부자가 된 느낌인데, 이 느낌은 그 어떤 행위도 대체해 줄 수 없다.

책을 읽은 후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올해 내가 플라이북에서 별 5개를 준 나의 베스트 책들을 가장 최근에 읽은 순서로 나열하자면,

정주영의 ‘이 땅에 태어나서’
아이라 바이오크의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장강명의 ‘열광금지, 에바로드’
임경선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
권민창의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이다’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
김하나의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세이노의 ‘세이노의 가르침’
데이비드 재럿의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이렇게 14권이다. 62권 중 14권이면 올해 읽은 책의 22.5%에 별 5개 만점을 준건데, 너무 후하게 준 것 같다. 참고로 작년에는 읽은 책의 12%에 별 5개 만점을 줬었다. 책을 읽을수록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예: 장강명, 임경선, 김하나) 책을 무의식적으로 골라서 읽다 보니 별 5개가 많이 나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계속 실험을 해봐야겠다.

올해 읽은 책들에 특정한 패턴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의 책을 꽤 많이 읽었고,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경영과 비즈니스 관련 서적은 최대한 안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그냥 평범한 에세이나 소설 위주로 독서했다.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5시간에 걸쳐서 읽는다는 건, 그 책을 쓴 저자의 평생의 경험과 통찰력을 단 5시간 만에 배운다는 건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남는 장사는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없고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변명이다.

내년에도 5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평등한 자본금

올해 나는 꽤 많은 책을 읽었다. 보통 일 년에 50권을 목표로 정하고, 지난 5년 동안 매해 50권 정도의 책을 읽었는데, 올해는 60권을 돌파해서 기분이 참 좋다. 60권 이상 읽은 자랑은 다음 포스팅에서 해보려고 한다.

어제 올해 62번째 책을 완독했는데,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씨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였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구글스타트업캠퍼스에는 작은 사내 도서관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책 중 하나였고, 그동안 이 책이 진열된 건 여러 번 봤지만, 페이지 수가 조금 많기도 하고, 너무 익숙한 한국 기업 이야기라서 그런지, 선뜻 손이 안 갔다. 드디어, 11월 말,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대여했는데,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실은,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현대라는 기업은 한국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를 가도 현대가 만든 제품을 우린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대단한 기업이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 회사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주영 씨도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맨손으로 현대를 시작했다는 건 대부분 알지만, 이분이 어떤 철학과 원칙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했는지 아는 분들은 별로 없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으니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현대그룹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현대에 대한 건지, 아니면 정주영 씨에 대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스타트업 창업가와 그 회사를 동일시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겐 둘 다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반성도 많이 했다.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 한국인들은 존경하거나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기업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한국보단 항상 외국인 CEO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내가 일하는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들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고, 누구한테 얼마의 투자를 받아서 얼마나 단기간에 유니콘 기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셜 미디어에 자주 포스팅을 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의 CEO나 한국의 창업가들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다. 한국에도 대단한 기업과 이 기업을 만든 창업가들이 많은데, 우린 너무 밖에서만 좋은 role model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닌지 반성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내 등잔 밑이 참 어두웠다는 것이다. 정주영 씨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이분의 인생 자체가 현대였기 때문에 이 책은 현대의 창업 이야기이고, 그 어떤 창업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 이런 면에서는 나는 현대도 엄청난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세세한 서평을 쓰진 않겠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권장하고 싶다. 아마도 정주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조각조각 많이 들었겠지만, 이 분이 어떻게 현대를 창업했고, 현대가 어떤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고의 회사가 됐는지, 이 자서전을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하지만 가장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말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 평등한 자본금을 열심히 활용한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게 현대의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이 자본금을 그냥 잘 활용한 게 아니라, 정주영 씨는 정말 오지게 잘 활용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간이라는 평등한 자본금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부터 더 잘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작은 시장, 작은 전략 vs. 큰 시장, 큰 전략

우린 매주 전체 투자팀이 모여서 현재 각자 보고 있는 회사, 같이 검토하고 있는 회사, 그리고 투자 결정을 해야 하는 회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큰 VC들과 같이 심각하고 딱딱한 투자위원회(IC: Investment Committee) 미팅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의 IC 미팅과 결정도 다 한다. 우리 투자팀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이다. 이 분야에서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고, 나이도 30대 후반 ~ 50대 초반의 투자팀원이 3명이고, 젊고 상대적으로 투자 경험이 적은 20대 투자팀원이 3명이다. 경험의 차이, 나이의 차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 남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 등, 이 모든 것을 감안해보면 같은 회사와 창업팀에 대해서 각 투자팀원이 보고 느끼는 건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미팅은 다이나믹하고, 컬러풀하고, 재미있다. 모두 성숙한 어른이라서 개인적인 감정싸움으로 가지 않는 범위에서, 같은 사업과 창업가를 이렇게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하면서, 하지만 동시에 나름 직설적이고 투명하게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팀 차원에서 공유하는 건 말 같이 쉽진 않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린 모두 다 더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투자자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주간 미팅에서 하는 생각이나 발언을 보면, 내가 요새 선호하고 찾는 창업가는 뭔가 거창한 사업을 하겠다는 분들보단, 작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분들이다.

어떤 창업가는 처음부터 거창한 그림과 비전을 제공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엄청난 전략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데카콘을 목표로 창업했고,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큰 포부가 있다. 이런 분들은 작은 사업엔 관심이 없다. 작은 사업을 목표로 했으면 굳이 이 힘든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생각하는 모든 단위 자체가 너무 크다. 원하는 투자금도 크고,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지만, 원하는 밸류에이션도 너무 크다. 이런 분들과 미팅하면 재미있긴 한데, 현실성에 있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이런 분들이 본인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면 데카콘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완전히 반대의 창업가들도 있다. 이들의 그림은 처음부터 매우 작다. 그림이 작기 때문에 비전이 작거나, 창업 당시에는 비전 자체가 없다. 그리고 뚜렷한 전략도 없다. 즉, 아주 작은 시장에서 아주 작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에게 그럼 이 사업이 아주 잘 됐을 때의 최종 목표나 비전에 대해서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냥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다음 문제를 해결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 과정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다 보면, 뭔가 더 큰 비전이나 그림이 보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나는 요샌 후자의 창업가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당장 존재하는 불편함과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금액으로 환산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TAM, SAM, SOM 등으로 나눠보면 아주 작다. 하지만, 거창한 비전을 세우고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기루에 갇혀서 꿈만 좇고 그 어떤 것도 실제로 만들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큰 시장과 큰 비전을 믿는 창업가들보단, 나는 작은 시장에서, 아주 작지만, 확실한 real problem을 해결하고 있는 사람들을 요샌 선호한다.

이런 마인드로 사업을 하다 보면, 아주 작은 시장 같아 보였던 문제가 생각보다 더 큰 시장이 되는 걸 많이 경험했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쌓이다 보면 아주 큰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작은 점

요새 창업가들에게 참 힘든 시기이다. 나도 이 블로그에서 좋지 않은 경기에 대해서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 많이 포스팅했고, 내가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모든 창업가들과 투자자들은 지난 2년 동안 매일 직접 몸으로 이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나는 이 어려운 시기에 VC라는 업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이 업의 본질에 대해서 배우고 있어서, 힘들지만, 오히려 더 의미 있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적엔, VC라는 업은 그냥 스타트업에 투자만 잘하면 되는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종류를 막론하고 좋은 투자 대상을 발굴해서 좋은 조건에 투자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되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배우면서 느끼는 건, VC라는 업의 진짜 본질은 투자한 회사가 어려울 때, 그 회사와 같이 싸우고, 경영진들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같이 찾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은, 투자하는 건 VC의 업무 중 가장 쉽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이 회사들이 망가지거나,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때 – 그리고 투자를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힘들지 않거나, 망가지지 않는 스타트업은 없다는 걸 – 같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가장 어렵고, 오히려 더 중요한 VC의 업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남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고, 남이 건드리지 않는 똥을 치우고 싶진 않지만, VC의 본질은 바로 이런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실은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이런 궂은일을 안 하려고 한다. 세월이 좋고, 회사가 잘 되면 모두 다 본인들이 잘 투자했고, 잘 관리했고, 그리고 그 회사를 “키웠다”라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지만,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면 너도나도 모른척하고 도망가기에 바쁘다. 이게 사람의 습성이고, VC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투자사에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면 그냥 모른척하고, 미루고, 도망가고 싶지만, 이렇게 하는 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결국엔 우리 스스로 엄청나게 후회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정면 돌파는 참 괴롭고 힘들지만, 하다 보면 문제가 잘 해결되는 운 좋은 경우도 있고, 잘 안되더라도 기분이 찜찜하진 않다.

회사의 대표도 이런 비장한 마음이고, 투자사이자 이사회 멤버인 우리도 비장한 마음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아주 골치 아픈 이슈가 요새 하나 있다. 실은, 나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우리 투자사 대표는 오죽하겠나. 이분과 이런 회사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분도 요새 스트레스가 커서, 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집에서 시간 날 때마다 지구본을 본다고 한다.

파란 구슬 같은 지구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지구는 정말 작은 구슬 같은 존재이고, 이 작은 지구에서 본인은 정말 작은 점 같은 존재이고, 이 작은 점의 걱정과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건다고 한다. 이렇게 몇 번 지구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위안을 하면, 그나마 불안이 조금 사라지면서 다시 지옥 같은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고 한다.

이후에 나도 불안과 스트레스가 너무 크면, 지구본을 보면서 “나는 이 지구상에 점과 같은 존재다. 점과 같은 존재가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몇 번 해봤는데, 솔직히 나한테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다. 불안, 스트레스, 그리고 고민의 크기는 상대적이고,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매 순간 우리만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우크라이나랑 중동에선 매일 사람들이 죽고 있고, 그 사람들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비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하냐?”라고 물어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 나한테 닥친 고민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민거리고, 내가 싸워야 하는 나만의 생사가 걸린 전쟁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 한, 큰 세상의 작은 점 하나가 겪는 더 작은 시련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불안을 바라보는 건 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괜찮은 방법의 하나인 것 같다. 계속 연습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