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더 쉽게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에 How I Built This에서 PayPal 마피아 중 한 명이고, 실제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만든 CTO Max Levchin의 2022년도 인터뷰를 다시 들었다. 2022년도에 이 팟캐스트를 정말 재미있게 들었고, 당시 내 생각과 회고를 포스팅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들어보니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몇 가지 내용은 새롭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때의 내 지식, 경험과 3년 후 지금의 내 지식, 경험은 다르므로, 같은 팟캐스트를 들어도 내 지식과 경험의 수준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다르게 와닿았던 것 같다.

나도 오래전에 맥스와 교류했던 경험이 있는데, 정말 똑똑한 엔지니어지만, 비즈니스 감각도 아주 뛰어난 창업가로 기억한다. 이 인터뷰에서 맥스는 페이팔을 만들 때 가장 고민했던 점은 이 서비스를 더 쉽게 만들어야 했던 부분이라고 한다. 당시에 페이팔 말고도 인터넷으로 돈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제품도 있었는데, 시장에서 도입률은 매우 낮았다. 그 이유는 뒷단의 엔지니어링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복잡한 뒷단의 엔지니어링이 그대로 앞단에도 적용돼서, 남에게 내 돈을 보내는 준비만 하다가 사용자가 지쳐서 서비스 이탈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페이팔이 없어도 사람들은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결제를 이미 잘하고 있었다. 물론, 더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특별하게 고장 나지 않은 프로세스와 문화를 바꾸기 위해선, 페이팔은 무조건 더 쉽게 설계되고, UI와 UX가 딱 보면 직관적이어야 했다. 오프라인에서 무언가 사기 위해선 주머니나 백 안의 지갑을 꺼내고, 이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서 지급하면 된다. 카드도 마찬가지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이걸 그냥 긁으면 된다.(요샌 긁지 않고 갖다 대기만 하면 되는데, 당시엔 NFC 기술이 약했다). 온라인 서비스로 따지면 두 번의 클릭으로 결제가 가능한 것인데, 페이팔이 엄청나게 커지기 위해선, 현재의 결제 방식보다 더 쉬워야 한다는 건 페이팔 초기 멤버 모두가 동의했던 몇 안 되는 내용 중 하나였다.

이 부분에서 맥스의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이 돋보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는 많은 뛰어난 개발자들은 남들이 잘 못 하는 걸 하고 싶어 한다. 이러다 보면 더 좋은 제품엔 더 복잡한 기술이 들어가고, 더 복잡한 엔지니어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게 어쩌면 맞을 수도 있지만, 실은 가장 뛰어난 기술과 복잡한 엔지니어링으로 만든 제품이 가장 좋은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고객의 입장에서 가장 사용하기 쉬운 제품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UI/UX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고, 이 건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중요하다.

페이팔이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보내는데, 그 사람의 이메일만 입력하면 그에게 돈이 간다는 건 당시에 충격적인 센세이션이었다. 돈을 보내고도 정말로 내 돈이 갔는지 약간 의심할 정도로 UI/UX를 쉽게 만들었다. 하지만, 뒷단에는 그 시대 최고의 암호화 기술이 이 복잡한 돈의 움직임을 매끄럽게 만들어줬다.

그 어떤 서비스를 만들더라도 – 이건 B2C든 B2B든 상관없다 – 무조건 쉽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쉬운 서비스의 정의는 주로 고객과의 최종 접점인 UI와 UX에서 결정된다. 사용하기 쉬우면, 쉽고 좋은 서비스다. 꽤 많은 분들이 아직도 사용하기 쉬운 제품은 기술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가장 기술력이 뛰어난 제품은 가장 사용하기 쉬운 제품이다.

왜 더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

*악플을 쓰시려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특히 주의 바랍니다. 내가 악플은 세상 누구도 읽을 수도 있지만, 쓰시는 분은 반드시 읽습니다. 악플은 남을 향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합니다.

2월에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이라는 글을 썼다. 솔직히 나는 그냥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을 그냥 포스팅했는데, 시장에서 꽤 많은 반응이 있었다. 한 달 만에 댓글이 약 250개 넘게 달렸는데, 주말에 전부 다 읽었다. 좋은 내용도 있지만, 공간 낭비하는 내용도 많아서, 좋은 내용 중 내가 바로 답변 할 수 있는 건 답변을 했고, 생각이 조금 더 필요한 건 나중에 답변하고 싶은데, 그동안 댓글이 너무 많이 달려서, 언제 다 답변할지 고민 중이다. 어떤 분이 답변하기 곤란한 댓글은 내가 무시한다고 했는데(“지 대답하기 곤란한 건 댓글 안 남기네 ㅋ”), 그건 아니고, 이 댓글처럼 답변할 가치가 없는 댓글은 댓글 안 남기는 게 맞지만, 댓글 중 대답하기에 곤란하지만, 좋은 내용도 많다. 이 댓글들은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서 답변을 언젠간 남길 계획이다.

다른 분들의 댓글을 보면 일단 항상 같은 생각을 하는데, 세상엔 정말 다양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다양한 스타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나도 이 사업을 하면서, 최대한 머리와 가슴을 활짝 열고 그 어떤 것도 내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만, 많은 분들이 달아준 코멘트를 읽으면서 아직도 나는 내 생각이 꽤 강하다는 걸 느꼈는데, 그렇다고 이걸 또 크게 반성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의견과 믿음이 있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상식을 크게 밑도는 의견을 주신 분들도 많았다. 그분들은 내 생각이 틀리고, 본인들의 생각이 맞는다고 주장하겠지만, 나 또한 그분들의 의견들보단 내 생각이 상식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근거 없고 감정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또 반대로, 좋은 자료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논리적이고 생산적으로 비판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국도 미국같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면 직원들이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내용이다. 이 중,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면 본인들도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도 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히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에서 우린 돈을 받고 그만큼 우리의 시간을 남에게 빌려주는 거라서, 받는 만큼 일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의견을 감정적으로, 그리고 익명으로 남긴 분들 중 몇 명이나 본인 연봉의 절반 값이라도 할지 매우 궁금하기도 하다. 본인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회사에서 그만큼 대우를 안 해준다고 생각할 텐데, 오히려 회사에서는 이런 분들에게 지금 주는 월급도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아주 오래된 논쟁이긴 한데, 정말 일을 잘하고 능력 있는 분들인데 회사에서 그만큼 보상을 못 받는다고 느낀다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다른 직장으로 옮기면 된다. 왜 현재 직장에서는 이분의 능력만큼 대우를 안 해줄까?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어쩌면 그 회사에서는 이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능력도 없고 일도 잘 못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더 높은 연봉을 받아야 하는데 회사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냥 받는 만큼만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더 대우가 좋은 곳으로 이직할 능력은 없으니 그냥 계속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만 회사에 있다면, 그 회사는 발전할 수가 없고, 제발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직원 중 이런 분들은 한 명도 없길 바란다.

실리콘밸리 회사들같이 억대 연봉을 주고, 스톡옵션을 주면, 본인들도 한국에서 개 같이 일 할 수 있다는 의견도 많았다. 음,,,이 의견들도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긴 했다.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5억 원 연봉을 받는다고 해보자. 절반 세금 내면, 세후 월급이 2,100만 원 정도인데, 가족이 있다면, 그리고 월세를 내고 있다면, 1,000만 원 이상이 월세로 나갈 수 있다. 애들이 있다면 엄마, 아빠가 각각 차가 있어야 하는데, 자동차 할부값 내고, 생활비 내고 하면, 솔직히 거의 저축을 못 할 수도 있다. 이 동네 물가가 얼마나 살인적인지 아는 분들은 내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실리콘밸리의 높은 연봉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니고, 돈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 동네 스타트업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 회사는 스톡옵션도 안 주고, 회사 잘 되면 대표만 부자가 된다고 했는데, 그건 그 회사의 문제지 한국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회사에 다니면 그냥 스톡옵션 주는 회사로 옮기면 된다. 아니면, 본인이 일을 못 해서 주식 보상을 못 받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런 부류의 댓글에 대해서는,

“너 같은 인간들이 있으니까 벤처 캐피탈 운운하는 인간들이 흡혈귀 취급을 받지.”
“VC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생각이 남다르시네요”
“글 쓴 분은 벤처캐피탈 대표니까 이런 발상이 되죠 ㅋㅋ”

이 글은 내가 쓴 것이지 VC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혹시나 나는 주 3일 근무하고, 주중에 골프 치고, 밤에 술 먹고, 일도 안 하면서, 투자한 회사 대표들 족치면서 개 같이 일하라고 닦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완벽한 오산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나는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창업가분들만큼 열심히 일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일 짜증이 났던 이런 댓글이 있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총,균,쇠 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정복하는 문명과 정복당하는 문명의 차이는 사람들이 근면하고 게으르고의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였다.. 라는 내용이 주제입니다.
사실 한국은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망했으나 아직 망함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와서 좀 더 열심히 일해 봤자 돌이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애 낳을 시간도 없었던 거 같네요.”

그 환경은 그럼 누가 만들까? 그냥 처음부터 환경이라는 게 만들어져 있었을까? 우리 개개인이 이 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지금 한국은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이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정복하는 문명이 정복당하는 문명이 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이분이 어떤 분인지 참 궁금하다. 그리고 왜 그럼 아직 한국에 살고 있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돈이 없거나, 온갖 핑계를 대면서 외국에 못 나간다고 하겠지. 그럼 더 열심히 해서 한국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진 않을까?

잘 사는 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선, 국민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한국도 이젠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끼기 시작했는데, 모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스타트업은.

소프트웨어는 방법을 찾는다

2월 26일 엔비디아가 4Q 실적 발표를 했다. 이렇게 큰 회사가 아직도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면서 AI 시장을 장악하는 동시에 스스로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출장 중이었는데, 호텔에서 CNBC의 실적 발표 후 젠승황과의 인터뷰를 봤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 젠슨황의 자신감, AI가 가져올 큰 변화 등이 그대로 느껴지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젠슨은 일도 잘하고, 영어도 완전히 미국인처럼 유창하게 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서 언론에 나오면 항상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CEO라고 생각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항상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소프트웨어는 알아서 방법을 찾는다(software finds a way)”

대충 무슨 말인진 모두 다 알 것이다. 엔비디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GPU 칩을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일찍이 GPU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너무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GPU 하드웨어에 대한 독보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했다. 실은, 이 하드웨어 경험만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텐데, 여기에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실력도 그동안 연마할 수 있었다. 결국엔 하드웨어를 잘 구동 시켜서 같은 환경에서 더 높은 성능을 뽑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동안 배웠기 때문에, 내가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엔비디아의 높은 기업가치는 하드웨어보단 이런 소프트웨어 실력 덕분인 것 같다.

하드웨어는 한 번 만들면 고치기 힘들고, 그 구조 자체가 경직되어 있어서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소프트웨어는 추가 비용 없이 초기 버전을 얼마든지 수정하면서 비약적인 개선이 가능하다. 유연한 소프트웨어는 물과 같이 흐르면서, 물리적으로 제한된 하드웨어, 나라마다 다른 산업적 규제, 그리고 계속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기술을 진화시키고 최적화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제자리를 항상 찾아간다.

그런데, 젠슨의 이 말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서 해석해 본다면, 아마도 이분은 항상 방법을 찾는 소프트웨어를 찬양한 게 아니라, 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드는 엔지니어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 창업가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면, 항상 많은 걸 배우면서 느끼는데, 역시 가장 놀라운 건 이들의 생존력과 적응력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이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서 찾는다. 내가 이런 분들을 보고 바퀴벌레 같다는 존경의 비유를 자주 하는데,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바퀴벌레를 가두어도 결국엔 방법을 찾아서 탈출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큰 위기에 봉착해서 더 이상 길이 안 보이는데, 우리의 창업가들은 무조건 방법을 찾는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젠슨이 말 한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이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 것이다. 나는 젠슨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분이 엔비디아의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찬양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은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고 투자하는 창업가들이야말로 항상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덜 약속하고; 더 해주어라

우린 어쩔 땐 하루에도 열 개가 넘는 회사 자료를 검토한다. 관심이 가는 사업은 조금 더 자세히 보고, 그렇지 않은 사업의 자료는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보는 부분 – 예를 들면, 창업팀의 이력이나 매출과 같은 수치가 있는 페이지 – 외엔 빠르게 스캔하고 스크리닝하는 편이다. 모든 회사는 다르고, 모든 비즈니스는 다르므로, 자료의 내용은 회사마다 다르지만, 웬만한 자료는 공통으로 3년 또는 5년 치 매출 추정이 들어간 페이지가 한두 개 있다.

솔직히 우린 이 예상 매출 슬라이드는 잘 안 본다. 어떤 대표들은 이 슬라이드의 숫자를 만들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예측치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서 상당히 복잡한 엑셀을 돌리거나, 아주 무거운 number crunching을 한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땐, 초기 스타트업의 미래의 매출 수치는 거의 90% 정도 디스카운트 하거나, 아예 무시해도 된다. 솔직히 다음 달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사업인데 3년 후의 매출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억지이고, 아무리 정교하게 모델링을 해도 대부분의 수치는 목표와 말도 안 되게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대부분 첫 2년은 큰 성장이 없고 손실이 많이 발생하다가 갑자기 3년 차부터 매출이 20배씩 뛰면서 흑자가 발생하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솔직히 대표들도 이런 그림을 투자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본인들은 속으로 민망한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시간 낭비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아직 1,000만 원의 매출도 못 하는 회사가 3년 후의 매출을 예측하는 건 실용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 숫자를 시뮬레이션해 봤다는 건, 대표가 회사의 전략, 비즈니스모델, 고객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는 의미라서 이 사실 자체는 투자자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주긴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서 계산해 본 숫자를 투자자들이 믿는가에 대해선 나는 매우 부정적이다. 나도 투자자지만, 3개년 프로젝션 등의 수치가 보이는 슬라이드를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 버리는 편이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미래의 목표 매출을 투자자들에게 제시할 때, 이 목표가 투자금이 있어야지 달성 가능한지, 아니면 투자금 없이 현재 자원만으로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펀딩을 돌 때, 그 투자금을 받았을 때 달성 가능한 목표를 자료에 기재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작년 매출이 1억이었는데, 올해는 30억을 하겠다는 약간 비현실적인 추정치를 제시하는 대표들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면, 현재 펀딩하고 있는 10억 원의 투자를 받으면 사람도 채용하고, 마케팅도 하고, 영업도 더 하고 해서 목표 30억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말이다.

이분들에게 그럼 이번에 10억 원보다 적은 5억 원만 투자받거나, 아니면 아예 투자를 못 받으면 매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생각해 봤다면 훨씬 낮은 수치를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목표 매출의 절반도 못 하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때부턴 이 창업가와 회사를 약간의 의심과 디스카운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모든 VC를 대변해서 말할 순 없지만, 회사 자료에 3년~5년 매출 추정치를 넣으려면, 기본적으로 외부 투자 없이 현재의 인력과 돈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산정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또는, 아주 명확하게, 얼마의 투자를 받으면 달성할 수 있는 공격적인 수치와 투자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확실히 구분해 주면 좋겠다. 투자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보면 너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을 것이고, 투자 없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매출을 계산했는데, 이게 너무 초라해 보인다면, 그냥 우린 현재로서는 외부 투자에 의존하는, 형편없고 초라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VC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서, 뭘 어떻게 표시하더라도 결국엔 이런 현실을 잘 파악할 것이다.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번 강조했듯이, 올해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현재 우리가 가진 돈, 인력, 캐파를 150% 돌렸을 때 달성 가능한,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를 투자자들에게 제공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화하는 게 서로에게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투자를 받았을 때 달성할 수 있는 공격적인 목표도 솔직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돈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회사들은 대규모 투자를 받은 후에 매출이 역성장하는 경우도 많고, 이미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회사 상황이 안 좋아서 대규모 감원을 한 회사는 오히려 매출이 두 배 성장한 경우도 있다.

우리 투자사에 내가 항상 조언하는 건, 투자자들에게 약속하는 목표는 되도록 보수적으로 산정하고, 이 보수적인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사업을 잘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underpromise; overdeliver들의 대가들이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잘할까? 이 세상은 허세와 뻥카로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더 강해 보이고, 어려운 상황을 얼렁뚱땅 넘어가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overpromise 하는데, 결국 이들은 모두 다 underdeliver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이들의 신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만 더. 책 읽고 책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하기 좋아하는 대표들이 사랑하는 전사 OKR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전사 목표를 정할 땐, 최소 90%는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해야 하는데, 내가 아는 너무 많은 회사들이 1년 내내 60% 도 달성 못 하는 비현실적으로 빡센 목표를 설정한다. 이렇게 overpromise; underdeliver 하려면 뭐 하러 전사 워크숍을 가고, 바쁜 임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가?

덜 약속하고, 더 해주어라. 사업이든, 인생이든, 우정이든, 연애든.

등잔 밑은 항상 어둡다

(이 블로그에 쓰는 글은 당연히 다른 사람이 다 읽을 수 있지만, 이 글은 남보단 내 스스로의 반성, 배움, 그리고 성장을 위해서 쓴다.)

우리가 2018년도에 투자한 Norae라는 미국 스타트업이 있다. Ryan이라는, 한국 분은 아니지만,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좋아하는 창업가가 시작한 회사다. 회사 이름 Norae(노래) 자체가 이 팀이 얼마나 케이팝을 좋아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데, 첫 번째 비즈니스는 틱톡의 모태가 된 Musical.ly랑 동일했다. 립싱크하는 동영상과 커버댄스 동영상을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였는데, 여기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콘텐츠가 케이팝이었다.

콘셉트는 재미있었지만, 사업 자체는 썩 잘되지 않았다. 아니, 잘 안된 게 아니라 진짜 별로였다. 똑똑한 창업가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워낙 작은 회사라서 돈도 없었고, 나도 뮤직쉐이크를 통해서 배웠지만, 음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소셜 미디어가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건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작은 투자금은 다 썼고, 팀원은 대부분 떠났고,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스타트업 폐업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이 창업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동 창업가와 방법을 찾아서 계속 서버비를 벌고 앱 자체는 운영이 되게 정말 열심히 허슬했다. 중간에 한 명씩 차례로 다른 회사 업무를 해주면서 외주비도 벌고, 하여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동원해서 바퀴벌레같이 살아남았다.

그런데 틱톡이 너무 커지자, Norae의 가능성은 점점 더 없어졌고, 아마도 이 시점에 다다르면 대부분 창업가들이 그냥 회사 문을 닫을 텐데, 이 회사의 코파운더들은 피봇을 시도했고, Coverstar라는 어린이들을 위한 안전한 TikTok과 유사한 앱을 만들어서 출시했다.

미국 회사라서 한국 창업가만큼 자주 연락하거나 만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계속 이야기하고, 상의할 게 있으면 조언도 하면서 이 팀의 변화를 나는 계속 지켜봤다. 내가 항상 바퀴벌레같이 절대로 죽지 말고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맘속에서는 그냥 회사 문 닫는 게 모두를 위해서 맘 편할 텐데 또 안 될 앱을 새로 만드는 게 안쓰럽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꾸역꾸역 조금씩 진도를 나아갔고, 우리가 첫 기관 투자자이기도 하지만, 초반부터 창업가의 허슬과 노가다를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사업 관련 모든 내용을 지속적으로 투명하게 공유해줬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우리에게 추가 투자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개인적으로 친한 주관적인 감정과 느낌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이 사업, 제품, 팀을 – 팀이라고 해봤자, 코파운더 두 명밖에 안 남았다 –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판단하면 잘 될 가능성이 너무 낮은 사업이라고 판단해서 이 회사에 스트롱이 단독으로 추가 후속 투자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매번 내렸다. 여러 번 검토했지만, 매번 우리 팀에서는 pass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최근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a16z에서 이 회사에 투자한 것이다. 그것도 단독으로. 이 투자자에게 피칭했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실제로 텀싯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을 때, 즉시 내 머릿속에 “왜 우린 투자하지 않았지?” , “우리만 뭔가 못 봤던 건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크고 유명한 VC에게 투자받는다고 해서 사업이 잘되는 건 아니고, a16z가 잘 못 판단한 투자도 수두룩하게 많다. 그래도 이렇게 크고 경험이 많은 VC가, 우리가 수년 동안 잘 알고 있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매번 투자하지 않은 우리 포트폴리오사에 후속 투자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기쁘기도 했지만, 뭔가 아쉽고 허전했다. 우리가 만약에 이전에 이 회사에 추가 투자했다면, 훨씬 더 싸고 좋은 조건에 투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배가 아프기도 했다.

전형적으로 등잔 밑이 어두웠던 케이스였다.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포트폴리오사를 실은 우리가 제일 잘 몰랐던 것이다. 아니, 몰랐던 건 아니고, 오히려 너무 잘 알고, 너무 오랫동안 본 팀이고, 이 팀이 그동안 어떤 고생을 했는지 샅샅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어쩌면 우린 그 뒤에 숨은 장기적인 가능성을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크고 유명한 VC에서 투자했다고 그 회사가 장기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난 스스로 이번 계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역발상적인 생각과 반성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지난 13년 동안 투자했던 모든 포트폴리오사를 다시 한번 검토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팀 전원이 좋은 창업가와 회사를 남보다 먼저 찾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어쩌면 스트롱 포트폴리오에 이런 분들이 있는데 등잔 밑이 어두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친하고, 너무 잘 알고, 너무 당연한 것들의 진가를 우린 못 알아볼 때가 있는 것 같다. 우리 투자사의 후속 투자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이는 투자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서 생각해서 봐야 하는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