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

big-fish-little-pond과거에 ‘서울만 중요한가?‘ 라는 포스팅에서 나는 굳이 모든 회사가 서울로 올 필요가 없다는 걸 강조했다. 아직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우리가 투자한 몇 안 되는 지방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상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내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지방의 열악한 환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러다 보니, 회사의 위치에 대한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지방에서 완전히 뿌리를 박고, 회사가 커지면 서울에 지사나 사무실을 하나 만들자는 내 주장과 지방에서 시작하지만, 조금만 회사가 성장하면, 본사를 서울로 옮기자는 팀의 주장이 극과 극으로 충돌하고, 답이 없는 대화로 끝난다. 물론, 내가 강압적으로 이런걸 강요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결정은 대표이사와 경영진이 하는 거고, 대부분 회사는 돈을 어느 정도 벌면, 지방을 떠나서 서울로 이사하는 결정을 한다.

그래서,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인에 대해서 생각해봤고, 이에 대한 내 입장을 한번 정리해본다. 지방에서 창업했는데, 사업 규모가 커지면 서울로 본사를 옮길 생각을 하는 창업가를 지금까지 꽤 많이 만났는데, 이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보, 네트워크, 벤처캐피털, 공간, 그리고 채용이다. 간혹 겉멋에 사업하는 창업가들이 본사 주소가 강남이 아니면 파트너나 고객이 무시한다는 이유로 서울, 그것도 강남으로 이전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가짜 창업가들이다. 우리는 이런 인간들을 주로 fauxpreneur라고도 한다.

하나씩 짚고 넘어가 보자. 지방에 있으면 서울보다 정보의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아마도 다음 항목인 네트워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 같다. 일단, 단순 정보에 대해서는 이건 무조건 틀린 말이다. 대부분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널려있는데, 서울에 있든 지방에 있든, 그 접근성은 똑같다. 의지만 있다면, 그래서 충분한 시간만 투자하면, 전 세계 모든 정보는 손가락 하나로 접근할 수 있다. 충분한 의지와 끈기만 있다면,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도, 구글 검색으로만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아마도, 지방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지방에는 서울과 같은 좋은 네트워킹 모임이나 행사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 같다. 즉,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과 투자자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반만 동의한다. 서울에는 지방보다 네트워킹 모임이 많은 거지, ‘좋은’ 네트워킹 모임이 많은 건 아니다. 솔직히 서울의 네트워킹 행사나 모임 대부분 별로 영양가가 없다. 새로운 사람 또는 이미 아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는 건 맞지만, 이게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나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낮다. 오히려 제품을 만들고, 고객한테 집중해야 할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그러니까 회사를 서울로 옮겨서, 이런 화려한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하면, 갑자기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거라는 순진해 빠진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나만 잘하면, 서울이든 지방이든, 좋은 정보와 좋은 사람에 대한 접근성은 저절로 생긴다. 오히려 이들이 나를 찾아온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시각에서 본 것이다.
지방에는 VC가 거의 없다. 이건 사실이다. 그리고 지방에는 서울만큼 쉽게 투자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의 스타트업이 투자받을 수 있는 확률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투자자도 좋은 회사 냄새는 금방 맡고, 좁은 투자자 커뮤니티 내에서는 잘 나가는 회사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진다. 지방에 있는 회사가 좋은 실적을 내면서 잘 성장하고 있으면, 투자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서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럼 왜 우리 회사는 투자자가 안 찾아올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당신의 회사가 후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은 디캠프, 마루180, 구글캠퍼스, 카우앤독 등 코워킹스페이스가 많은데, 지방은 이런 공간이 전혀 없어서 창업이 활성화되기 힘들어요.”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아주 많이 듣는다. 스트롱도 구글캠퍼스 안에 사무실이 있고, 디캠프와 마루180에도 나는 가끔 가는 편인데, 이런 공간이 지방에 없어서 창업하는 데 불리하다는 생각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공간이 있든 없든, 창업은 할 수 있고, 회사를 키울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서울로 이사 오면, 이런 코워킹공간에 누구나 다 입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후진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서울이든 지방이든 대접받지 못한다.

실은, 채용에 대해서만 나는 서울로 오고 싶어하는 창업가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대한민국의 좋은 인재들이 서울로 많이 몰리는 건 사실이다. 좋은 대학교도 서울에 많고, 좋은 직장도 서울에 많기 때문에, 서울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 하지만, 그래서 무조건 서울로 와야겠다는 대표이사들은 채용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울에 너무 꽂혀서, 처음부터 지방대학 출신이나, 그 지역의 인재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걸 나는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이다.
채용에 대해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좋은 인재를 데려오려면, 큰 물의 작은 고기가 되기보다는 작은 물의 큰 고기가 돼야 하는데, 이게 서울로 올라오면 쉽지가 않다. 서울에 오면 우리 회사는 수많은 벤처기업 중 하나가 될 텐데, 과연 최고의 인재를 채용할 수 있을까? 한국 최고의 회사, 그리고 간혹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회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에서 우리가 이들과 경쟁해서 더 좋은 인재를 데려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경쟁이 덜 치열하고, 그나마 우리가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지역이나 시장에서, 그 지역 최고의 인재들을 채용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CNBC의 2017년도 조사에 의하면, 서울은 전 세계에서 6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이다. 이 결과의 신빙성은 좀 떨어지지만, 어쨌든 서울은 물가가 높은 도시다. 아직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스타트업이 서울로 이사 오면, 비용 구조는 최악이 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활주로(runway)가 엄청나게 짧아진다. 이렇게 비싸다 보니, 사무실은 서울에 있지만, 직원들은 서울에서 멀리 살 수밖에 없고, 여기에 서울의 교통지옥이 합쳐지면, 출퇴근 시간이 짜증 나게 늘어난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언급한 인재 채용의 문제는 실은 지방보다는 서울이 더 심각하다.

그런데도 굳이 우리 회사를 서울로 이사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우리의 본사이고, 내가 제품을 만들고 있는 곳이 우리의 본사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Shout It Out Design>

그냥 죽지 않기

영어에는 ‘put up a good fight before you go down’ 이라는 말이 있다. 시합에서 패색이 짙어지거나, 또는 전쟁에서 죽을 게 확실해지는, 그런 불리한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모든 걸 걸고 최후의 한판을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에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엔 지거나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굉장히 멋있고 창업가들의 정신을 아주 잘 반영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이제 펀드에서 공식적으로 투자한 지 6년이 되어간다. 모든 펀드와 비슷하게, 투자사 중 잘 하는 회사가 있고, 잘 못 하는 회사가 있다. 잘 안되는 회사가 훨씬 많은데, 이 잘 안되는 회사 중, 잘 될 기미가 별로 안 보이는 회사도 많다. 물론, 공개적으로 티는 안 난다. 하지만, 대표이사와 이야기해보면, 회사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걸 대표와 투자자 모두 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대표와 직원들이 이야기 할 때도 이런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고, 그 산을 못 넘을 확률이 더 높다는 걸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봐야 한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투자사 중,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V자로 리바운드해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회사가 있는가 하면, 그냥 예상했던 대로 폐업한 회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회사의 창업가들이 다른 비즈니스로 다시 창업한다면, 둘 다 믿고 투자할 의향이 있다. 결과는 다르지만, 벼랑 끝까지 가는 과정을 지켜봤고, 여기까지 왔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정말 잘 버텼네. 이제 접자.” 하고 포기할텐데 – 그리고, 그렇게 포기해도 난 투자자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 그 벼랑 끝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putting up an awesome fight를 하는 것까지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어떤 회사는 벼랑 끝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아서, 전투에서 이겼고, 이제 세상을 제패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너무 다행이고, 정말 자랑스럽다. 어떤 회사는 벼랑 끝으로 떨어져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너무 안타깝지만, 그래도 정말 자랑스럽다.

어차피 창업의 길을 가는 건, 남이 안 된다고 하는 길을 나 혼자 고독하게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러면 그 끝도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끝내면 안 된다. 남들은 포기하고, 이 정도면 됐다고 할 때, 나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죽을 땐 죽더라도, “저런 독한 새끼는 처음이야”라는 말은 듣고 죽자.

카레클린트 스토리

얼마 전에 신흥 가구업체 카레클린트의 창업스토리에 대한 책을 읽었다. 나는 가구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졸업생 3명이 만든 국산 가구 브랜드의 초고속 성장 스토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회사인지 궁금했었다. 솔직히 책은 좀 뻔한 내용이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3명이 취업보다는 창업을 선택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이젠 연 매출 100억 원의 어엿한 회사를 만든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잘 읽으면서 내용을 곱씹으면, 인사이트와 경험이 넘쳐나는, 그런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창업스토리다.

실은 창업 관련 이야기는 나도 많이 읽어봤고, 내 일 자체가 이 분야에 있다 보니 신선한 건 없었지만, 내가 항상 믿고 있던 내용, 그리고 우리 투자사들이 직접 겪으면서 증명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 두 가지가 있어서 여기서 살짝 공유하려고 한다.

첫째는, 좋은 제품의 중요성이다. 좋은 제품이 최고의 마케팅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아직 시장에서는 보통 이하의 제품을 만들어서 마케팅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절대로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이 전략이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그것도 아주 장기적으로는 좋은 제품만이 좋은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카레클린트의 경우도 업계에서 입소문을 좀 타니까, 카피캣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비슷하게 생긴 제품으로 한때 가구 시장이 도배되기까지 했다.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 당연히 비즈니스에 큰 타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회사의 매출은 더 뛰었다. 왜 그랬을까? 제품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이 좋은 제품과 똑똑한 소비자가 만나면, 아무리 카피 제품들이 난무하더라도, ‘최고’의 제품은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 소비자들은 직접 발품을 팔기도 하고, 다른 고객의 리뷰를 꼼꼼히 따져보고, 직접 사용도 해보기 때문에, 정말로 잘 만든 제품이라면, 껍데기만 카피해 놓은 짝퉁이 따라올 수가 없다. 카레클린트의 경우, 오히려 카피 업체들이 이 시장에 대한 파이를 키워놓기만 하고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들이 만드는 최고의 제품은 최고의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이들은 가구를 디자인할 때 ‘누군가 따라 했을 때 이것보다 예쁘지 못하게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완벽한 제품을 디자인한다. 어떤 시장이라도, 특히 시장이 크다면, 경쟁업체는 존재하며, 그 경쟁업체는 다른 작은 스타트업이 될 수도 있지만, 삼성이나 네이버 같은 대기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리고 넘어설 수 없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면 시장에서 항상 1등 할 수 있다.

항상 사용자 편의성의 입장에서 제품을 디자인한다는 이들의 철학 또한 배울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기능을 존중한 디자인’이라는 섹션에서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써본다.

가구에는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라는 예술 영역이 있다. 이처럼 예술적인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하는 경우를 예외로 하고, 실용 가치가 있는 제품으로써 가구 디자인을 한다면 기본적으로 기능을 존중해야 한다. 카레클린트의 경우도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가구를 만드는 회사이기 때문에 디자인보다는 기능에 비중을 더 크게 두고 있다. 앉았을 때, 누웠을 때 사용자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형태에서 최고의 디자인을 뽑아내고자 노력한다. 기능을 무시하는 디자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자에게 ‘불편함’을 떠넘기는 것은 제품 디자이너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이런 현상은 가구뿐만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tech 분야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만드는 사람들은 엄청나다고 생각해서 복잡한 UI와 UX를 만드는데, 실제 사용자들한테는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기능들을 누구나 다 한두 번 정도 경험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예술적인 영역에서의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내가 알기로는 99%의 스타트업이 예술적인 영역보다는 실용적인 영역에서의 제품을 만든다? 기능을 무시하는 디자인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하지만, 실용적인 기능이 최고이며, 이는 시장과 고객과의 대화로부터 나올 수 있다.

즉,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 핵심을 건드리는 좋은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애벌레와 나비

metamorphosis지난 3주 동안 프라이머 12기 후보 회사 47개와 미팅을 했다. 참고로, 이 47개 회사는 지원한 수백 개 회사 중 서류심사를 통과한 후보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회사와 만나야 하므로, 그리고 나도 바쁜 일정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각 회사와 30분씩만 미팅을 했다. 늦은 오후까지는 나도 항상 다른 일이 있어서 평일은 주로 5시부터 7시까지, 30분 단위로 4개 후보 회사들과 만나고, 금요일은 6~7개 회사와 미팅을 했다. 짧은 미팅이 실은 긴 미팅보다 사전 준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정말 많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지난 3주 동안은 매일 평균 7~8개 팀과 미팅을 한 거 같다. 프라이머 12기 후보 회사, 스트롱 기투자사, 새로운 회사, 이렇게 하루에 많은 미팅을 소화하고 집에 가면, 목은 맛이 가고, 몸은 녹초가 돼서 쓰러질 거 같다. 항상 새로운 회사를 만나고, 뭔가 하려는 창업가들을 만나는 건 즐겁고 흥분되는데, 이번엔 정말 힘들었던 걸 보면, 나이와 함께 체력의 한계도 같이 오는 거 같았다.

미팅 시간이 짧다 보니, Y Combinator 스타일로 딱 다섯 가지만 질문했다:
1/ 우리 회사는 뭘 만드는지
2/ 왜 이걸 만드는지
3/ 우리 제품을 누가 사용할지
4/ 제품이 있다면, 현재 수치들
5/ 어떤 팀인지

매 기수가 특별하지만, 이번 12기 후보 회사도 매우 다양했다. 이미 수천만 원의 월 매출을 달성한 회사도 있었고, 작년 매출이 50억 원인 회사도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몰래 창업한 분도 있고, 아직 학생인 창업가, 그리고 40대가 훌쩍 넘은 시니어 창업가도 있었다.

아직 외부 투자를 유치하지 않고, 나름 잘 성장하고 있는 팀 중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자칫 거만해 보이는 팀도 있었는데, 이런 팀한테는 일부러 비즈니스의 여러 가지 허점을 지적했다. 이 정도를 일구었다고, 벌써 자만하는 건 앞으로 비즈니스의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냉정한 현실을 자각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양한 사업을 시도해봤는데, 지금까지 모두 처참하게 실패한 팀도 있었다. 이런 팀한테는 본인들이 하는 걸 정말로 믿는다면, 계속 시도해보라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정말로 이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만드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47번째 마지막 팀과 미팅이 끝났다. 이 중 몇 개가 프라이머 회사가 될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미팅한 모든 회사에 이야기했듯이, 프라이머 선발이 되든, 안 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실은 대부분의 회사는 잘 안될 것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팀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의지는 우리 모두한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소중한 마음가짐이다.

애벌레를 보면, 이렇게 희한하게 생긴 곤충이 나중에 화려한 나비가 될 거라는걸 예측하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같은 극초기 투자자의 역할이 더욱더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고 있다. 수천억 원이나 수조 원의 펀드를 운용하면서, late stage의 회사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펀드도 당연히 중요하고 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엄청나다. 하지만, 씨앗을 계속 뿌리면서, 토양을 기름지게 만드는 걸 도와주는 초기 투자자들은 정말로 독특하고 독보적인 존재들인 거 같다.

<이미지 출처 = eFinancialCareers>

가장 힘든 오늘

요새 나는 운동 횟수를 조금 줄인 대신, 그 강도를 높이고 있다. 강도를 높이는 데 음악이 도움이 많이 돼서, 계속 유투브 뮤직을 들으면서 웨이트를 하는데, 주로 복싱 관련 음악을 많이 듣는다. 특히 영화 ‘록키’ 음악을 즐겨 듣는데, 피로도도 감소하고,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요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록키 트레이닝 뮤직이다.

미국에서 한 일 년 정도 복싱을 했다.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그때 스트레스가 심해서, 뭔가 때려야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을거 같아서 시작했다. 어느 날 내가 흘린 땀에 미끄러질 정도로 샌드백을 미친 듯이 치는데, 땀과 함께 눈물이 막 쏟아졌다. 뭐,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펑펑 흘렀다. 실은 참 힘든 시기를 거치고 있었고, 아마도 속에 있는 불안감, 우울함, 창피함, 나약함, 뭐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눈물로 방출되었던 거 같다. 따뜻한 눈물을 흘리면서 샌드백을 치다 보니, 기분이 다시 진정되고, 내 주변을 다시 사심 없이 볼 수 있었다. 뭔가 정화가 되고, 새로운 희망이 생긴 거 같았고, 이는 내가 다시 몇 주 동안 일에 열심히 집중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런 패턴이 가끔 반복됐다.

스트레스.
스타트업을 한다면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나도 항상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거 같다. 일이 안 풀릴 때는 안 풀리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일이 잘 풀려도 나름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것도 강도가 상당히 높다. 워낙 힘든 분야라서, 일이 좀 잘 풀리면, 솔직히 막 불안해진다. “왜 갑자기 일이 잘 풀리지?” , “곧 상황이 다시 나빠질 텐데 그땐 어떻게 하지?” , “이걸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뭘 더 해야 할까?” 뭐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도 나는 항상 스스로 위안 삼는 게 있다. 투자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창업가가 받는 스트레스와는 그 차원이 다르고, 우리가 투자한 회사 대표들이 더 힘들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서 자신을 달랜다. 그래도 불안하면, 일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여러 번 한다. 좀 걷기도 한다. 와이프랑 이야기도 한다. 뭐, 솔직히 인생 자체가 스트레스의 연속이긴 하지만, 인생의 스트레스는 그래도 up and down이 있다. 하지만, 창업의 스트레스는 조금 다르다. 이 스트레스는 up으로만 가지, 좀처럼 down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참, 끝이 안 보인다는 건 더욱더 무섭고 stressful 하다. 하지만, 비즈니스를 오래 하려면, 이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완전히 제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일찌감치 깨달았고, 그냥 잘 관리하고 최대한 스트레스와 타협을 하면서 사는 게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주로 운동, 가족과의 대화, 개 산책 등으로 이걸 잘 해소했는데, 작년부터는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가벼운 명상도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지만, 꽤 유용하고, 이걸 계기로 마음 챙김 관련 앱과 비즈니스도 좀 보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는 이 분야가 전망이 꽤 밝은 거 같다.

스타트업을 하면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실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긴 한데, 그래도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하루였다면, 인생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길.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힘들고 미친 짓을 오래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