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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받지 않는 경험

3/4월은 전미 대학 농구 선수권 토너먼트 때문에 즐겁다. 이 시합은 March Madnes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와이프가 학부를 나온 미시간주립대학은 농구와 미식축구를 아주 잘하는 학교라서 항상 상위에 랭킹 되어 있다. 우승 후보였던 듀크대학을 8강에서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4강에 올라갔는데, 내가 나온 학교는 아니지만, 둘이 아주 열심히 응원하면서 경기를 봤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NCAA 농구를 보여주는 채널이 없어서 경기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꼼수를 시도해야 한다. 전에는 이런 운동경기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는 사이트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봤는데, 저작권 문제가 좀 애매해서 몇 분 보다 보면 스트리밍이 끊기고, 계속 사이트/방을 바꾸는데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 다른 대안을 찾았다.

March Madness를 가장 깔끔하게 보는 방법은 NCAA March Madness 앱 또는 유투브TV를 통해서인데, 아쉽게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는 둘 다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래도 경기를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봤다. 일단 앱스토 세팅을 미국 앱스토로 바꾼 후, 한국에서는 다운받을 수 없는 이 두 앱을 설치하고, VPN 앱을 깔아야 한다(일주일 무료 사용 가능한 ExpressVPN 추천). NCAA March Madness는 광고를 좀 많이 봐야 하지만, 이렇게 세팅을 해 놓으면, 무료로 전 경기를 볼 수 있고, 유투브TV는 월 $39.99를 내면 시청할 수 있다. 이렇게 세팅한 후 스트리밍되는 경기를 Chromecast를 이용해서 TV로 쏘면 꽤 품질이 좋은 경기 시청이 가능하다. 이론적으로는. 그런데 막상 해보면,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일단 마치매드니스앱은 폰에서는 잘 돌아가는데, 크롬캐스트로 쏘기만 하면 먹통이 돼서 큰 화면에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이건 내가 정말 다양한 실험을 해봤고, 인터넷을 다 뒤지면서 검색을 해봤는데, 그냥 어떤 경우에만 발생하는 알려진 문제점인거 같다. 유투브TV는 요새 저작권 문제 때문에 지역 관리를 더욱더 철저히 하기 시작한거 같다. VPN을 통해도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이 최근에 하나 더 생긴거 같고, 이걸 무시하면 시청을 못 하고, 이걸 하면 위치가 노출되서 시청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유투브TV의 경우, 돈만 내고 시청을 전혀 못 하고 있다.

결론은, 그 재미있는 경기를 작은 아이폰으로 둘이서 봤다. 아이패드로 보면 조금 더 큰 화면이지만, 우리 집 아이패드는 초기 버전이라서 이 iOS에는 아예 이 앱들을 깔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느낀 건,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전 세계 어디 가도 인터넷으로 연결된다고 해도, 아직 모든 일상생활에서 방해받지 않은 경험을 한다는 건 쉽지 않고 더 많은 장벽이 허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작권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단, 정책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도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즉, 아직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시장의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계속 좋은 서비스가 생길 수 있는 룸이 충분히 있는 거 같다.

결국 나는 노트북에 VPN 설치, 그리고 fuboTV라는 서비스로 노트북으로 – Chromecast가 중간에 계속 끊겨서 – March Madness 4강을 재미있게 봤다 🙂

페이지콜

pagecall더 나은 통합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우리 투자사 플링크에서 오랫동안 개발하고 튜닝한 PageCall을 베타 출시했다. 사용하는 만큼 돈을 내야 하는 유료 서비스지만, 첫 1,000분 까지는 모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데, 멀리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나 고객과 음성, 영상, 그리고 칠판을 이용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분이면 꼭 사용해보길 권장한다.

내가 플링크의 최필준 대표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2월이다. 우리 LP 중 한 분이 괜찮은 기술력을 가진 서울대생들이 있는데, 아직 사업 방향을 제대로 못 잡은 거 같으니 한 번 만나보라고 해서 연결이 됐다. WebRTC를 기반으로 스카이프와 행아웃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팀인데, 만나자마자 좋은 팀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비즈니스는 내가 보기에 조금 더 좋은 방향이 있을 것 같아서 다양한 피드백을 드렸고, 펀드레이징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그림을 함께 그려봤다. 우리는 LA와 서울에 사무실이 있고, 투자도 이 두 지역에 하기 때문에 우리 내부적으로 스카이프, 카카오톡, 행아웃, 페이스타임 등 실제 전화만 빼곤 인터넷 기반의 무료 커뮤니케이션 툴로 소통을 엄청 많이 하고, 미국에 있는 회사들과도 화상 미팅을 상당히 많이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항상 안타까운 점이 있는데, 자율주행 자동차가 출시되고 하늘을 나는 비행 자동차를 논하고 있는 2019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화상 미팅을 하려면 아직도 셋업 하는데 10분 이상이 소비된다는 것이다. 30분 화상통화를 하면, 이 중 절 반은 시스템 셋업 하고, 중간에 통신 끊기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허비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한 온디맨드 커뮤니케이션 소프트웨어는 최근에 IPO 신청한 Zoom이라는 미국 회사다. Zoom이 처음 출시될 때부터 나는 사용해봤는데 – 유료화된 이후부턴 사용하지 않는다 – 너무 잘 만들었고, 지금까지 사용해 본 화상 미팅 솔루션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시장에서 더 빠르고, 더 좋고, 더 저렴한 솔루션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도 항상 하고 있던 차에 플링크를 알게 됐을 때 관심이 많이 갔다.

페이지콜은 음성, 영상, 칠판 기능을 다 지원하는데, 이 제품의 차별점은 실시간 칠판(=canvas) 기능이다. 상대방과 단순히 통화를 하는 거면 칠판 기능이 굳이 필요 없지만, 뭔가 자료를 같이 보면서, 그 내용을 상대방한테 설명하려면 래그가 없는 준실시간 칠판 기능이 필요하다. 선생님이 학생한테 화상으로 수학 과외를 하려면 공식을 설명하고, 도형과 기호를 그리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끊기지 않고 필기 순서가 꼬이지 않는 칠판 기능은 필수이다. 보험설계사가 비대면으로 고객에게 보험약관을 설명하려면, 둘 다 약관을 보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칠판 기능이 필요하다. 성형외과 의사가 환자에게 얼굴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수술할 건지 비대면으로 설명하려면, 칠판 기능이 필수이다. 여기에 페이지콜의 강점이 존재한다.

비즈니스 용도로 페이지콜을 사용하려면, 간단한 API를 이용해서 직접 나만의 온디맨드 커뮤니케이션 솔루션을 구축할 수 있다. 위에서 수학 과외 이야기를 했는데, 엄청난 시청률을 자랑했던 JTBC 드라마 ‘SKY 캐슬’에서 소개된 화상 과외 솔루션 ‘수파자‘가 플링크의 페이지콜 API를 적용해서 만들어진 서비스다. 굳이 자체 제품을 만들기보단, 이렇게 남들의 좋은 온디맨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쉽게 구축할 수 있게 도와주는 통합 커뮤니케이션 API를 제공하는 B2B SaaS 비즈니스 모델이 한국에서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 시장은 무궁무진해질 거 같다. 특히, 경제와 고용 시장이 점점 비대면으로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행동의 가치

우리가 올해 투자한 회사 중 유아동복을 리세일(=중고위탁판매)하는 코너마켓이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미국에서는 엄청 커진 thredUP과 유사한 비즈니스다. 얼마 전에 코너마켓 새로 이사한 사무실에 갔다가 개인적으로 생각난 점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이 회사 김준모 대표님을 처음 만난 건 한 2년 전이다. 내가 벤처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프라이머에 지원했고, 그때 비즈니스는 자전거 관련 사업이었는데, 잘 안 될 것 같았고, 그냥 하다가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프라이머 그다음 배치에 다시 지원했다. 그게 코너마켓 모델이었는데, 이 비즈니스가 좋았다기 보단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업을 하고 있고, 프라이머 탈락했지만 다시 지원해준 게 고맙기도 해서 또 인터뷰를 했다. 나는 미국의 thredUP 이라는 비즈니스를 알고 있었고, 이 시장이 한국도 엄청 클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이 팀은 준비가 되지 않은 거 같았고, 과연 이 비즈니스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온라인/오프라인 실행력이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비즈니스는 좋고, 시장도 좋고, 타이밍도 좋은데, 조금만 더 지켜보자라는 결정을 내렸고, 일단 프라이머 두 번째 도전도 탈락시켰다. 그런데 그다음 배치에 다시 지원했고, 이번에는 코너마켓 모델을 꽤 날카롭게 다듬었고, 긍정적인 초기 시장 피드백을 갖고 왔다. 프라이머 권도균 대표님과 이기하 파트너님과 그때 아마도 내부적으로 “비즈니스는 실력보단 의지가 중요한데, 이 팀의 의지는 좋은 거 같다. 그리고 3번씩 프라이머 지원했으면,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고 이번에는 선발했다.

그리고 나랑 한 3개월 정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비즈니스도 다듬고, 여러 가지 기초 작업하는 걸 옆에서 나는 조금 도와줬다. 실은 이게 앞단에서 보면 이커머스지만, 뒷 단에서 보면 노가다가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다. 옷을 수거해야 하고, 수거한 옷을 정리하고, 사이트에 올리고, 판매될 때마다 또 배송해야 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물류, unit economics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힘든 비즈니스라서, 돈 없는 작은 스타트업이 하기에는 참 어렵다는 걸 이 비즈니스를 옆에서 보면서 나도 매일같이 느꼈다. 그래도 조금씩, 계속 발전이 있었다. 외형적인 매출도 조금씩 증가했지만, founder들이 비용과 물류에 대한 감을 조금씩 잡아갔고, 아주 작은 operation이었지만, 나름대로의 공식을 찾기 위해서 계속 실험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이 회사에 투자를 해야겠다고 결정한 계기는, 수거한 옷이 증가하면서, 작은 창고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 이사한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였던 거 같다. 중랑구 중화동, 1층에 닭강정집이 있고, 3층에 과격한 순복음 교회가 있는 허름한 건물의 4층이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물류 과정을 최적화하기 위해서 나름 배치를 잘했고, 두 분의 남매 코파운더가 진흙탕에서(영어로는 shithole이라고도 한다) 구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몸으로 체험하면서 모든 걸 배워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프로세스를 자동화하고 더 크게 확장하면 어떤 모습이 될지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그림을 그렸고, 얼마 후에 스트롱에서 조금 투자를 했다.

이후 처리해야 할 물량이 커지면서, 다시 한번 회사는 이사를 갔다. 돈을 아끼면서, 사람도 채용하고, 배송도 고려해서 경기도 남양주의 창고형 사무실로 이사 갔는데, 얼마 전에 내가 방문해서 찍은 사진 몇 개를 올린다.

사진 2019. 3. 6. 오후 6 49 10

실은,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많이 놀랐다. 이젠 제법 옷이 많아져서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진 2019. 3. 6. 오후 8 02 43

사진 2019. 3. 6. 오후 8 03 40

그리고 원래는 단층이었던 창고를 김준모 대표가 직접 설계해서 – 과거에 설계를 좀 했었다 – 복층으로 만들었는데, 이 또한 운영의 최적화를 고려한 설계였다.

아직 갈 길이 너무너무 멀긴 하다. 앞으로 투자도 더 받아야 하고, 매출도 더 커져야 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채용해야 한다. 그래도 쉽지 않은 사업이다. 하지만, 누가 이미 만들어 놓은 회사에 들어가서,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하던 일을 배운 팀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경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좋다. 말 잘하는 사람도 멋있고, 말이 창출하는 가치가 있지만, 행동이 만드는 가치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가상현실의 현주소와 미래

요새 ‘VR’이라는 말을 하면 마치 석기시대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들릴 정도로, VR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2014년도에 Facebook이 오큘러스를 거액에 인수했을 때는 곧 세상이 가상현실화될 것처럼 모든 투자자가 VR 회사를 검토하고 하나 정도는 투자했고, 많은 창업가가 VR이 미래라면서 가상현실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실은 이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5년 전 이야기인데, 이후 관심도가 급격히 줄면서, 최근 2년 동안 나는 VR 회사에 대한 피칭 자료는 거의 못 봤고, 이 분야에서 새로 창업한 팀도 많이 못 만나본 거 같다. VR과 엔터테인먼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우리는 LA에 있으면서 VR의 파도를 몸소 체감할 수 있었고, 우리도 이 분야의 상당히 많은 회사를 봤고, 4개에 투자했다. 콘텐츠를 만드는 Penrose Studios, VR 기반의 의료수술을 스트리밍해 주는 GIBLIB,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게임 회사였는데, 한 개는 망했고, 한 개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VR 시장에 대해서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관점을 갖고 언젠가는 시장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요새도 누군가 VR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면, 관심을 두고 본다. 물론, 이 관심은 VR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행이 아니라서 남이 관심 두지 않는 분야에 우리만 투자한다는 우리 철학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VR 시장이 올까? 온다면 언제 올까? 이 질문은 아마도 모든 VC가 하는,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2015년 8월에 내가 이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이 그랬듯이 앞으로는 –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 가상현실이 대중적인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기기 자체도 지금같이 투박하지 않고 상당히 진화되었을 것이다.
내가 맞을까?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5년 뒤에 이 블로그 포스팅을 재방문해 봐야겠다.”

5년 뒤가 되려면 아직 1년 6개월이 남았지만, 지금 속도와 분위기로는 가상현실이 현실화되긴 힘들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인데, 여기서 내가 그동안 듣고, 읽고, 경험하고, 느낀 점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내 지인 중 VR 기기를 모으는 분이 있다. 이 사람보다 VR 시장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이 사람보다 VR 기기를 더 많이 사용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분한테 VR에 관해서 물어보면, 다음과 같은 웃긴 말을 한다. “VR 기기를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 번 이상 사용해 본 사람도 거의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만큼 VR 기기를 세팅하고,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럽다는 의미이다. 기기가 너무 많고, 대부분 유선 제품이라서, 일단 기기들을 연동하고 세팅하려면, 세팅만을 위한 마음가짐과 다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은 아파트나 원룸에 살고 있다면,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에, 계속 연결해놓지 못하고 사용 후에는 다시 정리해놔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특히 다양한 HMD가 본체와의 호환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 VR 기기를 사용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귀찮음,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 불편한 과정이 이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이 현상을 “VR은 destination(최종 목적지)”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VR을 쉽게 경험하는 게 아니라, VR이라는 최종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VR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하며,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이 최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VR을 스마트폰과 비교해보면, 스마트폰은 그 자체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다른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 항상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accompaniment(동행)”라고 표현한다. 이 destination과 accompaniment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나 다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진다. 8시간은 침대에서, 8시간은 직장에서, 그리고 한 2~3시간은 삶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하는데 보낸다고 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5~6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VR은 이 소중한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의식적인 행위인 destination이자, 레알 현실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가상 현실이지만, 스마트폰 대부분의 앱은 이 현실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행위인 accompaniment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잠잘 때는 못 하지만,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도 하던 일을 굳이 멈추지 않고도, 상당히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근무 시간 중에 VR을 굳이 하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기를 세팅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나는 VR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우리는 항상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단기간 내의 혁신은 과대평가하지만, 장기간 내의 혁신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는데 VR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VR이 대중화되기 위한 인프라가 깔려야 하고, 하드웨어가 더 작고 편리해져야 한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는 그 다음 이야기고, 인프라와 하드웨어가 대중화되면 훨씬 더 쉽게 풀릴 수 있다.

Security Token 가이드

작년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줄었지만, 요새도 코인과 토큰 발행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팀이 있다. 시장이 워낙 죽었고, 앞으로 암호화폐가 어떻게 규제될지 모르기 때문에, 다들 펀드레이징에 대한 고민도 많고, 비즈니스 방향에 대한 고민도 많고, 하여튼 골치가 아주 아플 것이다. 그래도 이 시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믿고, 토큰 이코노미를 만들려고 한다면, 만들려고 하는 토큰이 security 토큰이 되지 않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토큰이 증권(security)으로 분류되는 순간부터 증권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데, 이러면 법의 규제를 받는 거래소에서만 거래될 수 있고, 특정 대상에게만 판매해야 하고, 토큰과 프로젝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공시해야 한다. 실은, 증권에 적용되는 증권거래법은 암호화폐와 같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토큰을 설계할 때는 security token의 성격이 없게 해야 한다.

그럼 security 토큰의 성격은 어떤게 있을까? 여기서부터 상당히 모호해지고, 관련해서 다양한 논의가 현재 진행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얼마 전에 Blockchain Association에서 이에 대한 꽤 명쾌한 글을 하나 올렸다. 일단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에 의하면,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제시하는 프레임은, 어떤 토큰이나 그 네트워크가 비트코인 또는 이더리움보다 더 탈중앙화되어 있으면, 충분히 탈중앙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큐리티 토큰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018년 6월 14일, SEC의 기업금융국장 William Hinman에 의하면). 계속 법이 새로 만들어지고, 이에 따른 규제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일단 현재로서는 내가 토큰을 설계하려고 하면, 스스로 물어볼 질문은, “이 토큰은 충분히 탈중앙화되어 있나?” 이다. 이 토큰의 네트워크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네트워크만큼 탈중앙화되어 있으면, 이 토큰은 ST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증권법의 적용대상에서는 제외된다. 이 토큰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보다 덜 탈중앙화 되어 있으면(=더 중앙화), ST로 구분될 확률이 높다.

아직 한국은 이런 논의 자체도 없고, 규제를 만드는 분들이 중앙화/탈중앙화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미국을 따라가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토큰을 만들면, 정부에서는 이 토큰의 탈중앙화 정도를 판단할 것이고,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만큼 탈중앙화되어 있으면, ST로 분류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중앙화되어 있다고 판단되면, ST로 분류할 것이다.

여기서 미국 증권거래법이 생겨난 배경을 잠깐 설명하면 좋을 거 같다(미국증권거래법 설명은 위키피디아 참고). 증권을 발행하는 측과 증권에 투자해서 이익을 보려는 투자자 간의 정보의 비대칭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증권거래법이다. 내가 주주인 나이키의 예를 들어보자. 나이키의 창업자인 필나이트 회장과 마크파커 대표이사는 나이키에 대한 정보를 나 같은 투자자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내부 정보를 다 알기 때문에 이들이 원한다면, 이런 내부정보를 기반으로 부당하게 나이키 주식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이키 회사의 미래와 실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주가를 조작할 수 있다. 즉, 나이키와 투자자 간의 네트워크는 나이키라는 회사와 그 회사의 내부자를 중심으로 중앙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이키의 주식은 증권거래법의 적용을 받고, 나이키는 해마다 큰 비용을 지급하면서 회사의 많은 정보를 직접 또는 중개인을 통해서 공시해야 한다. 또한, 나이키 주식은 법의 규제를 받는 증권거래소에서만 사고팔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금의 예를 들어보자. 금의 가격과 정보는 상당히 탈중앙화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금에 대한 시장 정보를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나이키의 예와 같이 특정인이 금의 가격을 조작하는 게 쉽지 않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도 비슷하게 탈중앙화되어 있다 – 물론, pump and dump와 같은 위험은 존재한다.

즉, 새로 만드는 토큰 네트워크가 소수의 내부자한테 의존하고, 이들이 조종 가능하다면, 이 네트워크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보다 덜 탈중앙화(=더 중앙화)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이 토큰은 security 토큰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고, 증권거래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오픈소스 프로젝트라도 법으로 요구되는 많은 정보를 공시해야 하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특정 거래소에서만 거래되어야 할 것이다.

이 ‘탈중앙화 정도’에 대한 정량적 내용은 아직 없지만, Blockchain Association에서 Hinman 가이드에 대한 꽤 자세한 기능적 분석을 도표로 정리하긴 했다. 물론, 이 내용은 계속 논의되면서 수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