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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이 다시 중요해지는 시점

지난 2년 동안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렀는데, 이제 그 돈줄이 서서히 마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천천히 마르는 것 같은데, 미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조금은 다르게, 급격하게 돈줄이 메마르고 있는 것 같다. 시장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서 발생한 결과 중 하나가 말도 안 되게 높은 스타트업 밸류에이션이었다. 창업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회사가 100억 원 이상의 밸류에이션으로 투자받는 상황이 이젠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과거에 이런 회사에 기업가치 30억 원 이하로 투자를 주로 해서, 기업가치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으로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안 하면 누군가는 이 밸류에 투자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현상은 시장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물가가 올랐고, 스타트업 밸류에이션에도 이런 물가 상승이 반영되어야 하므로 이렇게 가격이 비싸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팬데믹 기간 동안 이렇게 밸류에이션이 높아졌을 땐, 오히려 매출이 발생하는 회사들이 매출이 전혀 없는 회사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 투자받는 걸 많이 경험했다. 예를 들어, 사업 시작한 지 2년 됐고, 월 매출 1억 원 하는 스타트업이 펀딩을 하면, 많은 VC가 이 회사의 밸류에이션을 현재 매출을 기반으로 책정했다. 아주 1차원적으로만 계산해보면, 월 매출 1억 원이면, 연 매출 12억 원이고, 분야에 따라서 이 연 매출의 배수를 회사의 밸류에이션으로 계산했다. 뭔가를 판매하는 이커머스라면, 배수가 낮기 때문에 연 매출의 2배~5배 사이가 이 회사의 밸류에이션일 확률이 높다. 즉, 월 매출 1억 원 하는 이커머스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24억 원 ~ 60억 원 사이로 생각한다. 참고로, 무에서 시작한 회사가 매달 고객으로부터 1억 원을 벌고 있다는 건 대단한 업적이다.

그런데, 창업한 지 3개월도 안 된, 매출은커녕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회사가 100억 원 기업가치에 투자받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런 회사는 오히려 매출이나 수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위에서 말 한 수치 기반의 밸류에이션 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이런 밸류에이션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사업성이 유망하고 능력 있는 팀이지만, 그렇다고 2년 동안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서 돈을 벌고 있는 회사보다 이 회사의 기업가치가 높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첫 번째 예로 든 회사는 업력이 좀 됐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빠른 성장을 원하는 VC들에겐 성장이 느린 회사로 인식됐을 것이다. 그리고 뭔가 계산을 할 수 있는 숫자(매출)가 있기 때문에, 밸류에이션에 디스카운트가 됐을 것이고,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숫자가 없지만 요새 유행하는 기술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업한 회사가 밸류에이션 프리미엄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 경기가 꺾이면서, 이 상황이 역전되고 있다. 이젠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이 없는 회사들보단, 작더라도 매출이 발생하고 있는 회사들이 투자받을 확률이 더 커졌다. 이 불경기와 인플레이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투명해졌는데, 이런 불확실한 경제 상황을 버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게 견고한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이라서 그런지 이젠 많은 투자자들이 매출이 발생하고 있는 회사들을 다시 선호하고 있다.

유동성이 넘쳐 흘려서 비즈니스가 없음에도 부르는 밸류에이션이 값이 되는 시기에는 우리 투자사에 작은 매출을 만들 바에 일부러 매출을 발생시키지 말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그래야지 오히려 더 높은 밸류에이션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 논리는 얼마 전에 빌 게이츠가 말했던 ‘더 큰 바보 이론(The Greater Fool Theory)’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즉, 내가 아무리 비싸게 사도, 누군가는 이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살 것이고, 이 가격보다도 더 비싸게 살만한 또 다른 바보가 내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인데, 시장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이제 모두 다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제 다시 매출이 정말로 중요한 시점이 돌아왔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계속 이 분위기가 아주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

작지만 힘 센

요샌 반 은퇴해서 과거와 같이 통찰력이 넘치는 글을 매일 쓰지 않는 USV의 프레드 윌슨이 얼마 전에 The Partnership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스트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동질감을 상당히 많이 느꼈다.

요약하자면,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의 파트너십 구조는 아주 작고 수평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수평의 정의는 모든 파트너가 동일한 보상을 받고, 회사 내에서의 영향력이 동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이런 구조가 아니다. 오래되거나 실적이 가장 좋은 파트너들이 더 많은 보상을 가져가고, 의사 결정에서도 다른 파트너보다 목소리와 영향력이 크다. 그리고 이런 조직은 파트너도 주니어와 시니어로 구분하는걸 많이 봤다.

이 블로그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초기 스타트업 투자는 일반적인 투자와는 다르게, 아직 시장에서 증명되지 않은 아이디어와 팀에 베팅해야 하는데, 이렇게 투자했을 때 나중에 가장 큰 수익이 나는 회사는 당시에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아이디어를 가졌던 팀일 확률이 높다. 스트롱에서도 우린 이와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한다. 그래서 우린 “남들이 다 틀렸을 때, 우리만 오지게 맞을 수 있는” 아이디어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이런 아이디어가 나중에 성공하면 대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팀과 아이디어에 눈치 안 보고 소신 있게 투자하려면 믿음과 신뢰가 가득한 작은 파트너십이 가장 좋다.

초기 스타트업의 리드 투자자가 된다는 건, 아주 긴 시간 동안 이 회사와 한배를 타고 험난한 항해를 같이하는 것과 같다. 단순히 돈을 제공하는 투자자가 아니라, 창업팀의 비전을 공유하고 가끔은 이해하지 못하고, 동의할 수 없고,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최선이 아닌 결정을 지지해야 하는데, VC의 파트너십이 수평적이지 않고 권위적이고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면, 이런 스타트업의 엑싯까지 같이 하는 건 쉽지 않다.

작은 파트너십이 필수지만, 서로를 상호 보완해주는 파트너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투자자라도 항상 홈런을 칠 순 없다. 유니콘 회사를 발굴해서 투자하는 VC도 그 이면에는 잘못 투자해서 망한 회사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초기 투자의 이런 예측 불가능한 특성 때문에, 다양한 스킬을 가진 파트너들이 필요하다. 어떤 파트너는 촉이 좋고, 어떤 파트너는 숫자를 잘 보고, 어떤 파트너는 네트워킹을 잘하고, 어떤 파트너는 새로운 기술을 잘 이해한다. 이렇게 다양한 능력과 기술을 가진 소수의 파트너로 이루어진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작은 파트너십을 가진 VC는 주로 펀드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 작은 펀드로 투자하면, 더 높은 수익률을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다. 100억 규모의 펀드를 투자해서 LP들에게 3배의 수익을 돌려주는 게, 1조 규모의 펀드를 투자해서 LP들에게 3배의 수익을 돌려주는 것 보단 수월하다. 펀드가 크면 어쩔 수 없이 파트너십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은 파트너십과 작은 펀드가 더 좋다.

프레드 윌슨의 이 글에 대한 댓글을 보면, 큰 펀드와 큰 파트너십을 운영하는 VC들은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도 많고, 아주 오래전에는 맞는 내용이지만 이젠 통하지 않는 개념이라고 공격하는 내용도 많다. 하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이 의견과 내용에 많이 동의한다. 왜냐하면, 스트롱도 이런 구조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작은 펀드를 작은 파트너십으로 운용하고 있다. 특정 파트너가 지분이 더 많지도 않고, 영향력이 더 많지도 않다. 모두가 발언권이 동일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투자 결정을 하는데, 나는 이런 구조가 매우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우린 작지만 special하고 strong 한데, 이런 조직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리드 투자자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의 70% 정도에 스트롱이 첫 번째 기관 투자를 했다. 그만큼 일찍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그리고 이렇게 첫 번째 기관 투자하는 회사의 절반 이상에 우리가 단독 투자한 거로 알고 있다(정확한 계산은 아직 안 해봤다). 일찍 투자하는 걸 우린 선호하지만, 이렇게 투자하면 굳이 다른 공동 투자자와 같이하는 것 보단, 혼자 단독 투자하는 걸 더 선호한다. 투자의 효율성과 속도를 위해 클럽딜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고, 맘에 드는 회사가 있으면 굳이 다른 곳과 같이 투자하면서 보험?을 확보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단독 투자하는 건 아니다. 투자하고 싶은 회사를 만났는데, 이미 이 회사가 우리보다 먼저 다른 투자자와 이야기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회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투자자랑 같이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공동 투자할 때도 우린 가장 크게 투자해서 우리가 리드하는 걸 선호한다. 정해진 방법은 없지만, 여러 명의 VC가 같이 투자할 때는 주로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하는 리드 투자자가 계약 조건을 결정하고, 계약서 또한 리드 투자자의 계약서를 다른 투자자들이 그대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각 투자사마다의 방법과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남의 계약서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힘들 수 있어서, 대세에는 지장 없는 수준에서 사소한 내용을 수정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이건 생각해보면 꽤 상식적이다. 여러 명의 투자자가 참여하지만, 같은 라운드에서 발행되는 같은 종류의 주식이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건 일반적이진 않다.

하지만, 리드 투자자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투자하고, 심지어는 투자가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 막차로 들어와서 투자하면서, 굵직한 계약 내용을 리드 투자자와 굳이 다르게 가져가는 경우를 나는 상당히 많이 봤다. 그것도 가장 먼저 총대를 메고, 가장 큰 금액을 투자하는 리드 투자자보다 본인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끝까지 고집하는 경우도 본 적이 많다. 실은, 이건 피투자사 대표가 투자 협의하는 과정에서 알아서 교통정리를 잘 해줘야지 모든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되는데, 돈을 받는 대표 입장에서는 이렇게 잘 못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주로 리드 굳이 다른 조건을 고집하는 다른 투자자와 이야기해서 정리해야 한다.

10억 라운드에 1억도 투자하지 않는 공동 투자자에게 굳이 다른 조건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우린 원래 이런 조건으로 투자해야 합니다.”라는 1차원적인 대답을 듣는다. 여기에다가 “우리도 원래 이렇게 투자합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건 그냥 서로 싸우자는 거라서 어쨌든 상대방을 잘 설득해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걸 설득하다 보면, 뭐 대단한 거라고 굳이 이런 것까지 리드 투자자가 해야 하냐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특히, 내가 사람이 아니라 벽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는.

내가 항상 강조하지만, “원래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이에 따라서 모든 게 변해야 한다. 대기업, 공공기관 또는 금융기관이라서 몇 가지 원칙이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과거에는 통하던 방식이 현재에도 통하라는 법은 없다. 이게 현실이라면, 현실에 맞춰서 스스로를 바꿔야 한다.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방식을 못 바꿀 정도로 변화의 의지가 없는 경직된 조직이라면, 그냥 이 스타트업 게임에서 빠지면 된다. 실은 굳이 본인들이 빠지지 않아도, 언젠가는 밀려나게 되어 있다.

자주 웃기

지난 며칠 동안 Y Combinator에서 창업가들에게 보낸, 좋은 시절이 끝나가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이메일이 우리나라에서도 공유되면서 큰 화제가 됐었다. 이미 많은 분이 내용을 정독했을 텐데, 요약하자면 13년간의 스타트업 호황이 끝나가니까 이젠 허리띠 졸라매고 돈 아끼면서 비즈니스 모델 빨리 강화해서 돈을 벌든지 아니면 내년 말까지 쓸 수 있는 펀딩을 빨리 확보해놓으라는 내용이다. 이 외에 세쿼이아 캐피탈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고, 한국 VC들도 급랭하는 시장에 대한 경고를 너도나도 앞다퉈서 하고 있다.

나도 이 내용에 모두 동의한다. 실은, 이 상황은 이미 예견됐던 건데, 모든 악재가 그렇듯이 예고 없이,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와서 놀란 거지, 경제 위기 자체를 예상 못 했던 건 아니다. 팬데믹이 시작한 후, 글로벌 경기가 무너질 거라고 대부분 경제학자가 예측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시장에 보냈다. 그리고 그때도 많은 VC가 조심하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나 포함). 하지만, 고민하고 시간 투자해서 이런 경고음을 보낸 노력이 민망할 정도로, 경기가 나빠지긴커녕, 오히려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할 정도로 경기는 과열되면서, 시장에는 돈이 넘쳐흘렀다.

2021년도 한 해에만, 전 세계의 벤처투자금 $620B이 무려 9,000개가 넘는 딜에 투입됐고, 이는 과거 벤처투자의 모든 기록을 큰 차이로 경신한 숫자이다. 작년 한 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돈지랄”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정말로 유동성이 넘쳐흘렀고, 말은 안 되지만 “현금이 제일 싸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물론, 이런 돈지랄을 보고, 누구나 다 끝은 좋지 않을 거라는 걸 예측하지만, “내가 아무리 비싸게 사도, 다른 사람이 더 비싸게 살 거야”라는 생각으로 계속 시장이 과열됐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엔 이 모든 게 한 번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조정모드로 돌입하고 있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도 이 시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펀딩은 어떻게, 언제 해야 할지, 그리고 스트롱이 보는 현재 상황은 어떤지 최근에 많이 물어보고 있고, 나도 다른 VC와 비슷한 경고의 메시지 외엔 다른 말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2020년 4월에 나는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극단적 조치‘라는 포스팅을 통해서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조건 사전에 비용 절감하고 사람을 해고해야 한다는 강력한 이야기를 했는데, 결론적으로 보면 이건 좀 틀린 조언이긴 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우려했던 글로벌 쇼크 수준의 불경기가 오진 않았고, 단지 몇 달 동안 코로나19 쇼크만 있었고, 이후에 시장은 더 과열된 돈지랄로 보복 컴백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어떨까? 나는 경제학자는 아니라서 이번에도 틀릴 수 있겠지만 – 그런데, 경제학자들도 항상 틀린다 – 이번엔 모든 객관적인 수치가 꽤 심각한 글로벌 경제 쇼크로 향하는 것 같다. 불경기, 인플레이션, 스태그플레이션, 전쟁, 환율 폭등 등, 이미 경제 위기는 시작됐는데, 그동안 다들 현실을 부정하면서 돈 수도꼭지를 펑펑 틀고 있었다. 이제 돈줄이 메마르기 시작했는데, 이번 위기는 과거 금융 위기와 같이 갑자기 모든 게 한 방에 무너지는 양상을 보이진 않을 것 같다. 과거의 글로벌 위기는 대부분 블랙스완의 성격이 있었는데, 이번 쇼크는 이미 모두가 어느 정도 예견했던 시장의 조정이라서 오히려 아주 천천히 조정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천천히 금융 위기가 오면, 좋은 점은 위기를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호황이 온다고 하는데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요새 내가 우리 대표님들에게 드리는 조언은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돈 아끼면서 사업하고 – 우리 투자사들은 펑펑 쓸 돈이 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 사람 채용 신중하게 하고, 되도록 신사업 시작하지 말고 기존 사업에서 돈 더 벌자 이다. 그렇게 버티면서 그냥 자주 웃으면 된다.

믿음이 필요한 순간

투자를 잘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워렌 버핏이 항상 하는 말이, 머리로 투자해야지, 가슴으로 투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잘 봐야 하고, 시장을 잘 분석해야 하고,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 특히, 우리같이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사람들에겐. 나도 투자를 시작할 땐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고, 냉철함을 기반으로 투자 철학을 나름 몇 가지 정했다.

그런데 그동안 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계속하면서, 몇 가지 기술적 변곡점을 경험했고, 몇 년마다 한 번씩 오는 큰 technological cycle을 겪어보니, 데이터와 머리로만 투자하는 게 어쩌면 최선의 전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아니, 요샌 오히려 이렇게 투자하면 초기 투자는 잘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홈런 투자는 더욱더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이젠 어느 정도 믿음으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우린 매일 다양한 딜을 검토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요샌 이 중 절반 정도가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들이다. 전에는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면, 그냥 보지도 않았다. 아는 분야의 사업만 봐도 너무 많은데, 굳이 모르는 분야의 사업을 공부하고 분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내가 모르는 사업은 그냥 안 좋은 사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모르는 분야의 스타트업이 훨씬 더 많이 생겼고, 더 이상 이 회사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내가 모르는 사업이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업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배우는데 한 3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그 이후엔 내가 모르는 분야라도 최대한 많이 공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엔 시간을 좀 투자하면, 몰랐던 사업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투자 결정을 했다.

이젠 내가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해도, 자신감이 생길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사업과 창업가를 간혹 만난다. 그리고 이런 카테고리의 사업이 더 많아지고 있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검토하는 딜들이 워낙 많아지고 있고, 새로운 기술과 사업이 매일 매일 새로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나도 조금씩 스스로 변화를 주기 시작했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건 변화 그 자체’라는 아주 진부한 이 말을 온 몸으로 적극 수용하기로 했다.

올해 시작하자마자 우린 정말 많은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들 처음 미팅하고 내가 내부적으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잘 이해가 안 가네요” , “와, 이런 걸 정말로 사람들이 돈 내고 사용한다고?” , “뭐, 저런 사업이 다 있지?” 등과 같은 의심과 회의감 가득 찬 질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했던 건, 이런 의심을 버리고, 대신 의심을 호기심으로 대체했다. 이렇게 하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이 호기심을 기반으로 이 창업가와 비즈니스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부와 고민을 했다. 물론, 100%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믿기로 했고, 이 믿음을 기반으로 투자했다.

우리가 만약에 특정 분야에만 투자하고, 그 분야의 여러 가지 수치와 공식이 이미 존재한다면, 이 글 초반에 이야기했던 냉정한 데이터 기반의 투자, 업종의 충분한 이해, 그리고 다각도에서의 분석이 유의미하다. 하지만, 수치가 없고, 완전히 새로운 비즈니스라서 공식 또한 존재하지 않는 분야라면, 완벽하게 이해하기 전에 일단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이 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을 때는 투자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의심하지 말고 대신 호기심을 갖자. 호기심이 생기면 더 공부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100% 이해하기 전에 믿음을 갖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