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하드 트레이닝

2015년 6월 3일, 나는 와이프랑 한국에 잠깐 나와 있었는데, 미국 옆집 이웃 브라이언한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이 왔다. “집에서 물이 새는 거 같아서 수도국에 전화해서 물 공급을 중단시켰어요. 차고랑 정문 밑에서 물이 나오는 걸 봤는데, 이제 멈췄네요.” 정원 스프링클러가 고장 나서 물이 좀 샜나보다 생각하고 넘겼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국 나오기 전에 집 키를 맡긴, 같은 동네에 사는 와이프 친구에게 집에 가서 상황 좀 확인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한국 시각으로 밤늦게 이 친구분한테 급하게 전화가 왔고, 와이프가 통화하는 분위기를 보니 뭔가 큰일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끊고 와이프 왈, “오빠, 우리 집 x됐어”. 친구분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온 집 안에 물난리가 났고, 당시 거실 사진을 찍어서 보낸준게 있는데, 이렇다.

2135-1

2135-2

2층 집이었는데, 마루 천장이 무너졌고, 와이프 친구분 말 그대로 온 집에 홍수가 나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한국 일정을 다 취소하고, 그다음 날 혼자서 LA로 돌아왔다. 일단 상황 파악을 하고, 기초적인 건 내가 수습할 계획이었다.

오자마자 주택 보험회사에 전화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젖어 있는 집 구석구석을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층 안방 화장실에서 원인을 발견했다. 비대와 변기의 물 저장소를 연결하는 호스의 이음새가 약해져서 파열됐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이 상태로 48시간 이상 물이 누수됐고, 이 물이 이 층 바닥의 카펫에 모두 흡수됐다. 그리고 목재로 지은 건물이라서 천장이 물을 흠뻑 먹은 카펫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집 모든 곳에 물난리가 났고, 우리 집 이웃이 수도국에 전화하기 전까지 거의 5일 이상 계속 물이 샜던 것이다.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때 정말 황당했고, 머리가 하얘지는 거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라서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랐지만, 보험 회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하나씩 일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국은 이런 보험이 비교적 잘 되어 있어서, 2015년 10월 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기 전까지 5개월 동안 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말 힘들었고, 막판에는 거의 번아웃이 됐다(실은 이 사건 때문에 우리의 한국 귀국이 예정보다 빨리 앞당겨졌다). 여기서 다 나열하진 못 하지만, 물에 파손되지 않은 나머지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절반이 분실되고, 이 회사랑 법적 소송까지 갈 뻔했고, 보험금 합의하느라 한국 와서까지도 엄청 많은 에너지 낭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물난리 때문에 3주 동안은 일을 거의 못 하면서 이때 많은 기회비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난리를 다 처리하고, 보험금까지 다 받은 후에, 물난리가 있고 난 뒤 약 1년 후에 이 포스팅의 사진을 와이프랑 다시 보면서, 우린 그래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이 경험에 대해서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처음 겪는 일이라서 정신이 없었지만, 만약에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타지에서 오롯이 둘이서 이 큰일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이 일이 우리에게는 큰 모험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 하드 트레이닝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도 실은 이 일을 겪은 후부턴, 웬만한 어려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고, 덤덤하고, 침착하게 일을 하나씩 해결하려는 태도로 모든 것에 임한다. 실은, 이 물난리가 났을 때, 첫 일주일은 짐 옮기고, 집을 청소하고 건조하는 인부들을 관리해야해서 보험사에서 마련해줬던 호텔에서 집으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그리고, 세탁기가 있던 다용도실 – 다행히도 이 방은 물 피해가 없었다 – 구석에 있는 세탁기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틈 날 때마다 일을 조금씩 했다. 그 난리 통에 AuditBoard라는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가 요새 엄청나게 잘 하고 있다.

2020년도에 아마도 많은 창업가들이 내가 경험한 물난리와 같은, 인생 최악의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에 투자하고, 다양한 회사와 창업가들과 일하는데 코로나 거리 두기 단계가 바뀔 때마다 울고 웃는, 정말 웃지 못할 상황이 끝없이 펼쳐졌던 2020년이었다.

운이 없는 회사는 올해 문을 닫았고,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를 이분들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하지만, 올해 살아남았다면, 그리고 내년에도 계속 싸울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길. 여러모로 봤을 때, 역사상 최악의 한 해였고, 아마도 회사가 경험할 수 있는 나쁜 시나리오는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강해졌을 것이다. 물난리가 나를 하드 트레이닝 했듯이, 코비드19는 창업가들을 하드 트레이닝 했을 것이다. 올해를 잘 살아남았다면 앞으로 겪을 시련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모두 수고했고,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이제 훨훨 날기만 하면 된다.

대나무숲

1606861334666

이미지 출처: 오후의사진관 / 크라우드픽

올해 팬데믹이 창궐하기 시작한 2월 말에 조지윤 책임심사역이 스트롱에 조인했다. 우리와는 5년 넘게 알고 지냈고, 스트롱 이전에 이미 다양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수습기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나와 함께 지금까지 9개월 동안 발로 뛰면서 회사 발굴하고, 투자하고, 기존 투자사들을 도와주고 있다. 전에 지윤님과 이야기할 때, 밖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일 하면서 느낀 점은, 스트롱은 파운더들의 ‘대나무숲’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나무숲의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창업가들이 남한테 말 못할 힘든 점을 우리와는 솔직하게 계급장 다 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이런 내용은 외부로 발설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투자사 중 잘 하는 회사는 잘 되는 회사만의 고민을 창업가들이 갖고 있고, 못 하는 회사는 잘 안되는 회사만의 고민을 갖고 있다. 어떤 고민이 더 크고, 문제가 심각한지는 내가 점수를 매길 순 없지만, 그래도 주로 잘 안되는 회사 대표들의 고민이 더 심각하고, 우리의 즉각적인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 해마다 비즈니스는 더욱더 어려워지지만, 올 해는 코비드19 때문에 훨씬 더 어려웠던 한 해였고, 이로 인해 우리도 가장 힘들고, 잘 안되는 투자사 대표들과 더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모두 다 고통스러웠지만, 결국엔 힐링되는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USV의 프레드 윌슨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얼마 전에 한 적이 있다. 초기 투자하는 펀드의 실적을 수년 후에 보면, 소수의 회사가 전체 펀드 실적의 90% 이상을 만드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우리도 과거 펀드들을 보면 이와 다르지 않다. 파레토의 법칙은 펀드에도 존재하는데, 초기 펀드에는 이 80:20 법칙이 더 극단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VC가 이 소수의 잘 될 회사에만 집중하면 안 되는데, 프레드는 이런 현상을 한 반을 담당하고 있는 담임선생님에 비교한다. 내 기억으로는 나 초등학교 시절에도 우리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에서 가장 이뻐했던 최애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반장, 부반장, 그리고 공부 제일 잘하는 학우가 이런 친구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선생님이 이 친구들만 신경 쓰지 않고, 우리 학급 모든 학생에게 골고루 관심을 주면서, 학교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모두를 도와줬다. 선생님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 학생들이 공부도 잘하고 학교생활을 잘 할 때 뿌듯함과 보람을 가장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개인적인 보람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해야 하는 일은 소수의 학생에게만 관심을 주는 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지도하고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학교 생활에 적응 못 하고, 학습 진도가 더딘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은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스트롱의 수익률은 극소수의 투자사들이 만들고, 우린 이 회사와 창업가들에게 평생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일은 수익률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투자사, 창업가와 같이 진흙탕에서 구르면서 이들의 대나무숲 역할을 하는 것이고, 오히려 진정한 보람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Animoto 근황

2008년도에 미국에서 뮤직쉐이크를 할 때, 음악만큼 많은 사람이 몰입해서 보고 듣는 게 동영상이라는걸 알게 됐다 – 참고로, 요샌 숏폼 동영상이 대세라는 걸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지만, 당시만 해도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된 지 2년밖에 안 된 시점이고, 아직 PC에서 모바일로 플랫폼이 이전하기 전이였다. 그래서 뮤직쉐이크로 만든 음악을 가장 잘 홍보할 방법은 유튜브 동영상의 백그라운드 음악(=BGM: Background Music)으로 삽입하거나, 동영상을 제작하는 사용자들에게 우리가 만든 음악을 무료로 배포하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시장에 어떤 동영상 제작 소프트웨어가 사용하기 쉽고, 대중적으로 인기 있을까 찾아보다가 Animoto라는 작은 스타트업을 알게 됐다. 이 서비스가 요샌 많이 진화했지만, 당시에는 정말 간단하게 사용자들의 사진을 올리고, 거기에 내가 가진 음악 또는 애니모토에서 제공하는 음악을 추가하면, 그 음악에 맞춰서 사진을 재미있게 동영상으로 제작해주는 제품이었다. 그땐 이게 너무 참신해서, 내가 우리 개 마일로 사진으로 동영상도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그 이후 숏폼 동영상이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종류의 서비스가 엄청나게 많이 출시됐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도 비슷한 제품이 여러 개 있는 거로 알고 있다. 나도 가끔 이런 회사를 만나면 항상 애니모토 이야기를 하는데, 회사가 워낙 오래됐지만,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대부분의 창업가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애니모토라는 회사가 살아있고 서비스도 계속 제공하고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올 3월 애니모토 관련 기사를 읽었는데, 그냥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잘 살아있고, 아직도 잘 성장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직접 읽어보면 되는데, 요약하자면, 애니모토는 2007년 뉴욕에서 4명의 개발 백그라운드의 공동창업가가 그냥 재미로, 남들이 그전에 만들지 않았던 제품을 파트타임으로 만들면서 시작됐다. 참고로 2007년도에는 아이폰이 막 세상에 태어났고, 페이스북보다 마이스페이스라는 소셜미디어가 더 인기 있던 시대였고, 사진을 드래그앤드롭하면, 이 사진들을 클라우드에서 프레임 단위로 동영상으로 렌더링 할 수 있는 제품이 없던 시대였다. 그 누구도 이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니모토 팀은 이걸 해보고 싶었다.

약간 취미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변 가족과 친구들로 부터 약 7억 원 정도의 초기 펀딩을 받았다. 이 돈이면 1년 정도는 이 실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모든게 미지수였다. 일단 이런 동영상 렌더링 제품을 누가 사용할지도 몰랐고, 이걸 만들어서 어떻게 마케팅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들이 1차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배운 점이 있었다면, 그냥 만들어 놓고 사용자만 엄청 모으면 뭔가 될 거라는 전략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었다. 수백 개의 스타트업이 이런 전략으로 제품을 만들고 돈을 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본인들이 자신 있게 만든 제품을 무조건 첫날부터 유료로 제공하자는 결정을 했고, 당시 과금체계는 동영상 하나당 3달러, 또는 무제한 동영상에 연간 30달러였다. 많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애니모토를 돈 내고 사용하는 고객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회사가 지금까지 350억 원 정도의 펀딩을 받았고, 올해 예상매출이 400억 원 이상인 꽤 괜찮은 회사로 성장했다. 물론,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이 기사에 다 적혀있진 않지만, 그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애니모토 기사를 보면서,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몇 가지 사실이다:
1/ 4명의 평범한 월급을 받던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창업했다.
2/ 일단 트래픽을 모은 후에 돈을 버는 전략을 버리고, 첫날부터 과금하는 과감한 전략을 택했다.
3/ 13년 동안 펀딩을 세 차례에 걸쳐 350억 원 이상 받았지만, 모든 펀딩은 2007년~2011년 사이에 받았다. 그 이후에는 한 푼도 투자받지 않았는데, 계속 수익이 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4/ 미친 성장은 없었다. 그냥 꾸준히 매해 성장했다.
5/ 100명의 직원이 있다. 대부분 뉴욕에 있고, 3분의 2가(=66명) 개발 또는 제품 관련 일을 하고 있다.
6/ B2B 비즈니스가 꽤 큰데, 전통적인(=목표매출이 할당된) 영업사원이 없다. 대부분 입소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홍보/판매하고 있다
7/ 매달 155만 명이 애니모토 사이트를 방문, 이 중 15만 명이 14일 무료 체험 신청, 이 중 7%인 10,500명이 일 년에 $250 정도를 내는 유료고객으로 전환된다. 매달 $2.6M의 ARR이 발생한다. SaaS 비즈니스의 특성을 고려하면, 매달 $1M 이상의 년간수익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8/ Jason Hsiao 대표에 의하면, 올해 예상 매출이 $40M이고, 1년 후면 $50M이 될 거라고 한다.

이 기사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아마도 인수 오퍼를 많이 받은 것 같다. 대표이사에 의하면 인수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냥 많은 돈이 필요 없고, 지금 하고 있는 게 좋아서 계속 좋은 제품 만들고 싶다고 하는데, 애니모토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자주 언급하는 메일침프가 생각났다. 그동안 펀딩 한 푼도 안 받고 연 매출 1조 원짜리 회사로 성장하면서 revenue funding을 하고 있는 메일침프만큼 재미있고, 매력적인 회사인 것 같고, 천천히 성장하지만, 언젠간 유니콘 중 유니콘인 ‘흑자 유니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수천억 원 펀딩 소식과 출혈하는 유니콘 소식이 좀 지겨워질 때, 이런 알짜배기 회사 이야기를 접하면 뭔가 머리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배울 점이 많은 회사인 것 같다.

다름의 힘

사진 2020. 11. 18. 오전 7 34 19

Together We are All Strong!

초등학교 친구 존이랑 스트롱벤처스를 2012년도에 창업했고, 이후 4년 정도는 우리 둘이서 회사와 펀드를 운용했다. 처음에는 펀드도 작았고, 투자한 회사도 몇 개 없었기 때문에 둘이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운영이 가능했지만, 2016년도부터 우리도 사람을 조심스럽게 채용하기 시작했고, 이제 스트롱 팀이 어느덧 6명까지 커졌다. 그리고 그동안 너무 열심히 뛰기만 해서, 11월 초에 존이 한국에 나온 기회를 이용해서, 조금 숨도 쉬고, 주위도 보는 기회를 갖는 차원에서 스트롱 창립 이후 최초의 워크숍을 부산으로 갔다. 굉장히 알찬 1박 2일이었고, 그동안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고, 앞으로 갈 길은 어떨지에 대한 생산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워크숍에서 각자의 성향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간략한 MBTI 테스트를 했는데, 나는 오래전에 했던 거와는 다른 결과인 ISTJ가 나왔고, 내 파트너 존은 ENFP 성향이 나왔다. MBTI를 해보신 분들은 잘 알 텐데, ISTJ랑 ENFP는 4개의 각 항목(=알파벳)에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른 성향을 나타낸다. 실은, 둘이 굉장히 다른 성향을 가졌다는 걸 그동안의 우정과 업무 경험으로 둘 다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수치로 이걸 확인하니 참 신기하긴 했다. 이런 다른 성향 때문에 실은 스트롱 초반에는 둘이 엄청 싸웠다. 물론, 지금도 의견 차이가 크고, 많이 싸우기도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같이 일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쌓였기 때문에, 이 극과 극의 성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름은 내가 그동안 그 어떤 조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상호보완적인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름의 힘을 내가 자주 경험하고 있는 또 다른 팀은 프라이머 파트너팀이다. 프라이머에는 여러 명의 훌륭한 파트너가 있는데, 주로 앞단에서 회사들과 교류하는 파트너는 권도균 대표님, 이기하 대표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다. 우리 셋도 비슷하기보단, 다른 성향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다. 특정 회사나 창업가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매번 느끼지만, 어떻게 같은 파트너십에서 이렇게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 하지만, 그동안 오랫동안 호흡을 같이 맞춰왔고, 기본적으로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 신뢰와 존경이 깔려있기 때문에, 이런 다름이 항상 프라이머의 장점으로 작용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런걸 ‘다름의 힘’이라고 부른다. 일하면서, 서로 다름에서 나오는 힘은, 비슷하거나 같음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크다는걸 스트롱과 프라이머를 통해서 항상 느끼고 있어서, 우리도 투자할 때 창업멤버들의 다름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편이다. 물론, 아주 비슷한 성향이 있는 창업가들이 만든 회사가 잘 되는 경우도 많지만, 유니콘 가능성을 가진 회사는 항상 극과 극의 성향을 지닌 창업가들이 만든 회사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점은, 이 다름의 힘을 잘 다스리면서 이걸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름으로 인한 분열, 혼돈, 그리고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면, 적정한 수준에서 합의 또한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다름으로 인해서 분열이 생기면, 이건 완전히 재난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SPAC 상장

이 분야에서 일하는 분이라면 올해 SPAC, 또는 스팩 상장이라는 말을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SPAC은 Special Purpose Acquisition Company의 약자인데,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기업인수목적회사’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실은, 나도 스팩상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은 없어서, 모든 디테일과 실무는 모르지만, 주위 많은 분이 올해 자주 물어봤던 내용이라 그냥 개괄적으로 몇 자 적어본다.

스팩은 1990년대부터 존재하던 개념인데, 올해 이 방식으로 IPO를 하는 회사들이 급증했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 같다. 전통적인 IPO와는 달리 꽤 빨리 상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서, 코비드 19로 인해 불확실성이 높아진 이 시기에 많은 분이 이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다. 검색을 좀 해보니, 작년 대비, 올해 스팩 상장한 회사 수가 4배가 넘는다고 한다.

스팩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 회사인데, 딱 한 가지 목적(=special purpose)이 있다. 비상장 회사를 인수하는 게 그 목적인데, 일단 스팩 회사를 만들어 상장시키고, 특정 기간 안에 이 스팩 회사로 다른 비상장 회사를 인수하면, 피인수된 비상장 회사도 상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배기홍이 ‘마일로’라는 법인을 설립한다
2/ 이 회사를 상장 신청하고, 회사의 투자자를 모집한다
3/ 로드쇼를 통해서 만난 여러 투자자가 마일로 주식을 산다
4/ 주식회사 마일로가 IPO를 하고, 배기홍은 전체 주식의 20%를 갖는다(배기홍=스팩 상장 스폰서)
5/ 배기홍은 마일로를 통해 인수할 비상장 회사를 찾는다
6/ 이미 투자를 많이 받은, 탄탄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구루’라는 스타트업을 인수하기로 하고, 이 회사의 경영진/이사회와 인수 조건을 네고한다
7/ 마일로의 주주들 또한 구루 인수에 대해 투표하고 이 딜을 승인한다
8/ 마일로는 IPO로 모집한 자금, 그리고 새로 투자받은 자금으로 구루를 인수한다
9/ 마일로와 구루가 합병하고 거래소에서 거래된다
10/ 만약, 마일로가 2년 안에 – 2년 이상인 경우도 있다 – 회사를 인수하지 못하면, 마일로를 청산하고 다시 주주들에게 투자금을 돌려줘야 한다

뭐, 대충 이런 방식으로 스팩 상장이 진행된다.

스팩 상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가장 큰 건 상장을 빠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IPO는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데, 스팩의 경우 빠르면 3개월 안에도 마무리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전통적인 IPO 방식으로 회사를 상장시켜도 주식 가격에는 불확실성이 많이 존재한다. 원래 상장시장의 주가는 시장의 상황과 투자자들의 의향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고, 상장 가격 자체는 주로 투자은행의 뱅커들이 결정하는데, 뱅커들이 정한 가격은 대부분 너무 낮거나 너무 높아서 기존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스팩의 경우 이 가격을 사전에 정하고 인수 작업을 하므로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제거된다.

물론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명확하게 존재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단점은 스팩 상장의 성패가 스폰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위의 예제에서 스폰서는 ‘배기홍’이라는 사람이다. 즉, 마일로라는 스팩 회사는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 회사라서, 이 회사의 투자자들은 회사가 아니라 배기홍이라는 사람을 믿고 투자하는 건데, 이 인간이 사기꾼이거나, 인수할 회사를 잘 못 선정하면 돈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 해 스팩 상장 중 사기로 판명된 건 (아직)없지만, 과거에는 이런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스폰서는 본인 돈은 아주 적게 투입하지만, 스팩 회사 지분의 20%를 갖게 된다. 위의 예에서, 배기홍은 마일로 회사의 지분을 20% 갖게 되는데, 마일로가 구루를 인수하게 되면, 이 20%는 구루 지분의 1~5% 정도가 되기 때문에, 인수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항상 돈을 벌게 된다. 이런 이유로 투자자들은 스팩 상장의 스폰서에 대한 실사나 스크리닝을 잘해야 한다.

이런 스팩 회사들은 종목코드도 간단하다. IPOA, IPOB, IPOC – IPOZ 까지 있는 거로 알고 있다 – 등의 이름을 사용한 스팩회사들이 있는데, IPOA는 Virgin Galactic을 인수해서 상장했고, IPOB는 OpenDoor, 그리고 IPOC는 Clover Health를 같은 방법으로 인수해서 상장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스팩상장이 일어나고 있고, 조만간 많은 회사들이 이 방법을 통해서 상장하지 않을까 싶다. 워낙 광고를 많이 해서 우리한테 친숙한 ‘TS샴푸’를 만드는 TS트릴리온도 12월에 스팩상장을 한다고 발표했는데, 잘 될지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하다.

어쨌든 스팩 상장 외,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시장과 투자자들에게 유동성을 제공하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