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24시간 피칭

지난주에 미국 출장을 갔는데, 정말 오랜만에 실리콘밸리에 며칠 있었다.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우버를 탔는데, 이 우버 기사가 엄청 수다스러운 백인 아저씨였다. 내가 타자마자 실리콘밸리 지역은 아주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빨리 이 동네를 벗어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말인지 물어보니, 너무 많은 VC들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리고 공항 가는 내내 벤처캐피탈, 스타트업, 매크로/마이크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시끄럽긴 했지만 – 우버 기사분이 특수 분야에 대해서 이렇게 해박한 것에 놀랐고, 역시 우버 기사님들의 성향이 그 동네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 나에게 “Are you in the VC industry by any chance?”라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하면 너무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냥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무역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고, 이분의 VC/스타트업 독백은 계속됐다. 조용히 가긴 글렀다는 생각에 나도 그냥 가벼운 대화를 하기로 했고, 몇 마디 나누면서 꽤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 됐다. 나이는 한 50대 중반 추정, UC 버클리 다녔는데 졸업은 안 했고, 데이터베이스 회사에 취직해서 세일즈를 오랫동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봇과 자동화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이 분야에서 창업하기 위해서 관련 전공책들을 보면서 스스로 로보틱스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웠고, 현재 창고 자동화 로봇 분야의 회사를 창업했는데, 돈이 없어서 펀딩을 하는 동안에 먹고 살기 위해서 우버 기사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세일즈를 오래 해서 그런지 정말로 말을 잘했고, 상대방을 혹하게 하는 면도 있었다. 본인이 만들고 싶어 하는 회사의 글로벌 벤치마크는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Symbotic이라는 상장 회사인데 이 회사의 기술, 비즈니스, 펀딩 현황을 모두 줄줄 외우고 있었다.(귀찮아서 팩트체크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랑 이야기하면서 중간 중간에 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꽤 흥미로운 사람이긴 했다.

내가 이분한테 하루에 손님들이 꽤 많을 텐데 모든 손님들에게 이렇게 에너지 넘치게 당신의 스토리와 회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지 물어보면서, 마치 투자자에게 피칭(pitching)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 분은 내가 정확하게 봤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는 워낙 돈 많고 투자하는 VC나 개인들이 많아서, 승객을 태우면 이 사람이 투자자일 확률이 30%가 넘기 때문에, 본인은 24시간 피칭하는 자세로 우버에 임한다고 했다. 바쁘고 약속 잡기 힘든 VC들이 내 차에 타면 이동 시간만큼은 오롯이 본인이 이들에게 피칭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자받을 때까지 언제든지 피칭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희망찬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바로 전에 인생 쏟아내기라는 포스팅을 올렸는데, 이분이 매일 매일 인생을 쏟아내고, 다시 채워넣기를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 같다. 우리는 투자하지 않겠지만, 이런 끈질기고 긍정적인 자세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투자자와 좋은 접점이 생겨서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길. 그런데 공항 오는 내내 너무 시끄럽긴 했는데, 내가 VC라고 말을 했으면 아마도 제시간에 비행기를 못 탔을 것 같다.

투자의 리듬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직전 라운드보다 낮은 기업가치에 투자받는 다운 라운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우리 투자사를 비롯한 너무 많은 회사들의 다운 라운드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전 글에서 말한 대로, 그나마 다운 라운드라도 누군가 우리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하는 현상은 긍정적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으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는 다운 라운드도 많고, 아예 투자를 못 받아서 망하는 회사도 많아서 자연스럽게 이런 좋지 않은 경기를 의식하는 많은 투자자들이 돈이 있음에도 투자를 꺼리고 있다. 내 주변에도 지갑은 두둑하지만, 좀처럼 열지 않고 있는 VC들이 많이 있다.

스트롱은 조금은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누군가 우리에게 스트롱의 투자전략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우린 매우 일찍, 매우 꾸준히, 그리고 매우 자주 투자한다고 말한다. 즉, 불경기든 호경기든 우리가 시장에 돈을 투입하는 빈도와 속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도 지난 11년 동안 다양한 실험을 해봤고,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투자 방법과 전략을 찾기 위해서 이 실험은 진행 중이다. 이 분야에서 영원한 건 없고, 정답도 없지만, 초기 투자를 하면서 배운 점이 몇 가지가 있다면, 실력보단 운이 중요하고, 실력보단 타이밍이 중요한게 초기 투자이다. 운과 타이밍이 중요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매번 이길 순 없기 때문에 실력에 의지하기보단 운과 타이밍 때문에 볼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제일 좋은 전략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찾은 답 중 타율이 가장 높은 건 그냥 꾸준히 좋은 창업가들을 찾아서 투자하는 것이다.

불경기든 호경기든, 민주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국가든, 휴가철이든 아니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근무 시간이든 오프시간이든, 시장의 기회는 항상 존재하고, 시장의 비효율성도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언제든지 누군가는 이런 기회를 포착해서 창업한다. 이 중 잘 안되는 회사도 많겠지만, 유니콘이 되는 회사들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회사들에 초기 자본을 제공했을 것이다. 스트롱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VC들이 될 수도 있다.

이 현상을 조금 더 깊게 보면, 경기가 좋고 시장에 돈이 넘쳐흐를 때는 규모와는 상관없이 모든 투자자들이 대규모 자본을 많은 스타트업들에 투입했고, 이에 따라서 너무 많은 회사들이 너무 빨리 기업가치가 상승하면서 유니콘들이 역대급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돈지랄의 부작용은 유니콘이 되면 안 될 회사들이 유니콘이 됐다는 건데, 시장이 급랭하면서 이들의 기업가치가 폭락했고 너무 많은 투자자들이 역대급 손실을 봤다. 이런 좋지 않은 경험을 한 투자자들은 – 그리고 규모나 단계 상관없이 모든 투자자들이 이런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 – 불경기가 오니까 대부분 지갑을 닫았고, 경기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모드로 전략을 바꿨다.

그런데, 시장이 나쁘다고 좋은 회사가 창업되지 않는 건 아니다. 좋은 창업가들은 좋은 회사를 꾸준한 리듬과 페이스로 계속 만들고 있다. 이 중 어떤 창업가들은 수십조 원의 기업을 만들 것인데 그 시점을 우린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은 그냥 지속적이고 꾸준한 리듬과 템포로 투자하는 것이다.

불경기든, 호경기든, 자기만의 철학과 색깔을 갖고, 리듬감 있게 꾸준히 투자하다 보면, 분명히 성공하는 회사가 나올 것이다.

다운 라운드

요새 모두에게 참 어려운 시기이다. 우리가 최근에 첫 투자한 회사들은 아직 너무 작고, 돈도 없고, 제대로 된 제품도 없는 곳들이 너무 많다. 스트롱에게 초기 투자를 받은 후,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제품의 product market fit을 찾고, 이렇게 찾은 fit을 확장하기 위해서 또 투자받고, 좋은 사람을 채용해서 계속 성장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제 이런 계획들은 당분간은 실행할 수 없는 계획으로만 남게 됐다. 시장에 워낙 돈이 없기 때문에 이 정도 작은 규모에 성장이 없는 스타트업은 후속 투자를 아예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올해 우리 투자사 중 망하는 회사들이 역대급으로 많이 나올 것 같다.

마지막 라운드 밸류에이션이 수백억이 넘는 회사들은 위에서 말한 완전 초기 회사보단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이 상당히 발전한 회사들이다. 하지만, 이 스타트업들도 돈을 많이 벌거나 흑자 전환을 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계속 제품을 제대로 만들면서 비즈니스모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선 투자를 받아야 한다. 이 회사들은 완벽한 product market fit을 아직 찾진 못했지만, 돈과 인력이 보강되면 꽤 확실한 성장이 보이기 때문에 완전 초기 회사들보단 투자받는 게 조금은 더 수월하다. 이렇게 투자받을 때 요새 자주 보는 게 기존 밸류에이션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로 투자받는 down round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 라운드 대비 50% 할인된 밸류에 투자받는 회사도 있고, 심하면 70% 할인된 밸류에 투자받는 회사도 있다.

다운 라운드는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밸류에이션 거품에 흠뻑 젖어서 비싸게 투자한 시리즈 B, C 투자자들은 몇 달 만에 본인들의 지분 가치가 반토막 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다른 임직원과 심사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이 소신 있게 주장해서 투자했다면, 회사 안에서의 입지도 약해졌을 것이다. 우리같이 일찍 들어가는 투자자에겐 다운 라운드가 진행돼도 돈을 잃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예를 들면 지분 가치가 20배가 아니고 3배가 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게 투자하기 때문에, 지분 가치가 20배 될게 3배가 되면, 우리 또한 많이 고통스럽다.

그런데 다운 라운드의 충격과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분들은 바로 회사의 창업가, 대표이사, 경영진, 그리고 임직원들이다. 모두 다 개고생해서 0원짜리 구멍가게를 4,000억 원짜리 기업으로 만들었는데, 기업가치가 갑자기 400억 원으로 떨어진다면, 주인 의식을 갖고 열심히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들에게 팔아야 하는 회사의 임직원들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다운 라운드라도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회사를 계속 믿고 돈을 주겠다는 신호라서 아주 고맙게, 신속하게, 그리고 신나게 투자받아야 한다. 비상장 회사의 기업가치는 어차피 종이 가치라서, 계속 생존하면서 좋은 제품과 비즈니스모델을 만들다 보면 다시 충분히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밸류에이션에 들어갔던 많은 후속 투자자들이 다운 라운드로 후속 투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를 요새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본인들이 들어갔던 기업가치보다 낮은 다운 라운드는 무조건 막으면서, 극단적으로 본인들의 지분 가치가 하락할 바엔 그냥 회사를 폐업하라고 하는 투자자도 있다고 들었다. 뭐, 투자자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나는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다. 어차피 투자는 장기전이라서 좋은 팀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면, 그리고 계속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기업 가치는 다시 리바운드하기 마련이다.

피와 땀의 진입장벽

우리 투자사 중에 페이지콜이라는 9년 된 B2B SaaS 스타트업이 있다. 우린 페이지콜에 2017년에 첫 투자를 했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투자했다. 지금은 B2B SaaS 분야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당시엔 투자를 업으로 하는 VC들에게도 이 분야는 생소할 정도로 인기도 없고, 한국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페이지콜은 B2B SaaS 분야에서도 API를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창업 초기엔 투자자들이 이 비즈니스를 이해도 못 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페이지콜은 학원이나 학교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돕는 API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애매모호한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프라인 사업을 주로 하던 교육업체들이 페이지콜의 제품을 사용하면, 쉽고 자유롭게 본인들만의 온라인 강의실과 강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즉, 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도가 높고, customization이 가능한 온라인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이 회사의 강점은 9년 동안의 피와 땀이 투자된 연구, 개발, 그리고 삽질 위에 구축한 실시간 칠판(=캔버스) 기능인데, 수학과 같이 선생과 학생이 뭔가를 계속 보고 쓰면서 학습해야 하는 과목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려운 기능이다. 척박한 SaaS와 API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이젠 이 분야에서는 강자가 됐고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설탭, 콴다, 대교, 튼튼영어 등과 같은 기업고객에서 페이지콜을 기반으로 실시간 화상 과외 솔루션을 구축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분야에서의 사업, 그리고 펀딩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B2B SaaS 시장을 한국의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보고, 특히나 API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VC도 많다. 내가 이 회사를 다른 투자자분들에게 소개하면, SaaS나 API를 좀 아는 분들도 항상 하는 질문이 “어차피 WebRTC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큰 교육업체라면 개발 인력이 내재화 되어 있을 것이고, 구글에서 오픈 소스로 제공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API인 WebRTC를 이용해서 페이지콜과 똑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외주업체에 맡겨도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누구나 WebRTC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 API를 기반으로 누구나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비슷한” 제품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페이지콜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사용성에 대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해 본다. 시장에는 비슷한 제품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이 중 제대로 돈을 버는 제품은 극소수이다. 이 극소수의 제품과 다른 비슷한 제품의 껍데기만을 보면 다 비슷하다. 아니, 대충 보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이 제품들을 조금만 더 깊게 사용해 본 사용자들은 그 차이점을 금방 파악하고 어떤 제품을 돈을 내고 사용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좋은 제품과 그냥 비슷한 제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 차이점을 표현하는 완벽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사용자 경험의 오너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분야만 꾸준히 파고들면서 축적된 수천 ~ 수만 시간의 제품 개발과 운영, 그리고 수십 ~ 수백 명의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 수백 ~ 수천 번의 product iteration 과정을 통해서 한 제품을 여러 고객이 여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축적돼야지만 우리의 제품은 사용자 경험을 소유(=own)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껍데기는 다른 제품과 비슷하지만, 사용해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사용자 경험이 내재화 되어 있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페이지콜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API를 만들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 사용하는 브라우저, PC나 모바일 플랫폼의 환경,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 사용자 실수 등, 너무나 많은 변수 때문에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수년 동안 troubleshooting을 해왔고, 사용자들의 피드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코드, 기능, UI, UX를 개선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WebRTC를 기반으로 껍데기만 비슷하게 만든 제품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이 이 분야에 들어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페이지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이젠 다른 제품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런 제품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헌신하는 팀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노가다가 필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가다는 피와 땀이 만든 진입장벽이 될 수 있고, 피와 땀이 만든 진입 장벽은 어쩌면 남들이 넘기 힘든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다.

석탄 기관차

옛날 만화를 보면 기관차에 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 누군가 엔진에 계속 석탄을 투입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조금 과장된 면이 있지만, 더 빨리 가거나 언덕을 올라가기 위해서 동력이 더 필요하면 더 열심히, 더 많은 석탄을 삽으로 퍼서 계속 투입하고,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전을 보면, 더 빨리, 더 많은 석탄을 투입하면 더 멀리 달아났다가, 또 추격자와 가까워지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시 석탄을 더 투입하는 장면이 나는 기억난다.

요새 우리 투자사 몇 군데를 보면 이 석탄 기관차가 생각난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는 이 석탄 기관차이고, 대표님은 동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삽질해서 석탄을 투입하는 힘센 노동자다. 그리고 이 회사에 투입된 투자금이 석탄이다. 창업 초기에는 회사에 자본이 없기 때문에 투자를 받아서 사람을 채용하고, 제품을 만들고, 마케팅하고, 사업 관련 모든 자금은 실은 외부에서 유치한 투자자의 돈으로 충당된다. 소위 말하는 VC sponsored business를 창업 초반 몇 년 동안은 하게 된다. 계획했던 대로 많은 일들이 풀리면, 어느 정도의 투자금을 태운 후엔 소소하게 자생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극소수의 창업가는 만든다. 이 정도만 해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기관차를 예로 들면, 그냥 적당한 속도로 계속 철길을 따라 움직이기 위한 석탄은 자생적으로 내부에서 만드는 게 가능해진다. 엄청나게 빨리 가기 위해선 더 많은 석탄을 태워야 하는데, 이 정도의 석탄은 내부에서 만들지 못하지만, 그냥 멈추지 않고 계속 칙칙폭폭 가기 위한 석탄은 스스로 충당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외부에서 대량의 석탄을 공급받으면, 다른 기관차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뭐, 계속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순수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는 대표들은 이런 상황이 그렇게 익숙하진 않을 것이다. 한계 비용이 대략 제로이기 때문에 기관차를 움직이기 위해서 계속 석탄을 투입하는 시나리오가 그렇게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를 직접 생산해서 판매하는 사업을 하는 대표들은 이 석탄 기관차 상황이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도 열심히 삽질해서 석탄을 투입하고 있을 테니까. 매출을 만들기 위해선 팔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한데, 일단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대부분 외부 투자를 통해서 생산 비용을 마련하는데, 직접 공장을 운영하지 않으면 – 대부분 외주 생산을 한다 – MOQ 라는 게 있어서 당장 판매에 필요한 제품보다 훨씬 더 많은 수량을 주문하고, 여기에 대부분의 투자금이 사용된다. 문제는 이렇게 주문한 제품이 아무리 마진이 높아도 실제 매출로 회사 통장에 입금 되기까진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유통기한이 없는 제품이라면 수년 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진율이 80%인 제품을 10억 원어치 생산해서 판매하면 50억 원의 매출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엄청난 사업이다. 그런데 이걸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생산비용 10억 원은 한 번에 빠져나가는데, 이게 곧바로 50억 원의 매출로 회사 통장에 입금되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없는 제품이라면 2년에 걸쳐서 완판되고 50억 원이 2년 걸쳐서 현금화될 수 있다. 그 기간에 일부 제품이 더 잘 팔려서 재고가 소진되면, 중간에 또 주문이 들어가야 하고, 또 생산 비용이 발생하고, 마케팅도 하고 운영 자금도 필요하고 해서, 결국엔 계속 외부 투자를 받아야 하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사업이 올라가기 전까진 이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위에서 말한, 계속 가기 위해서 기관차에 석탄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수년 동안 계속 지속된다는 말이다.

추가 투자를 받기 위해선 매출이 계속 발생해야 하고, 매출을 계속 만들기 위해선 그 매출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을 투입해서 생산해야 하고, 겉으론 고마진 사업이고, 매출은 증가하지만, 실제 회사의 현금 상황을 보면 항상 바닥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계속 석탄을 투입해서 기관차를 움직여야 한다. 계속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체적으로 석탄을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는데, 대부분의 기관차는 이 시점이 오기 전에 영원히 멈춰서 더 이상 못 움직인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싫다면 사업을 안 하면 된다. 은하철도 999와 같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도달할지, 목적지를 아무도 모르는 이 외롭고 힘든 여행을 계속하는 게 창업이고,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석탄을 계속 투입해야 한다. 안 그러면 기관차는 멈추고, 거기서 모든 게 끝난다. 관건은 이 석탄을 외부에서 계속 지원받냐, 아니면 내부에서 석탄을 만들어서 다시 동력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