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육감

우린 일주일에 한 번 전체 미팅을 하고, 여기서 어떤 회사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 미팅도 한다. 워낙 많은 딜들을 보고, 그리고 다른 VC보다 많은 회사에 투자하기 때문에 우리의 투심위는 간결하다. 특정 회사에 대해 투자팀원 모두의 의견을 취합해서 투자하지 말지, 투자할지, 또는 조금 더 검토할지 빠르게 결정하는데, 모두 다 그동안 워낙 많은 회사를 봤기 때문에 각각 본인의 결정을 뒷받침할 만한 한두 개의 명확한 주장과 논리를 팀과 공유한다.

나도 그동안 많은 창업가와 회사를 만났기 때문에, 회사를 한두 번 만나면 이 회사에 투자할지 안 할지, 대략적인 방향이 나오고, 왜 그런 방향이 나왔는지 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최근에 어떤 회사에 대해서는 이런 명확한 반대 논리가 없었지만 투자하기가 싫었던 적이 있다. 실은 창업팀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사업의 수치도 나쁘지 않았고, 시장도 괜찮아서, 내 기준에 딱히 걸리는 건 없었는데, 그냥 왠지 이 회사와 대표에겐 투자를 꼭 해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 우린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콕 집어서 나열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 또한 없고, 왠지 이 회사의 대표에 대한 강한 확신이 없고 느낌이 별로라면 과감하게 투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돈을 제공하는 한 LP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분이 이런 우리의 방식이 너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지 않냐고 지적한 적이 있다.

실은, 표면상으론 맞다. 테크에 투자한다는 VC가 ‘감’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건 어떻게 보면 시대를 역행하는 태도인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지표와 논리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케미와 느낌/감이 더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초기 투자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실은, 이런 방식에 논리와 과학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스트롱 모든 멤버들의 누적 투자 경험은 30년이 넘는데, 이 30년 동안 차곡차곡 축적된 크고 작은 것들이 정교하게 순간적으로 프로세싱되는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큰 데이터보단 작은 데이터이다. 그동안 경험한 작은 것들, 즉 정량화할 수 없는 감정, 느낌, 관찰, 직관 등이 작은 데이터인데, 초기 투자할 땐 그 어떤 인공지능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것들 때문에, 회사를 검토할 때 딱히 크게 걸리는 건 없지만, 뭔가 투자하기가 꺼려진다면 우린 다시 검토하고, 또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도 크게 걸리는 게 없지만, 투자하고 싶은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그냥 과감하게 패스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린 회사를 검토할 때 우리가 싫어하거나 우리 기준에 미달인 부분들이 명확하게 파악되는 걸 선호한다. 이런 경우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탈락시킬 수 있어서, 더 이상의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육감에 의존해서 투자하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잘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우린 확신을 갖고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후회하지도 않는다.

자본의 해자(垓字)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플래쉬가 배트맨에게 당신의 슈퍼 파워는 뭔지 물어보자 “돈이 많다”라고 답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브루스 웨인의 차별점, 즉 비즈니스 세계에서 강조하는 해자(垓字)는, 바로 돈이었다. 시장에 돈이 넘쳐흘렀을 때, 자본 자체를 가장 큰 차별화 전략으로 만들면서 자본의 해자화를 추구했던 스타트업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돈을 써서 고객을 획득하고, 이들을 락인(lock-in)한 후에 돈을 벌겠다는 전략을 구사하는 회사들은 특별한 기술적 또는 비즈니스적인 차별점 보단, 돈 자체를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우리 포트폴리오에도 플랫폼 스타트업이 상당히 많은데 당근이나 숨고와 같은 회사들이 좋은 조건에 펀딩을 잘 받고 초기에는 자본을 무기로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창업 후 몇 년 동안은 매출이나 수익성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사용자들을 플랫폼에 온보딩시키는데 회사의 모든 자원을 집중했다. 돈은 나중에 벌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고, 이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사용자들이 확보되어야 했고, 단기간 내에 수많은 경쟁사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용자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썼다. 퍼포먼스 마케팅, 그로쓰 마케팅과 같은 방법을 기반으로 마케팅을 했는데, 실은 그냥 돈을 엄청나게 많이 써서 사용자들을 구매한 것이다.

잠재고객이 수천 만명 존재하는 소비자 플랫폼엔 이런 자본을 앞세운 대량 고객 획득 전략은 잘만 실행하면 단기간에 많은 유저를 온보딩 시켜서 수요와 공급의 바퀴를 돌릴 수 있고, 바퀴의 마찰을 제거하기 위해서 계속 효율적으로 돈을 쓰면, 결국 모든 경쟁사를 따돌리고, 가만히 놔둬도 마찰 없이 영구적으로 돌아가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플랫폼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이 적용되면 웬만하면 다른 경쟁사가 넘볼 수도 없는 거대한 매출을 만드는 사업이 완성된다. 나는 이 단계까지 온 대표적인 기업이 쿠팡이라고 생각한다. 토스도 이 단계에 꽤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본으로 해자를 만드는 전략은 시장에서 돈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유효한 전략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니, 유효하지 못 한 전략이 아니라, 스타트업이 취할 수 있는 최악의 전략으로 전락했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돈으로 플랫폼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계속 투자받아야 하는데, 과거와 같은 유동성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돈을 벌기도 전에 이렇게 돈을 써서 몸집을 키우는 기형적인 전략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정말로 플랫폼 경험이 많은 창업팀이 정말로 매력적인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니라면, 투자를 받는 게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 많은 창업가들이 이젠 몸집을 키우기 전에 돈부터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일단 사용자들을 모으면, 그다음에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다는 마인드에서 벗어나서, 일단 돈부터 벌고, 남는 돈으로 사용자를 더 모으자는 관점에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이 요샌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바뀐 생각과 관점이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방법이나 전략을 사용하든 궁극적으로 기업은 돈을 벌고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동안 경기가 너무 좋고 필요하면 돈이 항상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에 많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성장에 눈이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본으로 해자를 만드는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아직도 자본을 무기로 사용하는 전략을 아주 적절하고 조심스럽게 구사하는 스타트업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거대한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과거와같이 묻지마 마케팅 전략은 지양하는게 맞지만, 결국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바퀴를 돌아가게 만드는 기름은 사용자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보다 더 빠르게 사용자를 확보해서 이들이 다른 플랫폼으로 갈아타지 못하게 락인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이 기본적인 작업이 안 되면 아무리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해도 규모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을 읽으면 역시 또 혼란스러울 것이다. 돈도 벌어야 하지만, 동시에 돈도 태워서 사용자를 계속 확보하는 전략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나한테 조언을 구한다면, 지금같이 돈이 메마른 시장에서는 돈을 버는 데 집중하는 게 맞지만, 플랫폼을 운영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성장하기 위해서 마케팅을 해야 할 것이고, 불경기 동안 큰 자본이 없어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건 바람직하지만, 결국 다시 크게 성장하기 위해선 자본이 무기가 되는 전략이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다.

하이 텐션

창업가들의 말도 안 되게 높은 텐션과 긍정 에너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도 내가 자주 썼고, 항상 느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스타트업 업계에서 종사하면서 매우 많은 창업가를 만났는데, 이렇게 많고 다양한 창업가들의 공통점 하나만 꼽아보라면, 자발적으로 생기는 최상위 레벨의 에너지와 텐션이다.

일단, 에너지와 텐션이 높지 않으면 창업할 수가 없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데,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직접 세상의 틀을 만들고 싶어 하고, 이런 소수의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창업가들은 이런 비이성적인 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샘플인데, 미친 세상에서 미친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에너지와 텐션 레벨이 필요하다. 이들이 하려고 하는 걸 아무도 믿지 않고, 가끔은 본인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이 외로운 싸움은 하이 텐션이 없으면 절대로 시작도 못 한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창업가들의 높은 에너지와 저세상 텐션은 타고 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타고난 텐션을 지난 사람들이 사업을 하다 보면, 그 레벨이 더 높아진다. 창업하기 전에 이미 성공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을 벌여야 하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사업을 시작해 보니, 이게 생각보다 더 어렵고 확률이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매일, 매시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힘내기 위해서 안 그래도 높은 에너지 레벨과 하이 텐션을 더 높게 해야 한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도 텐션을 더 올리고, 좋은 사람들을 채용하기 위해서 더 높은 텐션을 발산한다. 이런 텐션은 다른 동료 직원들에게 전염되고, 우리 같은 투자자에게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전달된다.

이렇게 창업가에게서 시작된 에너지와 텐션은 그 주변으로 확산하고, 여기에 감염된 직원들, 외부 파트너, 투자자 모두 비슷한 레벨의 긍정적인 텐션으로 이 회사와 창업가를 응원한다. 그리고 이런 작은 텐션의 불꽃이 퍼지면서 큰불이 되고, 가끔 우리는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걸 목격한다.

이번 글은 새로운 내용은 없고, 내가 항상 하는 말을 다시 바꿔 말하는 건데, 돈이 아무리 많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무한 자원을 보유한 많은 거대한 기업들이 특정 분야에서는 항상 스타트업에 지는 이유가 바로 이 높은 텐션과 에너지 때문이다. 대기업 직원들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스타트업의 텐션과 에너지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텐션이 너무 높으면 오히려 대기업에서 싫어한다.

이런 최상위 레벨의 텐션과 에너지는 솔직히 돈 주고도 못 산다. 그냥 창업가들과 스타트업분들에게 타고난 소중한 자원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투자자는 이걸 돈 주고 산다. 스타트업에 투자한 후에 이렇게 텐션이 높은 분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의 텐션과 에너지 레벨도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우린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존재의 이유

나는 혼자 살진 않지만,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를 즐겨보는 편이다. 2주 전에 배우 이주승 씨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받아서 부산에서 보낸 하루에 대한 내용을 재미있게 봤다. 이분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팬들이 직접 부산으로 왔고, 팬클럽 회원들과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같이 교류하는 장면을 보고 역시 연예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팬들 때문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주승 씨 본인도 이런 이야기를 직접 했는데, 아무리 유명하고 연기를 잘해도 팬들이 없으면 배우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같은 투자자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봤다. 우리가 활동하는 생태계를 보면, 3개의 이해 관계인이 있다. 일단 우리 같은 VC에게 돈을 투자하는 LP라는 존재가 있고, LP의 돈을 관리하는 스트롱과 같은 VC가 있고, VC들이 이 돈을 투자하는 창업가가 있다. 이 외에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다양한 플레이어와 이해 관계인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3개의 플레이어가 이 생태계를 돌아가게 만든다. 즉, 스트롱 같은 VC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들이 있기 때문이고, 이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창업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도 첫 7년은 정말로 초기 스타트업과 같이 운영됐다. 특별한 시스템도 없고, 웬만한 일은 대표인 내가 다 처리하면서, 그냥 되는대로, 그리고 닥치는 대로 두서없이 일을 했다. 이렇게 하면서 점점 더 회사의 체력이 생기고, 좋은 동료들도 조인하면서 우리도 스트롱의 비전과 미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만들었다.

Together, We are ALL Strong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ALL’이다. 스트롱에서 하는 모든 의사결정이 우리의 LP, 스트롱, 그리고 우리의 창업가 모두에게(=ALL) 이익이 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철학이자 미션이 그대로 반영된 멋진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3명의 이해 관계인 중에서도 모든 가치는 창업가들이 만들어 낸다. 창업가들이 만드는 가치를 우리는 잘 다듬어서 우리의 LP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연예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팬이듯, 스트롱과 같은 VC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LP와 창업가이고, 굳이 하나만 택하자면 투자자의 존재 이유는 창업가들이다. 창업가가 없으면 우리 같은 투자자가 존재할 수 없다.

성장과 수익의 저글링

지난주에 불경기가 왜 어떤 스타트업에겐 평생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인지에 대해서 몇 마디 썼다. 내 블로그를 계속 읽는 분들에겐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오늘은 왜 이게 어쩌면 기회가 아니고 자멸로 가는 길일 수도 있는지에 대한 약간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할땐 – 이건 팬데믹 기간뿐만 아니라 실은 지난 12년 동안이었다 – 모든 스타트업의 전략은 수익성보단 성장성에 기울어졌었다. 기형적으로 많은 돈과 자원이 돈을 벌어서 흑자 나는 회사를 만드는 방향보단, 손실이 발생해도 무조건 외형을 성장시키는 방향에 집중적으로 투자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조건 성장하는 전략을 나도 좋아하진 않지만, 이게 맞냐 틀리냐를 따지기 전에, 경기가 좋을 때 당시 시장의 분위기도 감안을 해봐야 한다.

경기가 좋을 땐 정말로 유동성이 풍부했다. 정규 교육을 받았고, 누구나 알만한 회사에서 2년 이상의 직장 경험이 있는 창업팀이라면 웬만하면 투자를 받을 수 있던 시절이다. 워낙 비슷한 서비스가 많이 생겼고, 대부분의 회사들이 수많은 VC들로부터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익성 보단 성장이 중요했다. 그래서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다 적자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고효율의 그로쓰 마케팅에만 집중했다. 돈을 못 벌어도 일단은 고객을 획득해서 락인하면,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 지금은 이 사상을 모두 다 정말 싫어하지만 – 전략을 모두 다 진심으로 믿었었다. 우리를 포함해서.

마케팅에 돈을 너무 많이 썼고,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을 뽑으면서, 투자금은 금방 사라졌지만, 상관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또 나가서 펀딩하면 됐고, 나쁘지 않은 조건에 후속 투자를 상당히 많은 스타트업들이 제품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상태에서 잘 받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쓰면서 외형만 성장시키는 게 진짜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그 분야에서 일단 1등을 먹으면, 그 이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해도 된다는 것도 모두 굳게 믿고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냥 돈이 워낙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되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그냥 앞뒤 생각하지 않고 돈을 막 쓰고, 투자를 막 해도 크게 이상한 시절이 아니었다.

불경기가 찾아오고 유동성이 떨어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장하자는 분위기가 수단과 방법을 잘 가려서 돈을 벌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거래액이나 매출과 같은 외형을 키우기보단, 크게 성장하지 못해도 비용을 줄이고 수익성을 개선하는 게 요새 대부분 스타트업의 전략일 것이다. 우리 또한 스트롱 창업가분들에게 마이너스 나는 성장은 멈추고, 손익분기를 맞추고, 수익성에 집중하라고 한다. 성장 못 하는 걸 은근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수치가 줄어들어도 일단은 수익성을 맞추라고 강력하게 조언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수익성만 개선하고 성장을 못 하는 비즈니스는 크게 되기 힘들다. 성장이 없는 손익분기는 스타트업의 주 전략일 순 없고, 결국 작은 스타트업이 큰 사업이 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성장이라는 페달을 다시 밟아야 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이다. “언제는 무조건 성장하라고 하고, 언제는 성장 하지 않아도 되니 돈을 벌라고 하고, 이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라고 하네.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좀 미안하지만, 이게 변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환경에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대표들이 감수해야 하는 숙명이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에 유동성이 없을 땐, 수익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렇다고 성장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꺼버리면 안 된다. 상황이 다시 좋아지면, 언제든지 다시 성장에 초점을 맞출 준비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성장과 수익성이라는 두 가지의 공을 항상 저글링 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서 하나의 공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주워서 다시 저글링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