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전문가의 함정

VC들이 도입하는 프로그램 중 벤처파트너라는 게 있다. 정해진 포맷의 프로그램은 아니고, 투자사마다 이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주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해서 이 분야의 회사를 발굴하고, 검토하고, 실사하고, 투자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벤처파트너라고 한다. 예를 들면, AI, 게임, 메디컬, 반도체, 크립토와 같이 하나의 독립적인 분야로도 시장이 충분히 크지만, 이 분야의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고, 투자사 내부에 전문가가 없다면, 외부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하는 프로그램이다.(하지만, VC마다 정의하는 벤처파트너의 구체적인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우리도 벤처파트너에 대한 생각도 해봤고, 고민하고 있긴 하다. 아무래도 스트롱은 특정 분야에 대해 매우 깊고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VC라기 보단,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제너럴리스트 투자자라서 기술력이 핵심인 회사들을 검토하기 위해선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투자해야 한다. 특히,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이라면 기술력이 핵심이라도 사람들만을 보고 투자 결정을 할 수 있지만, 그 단계를 지난 회사를 검토할 땐, 그 분야에 대한 지식, 경험, 그리고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면 우리도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 영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는데, 결국엔 하지 말자는 같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걸 전문가의 함정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가 내가 의도하는 것을 뜻하는진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많은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아는 것만 알고, 모르는 건 너무 모른다. 그리고 본인들이 모르는 걸 모른다는 걸 잘 인정하기 싫어하고,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워낙 똑똑하고, 그 분야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고, 경험도 많기 때문에, 본인들이 모르거나 처음 접하는 건, 거의 즉각적으로 “저건 안 돼요.” , “내가 전에 비슷한 걸 해봐서 아는데, 안 되는 거예요.” 등의 반응을 보인다. 한 분야에 대해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하고, 경험한 분의 통찰력을 빌리기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건데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해야 하는 벤처 투자 결정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봤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런 전문가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그 분야의 스타트업에 대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그런 회사에 투자해야지 크게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전문가가 안 된다고 하면, 이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도 안 된다고 할 확률이 높고, 이럴 경우, 많은 VC들이 이런 의견을 기반으로 투자하지 않을 확률이 커질 것이다. 오히려 이런 회사에 투자하면,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 한 다양한 요소와 우연이 일어나고, 여기에 운까지 작용해서 이 회사가 성공한다면, 역사에 남을 대박 투자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된다는 사업은 무조건 되고, 안 된다는 사업은 무조건 안 된다면, 우리가 하는 초기 벤처 투자는 정말 메마르고 재미도 없을 것이다. 물론, 큰돈도 못 벌 것이다. 이 글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을 비난하는 내용도 아니고, 벤처 파트너 프로그램을 비난하는 내용도 아니다. 아주 뛰어난 전문가들도 많고, 벤처 파트너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VC도 많다. 다만, 내가 그동안 이 업을 하면서 관찰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만 빠져서 다른 큰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현상에 대한 고찰이다.

확장에 대한 상반된 견해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사람의 힘을 과소평가한다는 내용의 을 전에 썼다. 반면에 시장의 크기, 현재 사업의 수치, 기술의 난이도를 과대평가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번 포스팅은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반대 내용의 글이다.

우리 같은 초기 VC와 시리즈 B 이후의 투자를 하는 late stage VC가 회사를 검토할 때 보는 기준이 조금씩 다른데,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한쪽은 미래를 더 많이 보고, 한쪽은 현실을 더 많이 본다는 점일 것이다.

초기 투자자는 오늘의 창업자와 이분이 하는 사업이 5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고, 어떤 분야로 확장할 가능성이 있을지 열심히 상상해 보고, 그려보고, 그런 큰 그림을 창업팀이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투자를 집행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이 회사가 하는 사업은 10대 여성만을 위한 아이템이지만, 결국엔 한국의 모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확장할 것이고, 그 이후엔 글로벌 시장으로도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로 투자한다.

반면에,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비즈니스 모델도 명확하고 매출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 이 회사를 검토하는 투자자는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기보단, 현재 이 회사의 상황과 수치를 기반으로 투자를 집행한다. 같은 예를 들어보면, 지금 이 회사가 하는 사업이 한국의 10대, 20대 여성을 위한 아이템이라면, 그냥 현재의 시장과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이 회사를 평가하고 투자 기준에 부합하면 투자를 진행한다. 물론, 모든 투자자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고 투자하지만, 투자 단계에 따라서 미래의 가능성이 투자 결정의 기준에 기여하는 정도는 매우 다르다.

최근에 스트롱 내부 워크숍에서 했던 대화인데, 이렇게 초기 스타트업의 확장 가능성만을 보고 투자하는 전략의 타율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확한 과거 데이터를 깊이 있게 분석하진 못했고, 실은 이런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가 13년 동안 투자하면서 봤던 우리의 투자사, 그리고 우리의 투자사는 아니지만, 만났고, 계속 모니터링 했던 스타트업을 통한 간접 경험만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5년 후엔 훨씬 더 큰 분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업이다. 이미 미국의 글로벌 벤치마크 회사는 그렇게 크게 확장했다.”라는 생각과 기대를 갖고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충분히 확장하지 못했다.

“시장이 너무 작은데,,,그리고 아무리 그 시장을 50% 이상 먹어도 역시 큰 규모가 되긴 힘들어.”라고 판단해서 투자하지 않은 회사는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분야로 확장해서 엄청나게 큰 회사가 됐다.

왜 어떤 회사는 훨씬 더 커질 수 있는데 확장하지 못하고, 왜 어떤 회사는 이론적으론 더 커질 수 없는데 확장했을까? 결국엔,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사람’이 핵심인 것 같다.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한 경우, 이 사람이 확장이 불가능한 시장을 확장했다. 반면에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한 경우, 이 사람이 확장이 확실한 시장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실수를 아예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량적인 분석보단 정성적인 판단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다. 결국 우리가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과 초기 창업가들을 더욱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연구하면 할수록 과학과 수치 보단, 느낌, 감, 그리고 강한 확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매일 매일 느끼고 있다.

스케일은 우리의 적

우린 계속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이 돈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데, 펀드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을 LP(Limited Partner)라고 한다. 스타트업이 새로운 라운드를 진행할 때마다 기존 투자자들도 참여하지만, 새로운 투자자도 필요하듯, 우리도 새로운 펀드를 만들면 기존 LP도 재참여를 하지만, 어떤 분들은 사정상 참여하지 못하고, 어떤 분들은 예상보다 투자금이 줄어서, 우리도 항상 새로운 투자자와 만나서 돈 달라고 열심히 설득한다.

기관 LP들은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을 관리하는 큰 투자자들인데, 이들이 우리에게 가끔 펀드 규모에 대해서 지적한다. 스트롱 괜찮은 것 같은데, 본인들의 최소 투자금액 대비 스트롱의 펀드가 너무 작아서 혹시 펀드 규모를 더 키우면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전에는 항상 갈등하고 고민했다. 더 큰 펀드를 만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규모를 키우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LP가 투자한다는 생각을 하면, 벤처투자하는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고민을 상당히 깊게 했다.

그런데 요샌 누가 이런 질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우린 펀드 규모를 더 키울 계획이 없으니까 그냥 당신들이 작다고 생각하는 현재 펀드에 투자하든지, 아니면 그냥 안 하든지 결정하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펀드가 크면 좋은 점이 많다. 일단 투자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진다. 더 큰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고, 시리즈 A, B, C 등 다양한 단계의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 그리고 운영보수 또한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다. 주로 전체 펀드 규모의 2%를 해마다 회사 운영 비용으로 사용하는데, 펀드가 더 크면 이 비용 규모 또한 늘어나서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할 수 있고, 월급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봤을 땐, 우리같이 초기 투자하는 VC에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펀드 규모가 커지면, 이 펀드로 큰 수익을 내는 게 더 힘들어진다. 우리 첫 번째 펀드가 20억 원이 안 됐는데, 20억 원 펀드로 10배의 수익을 내는 거랑, 1,000억 원 펀드로 10배의 수익을 내는 건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된다. 즉, 펀드가 커질수록 큰 수익을 내는 게 더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런 숫자를 떠나서,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펀드가 너무 커지면 우리가 항상 하는 초기 투자만 하는 게 힘들어져서, 스트롱의 전반적인 철학과 전략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작은 펀드로 시작해서 새로운 펀드를 만들 때마다 계속 규모를 키우는 VC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어서 –  실은, 대부분의 VC가 여기에 해당된다 – 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작은 펀드로는 작은 투자를 하다가 펀드 규모가 커지면 주로 작은 투자와 큰 투자를 동시에 다 한다. 모든 걸 훌륭하게 잘 소화하는 VC도 있지만, 초기 투자와 시리즈 B 투자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펀드가 망가지는 것도 나는 많이 봤다. 또한, 펀드가 커지면 이에 따라서 사람도 더 많이 채용해야 하는데, 조직이 커지면 사람과 사람의 마찰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우리 같이 lean and mean 전략을 취하는 VC에겐 상당히 악영향을 미친다.

벤처 생태계에 있으면 스케일(scale)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실은, 과할 정도로 이 말을 많이 한다. 나는 전에는 스케일이 무조건 좋은 줄 알았는데, 요샌 오히려 이 반대의 생각을 한다. 스케일은 우리의 적이다. 우린 우리가 하는 일을 더 잘해야지(better), 더 커져야(bigger) 하는 게 아니다. 너무 커지는 순간 많은 것이 망가진다.

이런 현상은 스타트업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투자를 너무 많이 받으면, 너무 많은 사람을 채용하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한다. 쿠팡이나 토스 같이 이런 스케일을 훌륭하게 소화한 회사도 있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스케일이 회사를 완전히 망치는 경우도 있다. 창업가들도 너무 스케일에 목숨 걸지 말고, 본인들이 하는 걸 더 크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스케일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스트롱에겐 스케일은 적이다.

피드백에 대해

우리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타파스의 창업가 김창원 대표님이 얼마전에 링크드인에 이런 포스팅을 올렸다.

VC들이 회사를 검토한 후에 투자하지 않기로(=pass) 하면, 왜 투자하지 않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피드백을 창업가들에게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포스팅인데, 투자자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창업가의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내용이다. 김창원 대표님은 VC들이 투자하지 않고 패스하는 이유를 창업가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실은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이 내용에 동의할 것이다. 투자사와 스타트업의 관계는 비즈니스로 엮인 professional한 관계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VC라는 사람과 창업가라는 사람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자 교류라서,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왜 특정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지를 항상 명확하고 정량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매우 많고, 나도 이런 상황을 자주 경험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VC들이 패스하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조금 덧붙여서 말하자면, 그래도 나는 투자자들이 창업가들에게 간략하게라도, 명확한 피드백을 제공하고 패스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남의 돈을 관리해 주는 펀드 매니저들이고, 이 돈을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 투자한다. 기계적으로 보면, 그냥 돈이 좋은 사업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이지만, 이 구조 속으로 깊게 들어가 보면, 결국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고, 서로를 알게 되고,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투자하는 구조이다.

나는 창업가들이 VC들과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도 오래전에 뮤직쉐이크 할 때, 투자자들과 한 시간 만나기 위해서 5시간을 준비했고, 그 미팅을 위해서 엄청난 시간, 돈, 에너지, 기대, 그리고 희망을 투자했기 때문에, 창업가들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잘 안다. 특히, 유명한 VC랑 만나기 위해선 몇 달 전부터 약속을 잡고 수개월을 두려움과 설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미팅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대부분의 투자자 미팅은 거절로 끝난다. 거절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보면, 이력이 나기 때문에, 거절 자체로 맘 상하진 않는데, 왜 우리 회사에 투자하지 않았는지 피드백을 줬던 VC들이 그렇게 고마웠다. 어떤 투자자는 굉장히 다정하게, 그리고 자세히 피드백을 줬고, 어떤 투자자는 “너는 너무 지루한 피칭을 했어.”라는 그렇게 생산적이진 않았던 피드백을 줬지만, 그래도 당시 바닥을 구르고 있던 나에겐 모두 큰 도움이 됐다. 어떤 투자자는 싸가지 없는 피드백을 줬지만, 어쨌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던 부분이라서 이 또한 감사하게 생각했다.

가장 섭섭하고 아쉬웠던 투자자들은 미팅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고, 그 어떤 피드백도 없던 사람들이다. 물론, 나도 이제 투자를 조금 해보니까, VC들이 얼마나 바쁘고, 모든 거절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게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걸 매일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투자자와 만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한 창업가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 땐, 짧게라도 그 이유와 피드백을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건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를 떠나서, 나와 같은 한 명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만 더 하자면,,,가장 안 좋은 건, 미팅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는 투자자들이다. 어장관리라는 말도 안 되는 명목하에 절대로 창업가들에게 싫은 소리를 안 하겠다는 전략이라고 하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런 분들 때문에 VC들이 단체로 욕을 먹는다. 이런 분들은 투자하면 안 된다.

소명과 책임

우리 펀드의 출자자(LP)는 국내, 해외, 기관, 그리고 개인들이 적당히 잘 섞여 있다. 이 중 최근에 알게 된 분들도 있지만, 스트롱 1호 펀드부터 출자하고 있는, 13년 넘게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우리랑 오랫동안 알고 지낸 출자자 중 아주 유명한 투자자들도 꽤 있는데, 최근 프라이머 데모데이에서 어떤 분이 했던 질문 때문에 내가 한 9년 전에 이 분과 나눴던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일단 이 분과 9년 전에 나눴던 대화는 소명과 책임에 대한 내용이다. 이분은 수십 년 동안 좋은 투자를 많이 해서 그동안 큰 부를 축적했음에도, 가끔 보면 나보다도 더 열심히 창업가들을 만나고, 마치 이제 투자를 시작하는 심사역같이 용맹스럽게 투자하는 걸 보고 좀 의아했다. 이미 돈 많이 벌었고,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면 되는데, 굳이 이제 VC를 시작하는 나 같은 주니어만큼 열심히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그 대답이 당시에 나에겐 신박했다.

“Kihong. 너도 앞으로 좋은 투자 많이 해서 돈 많이 벌고, 이 업계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거야. 네가 말 한대로 난 더 이상 돈이 필요 없어. 내가 번 돈으로 우리 가족은 3대가 부유하게 살 거야. 그 정도로 돈은 많이 벌었어.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투자할 필요는 없지. 나도 투자를 시작했을 땐, 그냥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열심히 창업가들 만나고 좋은 회사를 쫓아다녔어. 너처럼 말야 ㅎ. 그런데 이젠 이게 나에겐 하나의 소명이자 책임이 된 것 같아.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 창업가들에게 내가 제공하는 자금이 기회가 되고, 이 기회를 통해서 이들이 하고 싶은 걸 해볼 수 있길 바래. 돈보다 이런 책임과 소명이 나에겐 훨씬 더 강해.”

솔직히, 이 말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땐, 속으로 “what the fuck?”이란 생각을 하면서 그냥 부자들이 하는 전형적인 그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당시엔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돈을 많이 못 벌었고, 이 업계에서 목소리를 낼 정도의 위치에 못 올랐지만, 이제 이분이 말한 게 어떤 말인지 아주 희미하게, 그리고 아주 어렴풋이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길,,,아직도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좋은 창업가들에게 투자하고 있고, 절대로 이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이들이 큰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물질적인 것들 외의 것들, 예를 들면 소명이나 책임에 대한 생각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작은 힘’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런 긍정적인 변화에 내가 동참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우리가 하는 작은 투자라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투자한 어떤 창업가들은 원래 부자였고, 좋은 학교 나와서 이미 남들보다 더 앞선 지점에서 스타트업이라는 경주를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남들보다 뒤에서 출발하고, 실은 경주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기가 힘든 분들이다.

요샌, 나는 우리가 제공하는 작은 투자금이 이들이 경주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이라는 경주에 참여한다고 모두 다 완주하는 게 아니고, 좋은 성적으로 완주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뛸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달 전에 있었던 프라이머 데모데이에서 어떤 분이 프라이머 파트너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본인은 학벌도 없고, 경험도 없고, 돈도 없지만, 뭔가 해보고 싶은 의지는 충만한데, 이런 창업가에게도 프라이머는 투자하는지 물어봤다. 프라이머나 스트롱이나, 당연히 이런 분들에게 투자한다. 우린 모든 창업가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위에서 말한 우리 출자자와 했던 9년 전의 그 대화가 다시 생각났었다.

의지가 있고, 준비되어 있는 창업가들에게 한 번은 뛰어볼 수 있는 자금과 기회를 제공하는 투자자로서의 소명 또는 책임. 뭐, 아직 나에게 이런 게 뚜렷하게 자리 잡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