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Bet Club

VC 업계에는 Second Bet Club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두 번 베팅하는 의미인데,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는 걸 의미한다. 한 창업가에게 투자했고, 이 분이 재창업했을 때 다시 투자하는 VC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업인데 왜 이런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항상 궁금했지만, 최근에 우리도 두 번 베팅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단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하고 엑싯하거나 회사를 폐업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후에 또 창업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을 마무리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의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걸 감안하면 VC의 역사가 최소 7년 돼야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할 수 있는데, 아직 7년 이상 된 VC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이 사이클을 못 탔기 때문이다. 물론, 창업하고 1년 만에 폐업하거나 엑싯한 창업가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분들이 재창업하면 다시 투자할만한 분인지 충분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한 창업가에 다시 투자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의 전 사업의 성공적인 엑싯이기 때문이다. 좋은 IPO나,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이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지만 이 분이 하는 그다음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가 생기는데,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잘 알듯이 성공적인 엑싯은 확률이 상당히 낮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투자하는 대부분의 회사가 성공적으로 엑싯하긴커녕, 창업 수년 후에 문을 닫는 걸 보면, 대부분 VC의 포트폴리오에서 두 번 투자할만큼 성공적인 창업가가 잘 안 나와서 second betting을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VC는 망한 창업가에겐 재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창업가에게 두 번 베팅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우린 올해 이런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과거에 투자했던 창업가 세 분이 모두 재창업을 했는데, 이 세 분의 새로운 스타트업에 각각 또 투자했다.

위에서 나열했던 내용과 하나씩 비교해보자.
스트롱은 이제 15년 됐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다보니 오래전에 투자한 창업가들이 재창업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스트롱은 그동안 거의 300개의 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많이 투자하다보니, 소수의 회사는 좋은 엑싯을 했다. 이 창업가들은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하지만, 우리에겐 성공적으로 엑싯한 회사들보다, 망한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망한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 이들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Saywise는 14년 전에 Tapas Media를 창업한 김창원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구직자를 위한 AI 에이전트 플랫폼인데, 솔직히 우리는 이 제품이나 시장보단 사람을 보고 두번째 베팅을 했다. 스트롱은 타파스미디어의 첫번째 투자자였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는 김창원 대표님을 보고 투자했다. 창업한지 9년 만에 타파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우리에겐 아주 좋은 엑싯이라는 훈장을 안겨줬지만, 그 9년 간의 여정은 똥밭이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 힘든 과정을 못 견뎠겠지만 우린 이 분이 9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투자자로서 이 분과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즐겼다. 새로운 스타트업도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SUPERBAND는 한국에서 만든 습윤밴드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D2C/브랜드 사업이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약 12년 전에 투자했던 Giblib의 코파운더였던 신지혜 대표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Giblib이라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지만, 신대표님은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창업에 도전했고, 우리는 이분에게 다시 한번 투자했다. 망한 회사의 코파운더에게 왜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사업의 성공은 실력과 운이 결정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은 실력보단 운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 분은 똑똑하고 실력도 있는데 첫번째 사업에서 운이 별로 없었다. 두번째 사업은 실패한 첫번째 사업에서 배운점을 잘 적용하면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전 사업을 할 때 우리와의 관계와 소통이 매우 좋아서 다시 투자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돈을 두 번이나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로 이 회사에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도 몰랐던 사실인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창고, 특히 습윤 반창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이다.

PreventiveMD는 개인화된 GLP-1과 펩타이드 치료 요법을 제공하는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이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의 Brian 대표는 위에서 말한 SUPERBAND의 신지혜 대표님과 Giblib이라는 이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Brian과 신지혜님이 공동창업한 Giblib에 12년 전에 투자했고, 이 사업은 망했지만, 두 분은 각자의 스타트업을 다시 했고 우린 이 두개의 스타트업에 다시 또 투자했다. 왜 한 번 망한 파운더에게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본다면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첫번째 사업은 운이 안 따라줬지만, 두번째 사업은 더 잘할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겐 회사가 좋은 엑싯을 했는지 아니면 망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와의 관계와 경험이 어땠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엔 이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long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업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지만, Second Bet Club에 이어 Third Bet Club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

한국 전도사

올해도 해외 출장이 꽤 많았는데 8월, 9월과 10월은 다행히도 그냥 한국에서 조용히 집중해서 일하고 있다. 특히 7월 미국 출장이 좀 빡셌는데, 미국 내에서도 이동 거리가 많았고, 만났던 투자자분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서 최근 한국 시장 소식, 스트롱의 활동, 그리고 왜 한국이 투자 대상으로 계속 좋은 시장인지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세어 보진 않았지만, 15명 정도의 투자자를 만나서 이들에게 한국과 스트롱에 대한 피칭을 한 셈인데,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15번 앵무새같이 반복한 것이다. 한 번의 미팅이 짧으면 1시간, 길면 2시간 정도인데 미팅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높은 에너지 레벨로 왜 이들이 한국과 스트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득하는 건 아무리 익숙해져도 매번 너무 어렵다.

이 일은 내가 어떤 나라에 가든 우리의 투자자 또는 잠재 투자자를 만나면 항상 하는 일인데, 출장마다 워낙 한국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니, 이제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도 왜 한국의 벤처 시장이 좋은지, 그리고 왜 스트롱이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피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됐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도시에서 미팅하고 비행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해외 LP들과 교류했던 과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스트통을 15년 전에 시작했을 땐, 솔직히 한국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기보단, 그냥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받기 위해서 한국을 팔았다. 이미 쟁쟁한 VC가 당시에 시장에 많았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돈 모으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들과 명확한 차별점이 있는 뾰족한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투자자로서 남들보다 잘하거나 뾰족한 게 없었기 때문에 ‘한국’을 전략적인 테마로 잡았다.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micro VC라는 컨셉이 그렇게 탄생했다.

만나는 잠재 LP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한국과 스트롱을 피칭했지만, 솔직히 당시엔 나도 과연 한국이 벤처투자하기 좋은 시장인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돈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은 좋은 시장이고, 똑똑한 창업가가 그 어떤 나라보다 많고, 작은 나라지만 유니콘이 많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을 계속했다. 말하는대로 생각하고, 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많이 말하니까 이 말이 내 뇌로 계속 주입됐고, 어느 순간 나는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100% 확신하는 한국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15년 후로 건너뛰어 2026년 이야기를 해보자. 이제 나는 한국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상품이기 때문에 한국을 해외 투자자들에게 열심히 팔고 있다. 스트롱 1호 펀드를 만들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이제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 투자자가 관심을 두는 시장이 됐고, 이미 그중 일부는 우리의 LP가 됐다. 개중에는 우리가 수년 동안 만나면서 한국과 스트롱을 열심히 팔아서 우리의 LP가 된 분들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우리의 LP가 된 건 아니다. 가장 큰 배경은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고, 한국에서 좋은 회사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자 유치하는 걸 전쟁에 비유하자면, 땅에서는 스트롱이 보병 역할을 충실히 했고, 위에서는 한국이 열심히 융단폭격하면서 점점 더 이 전쟁을 우승으로 몰아가고 있는 그림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면 나는 과연 애국자인가?

전에 누가 이 질문을 하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아니라고 했는데, 이젠 잠깐 생각을 해본다. 애국자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스스로를 한국 전도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자랑스럽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항상 강조하지만 나는 한국이 정말 잘 됐으면 한다. 지금도 잘 되지만 더 잘 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잘 되길 바란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우리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LP가 이런 말을 했다.
“South Korea is an incredible country. I think Koreans are the smartest people in the world.”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애국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치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다. 그냥 한국 스타트업에 많이 투자하는 것밖에 없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계속 한국의 전도사가 되고 싶다.

좋은 VC가 되는 방법

요새 학생 또는 사회초년생을 만나면 이들이 VC라는 업에 관심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나의 20대, 또는 30대 초반을 기억해 보면 당시엔 투자가 뭔지도 잘 몰랐고 VC라는 업 자체가 너무 생소해서 이런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요즘 젊은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가끔은 VC 업에 종사하는 나보다 이 직종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본인들의 커리어와 미래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좋은 인상을 받는다.

이들이 VC에 관해서 공부를 많이 하지만, 실제로 현업 VC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서인지 나를 만나면 그동안 직업으로서의 VC에 대해 갖고 있던 질문을 많이 한다. 역시 이 질문들의 수준이 높아서 매번 놀란다. VC라는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과 어떻게 하면 본인들도 VC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은데, 이미 이 질문의 단계를 넘은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VC가 될 수 있나요?”

이 질문은 VC가 되고 싶은 분들이 많이 하지만, 이미 투자하고 있는 현업 VC 초년생분들도 나에게 자주 한다. VC를 2년 정도 해서 이 업무 자체가 뭘 하는 건지, 이 산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투자는 어떤 프로세스로 돌아가는지 등에 대한 정량적인 지식과 경험은 어느 정도 습득했지만, 이 업계에서 정말 잘하고 존경받는 – 어떤 분들에겐 남에게 존경받는 게 중요한 듯 –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나에게 자주 물어본다.

일단 이런 분들에게 참 고맙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은 VC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수많은 투자자 중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준다는 건 그래도 내가 나쁜 VC는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는 것 같다.

VC가 되고 싶어 하는 분들, 그리고 사회 초년 VC 분들에게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드리는 답변은 의외로 단순하다. 좋은 투자자가 되고 싶으면 그냥 정상적이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VC가 되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 것 같은데, 많은 분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걸 보면 조금만 노력하면 눈에 띄는 좋은 VC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좋은 VC가 되고 싶으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 특히 창업가 – 나랑 똑같은 한 명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해줘라. 나는 돈이 있으니까 ‘갑’이고 이들은 내 돈을 받아야 하는 ‘을’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몸과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우리 돈도 아니고, 우린 어차피 남의 돈을 관리해주는 사람들이다. 내 돈이 아닌 남의 돈 때문에 내가 투자할 수 있고, 내가 관리하는 남의 돈 때문에 나를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어떻게 보면 큰 거품 속에 VC들은 살고 있다. 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내가 만나는 창업가를 인간으로 대하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줘라.

그리고 언행일치를 해라.
미팅 일정을 정했으면 약속한 날짜와 시간에 나타나면 된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생각보다 많은 투자자들이 아무런 사전 통지 없이 약속을 어긴다.
약속을 지켜라. 언제까지 의사결정을 하고 더 이상 투자검토를 진행할지 안 할지에 대한 의견을 주겠다고 했으면, 그냥 약속한 그 날짜에 연락해 줘라. 만약에 검토가 늦어진다면 왜 늦어지는지, 변경된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꼭 알려줘라.
투자하겠다고 했으면, 투자해라. 투자하겠다고 약속하고 잠수 타거나 연락 안 되는 VC가 너무나 많다. 혹시나 사정이 생겨서 투자를 철회해야 한다면, 쪽팔리고 불편하겠지만 솔직한 이유를 말해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해라.
무슨 말이라도 입 밖으로 꺼냈다면, 그 말을 지켜라. 이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만약에 못 지킬 말이라면 그냥 입 닥치고 있어라.

마지막으로, 좋은 투자자가 되고 싶다면, 투자해라. 너무나 많은 투자자가 무늬만 화려한 VC다. 온갖 미사여구로 본인 자랑을 하고, 과거에 어떤 회사에 투자해서 돈을 얼마나 벌었다는 자랑은 실컷 하는데, 막상 자세히 물어보면 최근 몇 년 동안 단 한 건의 투자도 집행하지 않은, 돈도 없는 VC인 경우가 너무 많다. 이건 실은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VC라고 하고 싶다면 좋은 투자든, 나쁜 투자든, 일단 투자해라. 이건 기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나열한 내용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정상적인 직장인이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고, 말과 행동을 일치하면 좋은 VC가 될 수 있는데, 이걸 또 많은 투자자가 잘 못 하는 게 현실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좋은 VC가 되는 건 생각보다 쉽다. 그냥 정상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

우린 전체 투자금의 10% 정도를 미국 회사에 투자한다. 과거에는 이 비중이 더 높았지만, 요샌 오히려 한국에 더 좋은 창업가가 많다고 느껴서 한국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몇 개의 미국 투자사는 주주명부를 Carta를 통해서 관리하는데 나에게는 아직도 이 제품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투자사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수년 동안 사용하곤 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용법을 잘 모르겠고 매번 사용할 때마다 불편하고, 내가 찾고 있는 회사가 안 보이고, 회사는 보이는데 이 회사에 투자한 우리 펀드가 안 보이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

며칠 전에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주식 수와 지분율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Carta에 들어갔다. 회사쪽에서는 이미 스트롱에 주식을 발행했고, 그쪽에서는 이게 보이는데 우리쪽에서 보면 발행된 주식이 안 보여서 대시보드에서 이것저것 누르면서 확인해봤지만, 결국엔 해결하지 못해서 Customer Support으로 갔다. FAQ도 열심히 읽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없어서 그냥 CS 이메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Carta가 이젠 고객지원 이메일을 없애고 이걸 AI 챗봇으로 대체해버린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모든 AI 챗봇은 최악이었고, Carta의 봇도 역시 나의 이런 낮은 기대 수준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AI 봇과 이야기하다가 짜증나서 Carta에 직접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개거지 같은 시스템이었다. 전화번호도 꼭꼭 숨어있어서 찾는 데 한참 걸렸고, 미국과 시간차가 있어서 아직 전화는 못 했는데, 사람의 도움과 사람과의 통화가 정말 그리웠던 순간이었다.

Carta는 이렇게 해놓고 아마도 AI를 통해서 고객지원 비용을 대폭 절감했다고 자랑할 것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맞다. 사람을 없애고 이걸 시스템으로 대체했으니까, 돈은 많이 아꼈을 것 같은데 이건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지원 비용은 아꼈겠지만, 나같이 화난 고객들은 결국엔 이탈할 것이고 아낀 비용보다 더 많은 매출이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화난 고객은 그냥 이탈하지 않는다. 특정 서비스에 만족하는 고객은 그냥 혼자서 만족하고 주변 사람에게 그 서비스 칭찬을 안 할 확률이 높지만, 이와 반대로 특정 서비스에 실망한 고객은 화가 나서 최소 3명의 주변 사람에게 이 회사 제품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이렇게 되면 과연 장기적으로 이 회사가 고객지원에서 절감한 비용이 이익으로 돌아올진 잘 모르겠다. 오히려 평판이 나빠지면서 고객 이탈이 대거 발생해서 비용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매출이 더 빨리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까칠한 고객이긴 하다. 웬만하면 만족을 잘 안 하니까. 내가 Carta에서 경험한 일을 다른 분들에게 이야기해보니까, 대부분 동의했고, 최근에 비용절감과 자동화 차원에서 AI를 도입하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과 짜증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요즘 내가 드는 생각은, 기업의 정형적이고 반복적인 내부 업무는 AI로 자동화하는 게 의미가 있지만,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는 오히려 사람이 처리하는 게 모두 다 AX로 가는 이 시점에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 한국은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데, 과거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요샌 고객센터의 사람직원과 통화하면 이렇게 반갑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도 이제 나는 웬만하면 고객을 응대하는 건 AI로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심지어 과거보다 더 인력중심이지만 더 높은 수준의 외주 콜센터 서비스를 하는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샌 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Carta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운의 외주화

테크 분야의 소식을 계속 관심 있게 보는 분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Bending Spoons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또는 이 회사의 이상한 사명은 잘 모르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회사가 인수한 브랜드는 들어봤거나 오랫동안 돈을 내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Vimeo, Eventbrite, Evernote, Brightcove, meetup, AOL 등이 그런 브랜드다. 벤딩스푼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비스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된 회사들을 상당히 싼 가격에 인수, 통합, 재정비해서 매출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회사이다. 얼마 전에 상장한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야후나 한국의 옐로모바일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회사를 인수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PE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딩스푼즈에 대해 여러 기사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이 회사의 기업 문화, 채용 방식, 운영 방법이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대표이사의 운과 실력에 대한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땐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하면서 시장과 고객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 즉, 이 바닥에서 말하는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건 –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운영하는 건 실력이라고 한다. 벤딩스푼즈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이 인수한 우리가 잘 아는 한물간 브랜드들은 모두 창업가들이 초반에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았지만, 운영 실력이 부족해서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전략은 본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운은 – 즉, 사업을 시작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 그냥 철저히 다른 창업가들에게 외주화하고, 본인들이 100% 제어할 수 있는 실력에만 –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성장시키는 – 집중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쨌든 현재까지 벤딩스푼즈의 성적표를 보면 이들의 방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회사의 이런 독특한 전략에 대해서 업계의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방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게 아니고 이미 많은 PE 회사의 철학과 전략과 흡사한 것 같은데 그냥 이들이 실행을 더 잘하는 것 같다 – 현재까지는. 장기적으로도 계속 이 방식이 작동할진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회사가 실리콘밸리나 뉴욕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가끔씩 관련해서 글도 쓰는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실력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벤딩스푼즈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와 기사를 읽을수록 혹시 우리도 운을 외주화하고 실력에만 의존할 방법이 있을지 조금씩 고민했었다.

며칠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 사업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벤딩스푼즈처럼 확실한 운영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우리가 만약에 실력이라는 게 있고, 실력이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에 적용된다면, 이건 오히려 벤딩스푼즈가 말하는 운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야 하는 운의 영역에서 열심히 구르는 창업가와 우리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운을 외주화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운을 외주 받는 처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가 남에게 운을 외주화할 순 없고 오히려 그 외주를 받는 처지니, 운의 영역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실력을 키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다. 운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표현이자 답이 없는 질문인데, 그나마 이걸 하고 싶다면 결국엔 이 운의 열쇠를 잡고 있는 창업가를 더 잘 선택하고, 더 좋은 분에게 더 잘 베팅해야 한다는 게 단순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