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월 1일부로 작은 실험을 한다.
바로 회사에서 직책을 없애는 것이다. 앞으로 나를 아는 분들은 “배기홍 대표”나 “배기홍 파트너”가 아니라 “배기홍님” 또는 “기홍님”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이게 좀 어색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속 나를 대표나 파트너로 부른다고 내가 싸대기를 때리진 않겠지만 되도록 그냥 직책 없이 “님” 호칭만으로 불러주면 좋겠다. 나뿐만 아니라 스트롱 모든 분을.
실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하는 덴 시간이 좀 걸렸다. 한국의 직장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데 이제 우린 스트롱이 extraordinary VC가 되는 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결정하게 된 굵직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일단 우리나라의 직책과 호칭은 복잡하고 어렵다. 어떤 회사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이렇게 올라가지만 우리 같은 VC는 주로 심사역, 선임심사역, 책임심사역,,,뭐 이런 방식으로 올라간다. 이 외에도 내가 지금까지 본 직책은 파트장님, 지점장님, 부지점장님, 부부장님 등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한국만 이렇게 복잡한가? 그건 아니다. 미국도 복잡하고 유럽도 이상한 직책을 나는 너무 많이 봤다. 그런데 한국이 더욱더 어려운 건 일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부를 땐 그냥 외국같이 이름을 부르는 시스템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모두 같이 불러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정말 어렵다. “배기홍 대표님”은 비교적 간단한데 “배기홍 책임심사역님”은 너무 길고 어렵고 입에 잘 붙지도 않는다. 1대1 미팅이면 그나마 괜찮지만, 이런 시스템에서 여러 사람과 미팅하면 그 사람들 이름과 직책 부르다가 에너지가 다 고갈되고 시간이 허비된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면 이 사람이 그동안 승진해서 직책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다른 팀으로 갔는지, 이런 걸 파악하는 데 불필요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직책/호칭 시스템이 이렇다 보니 내가 승진했는데 상대방이 그 이전 직책으로 나를 부르면 은근히 기분이 상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문화는 불필요한 걸 없애고 일을 잘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인데 우리의 호칭과 직책 문화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내가 봤을 땐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스트롱은 그냥 직책을 없애기로 했다.
내 명함에 “대표”라는 직책이 찍혀 있으면 내가 개인적으로 불편한 일도 있다. 우리 팀을 전혀 모르는 창업가와 미팅하면 일단 이 분은 미팅에 참석한 스트롱 멤버들의 명함을 다 받은 후에 누가 누군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명함상의 직책이 더 높은 사람들에게 더 집중한다. 특히 내가 대표라서 나를 더 자주 보면서 이야기하고, 나와 눈을 더 많이 맞추려고 노력한다.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는 대표이사에게만 잘 보이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미팅이 끝난 후에도 어떤 분들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이메일이나 문자를 보내는데, 이렇게 하면 스트롱의 모든 업무가 나에게 몰려서 내가 상당히 피곤해진다.
우리는 한국의 전형적인 회사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투자사에 대한 의사결정은 각 담당자가 전적으로 하는 구조이다. 권한도 많지만, 담당 회사에 대한 책임도 담당자가 가져가야 한다.(물론, 큰 문제가 발생하면 최종 책임은 내 몫이다) 그리고 우리는 담당자의 나이가 많든 적든, 투자 경험이 있든 없든, 담당자와 모든 이야기를 하면 되고 이들을 통해서 모든 의사결정을 한다는 회사의 정책을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런 우리의 정책이 단지 명함의 직책 때문에 전달이 잘 안되고 있다는 걸 자주 느꼈다. 스트롱의 모든 멤버는 각각 스트롱을 대표하고, 스트롱을 대변하고, 스트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미 우리 동료분과 이야기하고 있는 창업가가 있다면 그분과 계속 이야기하면 된다. 모든 의사결정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분에게서 끝난다. 그분의 결정이 스트롱의 결정이다. 우리의 의사결정 구조는 심사역에서 시작해서 결국엔 대표가 결정하는 그런 전통적인 구조가 아니다.
직책을 없앤 건 각 멤버의 마음가짐과도 관련이 있다.
회사를 대표해서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해야하면 주로 주최측에서는 대표이사 또는 임원의 참석을 항상 요청한다. 만약에 이런 자리에 기존 직책 시스템의 심사역이 참석해서 스트롱을 대표한다고 하면 주최측에서는 난처해하면서 심사역은 자격이 안 돼서 참석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 회사는 모두 다 full stack VC라서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짧다고 해서 스트롱을 대표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아닌데 이런 일이 명함의 직책 때문에 발생하는 걸 종종 봤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 심사역은 “나는 힘없는 심사역인데 내가 어떻게 외부에서 회사를 대표하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게 고정관념으로 굳어버린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또는, 회사를 대표해서 중요한 일을 해야하는데 이걸 심사역에게 부탁하면. “제가 그걸 어떻게 해요? 저는 그냥 심사역인데요.”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나는 종종 봤다. 공식적인 직책을 없애는 건 이런 마음가짐과 자세를 없애고, 모두 다 회사를 같은 무게로 대표하는 투자팀의 멤버라는 새로운 마인드로 리셋한다는 의도가 있다.
위에서 나열한 이유 외에 우리가 직책을 완전히 없애는 배경엔 여러가지 생각과 철학이 있는데, 궁극적으론 스트롱을 철저하게 실력과 성과로만 평가받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 투자경험도 아닌, 나이도 아닌, 직책도 아닌, 오로지 실력과 성과로 평가받는 full meritocracy로 가는 가장 빠르고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스트롱을 만나면 그냥 모두를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나는 배기홍 대표가 아니라 배기홍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