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

올해도 첫 번째 그랜드슬램 테니스 대회인 호주 오픈이 잘 끝났다. 마지막에 노장 노박 조코비치가 컨디션 난조로 기권하면서 내가 응원하는 선수들은 모두 탈락했지만, 좋은 젊은 선수들의 경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이번에도 다양한 선수들이 등장했고,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들이 발굴됐는데, 당분간은 남자 테니스도 계속 물갈이를 반복하며 운이 좋은 선수와 실력이 있는 선수가 확실히 구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반짝 떴던 선수들이 올해는 초반에 많이 탈락했는데, 이들은 겉으론 화려하고, 본인들이 스스로 PR을 매우 잘해서 항상 이슈 메이킹을 하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단단하지가 않고 뭔가 항상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모두 다 젊고, 포핸드이든 백핸드이든 강력한 무기는 하나씩 갖고 있는데, 왜 항상 불안한 플레이를 하는지 조금 자세히 보면, 이들의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잘하는 선수한테 절대로 못 이기는데, 이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떴고, 어떤 이들은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던 – 물론, 딱 한 번이다. 그 이상은 힘들다. –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냥 운이 좋았다. 진짜 잘하는 상위 랭커들이 어쩌다 초반에 탈락해서 이들과 대진표에서 만나지 않았거나, 붙었는데 컨디션 난조 때문에 진 걸 운 좋은 선수들이 실력으로 이겼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반 렌들, 피트 샘프라스,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그리고 노박 조코비치. 이들은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근대 남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완벽한 기본기 위에 자기만의 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테니스의 기본기에 대해서 말하면 항상 생각나는 인터뷰가 있다. 라파엘 나달의 인터뷰인데 아마도 이 인터뷰도 오래전 호주 오픈에서 치열한 5세트 접전까지 가서 우승한 후에 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경기를 했고, 멋지게 이겼는지 사회자가 물어보자, 나달은 이렇게 짧게 대답했다. “I ran very fast and I hit very hard.”

그 인터뷰를 봤을 때, 뭐 저런 초등학생 같은 이야기를,,,이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굉장히 심오한 이야기고, 테니스나 다른 운동이나, 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탄탄한 기본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빨리 뛰고, 세게 치는 건 너무나 당연한 테니스의 기본이지만, 이 기본기가 완벽한 프로 테니스 선수들이 몇 명 안 된다. 그 몇 안 되는 선수들이 지금 상위 랭커들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기본기가 없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성공할 수가 없다. 인생의 기본기가 뭐냐고 나에게 물어본다면, 자기만의 철학, 생각, 근면, 성실, 루틴, 규율 등이라고 생각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기본기가 없는 사업은 잘 될 수가 없다. 우리가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의 기본은 주로 제품, 고객, 매출 등이다. 이런 기본기를 제대로 만들지도 않고 겉만 화려한 창업가나 사업은 운 좋게 한두 번은 반짝 뜰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사업이 될 순 없다. PR을 얼마나 잘하는지, 투자를 얼마나 크게 받았는지, 어떤 유명한 VC에게 투자받았는지, 대표이사의 팔로워 수가 몇 명인지 등은 사업의 기본기와 지속가능성과는 큰 상관은 없다.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서, 돈을 내는 고객을 많이 확보하고, 이에 따라서 매출을 만드는 게 사업의 기본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사업의 기본기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본기를 잊어버리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경기의 95%는 이길 것이다. 나머지 5%까지 이기고 싶다면 탄탄한 기본기 위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실험과 실수를 하면서 자기만의 무기를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경기의 95%는 질 것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주 52시간 근무제의 열렬한 옹호자이거나, 워라밸을 맹신하는 분들은 이 글의 내용이 매우 불편할 겁니다. 악플을 쓰시려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각별히 주의 바랍니다.

얼마 전에 포스팅한 과 같이 올해는 걱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글로벌 매크로 경기도 안 좋지만,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은 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과 우리 같이 한국에 투자하는 VC들의 발목과 손목을 꽉 잡을 것이다. 실은,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어차피 5년 이후를 보고 지금 대폭 할인된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해서 계속 긍정적으로 투자는 하지만, 여러 가지 외부 요인들이 벤처 시장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내가 더 걱정하는 게 있는데, 이건 바로 한국 직장인들의 근면, 성실함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외국 투자자들에게 우리가 한국의 장점으로 항상 강조하는 건 바로 한국인들이 그 어떤 민족보다 똑똑하고, 여기에다가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 거였는데, 아직도 이 말은 대부분 맞지만, 한국인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걸 외국인들에게 강조할 때 점점 더 나 자신이 자랑스럽지가 않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대기업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삼성이나 LG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이나 지인들 말을 들어보면, 어차피 이 회사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다 하니까, 나머지는 그냥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하면 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마인드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회사가 돌아가니까 대기업들이 현상 유지는 하지만, 과거와 같은 발전이 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가장 큰 걱정은 우리가 투자하는 스타트업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은 스타트업의 임직원분들이 일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다. 요샌 평일 오후 6시 이후에 불이 켜진 스타트업 사무실이 거의 없고, 주말은 당연히 아무도 안 나온다. 내가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보다도 요새 스타트업 사람들은 일을 안 하는 것 같다. 이건 정말 문제가 많다.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나는 1년 365일 일한다. 주말에도 일하고, 오전, 오후, 밤늦게까지 일한다. 투자자도 이렇게 일하는데, 우리가 투자하는 스타트업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스타트업도 나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창업가들은 오래, 열심히 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고, 정말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5시간만 일해도 할 일은 다 한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이 말을 믿었지만, 이젠 안 믿는다. 일단, 이런 말을 하는 창업가들의 회사의 실적이 이런 나의 믿음을 증명한다. 대부분 형편없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내가 강조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질 수밖에 없는 경기를 하므로, 효율적으로 일하는 건 기본이고, 여기에다가 무조건 오래 일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회사에 오래 있어야 하고, 업무에 투입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이렇게 해도 95%의 스타트업은 경기에서 지고 망한다.

어디서부터 한국의 이런 근면성실함이 망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대대적으로 고쳐야 하는 악성 코드이자 버그다. 주 52시간 꼬박 지키고, 워라밸 다 챙기면 우린 국가적으로 계속 후퇴할 것이다. 그동안 쌓아놓은 체력이 있어서 그나마 한국의 위상을 지키고 있지만, 덜 일 하고, 더 많이 노는 문화와 태도가 아예 정착되면 한국은 유럽이 가고 있는 길을 그대로 가게 될 것이다. 꽤 강대국이었던 유럽 대부분 국가는 아주 빠르게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데,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유럽인들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일은 더 안 하고 정부에 요구하는 건 더 많아지면서, 이들은 여름휴가를 한 달 이상 가고, 세 시간 점심시간에 와인 한 병씩 먹으면서 삶의 질이 좋다고 하지만, 이건 오래 가지 못한다. 나라가 망하면 삶 자체가 없어지는데, 이걸 모르는지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돼라 마인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실리콘 밸리는 워라밸의 천국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분들 중 그 누구도 실리콘 밸리의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다. 그냥 ~카더라 소문만 듣거나, 실리콘 밸리에서 3개월 연수 다녀온 사람들이다. 실리콘 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곳이고,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나라다. 겉으로 보면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사람들이 설렁설렁 일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 그렇게 안 하면 한국과 다르게 바로 해고당하기 때문이다. 원래 최고의 강대국인데, 이렇게 모두 다 열심히 일하니까 미국은 더욱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잘 사는 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선, 국민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한국도 이젠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끼기 시작했는데, 모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스타트업은.

작은 동기부여

회사의 주인인 창업팀으로 시작한 스타트업이 제품도 잘 만들고, 돈도 좀 벌고, 투자도 받으면 점점 더 회사의 규모가 커진다. 이러면서 직원도 더 채용하고, 채용한 직원이 또 다른 직원을 채용하게 되며, 이렇게 머릿수도 늘어난다. 직원 수가 늘어나는 것은 일단 좋은 현상이다. 사업이 괜찮게 되어 더 많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매출을 만들어내고, 새로 온 사람들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일감이 많다는 의미이다. 또는, 매출을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큰 매출을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 회사여서 외부 투자를 받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채용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지금 인원수를 늘릴 타이밍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어쨌든 회사의 임직원 수가 증가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신호다.

하지만, 늘어나는 직원 수와 대표이사의 스트레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하여 증가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 명의 직원에서 두 명의 직원이 됐을 때 대표이사의 스트레스는 두 배가 되지만, 두 명의 직원에서 네 명의 직원이 되면 대표이사의 스트레스는 열 배가 된다. 이런 식으로 직원 수가 계속 늘어나면, 대표이사는 어느 순간 하루 24시간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그/그녀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직원들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를 나는 자주 본다.

직원들에 대한 이들의 고민 종류는 가지각색이지만, 공통적인 가장 큰 이유는 직원들의 동기 부여이다. 같이 시작한 공동 창업가들이나 완전 초창기 멤버들은 지분을 꽤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누가 옆에서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회사의 주인은 그 주인의식 자체가 자동으로 동기 부여가 된다. 그 누구도 옆에서 정기적으로 이들에게 인위적으로 동기 부여를 할 필요도 없고, 매니저나 경영진이 소위 말하는 ‘스타트업 뽕’을 정기적으로 투약할 필요가 없다. 이들이 그냥 스스로 매일 스타트업 뽕을 맡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분이 없거나 적은 직원들은 다르다. 이들은 대부분 월급쟁이 마인드를 가진 분들이다. 그냥 회사에서 일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받는 분들인데, 이들은 누군가 – 주로 대표이사나 경영진 – 정기적으로 동기부여를 해줘야만 계속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들이라서, 대표들은 이들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동기부여하여 능력치의 120%를 발휘하게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직원이 많아지면 이 고민만 하다가 하루를 마무리한다.

실은, 나도 직원이 수십 ~ 수백 명 되는 조직을 운영해 본 적은 없다. 스트롱벤처스도 나를 포함해서 8명의 작은 조직이다. 물론 이 작은 조직에서도 나도 직원들의 동기부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50명 이상 되는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대표들과는 차원이 다른 로우 레벨 고민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저기서 보고, 듣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직원들을 동기부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방의 거창한 동기부여보다 아주 소소한 동기부여를 자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똑똑한 대표라면 이런 소소한 동기부여를 적절한 타이밍에 캐주얼하게 자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영업 사원이 100만 원짜리 계약을 했다면,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서 우리가 같이 만든 제품으로 100만 원 계약을 했다고요? 정말? 대단한데요? 다음엔 150만 원 계약을 목표로!” 뭐, 이런 식으로 이 분에게 동기부여를 해준다. 이런 칭찬과 동기부여가 계속 쌓이다 보면 엄청난 자신감과 애사심이 생기고, 이게 결국엔 실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직원들이 조금씩 지칠 때마다 적시에 이들에게 계속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영감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어떤 대표는 이런 말을 직원들에게 자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뭔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이 만든 제품을 돈을 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린 우리가 직접 만든 제품으로 이번 달 매출 300만 원이나 했어요. 그것도 우리를 생판 모르는 남이 우리가 만든 제품을 사기 위해서 지갑을 열었단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 대단한 업적이죠.” 솔직히 이 말을 듣고 동기 부여가 안 되는 직원이 과연 있을까?

이런 작은 좋은 일들이 쌓이다 보면, 그 회사가 언젠가는 1,000억 원대 매출을 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명한 VC로부터 대규모의 투자도 받는다. 이런 건 아주 거창한 동기부여로 이어지고, 계속 이런 크고 작은 동기부여 엔진이 돌아가면서 회사는 건강하게 성장한다. 세상의 모든 거창한 동기 부여. 아주 작은 동기부여가 계속 쌓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는 뒤로 하고

올해부터 태어나기 시작해서 2039년까지를 베타 세대라고 한다. 출생년도로 인류를 구분하고, 이들은 어떻고, 어떤 특징이 있다고 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나는 MZ 세대보다 이후에 태어난 알파 세대(2010년 ~ 2024년생)와 베타 세대는 나 같은 X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DNA와 뇌 구조를 가진, 그래서 이렇게 출생년도로 한 번 구분해 볼 만한 신인류라고 생각한다.

일단, 베타 세대의 부모는 대부분 Z 세대와 젊은 M 세대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들은 우리의 손자 세대라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고, 이 중 꽤 많은 분들이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22세기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베타 세대는 엄청난 기술 발전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AI가 삶의 중심에 있을 것이고, 이들이 투자하는 기본 자산은 비트코인이 될 것이다. 세대를 구분할 때 그 세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기술을 많이 인용해서 우리 같은 X 세대를 삐삐 세대, 핸드폰 세대, 뭐 이렇게 부르기도 하는데, 베타 세대부터는 이런 특정 기술이나 제품으로 이들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워낙 기술이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세상을 바꿀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꿈꾸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베타 세대는 사람이 직접 차를 운전했던 시절이나 비트코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모를 수도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런 시절이 오고 있다는 이미 왔다는 게 약간 신기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긴 한다. 나도 최첨단 기술에 투자하는 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요새 왠지 계속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아마도 이런 큰 세대의 변화라는 매크로 테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도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강제적으로 이제 과거는 뒤로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작가 더글라스 아담스의 이 말을 항상 떠올린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정상적이고, 세상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15세에서 35사이에 개발된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혁신적이지만, 이걸 공부하고 연마하면 좋은 직업이 있다. 35이후에 개발된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에 이해할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나에겐 웬만한 건 모두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서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선, “옛날엔 이랬었는데” , “나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 “저게 가능해? 과거에 우리도 시도해 봤는데 안 되던데” 등과 같은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냥 내 기억으론, 내 경험으론, 안 되는 거였지만, 과거는 과거로 두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아니, 이런 생각만 해야 한다.

요즘 엄청나게 빠른 기술의 변화를 보면서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고, 과거에는 이랬다 저랬다라는 생각을 되도록 하지 말고, 미래만 봐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로 나는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분야를 요즘 다시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이제부터는 비트코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을 모르는 세대가 비트코인과 수많은 디지털 자산에 투자할 것이다. 또한, 미국 SEC 의장도 바뀌었고, 디지털 자산에 반대하던 대부분의 정부 관련 담당자도 갈아치워지면서 미국에서 디지털 자산 관련 현실적인 제도와 규제가 완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즉,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도 빨리 모든 것들이 정상화되어 과거는 뒤로하고, 조금 더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큰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한인이 창업했고, 창업 5년 만에 한화로 거의 1조 원에 인수된 화장품 회사 Hero Cosmetics(Hero)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흥미롭게 들었다. 창업가들의 이야기는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항상 배울 점들이 많아서 재미있고, 한국에 사는 분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여드름 패치 하나로 시작해서 1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어서 Church and Dwight에 매각한 이야기도 웬만한 케이드라마보다 더 흥미로웠다.

이 팟캐스트를 며칠에 걸쳐 아침에 운동하면서 계속 들었는데, 그 기간 우리 투자사 대표와 미팅하면서, 이분이 하는 사업은 화장품 분야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Hero가 고민하고 거쳐 온 과정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나름대로 고민의 공통점들을 찾고 해답도 같이 찾는 이야기를 꽤 많이 했다.

Hero는 Mighty Patch라는 여드름 패치 제품 하나로 시작했고, 한국에서 만든 이 제품을 온, 오프라인 상점에서 팔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지나서 이 카테고리에서는 거의 1등 제품이 됐다. 1등 제품이긴 했지만, 없던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일단 시장 자체가 작았고, 투자도 받고 사람도 더 고용하기 위해서 회사는 계속 성장을 해야 했다. 여기서 Hero의 창업가들은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해서 여드름 패치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반 화장품 분야로 확장하는 고민을 했다. 어차피 큰 카테고리로 보면 모두 다 화장품과 뷰티 분야였고, 다른 화장품도 한국의 공장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제조사 소싱도 용이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는 일반 화장품/뷰티 쪽으로 확장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성장 공식이라서 여드름 패치 판매 시작 1년 후에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일단 여드름 패치 분야에만 당분간 집중하는 것이었다. 여드름 패치 분야에서 더 많은,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판매해서 아예 다른 경쟁사들이 넘보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1등이 되고, 미국에서 말하는 소위 category dominator가 된 후에 다른 화장품 분야로 확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같은 여드름 패치를 다양한 색상, 다양한 용도, 그리고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서 SKU를 다각화했고, 판매 채널 또한 온, 오프라인 모든 곳으로 확장했다. 이렇게 한 결과, 여드름 패치로만 연 매출 수백억 원대를 달성할 수 있었고, 이 정도의 매출을 하니 이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1등이 됐고, 이 category dominator 해자(垓字)를 구축한 후에 다른 화장품 분야로 조금은 더 수월하고 편하게 진출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우리 투자사 대표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꽤 많은 창업가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주 힘들게 한 분야를 열심히 팠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반을 닦아 놓으니, 이 분야에서 돈을 내는 고객도 생기고, 아주 빠르진 않지만, 고객에게 서서히 입소문이 나면서 어느 순간 이 분야에서 꽤 알아주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된 경우를 우린 자주 본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시장보다 훨씬 더 큰 수천억 원 ~ 수조 원짜리 시장에서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서, 완전히 다른 시장, 또는 같은 시장에서 다른 카테고리를 계속 기웃거리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이분들에게 내가 주로 하는 조언은 항상 비슷하다. Hero의 전략으로 가라고 한다. 즉, 내가 시작한 분야가 아무리 작아도, 고객이 존재하고, 우리가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아는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면, 일단 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해서 category leader를 넘어선 category dominator가 되라고 조언한다. 그 이후에 다른 곳으로 확장하라고 한다.

예를 들며, 내가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반을 잘 닦아 놓은 시장의 전체 크기가 100억 원이라면, 일단 이 시장에서 최소 30억 원의 매출을 해서 시장의 30%를 장악하라는 뜻이다. 한 시장의 30%를 장악하면 그 시장의 확실한 category dominator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꽤 재미있는 건, 이런 고민을 하는 대표들이 대부분 그 100억 원짜리 시장은 항상 너무 작다고 하면서도, 막상 본인들은 이 작은 시장에서 매출 1억 원도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들에게 일단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장에서 작은 것부터 야금야금 먹자고 한다. 시장에서 압도적인 1등이 된 후에 다른 시장으로 진출하는 게 여러모로 봤을 때 훨씬 더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Hero와 같이 현재 시장에서, 현재 제품을 조금 더 다각화할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 보라는 조언을 한다. 전에도 한 번 내가 포스팅 한 적이 있는데, 일단 따기 쉬운 과일을 먼저 따먹는 전략이다.

이런 조언을 열심히 해도, 두 마리의 토끼를 쫓거나, 아니면 우리 토끼보다 더 큰 다른 토끼를 쫓는 창업가들이 더 많다. 누가 맞고 틀렸다는 문제는 아니라서, 더 큰 카테고리로 지금 당장 진출하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했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은,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칠 수도 있고, 더 큰 토끼를 쫓아서 힘들게 잡았는데 막상 보면 엉덩이면 커서 뒤에서만 봤을 때 큰 토끼일 가능성도 있고, 실은 내가 지금 잡고 있는 토끼가 나중에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데 다른 토끼를 쫓다가 내 토끼를 다른 회사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무모한 전략을 계속 고집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더 짧은 기간에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고 한다. 이분들에게 내가 한결같이 다시 해주는 조언은 세상의 모든 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100만 원 매출이 1,000만 원이 되고, 1,000만 원이 1억이 되고, 이런 느린 사이클을 타면서 언젠간 1조 원 매출이 된다. 한 번에 1,000억씩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혹시 있다면 나한테 DM 부탁한다. 그땐 내가 VC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