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 년에 약 1,200~1,600개의 회사를 검토한다. 6명이 검토하기엔 정말 많은 숫자이지만, 제품이나 수치가 완벽하지 않은 초기 회사와 창업가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좋은 회사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질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양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Quantity makes quality”가 좋은 회사를 투자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엔 창업가들을 많이 만나야지 이 중 좋은 분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이제 외국에 있는 분들이 아니라면 무조건 대면으로 창업가들을 만나고, 되도록 많이 만나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한다. 내가 외부에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할 때 체력이 가장 중요한 노가다라고 하는데, 정말로 하루에 5개 회사와 미팅하고 집에 가면 막노동을 하고 온 것처럼 온몸이 쑤신다.
우리는 투자하지 않고 패스한 회사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서 검토하고, 여러 번 패스한 회사도 계속 만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타이밍이 맞으면 투자하는 때도 꽤 있다. 우리 투자사 중 2~3년 동안 3번 이상 패스했는데, 그 이후에 가능성이 보이고 타이밍이 맞아서 4번째 검토에 투자한 때도 몇 개 있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창업가를 만나다 보면 여러 가지 패턴이 보이고, 이 패턴과 다양한 데이터포인트를 비교할 수 있는데, 요새 나는 이 창업가가 투자자가 원하는 그림이 아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얼마 전에 한 1년 동안 가끔 만나서 이야기하던 창업가가 이번에 다시 한번 제대로 피칭을 해보겠다고 해서 만났다. 어떤 사업인지 대략 알고 있었는데, 몇 달 만에 보고 들어보니 완전히 다른 사업이 되어 있었고, 내가 이분에게 내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대표님, 현재의 사업을 보고, 제가 느끼는 점은, 여러 가지 아이템을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는 건데요, 솔직히 뾰족함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아요.”
내가 그날 봤던 건 여러 가지 비즈니스 모델이 혼합되고, 한국과 글로벌 시장을 모두 공략하는, 이도 저도 아닌 제품을 기반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그런 사업이었다. 왜 이렇게 사업이 식빵에 얕게 바른 땅콩버터같이 됐냐고 물어보니까, 그동안 하도 투자를 못 받다 보니, 본인의 철학과 방향이 어쩌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됐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다른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듣고, 이들의 조언을 사업계획서에 적용했다고 했다. 특히, 만나는 VC 마다하는 말이 달랐는데, 어떤 투자자는 시장이 너무 작다고 해서 더 큰 시장으로 확장하는 내용을 추가했고, 어떤 투자자는 동남아 시장에서 더 잘될 것 같다는 조언을 해서 동남아로 확장하는 계획을 추가했고, 어떤 투자자는 B2B가 아니라 B2C로 해야 한다고 해서 원래 사업 모델인 B2B에 B2C를 추가해서 B2B2C로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물론, 이 분이 투자자의 말을 희망확대해석해서 “아, 저렇게 사업 방향을 바꾸면 투자 검토를 하겠다는 뜻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누구도 투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창업가도 인정했던 건, 솔직히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 이젠 헷갈린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창업가들에겐 투자하고 싶지 않다. VC들이 워낙 많은 사업을 보기 때문에, 이들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 회사에 투자하지 않은 VC가 창업가에게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을 너무 심각하게 귀담아들을 필욘 없다. 이 VC들은 회사의 결과에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어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부담 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본인의 생각, 방향과 철학이 깊게 녹아 들어간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창업가들이 좋다. 위에서 말 한 창업가처럼 수많은 투자자를 만났는데, 그 누구도 투자하지 않았다면, 이건 그냥 그동안 만난 투자자들은 우리 사업에 공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 사업이 틀렸다고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고, 그냥 우리의 그림을 인정해 주는 투자자를 찾으면 된다.
투자자들이 우리 사업을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투자자들이 우리 사업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할 순 없다. 남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말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 그림을 이해하는 투자자를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투자자들이 말하는 걸 모두 다 사업에 계속 녹이다 보면 결국엔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