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 영원히 안 변하는 자산

내가 2012년에 스트롱의 첫 번째 펀드를 만들 때는 VC 사업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떤 방식으로 펀드가 작동하는지, 그리고 남에게 받은 돈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없었다. 그냥 딱 한 가지 자신 있었던 건, 남들이 잘 못 알아보고, 잘 안 알아보는 똑똑한 창업가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을 알아보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했는데, 그땐 나에게 없었던 게 바로 돈이었다.

누구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 큰 기관 투자자들은 우리같이 처음 펀드를 만드는 초짜 VC에겐 돈을 안 주고, 돈이 많은 개인들이 확률이 좀 높긴 했는데, 솔직히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돈 좀 있는 분들을 한 명씩 소개 받았다. 한 명이 거절을 하면, 이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 그 사람이 거절하면 그 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이렇게 하면서 한 명씩 꾸역꾸역 지루한 미팅을 계속했다.

2014년도에 강북구 수유리 쪽에서 주유소를 여러 개 운영하는 현금이 많은 나이 든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본인 입으로 현금이 10억 원 있다고 자랑했으니, 당시로는 현금이 많은 분이었다.

이 분과의 대화는 예상외로 잘 진행됐다. “스트롱벤처스는 뭘 보고 주로 투자하나요?”라는 질문이 나오기까진. 나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사람을 보고 투자하고, 시장, 제품, 수치 모두 다 중요하지만 결국엔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분이 화를 엄청나게 내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냐, 세상에서 가장 믿으면 안 되는 게 사람인데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그런 멍청한 투자자가 어디 있냐면서 결국 내가 꽤 공을 들였던 그 미팅은 거기서 끝났다.

그날 밤, 우리의 사람에 투자하는 전략이 혹시 잘못된 건지 살짝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엔 이게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었고, 우린 13년 동안 이 기본 원칙을 더욱더 확고히 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주유소 사장님은 본인 사업의 공식에서 사람을 제외했기 때문에 현금을 10억 원밖에 못 번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요새 눈 돌아가고 토 나올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 분야는 AI 때문에 온 세상이 파괴되고 있다. 이 외의 온갖 기술이 새로 나오고 발전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업이 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환율은 미친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주식 시장은 거품이 터질 듯 말 듯 하면서 계속 활활 불타고 있다. 법과 규제 또한 이런 변화에 발맞춰서 계속 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많이 분석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공부해도 절대로 시장을 예측할 수 없고, 투자한 회사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 그 자체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여기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이다.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변수가 있고, 모든 게 변하지만, 그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잘 안 변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업에 있어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게 바로 창업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13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한테 투자하고 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변하는 지금 이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람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전략 때문에 우리는 사업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사업을 하는 동안 창업가와의 경험이 좋았다면, 같은 사람에게 또 투자할 수 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운이 크게 작용하고, 창업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지만, 그 사람은 안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그 사람과의 경험이 좋지 않았다면, 같은 창업가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절대로 다시 투자하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인데,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절대로 안 바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VC는 ‘사람’이라는 아주 독특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산에 투자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VC가 위의 주유소 사장님과 같이 사람만 빼고 다른 모든 것에 투자하고 있다. 말은 모두 다 사람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사람에 투자하는 VC가 점점 유니콘만큼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이상한 사람은 항상 이상하고, 개새끼는 항상 개새끼다.

“Why”가 아니라 “What”

이 글을 읽는 다른 VC가 있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할 것인데, 다음과 같은 창업가들을 분명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아무리 만나도 호감이 안 가고, 만나면 만날수록 더 싫어지는 종류의 창업가들이 있다. 실은 이런 분들이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요새 내가 정말 피하고 싶은, 만나면 하루가 다 피곤해지는 분들이 바로 변명하는 창업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사업은 더럽게 못 한다. 제품도 잘 못 만들고, 영업과 마케팅도 잘 못 한다. 그리고 이러다 보니 펀드레이징도 잘 못한다. 뭐, 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이렇긴 하다. 대부분 제품 잘 못 만들고, 잘 못 팔고, 투자 잘 못 받는다. 하지만, 변명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이렇게 사업이 잘 안되는 이유를 항상 밖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항상 경쟁사를 탓하고 비방하고, 투자를 못 받는 이유는 투자자들이 멍청해서 사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비슷한 회사가 투자받으면, 우리 회사가 저 회사보다 기술력도 좋고, 내가 저 대표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데, 왜 저 회사는 투자받고 우리는 못 받는지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자존심 상해하고, 그 이유를 밖에서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이렇게 모든 이유를 외부에서 찾고, 변명하는 분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무엇(what)”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왜(why)”에 대해서 너무 많이 고민한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가 우리 회사보다 더 많은 고객을 확보했고, 이들로부터 더 많은 매출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가 훨씬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왜 다른 회사 매출이 더 높은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무엇을 하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고 매출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1년 동안 100명의 투자자를 만났음에도 전부 다 거절당했는데, 우리보다 월등히 기술력도 떨어지고, 사기꾼 대표가 운영하는 다른 경쟁사는 수백억 원 투자받았다면, 왜 우리보다 안 좋은 회사는 투자받았지, 고민하면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우리는 지금 당장 뭘 하고, 뭘 고치면 투자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걸 권장한다.

물론, 무엇을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왜에 동반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건, “왜”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나는 전혀 문제가 없고, 나는 너무 잘났는데 다른 사람들이 멍청해서 나를 못 알아본다는 남 탓하는 악성 관점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무엇”에 집착하면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뭔가를 고쳐야 한다는 자신을 탓하는 시각을 갖게 되는데, 정말로 좋아지고 싶다면, why가 아니라 what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을 탓하고 있는 창업가들은 “왜”보단 “무엇”에 입각한 고민과 반성을 하기 바란다. 설령, 나는 잘났는데 남들이 멍청하고 못나서 나를 못 알아봐도 그게 현실이니까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려 노력해 봐라.

근데 현실은, 내가 멍청하고, 내가 못났고, 내가 이상하니까 일이 안 풀리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VC는 똑똑하지 않아도 된다

2012년도에 스트롱을 시작했을 때, 내가 VC를 만들어서 잘할 수 있을진 확신이 없었지만, 두 가지만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확신은 스트롱을 시작하고 13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 회사의 기초가 되는 두 개의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는, 당시에 –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 시장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VC와는 다른 성향과 색깔을 가진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말로 회사와 창업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VC가 되고 싶었다. 모든 VC가 회사와 창업가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겉으로는 다 그렇게 말하고 연기하지만, 실제 VC 생태계를 보면, 창업가를 나와 같은 고귀한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최대한 회사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VC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VC 중 한 명인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도 “VC들이 회사에 도움을 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 VC들이 회사에 해를 끼치고, 회사를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이들은 좋은 VC다.”라고 말할 정도로 회사에 피해를 주고 회사의 부채가 되는 VC들이 너무 많다. 나는 스트롱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창업가의 편에 서서 이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는 VC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두 번째는, 똑똑하지 않은 VC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의아해하는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하면,,,많은 분들이 우리가 첨단 사업에 투자하고, 창업가에게 온갖 어려운 질문을 많이 하는 걸 보고 VC들이 IQ가 높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 이건 나도 포함 –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가 아는 많은 VC는 실제로는 멍청한데, 대부분 엄청 똑똑한 척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13년 전에도 비슷했다. 근데 당시 내 생각은 VC는 별로 똑똑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들이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반드시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VC의 가장 큰 능력은 똑똑한 창업가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 창업가가 다른 VC가 아닌 내 돈을 받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건 자신 있었다.

스트롱을 시작할 때, 나는 돈도 없었고, 네트워크도 없었고, VC라는 업에 대한 이해도도 한참 떨어졌었지만, 위에서 말 한 두 가지의 기본 자격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확신이 있었다. 결국 나의 가장 소중한 고객은 창업가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존중하고 이들의 편에 서는 것, 그리고 나는 멍청해도 상관없으니까, 자만심과 자존심 다 필요 없고 그냥 똑똑한 창업가를 먼저 알아보고 이들에게 먼저 투자하는 것. 우리가 시작할 땐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이 믿음과 확신은 변치 않고 잘 지켜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VC는 똑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스트롱의 믿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만약에 어떤 VC가 창업가와 미팅하고 있는데, 그 회의실에서 그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면, 또는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자만한다면, 그는 방을 잘 못 찾아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투자 검토를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똑똑한 척하면서 창업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반박하는 VC들 앞에서는 대부분의 창업가가 주눅이 들고, 짜증 나서 이들과 제대도 된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련한 VC들은 절대로 회의실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창업가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고, 그러면 투자자들이 정말로 알고 싶어하는 것을 이들이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창업가들보다 본인들이 똑똑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본인들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면, 직접 사업을 해보면 된다. 물론, 그럴 용기는 없을 것이다.

소비자 DNA

2주 전에 잠깐 동경에 갔었는데, 과거부터 친분이 있던 일본 VC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의 스타트업 생태계 이야기를 특히 많이 했는데, 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나 같은 VC는 당연히 일본 시장보단 한국 스타트업 시장이 더 좋다고 믿지만, 내가 만난 일본 VC들도 대부분 한국의 벤처생태계를 부러워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떤 일본 VC는 대놓고 나에게 한국 벤처생태계를 볼 때마다 너무나 부럽고, 일본도 한국 시장과 창업가들로부터 A부터 Z까지 모든 걸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상장 시장의 크기는 한국의 3.5배 정도가 된다. 상당히 크고, 난 한국이 조만간 일본의 상장 시장 규모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현재의 이 규모는 상당히 부럽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일본 VC들은 오히려 한국의 역동적이고 큰 IPO 시장이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말인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니, 일본의 상장 시장은 크지만, 자세히 보면 tech IPO는 질보단 양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이들의 답변이다. 한국 창업가들은 꿈과 야망이 상대적으로 커서 항상 아주 큰 IPO를 꿈꾸면서 사업을 하는데 – 물론, 그렇다고 IPO를 다 하는 것도 아니고, 해도 큰 IPO가 되는 건 아니지만 – 일본 창업가들은 사업하다가 어느 시점에 그냥 작은 IPO를 하는 게 요샌 유행같이 번지고 있다고 했다. 한 1,000억 정도의 IPO를 하면 창업가들은 그래도 잘 먹고 잘살 수 있고, 일본에서 이런 작은 IPO를 하는 게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너도나도 적당한 규모로 사업을 키우고 IPO를 한다고 들었다. 창업가들은 돈을 벌어서 좋지만, 이 회사에 투자한 VC는 큰 재미를 못 보고, 계속 창업가들의 꿈과 야망이 이렇게 줄어들면 일본 스타트업 생태계는 큰 성장을 할 수 없다는 우려를 대화 내내 표시했다. 정확하게 “작은 IPO가 하나씩 될 때마다 일본 창업가들의 야망도 하나씩 줄어드는 것 같다.”라는 말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 같다.

그리고 일본 VC들로부터 내가 반복적으로 들었던 주제이자, 이들이 한국에 대해서 가장 부러워하는 게 한국인들의 “소비자 DNA(Consumer DNA)”였다. 한국 시장엔 소비자 DNA가 매우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네이버, 쿠팡, 카카오, 토스, 당근, 배달의 민족 등과 같은 좋은 자체 B2C 유니콘을 끊임없이 만들고 제품화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좋은 소비자 제품들이 시장에 출시되면, 한국인 특유의 경쟁심과 질투가 발동하면서 계속 더 좋은 기능, 더 좋은 UI/UX, 더 좋은 가격의 경쟁 제품들이 나오면서 “양이 질을 만드는” 효과가 극대화된다.

일본은 이 소비자 DNA가 점점 더 사라져서 이젠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창업가들은 대부분 B2B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의 B2C 제품이 한국과 같이 많지도 않고 다양하지도 않다. 하지만, 인구도 많고 시장이 크기 때문에 일본의 소비자 시장은 외국 회사들의 놀이터가 됐다. 검색은 구글, 동영상은 유튜브, 지도는 구글맵스, 이커머스는 아마존, 택시 호출은 우버 등,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대부분의 B2C 제품은 외산 제품들이다. 그러면서 내가 들었던 말은 일본은 전 세계에서 외국 B2C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가장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가장 큰 시장이 될 것이고됐고, 이들은 일본의 소비자 DNA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 아쉬움을 많이 표시했다.

그리고 한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우리만의 소비자 DNA를 기반으로 케이팝, 케이푸드, 케이뷰티, 케이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무형의 소비자 DNA가 만들어지고 있고, 이 무형의 한국의 문화가 현재 일본 시장을 완전히 쓰나미같이 덮치고 있다. 실은 일본도 한 때는 다른 나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지금은 이게 다 죽었고, 오히려 한국 문화가 과거 일본 문화보다 더 커지고 있는데, 이게 모두 다 일본의 소비자 DNA의 소멸로 인한 아주 좋지 않은 결과라는 결론을 이분은 내렸다.

물론, 한두 명의 일본 VC가 일본과 한국의 시장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고, 시장 현황을 일반화할 수도 없지만, 10년 넘게 일본에서 투자하고 있는 VC들에게 이날 내가 들었던 내용만을 기반으로 결론을 내려보면, B2C 분야에서는 한국 창업가들이 일본 시장을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하는 B2C로 시작하지만, 남에게 지는 걸 배 아파하는 한국인 특유의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결국엔 B2B 사업도 일본 시장에서 더 잘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정말로 더 많은 한국 창업가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해서 거대한 사업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내 친구이자 VC인 일본 투자자가 한국 시장이 부럽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엔 우리의 창업가들이다. 한 골 먹으면 두 골을 넣어야지 직성이 풀리는 우리 특유의 성깔?, 절대로 죽지 않고 생존하는 바퀴벌레력, 이 모든 게 한국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전에 여러 번 포스팅 했지만, 이 강점을 우린 계속 살려야 하고, 이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더 치열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