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에너지를 먹고 자라는 창업가들

며칠 전에 우리가 상주하고 있는 구글캠퍼스 서울이 1주년을 맞이했다. 1주년 기념 공식 행사에서 발표하는 임정민 센터장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나는 임정민 센터장과 1999년도에 같이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과는 달랐지만 창업관련 수업을 같이 들었고, 한국 유학생들이다 보니 자주 어울렸다. 당시에는 솔직히 앞으로 서로 어떻게 성장할지, 또는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전혀 없었다. 졸업 후 계속 비슷한 분야에서 일 하면서 우리는 한국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리고 17년이란 시간이 지난 현재 그는 구글캠퍼스 서울의 총괄이라는 한국 창업 생태계의 중요한 허브가 되었고, 나는 잘 나가지는 못 하지만 작은 펀드를 운영하는 투자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학생들이 참으로 많이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창업가들은 서로의 에너지를 먹으면서 성장한다” 라는 말이 있다. 나쁜 의미가 아닌 매우 좋은 의미의 말이다. 남의 에너지를 빼앗으면서 나만 잘 되는게 아니라 서로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같이 성장하고 모두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임정민 센터장과 나도 서로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먹으면서 성장을 한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는 비단 우리한테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창업가들에게도 적용된다. 현재 창업을 했거나 또는 창업을 꿈꾸고 있고, 창업가들이 많이 있는 공간에 있다면 주위를 한 번 둘러봐라. 모두가 뭔가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여기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대단하다. 아마도 이들의 에너지를 내가 받으면서 나도 나만의 일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나한테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발산되고, 나의 에너지를 다른 누군가가 느끼고 받으면서 그들 또한 성장하고 있다.

스트롱벤처스의 사무실이 있는 구글캠퍼스, 선릉을 지키고 있는 우리의 좋은 파트너 디캠프, 그리고 역삼의 절대강자인 우리의 또 다른 좋은 파트너 마루180 또한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 받으면서 대한민국의 창업 생태계를 탄탄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공간에 좋은 창업가들을 입주시키고 서로 같이 이야기하고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건 정말 중요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창업가들은 혼자서 일 할 때보다는 같이 일 할 때 서로의 에너지를 먹으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에 둘러 쌓여서 일 하는게 참 좋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 실리콘밸리가 좋은 이유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서로를 도와주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항상 이런 분위기에서 일을 해서 잘 몰랐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문화가 존재하는 산업이나 환경은 거의 없다. 나도 오늘 여러 업체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실은 우리가 투자한 업체가 아니면 굳이 내가 시간이나 에너지를 들여서 이들을 도와 줄 필요는 전혀 없다. 특히 나같이 냉정한 놈이라면. 하지만, 이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걸 보면 그 긍정적인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서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안하게 연락 주세요”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와 버린다. 내가 이들에게 그렇다고 뭔가를 바라는건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냥 스스로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다.

오늘은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더욱 더 많이 성장하는거 같다.

El Capitan

storm_widescreen-wide구글캠퍼스에는 엄마들을 위한 Google for Moms 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엄마가 되면서 휴직을 했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다시 직업 전선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여성분들 중 창업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한 세션에서 내가 스타트업에 투자를 한다는 건 바로 남의 배에 같이 탑승을 하는 것과 똑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탑승하기 전에는 이것저것 따지지만, 일단 배에 탑승을 하면 그 이후에는 선장과 그의 선원들에게 내 목숨을 맡겨야 한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과 내가 평소 했던 생각들을 ‘배와 선장’의 프레임워크 안에서 비유하면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지난 주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이게 굉장히 좋은 비유라는걸 깨달았다.

투자하기 전에 스타트업에 대해서 실사하고, 시장 조사를 하고, 레퍼런스 체크를 한다. 실사는 마치 배를 타고 항해를 떠나기 전에 배는 어떤 재질로 만들었는지,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거와 비슷한다. 시장 조사는 이 배가 항해할 바다의 기류는 어떤지, 항해하는 동안 풍량과 풍속은 어떤지, 가는 곳에 해적선이 출몰하는지를 조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레퍼런스 체크는 이 선장과 선원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과거의 항해 기록은 어떤지에 대해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보는 것과 같다. 배를 타려면 운임을 내야하는데 과연 그 비용이 합당한지, 혹시 너무 비싼건 아닌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네고하는건 마치 밸류에이션을 정하는것과 비슷하다. 어떤 배를 타고, 어떤 선장과 선원들과 항해를 떠날지 결정하는건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래 고민을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다. 바다로 들어가는 그 순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건 거의 없고 내 목숨을 이 배와 선장한테 맡겨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를 직접 만들거나, 몰아보지 않은 사람들은(=대부분의 투자자들) 아무리 사전 조사와 준비를 많이 해도 별로 소용이 없다. 배를 봐도 이 배가 튼튼한 배인지 모르고, 바다를 아무리 봐도 파도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직접 배를 타 본 사람들이라도 바다와 날씨는 워낙 변덕스럽기 때문에 항해를 할 때마다 사정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 배를 항해할 사람들한테 베팅을 한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선장한테 모든걸 맡긴다. 배가 아무리 조잡하더라도 능력있는 선장은 선원들을 설득하고 통제하면서 험한 바다를 뚫고 목적지까지 손님들을 무사히 모시기 때문이다.

우리같은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스타트업 경험이 없고, 실제 경험이 있더라도 이 바닥이 워낙 빠르게 변하고 변수가 많기 때문에 투자자가 스타트업을 성공으로 안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시장조사를 하고 고민을 많이 해도 투자가 집행된 그 순간 부터는 우리는 남의 배를 타고, 대표이사인 그 배의 선장한테 목숨을 맡기는 것이다. 모든 투자자들은 잠잠하게 항해해서 목적지까지 무난하게 가길 원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태풍이 올 것이고,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해적선들은 우리 배에 올라와서 모두 죽이려고 할 것이다. 실은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부분의 배들은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침몰해서 전원 사망할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항해를 해야한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그 항해를 어떤 용감한 이들은 몸으로 부딪히면서 계속 도전한다. 우리같은 투자자들은 이런 선장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배를 타려고 한다. 침몰하면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죽는다. 하지만, 침몰할때는 침몰하더라도 아주 멋있고, 흥분되고, 짜릿한 그런 항해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친 바다 위에서 한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대동단결 하면서 고난을 극복하는 그러한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

오늘도 태풍속으로 무모하게 돌진하는 우리들의 capitan 들을 위해서.

<이미지 출처 = http://blindedbythelightt.blogspot.kr/2013/01/the-perfect-storm-how-increase-in.html>

기성세대가 문제인가?

얼마전에 ‘일자리가 미래다’ 라는 KBS 특집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요새 계속 화두가 되고 있고, 누구나 다 공감하는 청년실업 관련 내용이었다. 실은 나도 여기저기서 듣기만 해서 자세한 건 몰랐는데 이 다큐를 보면서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많이 느꼈고 공감을 했다.

그래도 동의할 수 없었던 내용도 많았다. 다큐멘터리의 일부 내용이 방영 된 후에 방송국 현장무대에서 패널리스트들이 이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형태였는데, 요리사(전 코미디언) 팽현숙씨가 패널리스트 중 한 분 이었다. 취직을 못해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택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가 방영되자 팽현숙씨가 이 여자가 죽은건 (자기와 같은)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젊은이들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 기성세대가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서 일자리가 없으니, 이런 현상을 기성세대들이 올바로 고쳐야 한다는게 팽씨의 주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실은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정말로 슬펐다. 젊은 친구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방황하고, 위에서 말한거와 같이 어떤 분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하는 이 현실이 참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성세대들이 잘못을 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어느 시대나 문제는 존재하고, 어느 시대나 사는건 어렵다. 내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한국이든 미국이든 주위 사람들이 “요새 경기가 너무 좋아서 살 맛 나요!” 라고 한 적은 없다. 힘들지 않았던 시대가 과연 역사에서 존재했을까?

세상은 어차피 복잡하고, 골치아프고, 불공평하다. 누구나 다 힘들다. 그리고 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더욱 더 힘들어 질 것이다. 모두가 다 만족하는 일자리가 넘쳐 흐르던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다큐멘터리를 계속 보면 차이가 뚜렷한 두 부류의 젊은이들이 소개된다. 한 쪽에는 대기업 정규직 취업이 안 되니까 취업을 아예 포기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또 한 쪽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거나 택배회사에서 포장을 하는 – 즉, 뭐라도 하면서 생계비를 벌고, 계속 기회를 찾는 그런 젊은이들 – 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지방대학을 나와서 대기업 취직이 안 된다고 말하고, 고졸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이라고 한탄할때, 중학교도 안 나와서 기업을 만들고 재벌이 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라도 찾아볼 수 있다. 세월이 힘들지만, 이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잘 살고, 성공을 한다. 남들이 기성세대와 정부를 탓할때.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일하고 있는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일이 잘 안 풀리면 기성세대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탓하고 채찍질 하면서 계속 전진한다. 기성세대를 탓하고, 나라를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운을 시대와 기성세대를 탓하는 순간, 우리는 동정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손으로 어쩌지 못하고, 그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다니는 무기력한 존재말이다.

내가 만약에 KBS 방송국 패널에 있었다면 팽현숙씨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뭐를 했는데?” 실은 나도 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남을 탓하지는 않는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정말 열심히 살았고, 우리 세대도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

한국의 DIY 문화

DIY나는 잘 사용하지 않는데 우리 집 안방 화장실에는 비데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도 있으니까 얼마전에 한 번 사용해보려고 했는데, 물이 나오는 튜브가 고장이 나 있었다. 솔직히 큰 고장이 아니고 부품 한개만 교체하면 되는 작업인데, 미국 같으면 Home Depot나 Lowe’s 같은 대형철물점에 가서 직접 부품을 구매하고 유투브 동영상 보면서 교체를 하면 된다. 주로 유투브나 eHow 같은 사이트에 가면 이런 류의 DIY 컨텐츠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정확한 모델에 대한 고장수리방법을 찾아서 하나씩 따라서 하면 된다.

이 비데는 웅진에서 만든 오래된 제품인데 네이버나 유투브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이 모델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고, 단종 모델이라서 그런지 웅진비데 사이트에 들어가도 관련 제품에 대한 정보를 찾는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웅진에서 알려준 유지보수 업체에 전화해서 방문수리요청을 했다. 한국의 모든 서비스가 그렇듯이 이 업체 또한 매우 친절하고 빨랐다. 월요일 전화했더니 그 다음 날 바로 와서 고쳐줬고, 비용 또한 매우 저렴했다.

아마도 이러한 환경과 문화 때문에 한국은 아직 DIY 문화가 발달되지 않은거 같다. 미국에 비해서 인건비가 저렴하고, 물류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고, 서구에서 유래된 ‘서비스’의 개념이 오히려 더 잘 구현되어서 그런지 소비자가 뭔가를 직접 하는거 보다 누구를 불러서 시키는게 오히려 더 빠르고 저렴해서 집에 사소한게 고장이 나도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요청한다.

미국 같으면 이렇게 하는게 쉽지가 않다. 일단 누군가를 부르려면 항상 메뉴와 내용이 바뀌었으니 잘 듣고 선택하라는 ARS 시스템을 – 전에 내가 굉장히 잘 들어봤는데 바뀐 건 전혀 없다 – 거친 후 실제 교환원과 통화해서 예약을 하는데만 30분이 걸린다. 그리고 예약을 해도 한국같이 오늘 또는 내일 당장 오는게 아니라 3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을 불러도 그 비용이 상당히 비싸다. 전에 싱크대에 문제가 있어서 사람을 불렀는데, 일단 미국의 경우 누군가 한 번 파견되면 기본적으로 80 달러가 청구되고, 수리업무의 내용에 따라서 엄청난 비용이 추가 발생한다. 우리 싱크대의 경우, 실은 고장난게 아니라 나사가 하나 느슨해져서 수리공이 5번 정도 돌리고 꽉 조이고 갔는데 90 달러가 청구되었다(출장비용 80 달러 + 나사 조이는 비용 10 달러).

이러니까 미국은 거의 다 스스로 해결을 해야한다. 나도 아파트가 아니라 집에서 살때는 왠만한건 스스로 다 고쳤다. 온수기가 고장났을때도 유투브에서 이 모델을 검색하면 왠만한 동영상이 다 올라가 있기 때문에 필요한 부품은 구매하고(가게에 없으면 아마존에는 무조건 있다) 수리 동영상을 하나씩 보고 따라하면 다 고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환경과 뭔가를 스스로 하려고 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정신 때문에 미국은 DIY 문화가 발달을 하게 된거 같고, 이런 DIY 문화가 많은 관련 비즈니스들의 창업과 성장을 가능케 한 것 같다.

한국도 곧 이렇게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인구는 더욱 줄어들 것이고, 인건비는 비싸질것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전화 한 통만 하면 사람이 당일날 와서 모든 걸 다 고쳐주거나 해결해주는 시대는 조만간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DIY 컨텐츠 관련 시장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혹시 내가 모르는 관련 서비스가 한국에도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thecowetashopper.com/?p=6152>

우리도 해야하는거 아니야?

작은 스타트업들에 투자를 하다보면 대기업 분들도 많이 만난다. 우리가 투자한 기업의 후속투자, 협업, 우리 펀드 출자 관련 일들 때문에 대기업의 투자 담당하시는 분들 또는 사업 부서 분들을 자주 만나는데 이 분들 이야기 듣는것도 은근히 재미있다. 작은 벤처기업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있는 판들이 대기업에서 벌어지는데 최근에 만난 분도 나를 보자마자, “우리 회장님이 요새 xxx에 완전히 꽂혀있는데 혹시 그 분야 회사들 소개 좀 해주실래요?” 라고 물어봤다.

사건의 발단은 아마도 이렇다. 이 회사 회장님이 친하게 지내는 업계 분들이 몇 명 있는데 어느 날 누군가 술자리에서 이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기술의 전망이나 시장성에 대해서 포장을 잘 했을 것이다 – 아마도 경쟁사나 비슷한 규모의 회사 회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주간 경영회의에서 회사 간부들한테 “우리도 이거 해야하는거 아니야?” 한 마디 던지면서 회사의 모든 자원을 이 분야에 집중하는 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뭐, 모든 회사들이 이렇게 돌아가는건 당연히 아니지만, 내가 아는 꽤 많은 대기업들이 은근히 이렇게 돌아간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나는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회사의 오너나 그에 준하는 높으신 분이 밀어붙이면 그 기술이나 아이템의 사업성이나 미래가능성과는 상관없이 회사의 핵심 인재와 자원들이 모두 집중되기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하다. 주로 대기업이라는게 일 보다는 줄 서기나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데 이런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회장님이 특정 분야에 ‘꽂히면’ 이런 건 좋다.

하지만, 확실이 장점 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일단 전사적 차원에서 전략적인 공부나 계획이 동반되지 않고 이루어진 일 인의 결정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게 과연 회사가 할 수 있는 사업인지 그리고 해야 할 사업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돈과 인력 투입을 해도 단기간 안에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우리도 해야하는거 아니야?” 란 질문 자체가 누군가 남이 하니까 우리도 따라하자 라는 의미인데, 이는 그냥 유행 따라하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만하고 또 다른 유행을 따라갈 확률이 크다.

실은 유행을 따라가는게 나는 무조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유행하는 비즈니스나 기술들 중 절 반 이상은 실제로 미래의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실이 만들어지려면 많은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 5년, 더 길게는 20년 동안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하는데 그냥 순간적으로 이 분야에 꽂히면 이게 오래 가기가 힘들다. 구체적인 고민과 계획이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이런 분들은 또 다른 분야에 꽂혀서 관심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장님들,
“우리도 해야하는거 아니야?” 말씀하시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주세요. 안 해도 되는거구요, 진짜로 해야하는거라면 정말 길게 보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여러 사람 피해봅니다.

대통령 각하+높은신 분들,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