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이 유니콘을 만든다

나를 만난 전문직 – 교수,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 파트타임 창업가들은 잘 알 텐데, 나는 이런 분들한테 투자하지 않는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이런 회사들을 몇 개 만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에 좀 놀랐다.

창업이 과거에 비해 더 쉬워졌고, 더 저렴해졌고, 요샌 일부 일을 AI가 대신해 주지만, 일단 스타트업은 남들보다 더 짧은 시간에 저 많은 성장을 압축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집착해야 한다. 제품에 집착해야 하고, 고객에게 집착해야 하고, 펀드레이징에 집착해야 하고, 좋은 사람을 회사에 채용하는 것에 집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집착은 기본적으로 사업에 올인하지 않으면 생길 수가 없다. 취미생활로 스타트업을 하는 분들에게 집착은 생길 수가 없다.

풀타임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그리고 이분들이 대표이사라도, 이분들에겐 여전히 교직생활이 풀타임 업무이다. 스타트업은 그냥 투잡 중 하나의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왜냐하면, 이분의 우선순위는 항상 학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소속되어 있고, 여기서 주 수입이 나오기 때문에, 회사 일을 하다 가도 갑자기 학교에서 부르면 그쪽으로 뛰어가야 한다.
풀타임으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이분에게도 의사가 풀타임 업무이고 스타트업은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풀타임으로 방송 생활을 하거나 연기를 하는 연예인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이분에게도 연예인이 풀타임 업무이고 스타트업은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나의 이 발언을 보고 발끈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실제 대면 미팅에서도 내가 “그럼 사업은 누가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흥분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대부분 돌아오는 답변은 거의 비슷하다. 교수님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별로 없어서 나머지 시간은 전부 다 회사에서 보낸다고 하고, 의사들은 병원이 본인 없어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스타트업하는 데 보낸다고 하고, 연예인들은 연예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회사 일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사업에 언젠가는 완전히 올인 하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지 않다. 계속 본인들은 파트타임이고, 대표이사 또는 공동창업가라서 회사의 큰 결정에 관여할 것이지만, 결국 실제 사업은 다른 코파운더나 다른 직원들이 할 것이라고 한다. 실은, 그렇게 말하진 않지만, 결국 말을 들어보면 이런 의미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런 분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좋은 성과를 못 만드나? 꼭 그런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 교수, 의사, 연예인, 변호사가 창업한 회사가 잘 되는 경우를 찾아보면 그 사례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회사들이 유니콘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유니콘을 만들기 위해선 사업에 집착해야 하고, 집착이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사업에 대해서만 생각해야지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LA에 본사를 둔 The Honest Company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이 회사의 공동창업가는 배우 제시카 알바인데, 연예인들이 이분 같이 사업에 집착할 수 있다면 어쩌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우리 포트폴리오사와의 협력 때문에 알바씨를 두 번 직접 만나본 적이 있다. 내가 듣기론 이분은 회사를 하기 위해서 모든 연기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고, 다른 직원분들에게 물어보니 매일 회사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회사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고, 모든 투자자 미팅에도 참석했다. 우리가 했던 미팅에도 전부 다 들어왔고, 준비를 잘하고 들어와서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다.

회사에 매일 출근하지 않고, 회사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지 않고, 회사에 대해서 매일 24시간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집착이 생길 수 없고, 집착하지 않으면 유니콘은 만들 수가 없다. 현재 풀타임 직업/직책의 유명세, 지위, 네트워크가 어려운 미팅을 몇 번 성사시킬 순 있지만, 유니콘을 만드는 것은 유명세나 지위가 아니라 집착이다.

AI의 독

전에 내가 AI가 중요한 게 아니라 비즈니스가 더 중요하다는 을 썼는데, 그 내용의 연장선상의 글이다. 요새 직업상 또는 비직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다 AI 이야기를 한다. 특히나 창업가들은 AI라는 이 거대한 tech 물결을 어떻게 더 잘 타서 남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갈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면서 부서와 업무와는 상관없이 전사적 AI 도입을 외치고 있다.

실은, 기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남들보다 빨리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건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은 AI 도입에 꽤 잘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는데 AI에도 어두운 면이 있고, 최근에 만난 많은 창업가들이 AI의 독에 물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많은 창업가들이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분들을 만나 보면 사람도 채용할 필요가 없고, 코딩도 배울 필요가 없고, 콘텐츠도 깊게 고민해서 만들 필요가 없고, 고객이나 협력업체에 보낼 이메일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모든 걸 AI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업무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5%는 – 우리가 하는 일을 완성하고, 고객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게 이 마지막 5%이다 –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초지능의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은 초지능 그 이상의 지능, 창의력,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응용력을 가졌고, 결국 누구나 다 AI를 활용해서 누구나 다 비슷한 걸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이길 수 있는 제품, 서비스 그리고 사업을 만들 수 있는 건 이런 인간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창업가는 지금까지 외부 투자 없이 연간 수십억 원의 매출을 만들었고, 영업이익까지 발생하는 좋은 브랜드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펀드레이징을 하는데, 투자받으면 AI에 올인해서 고객의 데이터를 축적한 후, AI를 활용해서 초개인화된 브랜드를 판매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 전략은 교과서적으론 매우 이상적인 방향으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분에게 지금까지 특별하게 데이터를 활용하지도 않고 기술을 깊게 적용하지도 않고 잘했고, 지금까지 했던 그 방식으로 연 매출 천억 원 까지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이 시점에 기존의 방법을 버리고, 회사가 잘하지도 못하는 AI에 올인하는 180도 다른 전략을 도입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너도나도 다 AI 이야기를 하고 있고, 주변에 사업하는 다른 창업가분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다 AI가 미래라는 말을 하고, 본인이 봤을 때도 데이터를 활용해서 AI 에이전트를 통한 한 초개인화 된 전략이야말로 수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그 어떤 사업에 갖다 붙여도 말이 되는 너무나 말로 하기엔 쉽지만, 실행하기엔 정말 어려운 전략이다.

이미 몇 회사들은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계속 사업을 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고, 현재 매출의 10배까지 할 수 있음에도, 갑자기 회사의 방향을 AI에 올인 했다가 후회하고 있다. 멀쩡하게 잘 되던 사업을 버리고 AI에 올인 했는데, 그사이에 다른 경쟁사들이 이 회사가 원래 잘하고 있던 분야에서 시장을 야금야금 다 뺏어갔다. 그리고 AI에 몰방하는 게 우리 사업에 맞는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실은, 이런 회사들이 이렇게 방향을 급하게 바꾸게 된 배경엔 투자자들도 한몫했다. 투자하는 조건으로 무조건 AI native 회사로 체질 개선하는 걸 요구했고, 계속 AI 뽐뿌질을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내가 AI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사업의 본질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우리 고객은 왜 우리 제품을 구매하는지 명확하게 판단한 후에 과연 우리는 AI를 어떻게 활용하면 현재 사업을 10배, 100배 이상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후에 행동으로 옮겼으면 하는 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이다.

안티들의 말은 무시해라

얼마 전에 요새 큰 고민이 있는 우리 투자사 대표와 이야기를 했다. 사업은 그냥 나쁘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 회사의 제품에 대한 악플과 형편없는 리뷰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거나, 한 번 정도는 해 본 대표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일반 고객과 실물 시장과의 접점이 훨씬 많은 B2C 서비스 또는 먹고, 입고, 바르는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브랜드/D2C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분이라면 엄청난 악플과 제품 리뷰를 쏟아내는 안티들에게 시달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조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회사와 제품에 대한 안 좋은 피드백이 단순 증오성 내용이 아니라, 실제 우리 제품을 자주 사용하는 고객의 애정이 어린 피드백이라면, 그리고 정말로 이분들이 우리 회사와 제품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이런 충고, 리뷰, 피드백은 아주 적극적으로 듣고, 수용하고, 반영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분들이 우리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고, 결국엔 우리 회사가 계속 존재하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찐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남기는 글이나 영상은 그냥 봐도 회사와 제품에 대한 애정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한 논리와 내용도 없이 주구장창 우리 제품과 회사를 욕하는 증오성 피드백이라면 – 그리고 이런 건 그냥 보면 알 수 있다 – 그냥 무시하면 된다. 어차피 이런 사람들은 우리의 팬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고 그냥 우리의 안티다. 아마도 우리 제품을 한 번 정도 써봤거나, 아니면 아예 써보지도 않고 그냥 악감정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이런 증오성 악플과 혹평을 하는 것일 텐데 이런 사람들은 우리 회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이다.

우리 제품을 구매하는 건 우리의 팬이지, 우리의 안티들이 아니다.

엄격한 사랑

American Idol을 시작으로 수많은 원조 오디션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 사업가 중 한 명인 사이먼 코웰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참 재미있게 들었다. 요샌 그나마 나아진 것 같은데, 이분이 몇 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 평가하는 것을 본 분이라면 듣는 사람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로 차갑고 독하다는 것을 모두 다 인정할 것이다.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straight shooter 스타일이지만, 코웰씨의 악평을 듣다 보면 나는 참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미디어에서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걸로 이해했다. 원래 사람이 저렇게 독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라면, 저 분한테 욕먹는 참가자도 힘들겠지만, 저분도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분은 원래 이렇게 가혹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tough love’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이분이 같이 오디션 심사를 하다 보면 어떤 심사위원은 참가자가 정말로 재능이 없고 노래도 못 부르는데, 앞에서는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칭찬하면서 뒤에서는 “최악의 가수네”라고 하는 걸 자주 봤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한다. 일단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싫다고 하고, 심사위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걸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로 본인이 조금만 더 연습하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심한 착각을 해서, 절대로 가수가 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심사위원의 말 때문에 평생 돈과 시간 낭비를 해서 인생 자체를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런 참가자에겐 아예 면전에서 솔직하게 가수의 재능이 없어서 이 길 말고 다른 커리어를 찾아보라고 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상대방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한다. 즉, 이분은 무대에 있는 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존경하기 때문에 이렇게 엄격한 사랑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인류의 발전에 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코웰씨의 말과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가수 오디션을 심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많은 창업가들과 만나고 이들의 사업에 투자할지 고민한다. 물론, 누가 언제 유니콘을 만들진 아무도 모르지만, 아예 안 될 것 같은 사업 아이템이나 아예 사업을 할 자질이 없는 창업가는 미팅 후 15분 정도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분들에겐 나는 어떻게 할까?

첫 번째 방법은 – 그리고 이게 서로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나도 편한 방법이다 – 그냥 아주 좋은 사업 같고, 내부적으로 이야기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면서 잠수 타는 것이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은 아니고, 우리가 투자 안 할 건데, 굳이 이분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정 상하게 하고 나도 싫은 소리 하기 싫은 게 모든 사람들의 디폴트 태도이다. 하지만, 이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창업가는 투자자들의 조언을 상당히 진지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인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개선해야 할 점 투성이인 비즈니스와 창업가의 태도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데 “너무 좋으니까 계속 열심히 하면 우리가 투자 검토하겠다”라는 맘에도 없는 말을 하면, 정말로 이 말을 믿고 지금 하는 것을 하던 대로 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분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코웰씨와 같이 대놓고 면전에서 이 사업은 문제가 있어서 안 될 것 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창업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해준다. 물론, 이 말은 무례하게 하거나, 갑의 자세로 하는 게 아니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해야 한다. 나는 항상 이 두 번째 방법의 선상에서 내 솔직한 생각과 피드백을 창업가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고, 상대방도 사람인지라, 최대한 예의 바르게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지만, 가끔씩자주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그 자리에서 대놓고 나에게 정말 무례하고 어떻게 이런 말을 본인에게 할 수 있냐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따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나도 속으로 내가 굳이 왜 잘 알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만났고, 아마도 앞으로 안 만날지도 모르는 이분에게 이런 말을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그냥 앞으로는 무조건 좋은게 좋다는 태도로 “굉장히 좋습니다.” ,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 “내부적으로 검토해 볼게요.”라는 말로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한 후에 다시는 연락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되는 사업이든 아니든, 이상한 창업가이든 아니든, 내 앞에서 열심히 사업을 설명하는 이 사람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 두 달을 기다린 사람도 있고, 우리가 대단한 VC는 아니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 투자자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라서 이 미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민과 연습을 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나와 단 한 시간의 미팅을 위해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분들도 있는데, 내가 이분들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바로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솔직하게 내 의견과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개인적인 감정이 생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분에 대한 같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표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 tough love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도 남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하는데, 우리에게 투자하는 잠재 LP 중 “스트롱 너무 좋아요.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바로 검토 시작할게요.”라고 면전에서는 이야기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 연락조차 안 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 오히려 내 앞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스트롱은 이런 점이 별로다” , “나는 한국 시장이 정말 아닌 것 같다.” , “배기홍 너는 정말 쓰레기 같은 파트너야(아, 이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극단적인 예시다.)” 뭐 이런 말을 해주면서 스트롱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고맙다. 이런 분들과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투명하고 솔직한 관계를 맺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 서비스는 왜 좋아질 수 없을까?

얼마 전에 열흘 정도 미국에 다녀왔다. 나는 미국 출장을 가면 동부로 들어가서 서부로 나오거나, 반대로 서부로 들어가서 동부로 나오는데, 미국은 워낙 큰 나라라서 이동하는 게 참 어렵다. 이번에도 미국 내에서만 방문한 곳이 꽤 많고, 땅덩어리가 커서 직행 비행기 노선이 없는 곳도 많아서 미국 내에서만 비행기를 8번 탔다. 이전에는 다양한 항공사를 이용했지만, 대한항공과 제휴되기도 하고 그나마 서비스가 나은 것 같아서 요샌 미국 내에서는 델타만 이용하는데, 이번에 좀 크게 짜증 나는 경험을 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중부 테네시주 내쉬빌에 오후 1시에 착륙했다. 나는 오후 4시에 여기서 미팅이 있었고, 저녁 8시 비행기로 다시 바로 서부 LA로 가는 일정이었다. 큰 짐이 있어서 이걸 들고 이동하는 게 좀 귀찮았지만, 저녁 8시 비행기에 짐을 체크인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델타에 물어보니 8시 비행기지만 2시에 짐을 체크인해도 된다고 해서 일단 가방은 체크인하고 내쉬빌 시내에서 미팅하고 6시쯤 다시 공항에 왔다. 이때부터 30분 단위로 출발이 계속 지연되면서 결국엔 밤 10시 정도에 LA로 가는 비행기가 취소됐다. 뭐, 미국 국내 항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취소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것까진 괜찮았다. 기상 문제로 인해서 취소돼서 자동으로 그다음 날 LA로 가는 항공편 예약이 됐는데,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도 미팅에 늦을 예정이라서, 일단 LA 미팅도 다 취소하고, 내쉬빌에서 예정에 없던 1박을 하게 됐다.

다시 짐을 찾기 위해서 수화물 칸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들 짐은 모두 다 빙글빙글 돌면서 나왔는데, 유독 내 짐만 안 보여서 확인해 보니, 이미 내 가방은 LA 공항에 도착했다는 황당한 답변을 받았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내쉬빌 공항 델타 수화물 사무소 직원분에게 LA 공항 수화물 사무소에 연락해서 내일 이 가방을 다시 내쉬빌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맨몸으로 호텔에 체크인했다. 델타 직원분은 다음 날 오전 11시 정도에 가방이 다시 올 것이고, 도착하면 나에게 전화하라는 메모를 시스템 안에 남겨 놨다. 그런데 그다음 날 델타 앱을 통해서 확인해 보니 내 짐은 아직도 LA 공항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델타 내쉬빌 수화물 사무소에도 전화를 해봤고, 델타 고객 서비스 번호로도 전화해 봤지만, 그 누구 와도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고객 서비스 번호는 최소 대기 시간이 90분이었는데, 거의 70분을 기다렸는데 전화가 끊겼다.

너무 답답해서 다시 내쉬빌 공항 수화물 사무소로 갔다. 일단 여기서도 30분 대기 후에 어제와는 다른 직원에게 그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잘 설명한 후 – 예상은 했었지만, 내부 시스템에 내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내용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음 – 내 가방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본인도 어깨를 쓱 하면서 “LA에 있네요. 이게 왜 내쉬빌로 오는 비행기에 안 실렸을까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델타 직원들이 내부 번호로 LA 공항 수화물 사무소에도 계속 전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도 안 받고, 본인들도 내부적으로 소통이 안 되는 듯했다. 어쨌든, 다음 비행기에 가방을 실어서 꼭 보내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원치 않은 일박을 내쉬빌에서 더했다.

그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다시 확인해 보니, 역시나 내 가방은 LA에 그대로 있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이 병신 같은 항공사를 믿지 말고 그냥 내가 LA로 직접 날아가서 내 가방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내쉬빌 공항으로 왔고, 수화물 서비스로 가서 역시나 새 담당자에게 내 상황을 다시 설명하고 내 가방을 내쉬빌로 보내지 말고, LA에 그대로 보관하라는 내부 긴급 지시를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이야기했다. LA에 갔는데 가방은 내쉬빌로 출발했으면 정말 델타 직원 싸대기를 때려야 할 판이니까. 그리고 실제로 델타 직원한테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이 불행한 상황이 종료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LA로 가는 직항을 못 타고 미네소타를 경유해서 미네소타에서 LA로 날아가는 동안 하늘에서 와이파이 접속을 한 후에 델타 앱을 확인해 봤다. 앱을 누르면서도 왠지 불안했는데, 앱을 리프레시 하자마자 뭔가 상태가 바뀌었고, 내 가방이 LA에서 내쉬빌로 가는 비행기에 priority booking이 되어 있다는 업데이트가 떴다. 와,,,왜 이런 일이 나한테…항공법상 하늘에서 통화는 금지되어 있어서, 온갖 델타 관련 사이트를 다 뒤지다가 결국엔 델타의 페이스북 페이지 메신저와 연결됐다. 그리고 내가 가장 처음 물어봤던 질문은, “Are you a bot?” 이었다. 다행히도 사람이었고, 다시 한번 내 상황을 최대한 짧게 설명했고, 이 가방 절대로 비행기에 탑승하면 안 되니까 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가방이 이미 비행기에 들어갔으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두 번이나 받은 후, 나는 그냥 비행기 안에서 초조하게 아름다운 구름만 보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LA에 도착하자마자 수화물 서비스 지역으로 달려갔는데, 다행히도 꿈에 그리던 내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찾자마자 다시 델타 고객 서비스 사무실에 들어가서 다시 내 상황을 설명하면서 LA까지의 항공비, 그리고 이 상황 때문에 내가 취소했던 미팅에 대해 보상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본인들은 창구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9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고객서비스로 전화해서 시도해 보라는 아주 성의 없는 답변만 받았다. 성질 같아서는 난리를 치고 싶었지만, 여기서 지랄하면 경찰을 부를 것이라는 걸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알기 때문에 그냥 화를 꾹 참고 그다음 행선지인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내 가방이 내가 타는 비행기에 실린다는 걸 확인한 후에.

이런 더러운 고객 경험은 항공사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너무 자주 경험하는 흔한 일상이다. 고객 서비스는 정말 좋아질 수 없을까? 힘들게 번 돈을 이렇게 날렸는데,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상식적인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건가?
아니,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지금보단 훨씬 개선될 수 있다. 그런데 안 좋아지는 이유는 그냥 델타의 경영진에서 고객 서비스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회사의 경영진들은 내가 항상 강조하는 자기 회사의 개밥 먹기를 안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같은 일반 고객의 비행 경험을 직접 안 하므로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고, 문제가 발생하면 본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고객서비스 직원들이 얼마나 고객들을 무시하고 거지 같은 불친절을 제공하는지 모를 것이다. 알면 이런 고객 서비스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거지 같은 서비스에 쓰는 비용도 아깝다고 많은 미국 회사가 요새 AI를 활용해서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나는 이것도 정말 맘에 안 든다. 사람도 제대로 제공할 수 없는 고객 서비스를 과연 기계가 제공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최근에 경험했던 이 상황에서 AI 봇이 나를 얼마큼 도와줄 수 있었을까?

이런 경험을 하고 – 그리고 델타 뿐만 아니라, 미국 Chase 은행에서도 아주 거지 같은 고객 서비스 경험을 많이 했다 – 한국에 돌아오니, 대한항공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항공사라는 생각을 했고, 하나은행도 너무 좋은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이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