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미약하나,,,

2025년 7월 15일은 한국의 국민 앱 중 하나가 된 당근의 창립 10주년이었다. 원래 이런 걸 잘 안 챙기는 회사인데, 10년이라는 기간은 나름 대단한 마일스톤이라서 한강 세빛둥둥섬에서 10주년 행사를 했다. 나도 초대받아서 잠깐 참석했는데, 마치 내가 만든 회사인 것처럼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 몇 자 남겨본다.

일단 세빛둥둥섬 주차장에서 봤을 때, 멀리서부터 거대한 당근 로고가 보였고, 당근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과 기억을 스치면서, “와, 당근이 이제 괴물이 됐구나.(좋은 의미로).”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올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행사장 안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많은 임직원분에 다시 한번 압도당했다. 강당을 꽉 채운 당근 임직원분들의 규모가 500명이었는데, 회사의 월간 업데이트에 항상 임직원 수를 알려주지만, PDF 상의 ‘500명’ 숫자를 보는 것과 직접 이렇게 500명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는 당근에 2016년도 12월에 투자했다. 카카오벤처스, 캡스톤파트너스와 스트롱이 당근의 첫 번째 기관 투자자였는데, 내 기억으론 당시 당근은 8명의 작은 팀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8명의 첫 번째인가 두 번째 사무실이 판교의 꼬마 빌딩의 2층 공간이었는데, 들어갈 때 슬리퍼로 갈아 신는 아주 아담한 사무실이었고, 이것도 내 기억이긴 한데, 한겨울엔 창문 사이로 외풍이 불어서 약간 춥기도 했던 그런 곳이었다. 사람의 뇌는 첫인상을 강력하게 기억한다고 하는데, 나는 당근을 생각하면 항상 판교의 이 작은 사무실의 8명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8명이 있던 회사가 500명이 넘은 회사가 됐다. 그 많은 임직원분을 보니 뭔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는데, 이분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마치 아우라를 만드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할 정도로 역동적인 행사장이었다.

당근의 시작은 미약했다. 내가 처음부터 봤기 때문에 잘 안다. 그 끝은 창대할까?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아주 잘하고 있다. 하지만, 끝을 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왜냐하면 이 회사는 이제 막 시동이 걸렸고, extraordinary한 회사로 가는 당근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일 출근하기

최근에 나에게 직업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이 몇 개 있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에겐 개인적으로 기쁘고 보람찬 일들이었는데, 오랫동안 돈 달라고 쫓아다니던 투자자 몇 명과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이 “의미 있는 진전”이 실은 돈을 받거나 하는 그 정도로 의미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격투 게임에서 적의 대장이 10층에 있다면, 계속 1층에서 죽다가 한 5층까지 올라간 정도다. 그래서 위에서 내가 계속 개인적인 보람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 중 어떤 해외 투자자는 5년 넘게 이야기하던 곳인데, 5년 동안 거의 분기마다 출장 가서 그동안 스트롱이 했던 투자, 의미 있는 발전이 있는 투자사, 그리고 전반적인 한국 시장에 대해서 업데이트해 주고, 또 이분들이 가끔 한국에 오면 항상 시간을 내서 미팅했다. 시간이 많으면 식사도 했고, 시간이 없으면 “안녕. 나 너희 동네에 왔는데, 얼굴 보고 인사해도 될까?” 하면서 15분만 짧게 만났다. 실은, 어떤 경우엔 특별한 업데이트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만났다. 서로 시간이 안 되면 그다음 출장에서 만났고, 그다음 출장에서도 시간이 안 되면, 그 다다음 출장에서 만났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는 이유는 내가 대단히 말을 잘하거나, 스트롱 멤버들의 경력이 화려하거나, 또는 우리가 엄청난 전략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딱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꾸준히 문을 두드리고, 계속 이들의 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뭔가를 간절하게 원한다면, 이걸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냥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것이다. 실은 한글로 출근 도장 찍는다고 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100% 전달되지 않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영어로 “showing up everyday”이다. 아마도 이 영어 문장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이 showing up everyday 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쉽기도 하다. 그냥 꾸준히,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빠도, 몸이 피곤해도 그냥 매일 출근 도장 찍으면 언젠가는 달성할 것이다. 그게 투자유치든, 고객 유치든, 영업이든, 연애든, 우정이든, 운동이든, 대학입시든. 그리고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 보면, 그 언젠가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결국엔, 내가 항상 강조하는 복리와 꾸준함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실은, 이렇게 투자자들과 쌓은 관계에서 뭔가 될지 안 될진 잘 모르겠다. 이제 5층까지 올라왔는데, 10층까지 가기 위해선 어쩌면 또 5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다. 그냥 나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또 꾸준히, 정기적으로 이들을 만날 것이다. 매번 show up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뭔가 될 것이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현실과 이상

펀드레이징하는 창업가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바로 현실과 이상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당연히 창업가들을 만나는 건데, 이 중 당장 투자유치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현재 펀드레이징 중이고, 스트롱에게 투자받기를 희망하는 창업가들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를 검토하고 투자 유치가 급한 회사들에 검토의 우선순위를 할당하면서 일을 쳐내기 때문에 항상 하는 질문 중 하나가 펀드레이징 타임라인이다. 즉, 이번 투자유치가 얼마나 급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회사인데, 현금이 아슬아슬해서 금방 런웨이가 끝나는 상황이면 우선순위를 높게 하고 검토한다. 또한, 다른 VC와도 이야기하고 있고, 몇몇 투자자들과의 대화가 깊게 진행되고 있다면, 이런 회사들도 우린 우선순위를 높게 하고 검토한다. 느낌이 좋은 창업가인데, 우리의 바쁜 상황 때문에 느리게 검토했다가 다른 VC에게 투자를 받고 라운드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요새 아주 자주 느끼는 건, 상당히 많은 창업가들이 VC들의 의향에 대해서 착각하고, 현실을 똑바로 못 보고 본인들이 바라는 이상대로 생각하고 믿는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몇 달 전에 한 회사를 만났는데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창업가에게 펀드레이징 타임라인에 대해서 물어보니, “최근에 XYZ 벤처스가 커밋했고, 3주 안으로 마무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라고 해서 우리도 현재 검토하고 있는 다른 딜들을 일단 보류하고 이 딜을 먼저 검토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창업가는 다른 VC들과 미팅하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위에서 말 한 커밋했다는 투자사의 담당자를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커밋은 커녕, 딜 검토를 진행할지 말지 결정도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3주 안에 마무리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물어보니, 상당히 황당해하면서, 그건 그 VC의 일반적인 투자 프로세스에 관해 이야기한 건데, 대표이사가 철저하게 본인이 이해하고 싶은 데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했다.

또 한가지 예는, 창업가는 그 투자 라운드에 여러 명의 VC가 커밋해서 이미 마무리 됐다고 하면서 스트롱이 들어 올 수 있는 룸이 없다고 하는데, 막상 커밋했다고 하는 VC들과 확인해 보면 몇 번 가볍게 미팅만 했지, 투자 한다고 커밋 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룸이 안 남았다고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던 창업가는 한 달 후에 다시 연락와서 펀드레이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창업가들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본인들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이상만 봐서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VC들을 잘 못 읽어서인 것 같다. VC들도 사람이라서 모두 다 성향, 인상, 태도, 어법, 표정 등이 다르고, 한 사람을 읽는 것도 어려운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읽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 두 사람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같은 말을 해도, 이들이 의도하는 건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있다. 특히, VC는 소위 말하는 어장 관리를 해야 하는 업종이라서 가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투자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나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이 명확하게 이야기해도 창업가는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다수의 VC가 한 회사의 피칭을 듣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한 투자자가 이 회사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10억까진 할 수 있고, 리드도 할 수 있다. 당장 내부에서 작업을 시작해 보겠다.”라는 말을 했다. 나도 아주 명확하게 들었다. 그런데 같은 창업가가 다른 자리에서 그 투자자가 10억을 커밋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나는 봤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이 창업가는 정말로 그때 들은 말이 회사에 10억을 투자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어쩜 이렇게 현실을 제대로 못 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VC들을 잘 읽어서 현실과 이상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텀싯이다. 아무리 투자자들이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고 하고, 투자하겠다고 하고, 내부 투심에서 무조건 통과시키겠다고 해도, 텀싯을 주지 않으면, 그 VC는 투자하지 않는 거다. 이게 현실이다. 이미 커밋한 VC가 있다고 하는 창업가들에게 내가 항상 텀싯을 받았는지 물어보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대부분 비슷하다. “아직 텀싯은 안 받았는데, 구두로 확실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 “원래 이 VC는 텀싯 없이 투자한다고 합니다.” 등의 답변인데, 이런 투자자들이 투자하는 걸 난 보지 못했다.

간절하게 펀드레이징 하는 건 좋은 자세이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1,000억 원 매출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나는 요새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그쪽을 꽤 많이 보고 있다. 이렇게 조금 다른 각도로 시장을 보면, 잘 안 바뀌는 분야가 생각보다 많은데, 먹는 것, 바르는 것, 입는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터미네이터와 같은 휴머노이드가 길거리에 사람같이 돌아다녀도, 우린 계속 밥은 먹어야 하고, 얼굴과 몸에 뭔가를 발라야 하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몇 년 전에 DTC, 브랜드, 이커머스가 크게 유행하던 때가 있었고, 이때 엄청나게 많은 VC 돈이 이 분야에 투입됐는데, 돈 벌기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요샌 대부분의 VC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나는 이 분야가 돈 벌기가 힘든 이유는 너무 많은 플레이어가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시장 자체가 돈을 못 버는 습성이 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논리로 시장과 회사에 접근하면, 그 어떤 분야에도 투자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돈 벌기 쉬운 분야와 사업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요새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우린 최근에 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분야에 꽤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사업보다 성장의 기울기가 전반적으로 완만하고, 계속 뭔가를 만들어 팔아야 하므로 한계비용을 낮출 순 있어도 0으로 내릴 순 없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자본 집약적이라는 꼬리표를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한다는 점에선 아주 단순하고, 아주 훌륭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2025년 1사분기에 유니콘이 된 Top 10 글로벌 신생 유니콘 중 7개가 AI 관련 스타트업인데, AI가 주 사업이 아닌 나머지 3개 중 유독 내 눈에 띈 회사는 OLIPOP이라는 미국의 프리바이오틱 음료수 회사다. 이 회사의 2023년 매출은 약 2,500억 원이고, 2024년 매출은 이보다 더 클 것이다. 유니콘 기업가치는 약 2.5조 원이었다. 매출의 10배 정도의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은 건데, 이 배수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봐왔던 먹고, 마시고, 입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의 기업가치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고, 이 분야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한 magic number는 연 매출 1,000억 원인 것 같다. 매출 1,000억 원을 하면 대부분 5,000억 원 이상의 기업가치에 투자를 받거나, 1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에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사례를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매출 1,000억 원은 어떤 의미일까?

일단 엄청나게 큰 매출이다. 일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제품의 단가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이 팔아야지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 매출을 하면 꽤 의미 있는 규모의 소비자들이 이 제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프리바이오틱 소다에 대해 이야기하면 10명 중 4명은 위에서 말한 OLIPOP의 브랜드를 떠올릴 것이다.

또한, 매출 1,000억 원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하면, 그 분야를 수십 년 ~ 수백 년 동안 장악하고 있는 공룡인 대기업들에게 조금씩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아직까진 경쟁사는 아니지만, 대기업이 뭐만 하려고 하면 이 작은 회사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굉장히 불편하고 짜증 나는 존재로 강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는데, 마하트가 간디의 명언 중 하나인, “처음엔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할 것이고, 그다음엔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고,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길 것이다”에서 대기업들이 1,000억 매출 하는 스타트업을 대하는 자세는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다” 바로 그 직전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대부분 이 시점에서 그 분야 1,2등 회사가 1,000억 원 매출의 대략 10배인 1조 원 정도의 가격에 회사를 인수한다. 이 정도까지 매출을 키운 브랜드라면, 대기업이 가진 자원과 유통 채널을 활용하면 장기적으론 이보다 훨씬 더 큰 브랜드로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게 가능하고, 정말로 인수 이후 훨씬 더 큰 브랜드가 되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산업에서는 유통이 가장 막강한 권력이고 큰 회사가 작은 회사보다 항상 잘하는 게 이 유통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시장이 작다. 많이 작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TAM(Total Addressable Market)은 한국의 5,000만 명의 잠재 소비자보다 훨씬 더 큰 글로벌 시장이다. 이미 한국이 만드는 먹는 것, 마시는 것, 바르는 것과 입는 것들은 해외 시장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다. 이미 많이 있지만, 조만간 한국에도 매출 1,000억 원을 찍는 스타트업들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은 글로벌/한국 대기업들이 이 회사들을 높은 기업가치에 인수할 수 있길 바란다. 아니면, 스스로 계속 성장해서 이들이 대기업이 되고, 다른 스타트업을 높은 기업가치에 인수하고, 이 현상이 계속 반복될 수 있길 바란다.

상수와 변수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혁신과 변화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아는 주변의 많은 스타트업이 무에서 유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현상 유지가 잘 되던 현재 상황을 완전히 엎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다. 이들은 미래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우리 같은 VC는 이런 스타트업을 계속 찾고 있다. 창업가를 만났는데, 감동이 깊었고, 이들이 그리는 혁신에 동의해서 투자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bottom up 전략과 반대로 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지금 사는 세상에 비해 뭐가 달라질지 예측하고,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걸 하고 있는 창업가를 찾아서 투자하는 top down 전략을 추구하는 때도 있다. 특히 요샌 많은 VC들이 AI가 앞으로 바꿀 세상을 상상하고 예측하면서, 이 예측과 같은 선상에서 사업하는 스타트업을 찾아서 투자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중 어떤 것들이 크게 바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고,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창업가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AI가 메인스트림이 됐던 시점부터, 약간 다른 관점에서 시장을 보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는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이 거의 안 바뀌는 제품, 서비스, 시장은 어떤 게 있을까?”이다.

실은 이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에게 힌트를 얻은 질문인데, 지금 내 주위의 모든 VC들이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볼 수 있는 역발상적인 영감을 주는 질문이다. 역발상적이긴 하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변화만을 보고, 변화만을 상상하고, 변화 만에 투자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곳에 우리만 투자해서 우리만 맞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함과 벌 수 있는 수익은 훨씬 높다. 내가 봤을 땐.

어떤 것들이 앞으로도 안 변할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계나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대체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들이 이 분야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앞으로 변하지 않을 분야의 중심엔 결국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변화, 그리고 변화로 인한 변수에 너무 익숙한 직업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와 혁신을 외치기 때문에 잘 안 바뀌는 상수에 관한 생각을 우린 너무 안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사업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아이디어, 컨셉, 시장, 제품을 기반으로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나 변수를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다 보면, 출시 시점에 그 시장이 이미 없어졌을 수도 있다. 우린 이런 걸 유행이라고 하는데, 유행을 좇다 아무것도 못 만드는 창업가들을 너무 많이 봤고, 이들을 좇다 돈을 다 날린 투자자들도 너무 많이 봤다.

어차피 사업과 투자엔 정답은 없다. 하지만, 가끔은 변수만 보지 말고 상수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