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바이블 QA

비즈니스 모델

오늘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본다.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결국엔 우리 회사가 돈을 어떻게 벌지에 대한 주제이자, 생존에 대한 주제이다. 초기 스타트업이 안 망하고 계속 사업을 할 수 있게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가 외부 투자를 받는 인위적인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회사에 자금을 조달하는 유기적인 방법이다. 당연히 후자의 방법이 가장 좋지만, 무에서 시작하는 회사가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로 외부에서 자금을 투자 받아야 하는데, 되도록 외부 자금을 사용하는 기간을 최소화하면서 내부에서 돈을 버는 시점을 앞당기면 좋다. 물론, 돈 보다는 성장이 중요한 특정 산업이나 서비스도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분석도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너무나 다양하게 할 수 있는데, 오늘은 B2B랑 B2C의 측면에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일단 대부분의 B2B 사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매우 간단한데, 이 간담 명료함이 B2B 사업의 매력이다. B2B 스타트업은 핵심 제품을 기업고객에게 판매하고, 오롯이 이 제품을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매우 간단하고 정직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물론, 여기서 여러 가지 다른 돈 버는 모델이 나올 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드는 제품에서 파생되는 모델이다. 유지보수, 특정 기능 추가, 특정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커스터마이징, 제품을 도입하기 위한 컨설팅 매출 등이 그런 파생 비즈니스 모델이다. 기업 고객을 위한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걸리고, 만든 후에도 영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한 번 팔기 시작하면 꾸준한 매출이 발생하고, 이 시점부턴 우리가 만든 제품으로 돈을 벌어서 회사에 자금을 조달할 수가 있다.

B2C 사업도 B2B와 같이 스타트업이 만드는 핵심 제품을 일반 사용자에게 판매하고, 이 제품을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모델이 있다. 사진 필터 앱, 캘린더 앱, 명상 앱 등 너무나 많은 앱들이 주로 프리미엄(freemium) 모델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공짜이지만, 더 많은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B2C 앱은 일반 소비자에게 과금을 하므로, 많은 사용료를 받진 못한다. $0.99, $1.99, 많아 봤자 $14.99 정도를 과금하고 있는데, 이런 비즈니스 모델로는 엄청나게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지 않으면 스타트업에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만큼의 매출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B2C 스타트업이 핵심 제품으로 돈을 벌기보단, 이를 통해서 얻은 트래픽, 그리고 트래픽을 통해서 얻은 고객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본격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다. 우리가 매일 수십, 수백 번씩 사용하는 카카오톡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카카오의 첫 번째자, 아직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본 제품은 메신저인 카카오톡인데, 카카오톡은 유료 서비스가 아니다. 누구나 다 무료로 카카오톡을 통해서 친구, 동료, 그리고 지인과 대화할 수 있다. 카카오는 핵심 제품인 카카오톡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카톡을 통해서 얻은 트래픽과 고객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다양한 수익원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엄청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있다. 네이버도 비슷하다. 네이버의 핵심 제품은 검색엔진인데, 검색엔진은 무료다. 네이버는 메인 제품을 통해서 얻은 트래픽과 데이터를 활용해서 검색광고라는 엄청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

그럼 B2B 사업같이 핵심 제품 자체가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게 더 바람직할까, 아니면 많은 B2C 사업같이 핵심 제품 자체가 아닌, 이를 활용한 다양한 부수적인 제품이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게 바람직한 건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하지만, 핵심 제품 기반이든 부수적인 제품 기반이든, 언젠가는 외부 자본의 유입 없이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서 회사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견고한 비즈니스 모델을 확보하는 건 모든 스타트업이 풀어야 하는 지상과제이다. 결국엔, 이게 안 되면 계속 힘들게 외부 투자만 받다가 그냥 망하는 것이다.

피치 덱 분석

얼마 전에 피치 덱이라는 글에서 투자받기 위한 자료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몇 자 적어봤는데, 꽤 많은 분들이 좋은 피드백을 제공했고, 좋은 질문도 개인적으로 많이 해 줬다. 그런데 그 글 쓴지 며칠 후에 TechCrunch에서 이런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한국도 요샌 가끔 Docsend로 피치 덱을 보내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미국은 꽤 많은 분들이 Docsend를 통해서 덱을 보낸다. 이렇게 하면 누가 자료를 봤고, 어디까지 봤고, 어떤 페이지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는지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드롭박스가 이 회사를 작년에 인수했고, Dropbox Docsend 팀이 수많은 피치 덱과 이 덱을 읽는 VC들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한 내용이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고 이 팀을 만날지 말지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줄고 있다. 놀랍게도 3분 이상 안 걸린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고, 더 많은 자료가 투자자들에게 발송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평균 시간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2021년 대비 2022년에는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24% 감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덱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되, 3분 안에 이 팀을 만나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아주 임팩트 가득한 내용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전 에서 나열한 내용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투자자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보는 내용도 데이터로 정리해보니까 참으로 흥미롭다. Docsend 팀이 320개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VC들이 가장 자세히 보는 내용은 첫 번째가 제품, 두 번째가 비즈니스모델, 그리고 세 번째가 Purpose인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로 자료 초반에 있는 우리 사업에 대한 한 줄 설명 또는 엘리베이터 피치와도 비슷한 내용인데, 가장 짧은 내용이지만,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또는 오랫동안 보는 부분이다. 즉, 전체 슬라이드를 다 보지 않고도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는 이런 내용을 자료에서 찾아보고, 그 짧은 설명 자체가 별로이면, 그냥 미팅조차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자료 초반에 “우리 회사는 X를 위한 Y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명확한 설명이 있으면, 훨씬 더 잘 집중하면서 자료를 완독하는 편이다. 반면에, 자료를 다 읽어도 뭐 하는 회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이 회사랑 미팅을 안 할 확률이 매우 크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은, 투자 유치에 성공하든 안 하든, 320개의 모든 자료에 있는 내용은 팀에 대한 설명인데, 모든 투자자나 창업가나 팀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만큼 중요하고, 실은 스트롱은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바로 이 팀에 대한 슬라이드다. 우린 위에서 말 한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도 보지만, 우리가 가장 자세하게 보는 부분은 팀이다.

결론은, 창업가들에겐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업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 짧고 간결하게, 최고의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투자자들에게 정성스럽게 보내도 읽힐 확률이 매우 낮고, 읽혀도 3분 이내에 미팅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미팅을 해도 실제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더 낮다.

그래도 피치 덱은 중요하니까 신경을 좀 써서 만들어야 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창업가들

투자자들이 창업가들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창업 동기이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창업가 분들이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회사에서 일 한 경험이 있어서, 굳이 창업같이 어려운 길 말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길을 갈 수도 있는데 굳이 이 어려운 창업을 택한 이유와 동기는 항상 궁금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해도 이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창업가들이 듣기 좋은 고결한 답변을 했다. 어떤 분들은 어릴 적부터 느꼈던 사회의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세상에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창업했고, 어떤 분들은 어릴 적부터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창업했다고 한다. 굉장히 좋은 답변이고, 어떤 경우에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사업을 막상 보면 세상의 변화나 소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아서 후에 다시 물어보면, “그렇게 이야기 하면 투자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돈이 동기인데, 그렇게 이야기 할 순 없잖아요”, “떼돈을 벌기 위해서 창업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라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자주 듣는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창업의 목적이 돈이고, 돈 외에는 다른 동기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창업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무겁고, 고통스럽고, 공황장애스럽기 때문에, 이 길을 꼭 가야겠다는 아주 굳은 동기와 목적이 없으면 견디는 게 어렵다. 그래서,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든, 돈에 대한 개인적 욕심이든, 힘들지만 계속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거짓으로 거창한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렸을 때 너무 없이 자라서,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그냥 돈벼락 맞고 싶어서 창업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나도 실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한다. 기업 대상 강연은 잘 안 하지만, 학생들 대상으로 세미나나 강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데, 유니콘 기업과 1조 원 – 지금 환율로는 1.4조 원 – 이라는 큰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은 이 숫자에 대한 감을 전혀 못 잡는데, 주로 이렇게 추가 설명을 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인 중 한 명인 삼성전자 사장 연봉이 120억 원 ~ 150억 원인데, 이 연봉을 66년 동안 단 한 푼도 안 쓰고 100% 저금해야지 1조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즉, 남한테 월급 받아서는 절대로 큰돈을 못 번다는 뜻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으세요? 그러면 무조건 창업해야 합니다.”

이런 강연이 끝나면, 학생들이 찾아와서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본인도 돈을 벌고 싶은데 창업을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물론, 이 중 실제로 창업하는 분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이렇게 돈이 동기와 목적이 돼서 창업을 한 분들이 정말로 유니콘 기업을 만들어서 부자가 되면, 이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생관이 바뀐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생기면서, 이 분들의 동기와 목적이 돈에서 조금 덜 물질적인 것으로 바뀌고, 많은 분들이 궁극적으로는 창업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MVP 출시의 고통

요새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초기 스타트업 대표들이 몇 분 있다. 회사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성장한 후에, 이 회사를 더 좋은 회사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작업을 하고, 어떤 사람을 채용하고, 어떤 성장 전략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언을 주는 건 내가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항상 힘들지만, 지금 아무것도 없는 초기 스타트업이 소위 말하는 product/market fit을 찾는 걸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이다.

얼마 전에 이 중 한 분과 이야기하다가 MVP(Minimum Viable Product)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는데, 초기 스타트업과 만나다 보면 MVP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한다. MVP의 기본정의는 대략 다음과 같다.

MVP는 출시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한다. 보통 얼리어답터와 같은 소수 잠재 고객에게 먼저 공유를 한다. 이런 고객이 불완전한 제품의 가능성을 잘 파악하고 생산적인 의견을 주기 때문이다. MVP의 기본이 되는 사상은 고객을 발견하고 고객의 애로사항을 파악하는 것이다. 빨리 제품을 시장에 내면 고객 성향을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창업자가는 고객이 관심 없는 기능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고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제품을 빠르게 내야 한다. 그래야 남들보다 빠르게 배울 수 있다.
-출처: ‘스타트업 바이블 2‘ 23계명 – 빨리 똑소리 나는 MVP를 만들라

제품을 매일 매일 만들고, 이 제품을 시장에서 마케팅하면서 product/market fit을 찾기 위해 밤새워서 고민하는 창업가들은 MVP의 정의도 잘 알고 있고, 제품 개발을 조금 해본 분들이면 어떻게 하면 좋은 MVP를 만들어서 시장이 좋아하는 제품으로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방법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MVP’는 어떤 제품일까? 어느 정도 수준까지 만들어야지만 MVP라고 할 수 있을까? 초기 스타트업 대표들이 이런 질문을 나한테 많이 한다. MVP의 의미는 과거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정의는 “시장에서 사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제품”이다. 당근마켓은 현재 전 국민의 40%가 사용하는 국민 중고 거래/로컬앱으로 성장했지만, 창업초기에는 모바일로 아주 쉽게 내 물건을 등록하고, 이걸 판교 지역 사람들에게 사고팔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제공했다(당근마켓의 원래 이름은 판교장터 였다). 이 MVP로 실험하고자 했던 건, 과연 사람들이 지역주민이랑만 거래할 의향이 있을까였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홈서비스를 위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미소의 MVP는 웹 기반의 간단한 청소가사도우미 매칭 서비스였다. 집 청소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뒤에서 미소 직원들이 고객의 집 근처에 있는 인력사무소에 전화해서 수동으로 가사도우미를 매칭해줬는데, 이 MVP로 실험하고자 했던 건, 과연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가사도우미 서비스 신청을 할까였다.

어차피 완벽한 제품은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오래 고민하고 개발해서 10년 후에 출시한다고 시장에서 환영받는 제품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장에서 먹힐만한 제품과 시장이 실제로 원하는 제품은 다르고, 시장의 상황도 지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서 출시하는 건 시간 낭비다. 이런 문제점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린 제품 개발 방법론 중 하나가 MVP를 빨리 만들어서 출시하고, 이후에 시장의 피드백을 지속해서 다시 제품에 반영해서 시장이 원하는 것과 가장 근접하게 제품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서 한 번의 무거운 제품 출시를 하지 말고, MVP를 만들어서 가벼운 제품 출시를 여러 번 하라는 조언을 나도 자주 하는데, 최근에 내가 느끼고 있는 건 MVP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 돼서 완전한 제품의 완성도를 가진 MVP도 꽤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추세를 의식해서인지, 우리 투자사 포함, 많은 창업가들이 더 좋은 MVP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긍정적인 결과 보단, 부정적인 결과가 더 눈에 띈다. 더 좋은 MVP를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절대적인 개발 시간을 투입하는데, 어떤 회사는 MVP 만들어서 출시하는데 1년 넘게 걸리고, 예정 일정 대비 계속 출시가 지연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완성될 수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다 보면, MVP 출시 자체를 못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그리고 계속 출시 준비만 하다가 회사가 망하기도 한다. 또는, 지연을 거듭하다가 결국 출시는 했는데, 그동안 타이밍을 놓치면서 시장의 요구사항이 바뀌거나, 아니면 경쟁사가 먼저 MVP를 출시하면서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 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이런 상황을 많이 보고 경험하면서, 내가 느낀 MVP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1/ MVP의 수준이 상향평준화 된 건 확실하다. 하지만, MVP의 정의는 말 그대로 “최소한의 기능만 탑재한 제품”이다. 무조건 빨리 출시하는 게 생존과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 있다.
2/ 이렇게 빨리 출시해서 시장의 반응을 보는 게,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 더 개발할 건 빨리 개발하는걸 결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3/ “최소한의 기능”을 조금 더 확대해석해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즉,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제품이 시장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3-1/ Gmail보다 훨씬 더 사용하기 편리한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이라면, MVP는 멋진 UI와 UX, 그리고 다른 부수적인 기능 보단, 일단은 이메일을 잘 보내고, 잘 받는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이게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게 완성되면 일단 MVP를 출시하고, 이후에 시장의 피드백을 반영하면서 제품을 계속 향상해야 한다. 모든 부수적인 기능이나 디자인을 입힌 후에 MVP를 출시하려면 출시 자체를 못 할 확률이 높다.
3-2/ 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에 대한 정의를 제품 개발 시작하기 전에 잘 고민해봐야한다. 여기에서 정의가 어긋나면 MVP 자체가 산으로 간다.
4/ 그렇다고 허접한 MVP를 만들면 안 된다. 이 또한 망하는 지름길이다.
4-1/ 최소한의 기본적인 기능이 탑재되지 않고, 쓸데없는 부수적인 기능과 기술이 탑재된 MVP가 출시되면, 사용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MVP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5/ 즉, MVP의 핵심은,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제품의 방향을 확정하기 위한 틀을 만드는 작업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만들어서 사용 자체를 못 하는 MVP를 출시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나도 정확한 평균치를 계산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개발력과 제품 기획력이 있는 초기 스타트업이 괜찮은 MVP를 만드는데 투자하는 시간은 대략 6개월 정도인 것 같다. 6개월 이하면 원하는 제품이 안 나오고, 6개월을 넘기면 출시가 지연된다. 물론, 이건 산업마다 다르고, 시장마다 다르고, 회사마다 다르다.

피치 덱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1년 365일,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접하는 게 있는데 바로 스타트업의 소개 자료이다. 한국에서는 이 자료를 ‘IR 자료’라고 하는데, 이건 솔직히 말하면 콩글리시다.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해외 투자자들한테 IR 자료라고 하면 대부분 잘 이해 못 할 것이고, 그냥 영어로는 deck 또는 pitch deck 정도가 맞다.

우리는 대략 1년에 1,000개 정도의 회사 소개 자료를 보는 것 같다. 모든 회사가 다르듯이, 모든 자료가 다르다. 그래서 싸잡아서 모든 자료를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잘 만든 자료와 잘 못 만든 자료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잘 만든 피치 덱은 어떤 자료인지 몇 자 적어본다. 실은, 이 또한 내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일단 이 자료에 회사의 모든 역사와 비즈니스의 모든 걸 담으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이렇게 하기도 어렵지만, 너무 많은 내용을 담기 시작하면, 용량이 늘어나고, 페이지 수가 늘어나서, 하루에도 여러 개의 회사 소개 자료를 보는 VC들의 피로감만 증가시킨다. 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오후에 보는 자료의 용량이 30MB 이상이면 별로 다운받기도 싫어지고, 40장 이상이면 읽다가 지쳐서 중간에 포기하는 적도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PDF 용량을 대폭 줄여서 3MB 이하, 그리고 30장 이하로 만드는 걸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이 deck을 보고 회사에 투자할지 말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자료의 1차 목표는 VC와의 대면 미팅이다. 직접 만나서 우리 회사를 적극적으로 셀링하기 위한 미끼가 이 자료이기 때문에, 너무 내용이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되고, 적당해야 하지만, 최대한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고,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 즉, 자료를 읽는 짧은 시간 내내, “와, 이 회사 일단 한번 만나봐야겠다.”라는 생각을 VC가 하게끔 만드는 게 deck의 목표이다.

이런 임팩트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숫자다. 내가 지금까지 본 많은 자료 중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몇 개의 자료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부분 첫 페이지부터 “우린 창업 이후 24개월 동안 매달 10% 이상 성장했다.”라는 문구와 함께 안구가 정화되는 아주 아름다운 상승곡선의 그래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첫 페이지를 보고 바로 미팅 약속을 잡았던 게 기억난다. 그 이후에 나머지 내용을 읽었다.

특히 이런 수치 위주의 자료 작성과 발표는 한국보단 미국 창업가들이 매우 잘한다. YC 데모데이만 봐도, 잘하는 회사는 그 짧은 발표 시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주야장천 숫자 이야기만 한다. 좋은 숫자는 곧 아름다운 비즈니스이고, 아름다운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창업가는 모든 VC가 일단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런 아름다운 수치가 없다. 아니, 아예 수치가 없는 회사들이 태반이다. 이런 회사들은 어쩔 수 없이 숫자보단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 위주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이건 개인적인 성향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내용이 들어가면 좋다:
1/ 우리가 어떤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지
2/ 왜 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지
3/ 왜 지금 이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지
4/ 지금까지 시장에서는 어떤 문제가 존재했는지, 그리고 이 문제의 크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큰지(=시장 크기)
5/ 남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경쟁사)
6/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지(=제품, 기술)
7/ 어떤 사람들이 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지. 왜 우리가 이 비즈니스를 가장 잘하는지(=팀)
8/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숫자)
9/ 앞으로 우리가 할 일(=비전)
10/ 자세한 숫자와 내용은 되도록 부록으로 다 빼는 게 좋다

이렇게 자료의 모든 내용이 연결되고, 이 연결된 내용을 읽으면서, 이 팀을 한번 만나야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다면 기본적인 deck은 완성된 것이다.

물론, 피치 덱을 잘 만들었다고 투자받는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우리 비즈니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리고 이 첫 번째 미팅이 두 번째, 세 번째 미팅으로 이어진다면, 펀딩의 확률은 계속 올라가게 될 것이다. 모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