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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해

얼마 전에 넷플릭스 스포츠 다큐멘터리 4부작 ‘RAFA’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한국에서는 ‘나달’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는데, 스페인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이 선수를 주니어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고, 그동안 20년 넘게 팔로우해서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리즈가 재미를 넘어 그 어떤 스포츠 다큐보다 감동적으로 봤던 이유는 내가 알던 것보다 나달은 훨씬 더 투지가 넘치고 독한 선수라는 점이었다.

테니스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도 나달은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독특한 스타일의 테니스를 했던 선수이고, 그가 세운 기록 중, 4대 그랜드 슬램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 오픈 14회 우승은 아마도 평생 깨지지 않을 기록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본인이 특별히 테니스를 잘했다기보단 “I hit very hard and I run very fast”라고 항상 말할 정도로 재능, 노력, 겸손함을 모두 갖춘 훌륭한 선수지만, 이 시리즈를 보면서 내가 제일 감동받았던 건, 테니스라는 고통스러운 운동을 하면서 그가 습득한 ‘고통’에 대한 정의와 그만의 독특한 관점이었다. 그의 고통에 대한 태도는 운동선수가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도 배울점이 매우 많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통에 대한 철학은 2008년 윔블던 결승전에서 더욱더 두각을 나타낸다. 이미 2006년과 2007년 윔블던 결승에서 나달은 테니스 천재 로저 페더러에게 두 번 연달아 패배한 경험이 있었고, 이번엔 정말로 그 누구보다 간절히 이기길 원했다. 그리고 결국, 비가 세 번이나 와서 총 7시간 동안 진행된 경기를 해가 거의 질 무렵 나달이 세트 스코어 3-2로 이겼다. 당시의 심정을 이 다큐멘터리에서 나달은 이렇게 표현했다.

“제가 그보다 테니스를 더 잘하는진 잘 모르겠지만, 전 페더러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을 준비가 돼 있었어요. 이건 확실했습니다.”

누구나 다 고통스러우면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서 그 고통을 조금만 더 버티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또 버티고, 또 유혹을 뿌리치다 보면, 고통을 버티는데 점점 익숙해진다. 나달도 이 과정을 통해 평생 고통을 버티면서 “한 공만 더”를 했다. 아마도 이게 위대한 테니스 챔피언들과 그냥 테니스 선수들을 구분하는 자질인 것 같다. 한 공 더 버티는 것.

창업가도 테니스 선수 같은 운동선수이다. 다만, 몸보단 머리를 더 많이 쓰는 운동선수이다. 그래서 이들도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고통을 버텨야 한다. “한 시간만 더” , “한 이메일만 더” , “한 미팅만 더” , “한 피칭만 더” , “한 기능만 더”하면서 계속 버텨야 한다. 이 고통을 버틸 자신이 없으면 사업가로서 성공하긴 정말 어렵다.

얼마 전에 우리가 좋아하고 가끔 후원하는 연고대 창업 학회 인사이더스 회원분들을 대상으로 AMA 세션을 진행했는데, 어떤 학생분이 스트롱 팀원 모두에게 각각 어떤 창업가를 선호하는지 물어봤다. 우리 팀동료분들 모두 각각 다른 답변을 했는데 나는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할 수 있는 분들”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100시간 일하려면 월~금 매일 20시간씩 일해야 하고, 주말에도 일한다면 매일 14시간씩 일해야 해서 아무리 스타트업이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업무 강도라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 힘든 분야에서 정말로 성공하고 싶다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나달과 같이 남들보다 고통을 더 견딜 수 있어야 한다.

AI가 대세가 되는 시대가 오면서 인간은 모두 덜 일할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완전히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더 많이 일하는 사람이 더 잘할 것이고, 더 많은 고통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항상 앞서갈 것이다.

나는 고통을 더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반짝이는 눈

몇 주 전에 아주 행복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이 느낌을 글로 남기고 싶었고, 당시 내 생각과 기분을 종이에 펜으로 기록했었다. 이 글은 그 메모를 다시 읽고 당시의 내 생각, 기분, 그리고 느낌을 전반적으로 복기하면서 쓰는, 일종의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다.

이틀 연속으로 두 분의 창업가를 만났다. 한 분은 우리가 거의 10년 전에 첫 투자를 하고 이후에 여러 번 더 투자한 분이고, 한 분은 우리가 투자하진 않았고못했고, 오히려 우리 펀드에 투자해주신 분이다. 우리가 왜 이 창업가에겐 투자하지 못했냐 하면, 스트롱이 만들어지기 몇 년 전에 창업하신 분이라서 우리의 펀드와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았다. 두 분 모두 내가 나름 잘 아는 분들이고, 가끔 보는 분들인데 이들과의 연속 만남은 나에게 큰 울림을 줬고, 지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됐다.

일단 우리에게 투자한 분은 올해 18년째 본인의 사업을 하는 분이다. 18년 전이면 창업의 시대가 전혀 아니었고, 좋은 학교 졸업한 분이 내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주위에서 정신 나간 놈(년)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창업 관련 정보도 없고, 투자할 수 있는 돈도 시장에 별로 없고, 아이템도 당시엔 신박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 사업을 시작하면 안 됐는데, 역시 이 분은 내가 아는 모든 창업가와 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창업했다.

그동안 온갖 업과 다운을 경험하면서 사업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도 대단한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로블록스의 데이빗 바주키와 엔비디아의 젠슨 황처럼 창업 초기의 그 에너지와 열정을 18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금도 마치 창업 첫날인 것처럼 업무에 몰입하는 건 존경스럽다 못해, 굳이 왜 저렇게 할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할 정도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 많은 창업가를 만났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분이 가짜 에너지와 열정을 분산하는지 아닌지는 금방 구분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대방의 눈을 보면 된다. 이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하면 이건 깊은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흥분, 에너지, 그리고 열정이다. 이 분과 점심을 먹으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18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돈도 벌고 명성도 어느 정도 생겼는데 왜 계속 이 힘든 일을 할까? 이건 내가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 단계를 이미 지났고, 그냥 이 분의 내면에 있는 자가발전기가 아직도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업을 즐기고, 자신 있고, 평생 하겠다는 굳은 의자와 각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런 내면의 전투력과 활활 타오르는 불이 두 개의 작은 눈을 통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분은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이다. 사업을 한진 거의 10년이 됐고, 첫 제품은 잘 안돼서 교과서적으론 회사는 망해야 했는데, 당시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피봇팅했고, 이 두 번째 제품은 나름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제품도 시간이 지나자 정체되면서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때 이 회사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고 마음속으로 또다시 생각했다. 그 기간 이 창업가를 만나면 항상 피곤하고, 우울하고, down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분은 이성적인 일반인이 아니라 본인이 만드는 틀에 세상을 맞추고 싶어 하는 창업가이고, 역시 다시 한번 피봇팅을 통해서 돌파구를 찾는 노력을 최근에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초기 반응은 나쁘지 않아서 나도 맘속으론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두 번째 피봇팅을 시도하는 이 시점에 만난 우리 창업가분은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몇 년 동안 번아웃이 됐던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초기화된 것 같았고, 위에서 말한 18년 사업하는 대표님과 비슷하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랫동안 정체됐던 구간을 지나면서 사업의 돌파구를 찾았을 때 오는 그 짜릿함과 흥분감이 활활 타오르는 내면의 불이 됐고, 이게 이 분의 두 개의 작은 눈을 통해서 빛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왠지 이 순간과 느낌이 데쟈뷰 같았는데, 그건 이 분이 약 7년 전에 첫 번째 피봇팅을 했을 때 내가 동일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반짝반짝하는 눈빛을 그때 내가 봤는데, 7년 후에 다시 보게 되다니,,,창업한 지 10년 된 분에게 이런 에너지가 계속 나올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신기했다.

이런 느낌을 내가 이틀 연속 받다 보니, 마치 내가 초사이어인이 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나도 내면의 전투력이 활활 불타오르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창업가들과 항상 같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하는, 우리 같은 VC만 느낄 수 있는 특권과도 같다.

Founders will be founders.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겉으로 보면 화려한,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졸x 힘든 이 VC라는 업을 내가 왜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이걸 계속하는지,,,나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이틀이었다.

100년 마인드셋

로블록스의 공동창업가이자 현대 대표이사인 David Baszuki는 이 회사를 2002년도에 창업해서 현재 24년째 운영하고 있다. 많은 창업가가 사업을 어느 정도의 궤도까지 올려놓은 후에 본인이 만든 회사를 떠나거나, 아니면 현업에서 손을 떼고, 개인적인 관심사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데, 이 분은 오늘도 24년 전과 비슷한 에너지로 사업에 집착한다는 게 정말 놀랍다. 그리고 앞으로 로블록스를 몇 년 더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은퇴할 계획은 전혀 없고 가능하면 20년은 더 하고 싶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자주 하는데, 얼마 전에 내가 들었던 인터뷰에서도 그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고, 본인은 남은 인생을 로블록스에 바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엔비디아의 공동창업가이자 현재 대표이사인 젠슨황도 엔비디아를 33년 전에 창업했고, 아직도 운영하고 있다. 젠슨 역시 은퇴와는 너무나 먼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아직도 거의 매일 15시간씩, 주말에도 계속 일하고 있다. 엔비디아 초기 멤버들의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젠슨은 창업 초기보다 요새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한다. 젠슨은 로블록스의 데이빗 같이 공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엔비디아를 평생 운영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고 들었다.

로블록스의 데이빗 사장이 “저는 로블록스에서 20년은 더 일할 거예요.”라는 말을 했을 때, 그리고 내가 이 인터뷰를 들었을 때 온몸에 진한 전기가 찌릿하게 왔다. 그리고 바로 떠올랐던 생각은 “와,,,나도 이제 저런 사람들에게(만) 투자하고 싶다.” 였다.

한 5년 열심히 일해서 소소한 엑싯 하면 다른 사업을 하거나, 현재 사업으론 돈을 벌고 이 돈으로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 또는 취미 생활을 하겠다는 창업가들은 내 주변에 널렸다. 이들보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기간만 5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날 뿐이지, 엑싯하면 그 돈으로 다른 더 재미있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은 동일하다. 그리고 솔직히 스트롱이 투자한 창업가들도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우리가 이제 14년째 투자를 하고 있으니, 스트롱 포트폴리오 중 가장 오래된 회사는 14년 정도의 역사가 있다. 내가 로블록스 데이빗 사장의 말을 듣고 우리가 그동안 투자한 300개 회사의 창업가들을 비디오처럼 머릿속에서 한 명씩 떠올리며, 어떤 분이 50년 사업할 마음가짐이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솔직히 지금까진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 중 어떤 분들은 50년 ~ 100년 가는 사업을 만들을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게 내 판단이다.

나도 투자를 시작했을 땐 단기적인 마인드로 일했다. 솔직히 스트롱을 만들었던 2012년도에 누군가가 나에게 왜 VC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면, 전형적으로 멍청하고 1차원 적인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직업이 어디 있어요. 남의 돈으로 투자해서, 운 좋으면 나도 돈 많이 벌 수 있는데요.” 그런데 고백하건대, 당시엔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남의 돈으로 투자하고 한 3년 후에 돈 많이 벌어서 인생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내가 VC를 시작했던 이유의 절반이었다. 그리고 그땐 투자하면 3년, 아무리 길어도 5년이면 회사들이 수천억 원에 엑싯 할 줄 알았다.

14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참 개념 없고 순진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동안 투자를 더 많이 하고, 더 좋은 창업가들을 만나면서 VC라는 업을 바라보는 내 직업관과 내가 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와 목적에도 굵직한 변화들이 있었다. 이제 나는 5년 안에 큰 엑싯을 해서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만드는 창업가들보단, 100년 가는 사업을 만들고 싶은 창업가들에게 투자하고 싶다. 위에서 말한 로블록스의 데이빗 바주키와 엔비디아의 젠슨황 같은 창업가들에게 투자해서 돈도 벌고 싶지만, 이들과 함께 오래가는 기업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그 기업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

이런 창업가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철학과 전략을 더욱더 뾰족하게 다듬어야 한다. 시장의 유행을 따르기보단, 우리만의 사람 중심적인 투자 철학과 전략을 더욱더 갈고 닦아야 하는데, 우리도 이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어쩌면 스트롱도 100년 가는 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실전의 중요성

요새 한국의 주식 시장은 정말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나도 한국과 미국 주식을 약간 보유하고 있지만, 큰 연구나 분석 없이 내가 좋아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기 때문에 한국의 public 시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조만간 코스피가 1만을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요샌 한다. 연일 뉴스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주식 분석가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본인들의 이론과 전략을 공개하면서 앞으로 주가가 어떻게 변동할지 예측하는데, 이걸 보면서 맨 먼저 들었던 내 생각은 과연 저 수많은 주식 분석가 중 실제로 주식 투자로 돈을 번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이다.

내 주변에도 유명한 주식 분석가가 있다. 언론에도 나오고, 여의도에서는 꽤 유능한 애널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분이다. 나도 이 분이 방송에 출연해서 특정 회사와 분야에 대해 본인이 아는 내용에 관해 설명하는 걸 들었는데, 대학교 교수님보다 더 유식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이 분은 주식 투자로 돈을 크게 벌진 못했다. 투자를 안 해서 못 번 건 아니고, 투자하는데, 막상 본인이 투자한 회사의 주식으로 수익을 만들진 못했다. 그 회사의 임직원보다 본인이 분석하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고, 이 회사의 재무제표를 꿰뚫고 있고, 세계 경제의 흐름까지 예측할 수 있는 전문가가 어떻게 주식 투자로 돈을 못 벌 수가 있을까? 세상은 실전으로 돌아가지, 이론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경영대학원을 6개월 동안 매우 짧게 다녔고, 이때 경제학에 대해 조금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경제학은 꽤 재미있는 학문이긴 하지만, 경제학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기본 법칙과 원리를 담는 학문이라는 이론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워튼 경영대학원에서 그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수업을 듣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들이 아는 상식은 실물경제에 거의 적용할 수가 없는 죽은 지식이라는 걸 매번 느꼈다. 이론가들이 말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학 이론 뒤에는 수많은 비현실적인 모델링과 가정들이 있어서 우리의 실생활에는 적용할 수가 없는데, 많은 경제학자는 이런 이론이 고용을 창출하고 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에게 실물경제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본인들의 이론을 기반으로 해결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 못 한다. 왜 그럴까? 세상은 실전으로 돌아가지, 이론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은 투자의 세계도 비슷하다. 투자를 책으로 배우고, 이론적으로만 아는 가짜 VC들의 말을 듣다 보면, 정말 투자의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벤처투자에 대한 이론은 빠삭하다. 이 기술은 이래서 좋고, 저 기술은 저래서 미래가 없고, 이 회사는 이러므로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이들의 말은 하나씩 따져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정작 이분들에게 본인의 포트폴리오 중 성공한 회사에 관해 물어보면, 말에 비해 실제 투자는 거의 안 했거나, 투자는 좀 했지만, 성공한 회사는 하나도 없다. 벤처 투자 세계도 실전으로 움직이지, 이론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론, 수치, 그리고 데이터를 맹신하진 않는다. 수치와 데이터를 보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사업은 하면 안 되고, 이론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했을 때 우리의 경쟁사가 우리보다 말도 안 되게 경쟁우위를 갖는 시장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 또는 이와 반대로 수치와 데이터를 보면 무조건 해야 하는 사업은 해야 하고, 우리가 경쟁사를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시장에는 들어가야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결정이라서, 일단 해보고 부딪혀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다. 너무 많은 분이 이론만으로 미래를 계획하는데, 실험실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결과는 항상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해봐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창업가들이 좋다. 이들은 이론도 참고하지만, 결국 모든 건 실전에서 결정되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 절대로 승산이 없는 분야에서 조 단위 사업을 만들고,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는 시장에서 달걀로 바위를 쳐서 정말 바위에 금을 내는 분들을 나는 봤고, 몇 명에겐 우리가 직접 투자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실전이다. 이론 뒤에 숨지 말고, 일단 해보는 걸 권장한다.

기다림의 미학(또는 지루함)

꼰대 같은 내용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이전 세대 사람들이 현재 세대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요즘 사람들은…” 하면서 불만족을 표현하는 건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는 행위다. 나도 옛날 사람이라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 세대랑 비교했을 때 요즘 세대가 부족한 걸 하나만 꼽아 보라고 하면 나는 “인내심”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인내심을 기다림의 미학이라 하고, 어떤 분들은 기다림의 지루함이라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인내심은 기다림의 미학, 또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가 언제 이 말을 대학생에게 한 적이 있는데, 이 친구가 나를 외계인처럼 봤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서비스 앞에 “바로”가 붙고, 오늘 밤에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배송되는 “로켓” 서비스가 기본이고, 글자 하나씩 읽으면 느려서 책도 잘 안 보고, 영상도 몇 배속해서 보는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의(=instant gratification) 시대에는 인내심이라는 말 자체가 촌스럽고 고인물들의 전유물이 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긴 하다.

반면에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하는 벤처 투자, 그리고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분들은 대부분 인내심의 미학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보단 장기적인 만족과 보상을 위해 – “장기적”이 5년이 될 수도 있고 30년이 될 수도 있지만 – 불안, 초조, 공황을 참고 오늘도 인내심의 미학을 믿으면서 본인들만의 길을 가고 있다. 이런 분들과 항상 어울리다 보면, 나도 인내심의 미학을 믿게 되고, 인내심과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복리의 위력을 배우게 된다.

조만간 하와이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만약에 주말을 끼고 가게 되면 오랜만에 서핑해 볼까 해서, 호놀룰루에서 좋은 서핑 장소, 파도, 서퍼 등과 관련된 기사와 영상을 보면서 여기저기를 웹서핑하면서 생각났던 게 바로 서퍼들이야말로 인내심의 끝판왕이라는 점이다.

서핑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큰 파도를 타고 바다를 가르는 구릿빛 서퍼만큼 멋진 사람들이 없는데, 이 멋짐을 만드는 건 기다림의 미학이다. 어느 정도 잔챙이 파도와 씨름해서 서핑의 기본을 잘 다지면, 누구나 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좋은 파도’를 타고 싶어 한다. 그런데 파도를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어서,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보드 위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어떨 때는 몇시간 동안 여러 번의 좋은 파도를 신나게 타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기다리다 허탕 치고 귀가하는 서퍼들도 많다. 내가 LA에 살 때 서핑을 배웠던 강사는 3일 동안 매일 5시간 기다렸지만, 맘에 드는 파도를 못 찾아서 그냥 집에 왔다가, 4일째 엄청난 파도를 만나서 인생 최고의 서핑을 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 분은 강습 시간 내내 서핑 기술보단 기다림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이야기해 줬는데, 한참 후에서야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해했다.

스타트업도 이렇게 보면 서핑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당장 성공을 맛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지만, 정말 큰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주 많이. 시장을 잘 파악한 후 나만의 믿음과 시각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고, 남들이 잘 안 가는 길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먼저 자리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 마치, 서퍼들이 남들보다 더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 지금은 잔잔하지만, 앞으로 바람이 불어 큰 파도가 올 만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보드 위에서 주변 상황과 여러 지표에 주목하면서, 파도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한다. 바람과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자리를 예측해서 옮겨야 한다. 그리도 또 기다려야 한다.

실은, 이렇게 인내심을 갖고 사업하면서 기다려도, 대부분의 창업가는 파도 한 번 못 타고 그냥 집에 가는 경우가 훨씬 많을 텐데,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그다음 날 또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만약에 운과 실력 사이 어느 지점에서 큰 파도를 만난다면, 그리고 인내심의 미학이 철저한 준비로 이어졌다면, 이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고, 그동안 쌓인 인내심과 기다림이 복리 폭발해서(=compounding explosion) 그 어떤 창업가들보다 앞서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스타트업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그나마 갖고 있는 짧은 경험도 성공한 경험은 아니다. 서핑으로 따지면 그냥 잔챙이 파도와 씨름만 하다가 집으로 간 경험밖에 없지만, 좋은 파도를 타는 것만큼 신나고 짜릿한 느낌이 없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 큰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야 하고, 항상 연습해야 한다. 실은, 언제 올지 모르는 파도를 아무도 없는 뜨거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기다리는 건 매우 혼란스럽고, 공포스럽고, 불안하고, 짜증 나고, 초조한 경험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내심의 미학이 우리 모두에겐 필요하다.

물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고 해서 좋은 파도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대부분 못 만날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이 없다면 성공할 수 있는 그 작은 확률조차 없어서 인내심은 모든 창업가의 기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또 막상 생각해 보면, 인내심은 요즘 세대뿐만 아니라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대부분 사람에게 부족한 자질인 것 같다. 우리 윗세대, 그 윗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를 봐도 인내심의 중요성을 아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보고 화난 요즘 세대분들이 있다면 사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