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ing

개밥 핥아먹기

나는 과거에도 “자기 개밥 먹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은 이 용어를 잘 알 텐데,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만든 제품을 내가 직접 사용해본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요새도 나는 자주 놀라는 게, 너무나 많은 대표이사가 본인이 만든 제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하지 않고, 어떤 기능이 있는지 잘 모르고, 나 같은 투자자가 간혹 창업가보다 그들의 제품을 더 많이 사용하고, 어떤 기능이 있고, 어떤 버그가 있는지 더 잘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창업가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제품을 만드는 게 쉽지 않고, 디테일이 떨어지는 제품은 시장의 buy-in을 못 받기 때문에, 이런 제품과 회사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내가 요새도 자주 사용하는 예시인데,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이렇게 커지고 많은 사용자의 인정을 받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회사의 대표들이 제품을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사용하면서 본인들이 만든 개밥을 먹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요새도 페이스북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기능을 다 사용해보면서 수시로 제품과 개발 팀에게 피드백을 준다. 잭 도시도 트위터를 항상 사용하면서 개밥을 열심히 먹는다. 며칠 전에 내가 포스팅했던 에어비앤비의 공동창업가이자 대표인 브라이언 체스키는 벌써 수년째 집 없이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집을 장기대여해서 살고 있다. 이 수준으로 창업가들이 자기가 만든 개밥을 직접 먹어봐야지만, 최고의 개밥을 만들 수 있는 건 불변의 진리인데, 너무나 많은 창업가들이 – 우리 스트롱 투자사 대표들 포함 – 이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건 투자자로서 아주 아쉽다.

2월 초에 오랜만에 LA 출장 갔다가 우리 투자사 Polydrops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 회사는 미래지향적인 소형 캠핑트레일러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스타트업이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한인 유학생 부부가 이 회사의 공동창업자들인데, 나는 이 팀이 개밥 먹는 걸 보고 엄청나게 감명받았다. 일단, 회사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부부가 워낙 캠핑을 좋아해서, 졸업 후 취업자리를 알아보기 전에, 몇 개월 동안 미국을 돌아다니면서 캠핑을 하기로 했고, 본인들이 건축을 공부했고, 미래형 주거 공간이라는 주제를 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기 때문에, 캠핑트레일러를 직접 만들어서 캠핑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무와 스티로폼으로 직접 두 분이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트레일러를 만들어서 미국 횡단 여행을 떠났다. 3개월 이상 노마드 생활을 해봤는데, 직접 만든 트레일러가 꽤 쓸만하게 고장도 안 나고 잘 버텨줬고,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이 트레일러를 보는 사람마다 “디자인이 너무 예쁘다” , “어디서 살 수 있냐” , “얼마냐” 등의 질문을 수없이 했고, 두 분은 이걸로 사업을 해볼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긴 도로여행을 끝내고 LA로 돌아와서, 트레일러를 크레이그스리스트에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어떤 미국인이 이걸 사겠다고 했고, 바로 이 순간 Polydrops라는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이후는 고생길이었고, 지금도 엄청 고생하고 있지만, 우리는 운 좋게 이 팀을 초반에 만나서 투자했다. 실은, 여기까지도 꽤 인상 깊은 이야기이고, 본인들이 하는 사업을 이렇게 몸으로 직접 실행하는 팀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개밥을 먹는 분들인데, 이번 방문에서 내가 진짜 인상 깊게 느꼈던 점 몇 가지만 더 적어본다.

캠핑 트레일러로 시작했고, 현재 비즈니스는 이 트레일러를 주문제작으로 판매하는 거지만, 이 팀이 그리는 비전은 미래의 주거공간과 수단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 추세라면 밀레니얼들은 과거와 현재 세대같이 집을 사서 소유하는 개념에 열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비싼 집을 사진 않을 것이고, 한 지역에 있는 고용주와 고용 계약을 오랫동안 맺는 형태의 취업보단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돌아다니면서 단기 취업을 하는 gig employment를 선호할 것이다. Polydrops가 만들고 있는 트레일러는 이런 새로운 세대를 위한 주거공간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LA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홈리스(homeless) 해결에 대한 답을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부부는 본인들이 그리는 미래를 그대로 한번 살아보기로 했다. 살던 아파트도 없애버렸고, 살림살이를 드라마틱하게 줄여서, 아예 작업실/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창고형 건물을 임대해서, 트레일러와 창고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다.

사진 2020. 2. 26. 오후 12 46 17

창고 위층에는 작은 부엌이 있는 방을 만들었고, 잠은 주로 여기서 자지만, 본인들이 만들고 있는 폴리드롭 트레일러에서도 잔다.

사진 2020. 2. 10. 오후 6 50 07

사진 2020. 2. 26. 오후 12 45 26

그리고, 본인들의 개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를 보여주는 게 바로 이거다. 바로 이동식 야외 샤워 텐트다. 화장실만 있고, 샤워실이 없는 창고라서, 이 분들은 이 안에서 샤워를 하는데, “상당히 쓸만하다”라고 한다.

사진 2020. 2. 26. 오후 12 46 38

이렇게 뼛속까지 본인들이 하는 일을 믿고, 개밥을 열심히 먹는 창업가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 정도면 개밥을 먹는 게 아니라 완전히 핥아먹는 수준이다. 미팅 후 호텔로 돌아오면서 내내 생각했는데, 이런 팀에 투자해서 정말 자랑스러웠다.

자기가 어떤 제품을 만드는지 A 부터 Z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사업을 하겠단 말인가? Amen to 개밥먹기.

에어비앤비 스토리

얼마 전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리 갤러거의 “에어비앤비 스토리(The Airbnb Story)”를 읽었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는데,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일부러 창업이나 비즈니스 관련 책 보단 일반 소설을 읽는데 시간을 할애해서 인제야 읽게 됐는데, 비행 내내 밥 먹는 시간 빼곤 한 번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고 단숨에 다 읽었다. 실은, 우리가 아는 현재 거대한 비즈니스가 된 스타트업들의 창업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는데, 에어비앤비의 창업과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전에 포스팅했던 넥슨 창업 이야기 플레이만큼 흥미진진했고, 영감과 감동으로 가득 찼던,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과 같았다.

에어비앤비 관련 단편 일화들은 이 분야에서 일하면 누구나 다 한두 번은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가난한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디자인 관련 행사 참석자들에게 자신들의 침대를 돈 받고 빌려주면서 시작한 일화, 한때는 회사 서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당대회가 열리는 곳에서 두 대통령 후보를 주제로 한 시리얼을 판매했던 일화, Y 컴비네이터에 거의 떨어질 뻔했다가 턱걸이로 들어갔던 일화, USV의 Fred Wilson이 에어비앤비 투자하지 않았던 걸 후회한 일화 등은 아마도 누구나 다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나도 이런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듣고 읽어서 대략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조금 더 깊고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되니, 모두가 비웃던 아이디어를 가진 세 명의 젊은 창업가들이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직면해야 했던 도전들, 이들이 구축한 제품과 문화, 그리고 세계 최고기업으로 단시간 만에 성장시킨 이야기는 실리콘밸리 다른 회사의 성장 스토리랑 비교해봐도 매우 인상 깊고 이단적이기까지 하다.

세 명의 창업가가 단기간에 수십조 원의 가치를 가진 에어비앤비라는 회사를 만든 과정을 책으로 보면서, 이 바쁘고, 정신없고, 잡음 많은 세상을 살면서, 쉽게 잊어버리지만, 투자자한테는 생명과도 같은 다음 세 가지를 계속 스스로 상기시켰다:
1/ 황당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실행했을 때, 뭔가 항상 나오고, 그게 나오면 대박 성공 확률이 가장 높다.
2/ 지적인 강인함을 가진 창업가가 어려운 시기에도 성공할 수 있다.
3/ 학벌, 능력보단 의지. 특히, 배움에 대한 의지는 성공의 필수 조건이다.
4/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황당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실행하는 바퀴벌레 근성은 정말 중요하다.

에어비앤비 공동창업가이자, 현재 대표이사인 브라이언 체스키는 1년 365일 배움의 의지를 가진 사람인데, 독서광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두 개의 명언이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킨다. 비이성적인 사람은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고로 모든 변화와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달려있다.”
-조지 버나드 쇼

“처음에 그들은 당신을 무시하다가 당신을 비웃고, 그다음에는 당신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그러면 결국 당신이 이긴다.”
-마하트마 간디

에어비앤비의 탄생과 성장 자체를 바로 이 두 명언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작은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욕먹고, 비웃음당했다.

“낯선 사람을 낯선 사람의 집에서 재운다.”

그 누가 봐도 정말 미친 아이디어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에어비앤비는 절대로 생겨날 수 없는 회사였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기업가치가 높은 회사가 됐다.

대담한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매번 무시당하고 조롱받았던 사람들. 하지만 결국 승리한 사람들.

이 책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이다.

Strong LA 스타트업

한 2주 전에 LA에 오랜만에 잠깐 다녀왔다. 4년 전에 LA를 떠나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분기에 한 번은 LA에 출장을 가야겠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한국의 생활이 바빠서 지난 4년 동안 거의 못 갔는데, 이번에 다녀오면서 앞으로는 자주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는 한국과 미국, 이렇게 두 지역의 스타트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데, 미국에 있는 스타트업도 한인 또는 한인교포들이 창업한 회사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한 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많은 미국의 투자사는 한국에서 먼저 생긴 컨셉을 미국으로 가져와 로컬라이즈해서, LA를 발판으로 삼아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모델을 도입한 회사들이다. 여기 그 몇 개를 소개한다(알파벳순).

7TILL8: 이 스타트업은 진정한 LA스러운 회사이다. 서핑할 때 입는 웨트수트를 커스터마이즈해서 판매하는 회사인데, 기존 웨트수트가 가진 여러 가지 단점을 – 특히, 몸에 잘 맞지 않는 단점 – 보완한, 고가의 고급 웨트수트 D2C 회사이다. 회사의 이름도 재미있다. 전문 서퍼들이 가장 선호하는 파도를 탈 수 있는 시간이 저녁 7시 ~ 저녁 8시 사이인데, 여기서 7TILL8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KPOP Foods: 미국인들은 소스를 참 좋아한다. 그 어떤 식당을 가도, 그리고 그 어떤 음식을 주문해도, 거의 모든 음식에 다양한 소스를 뿌려서 먹는다. 대표적인 소스가 케첩, 머스터드, 타바스코, 마요네즈, 에이욜리, 스리라차 등인데 전 세계 소스 시장은 수십조 원 크기이다. KPOP Foods는 UCLA MBA를 졸업한 교포 창업가가 창업한, 한국 소스를 만들어서 D2C로 판매하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의 대표 소스는 고추장을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 한 KPOP Sauce, 그리고 마요네즈와 김치를 절묘하게 혼합한 Kimchi Mayo다. 미국인 친구가 있는 한국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할 텐데, 미국인들이 한국의 고추장과 쌈장을 정말 좋아한다. 존이랑 나는 항상 이 생각을 했었고, 누군가 고추장과 쌈장을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제대로 마케팅하고 유통하면 타바스코보다 더 큰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회사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백인들이 햄버거에 고추장을 뿌려 먹는 모습이 벌써 상상된다.

MAKKU: 한국을 대표하는 술은 소주이지만, 소주보다 전통이 깊은 한국의 술은 막걸리다. MAKKU의 창업가는 글로벌 대형 주류회사인 AB InBev의 신사업 팀에서 일하면서, 밀레니얼들이 저알콜 음료를 선호하는 트렌드를 파악하고, 한국의 막걸리를 미국 시장에 맞게 만들어서 판매해야겠다는 아이디어로 퇴사했다. 현재 뉴욕과 LA의 다양한 도매상, 소매상, 그리고 식당을 대상으로 Korean Creamy Beer인 막걸리를 열심히 홍보하면서 판매하고 있다. 일본의 사케가 글로벌 주류가 될 수 있다면, 한국의 막걸리는 이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고 우린 믿고 있다.

Millibatt: UCLA 박사들이 만든 회사인데, 초소형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들고 있는 high-tech 스타트업이다. Y Combinator 2017년 겨울 배치를 거쳤으며, 독보적인 기술과 지적재산권을 바탕으로 아직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초소형 배터리의 상용화에 도전하고 있다. 이 배터리가 얼마나 작은지는, 이 동영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More Labs: 이 회사와 이시선 대표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숙취해소 드링크를 미국에서 Morning Recovery라는 브랜드로 로컬라이즈해서 D2C로 판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More Labs의 비전은 다양한 생산성 드링크를 만들어서, 궁극적으로는 Red Bull과 같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숙취해소를 돕는 Morning Recovery 외에, 집중력을 향상하는 Liquid Focus, 수면을 도와주는 Dream Well, 그리고 수분을 보충해주는 Aqua+ 제품이 있다.

PAIRELA: 여성용 바지를 직접 만들어서 D2C로 판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의 여성 대표님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하는 여성들이 편안하지만, 고급스럽게 입을 수 있는 바지가 시장에 별로 없다는 점에 착안해서, PAIRE-LA를 창업했다. 여성을 위한 좋은 pair of pants를 LA에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PAIRE-LA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이 회사에 뉴욕의 아주 유명한 VC랑 같이 투자했는데, Theory와 같은 좋은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Polydrops: 건축학을 공부하러 온 한인 유학생 부부가 창업한 회사이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캠핑용 트레일러를 수작업해서 D2C로 판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트레일러도 상당히 쿨 한데, 이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는 더욱더 쿨하다. 미래에는 한 명의 고용주와 계약해서 일 하는 고용의 형태가 프리랜싱 형태의 gig 방식으로 바뀔 것이고, 집을 사서 한 곳에서 주거하는 주거문화 또한 바뀔 것이다. 이렇게 주거와 고용의 형태가 바뀌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는 노마드 생활을 하는 인구가 증가할 것인데, Polydrops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이동 주거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Rael: 한국에도 사무실이 있고, 한국 미디어에서도 워낙 많이 소개되어서 친숙한 이름이다. 한국의 다양한 여성용품을 미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fem-care 스타트업이며, 한국의 유기농 면 생리대를 아마존에서 판매하면서 시작했다. 현재 미국 전역의 Target에서 라엘의 제품을 구매할 수 있으며, 아마존에서 가장 잘 팔리는 유기농 면 생리대 중 하나이다. 이젠 다양한 여성용품을 제조해서 D2C로 판매하고 있다.

실은 LA 지역에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는 훨씬 더 많지만, 위 회사들은 우리가 비교적 최근에 투자했고,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컨셉으로 사업을 하는 대표적인 스타트업들이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결과를 내면서 미국과 전 세계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한 단계 상승했는데, 할리우드가 있는 LA보다 이 기운을 더 잘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이 좋은 기운과 스트롱이 만들고 있는 한국과 북미/LA 간의 다리를 잘 활용해서, 모두 좋은 글로벌 비즈니스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I don’t know

해마다 정확한 통계를 내봐야겠다고 하면서 잘 못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일 년에 만나는 창업가/회사와의 미팅 횟수에 대한 통계이다. 미팅할 때마다 카운트를 하는 게 가장 정확한 방법인데, 어느 순간 이걸 깜박한다. 작년도 정확한 카운트를 하진 않았는데,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략 세어보면, 나는 한 400~500개 회사와 미팅을 한 것 같다. 즉, 매우 많은 사람을 만났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창업가들한테 가장 듣고 싶었지만, 가장 듣지 못 했던 말 중 하나가 바로 “잘 모르겠네요(I don’t know)” 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싫어한다. 남한테 항상 본인은 강하고, 일 잘하고, 모든 걸 다 안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습성이 있다. 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잘 안다. 특히, 창업가들은 자존감도 세고, 자존심도 세고, 일반 사람들보단 능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이나 무지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걸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나 같은 투자자한테는 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창업가의 나약함이 드러나고, 이러면 투자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나약한 창업가는 투자자들이 싫어한다. 안 그래도 힘든 스타트업 인생인데, 나약한 창업가는 절대로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실은 “잘 모르겠네요”는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용기 있고, 자신 있고, 강한 사람이 오히려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모르는 거에 대해서는 “I don’t know”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창업가들과 미팅할 때 내가 물어보는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을 가진 분들을 오히려 경계한다. 이런 창업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지를 인정하면 불이익을 당할 거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이런 성향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더욱더 두드러진다고 한다. 실은 나도 과거에는 모르는걸 아는 척 한 적이 상당히 많고, 요새도 가끔 그러기도 하지만, 남이 아무리 “저 인간은 투자한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더라도, 모르면 무조건 모른다고 인정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실은, 모르는 걸 안다고 거짓말하면 그때는 남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일시적으로 속으면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말 좋지 않은 결과가 만들어 진다.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면, 내가 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스스로 제한하고, 언젠가는 상대방이 내가 거짓말 한 걸 알게 되기 때문에 신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 개 마일로가 많이 아파서 얼마 전에 큰 수술을 했다. 강남에서 가장 크고, 비싸고, 잘 한다고 소문난 동물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수술 후 수의사로부터 수술경과와 마일로 몸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들을 수 있게 상담을 했다. 그런데 뭔가 잘 모르고, 내가 물어보는 대답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계속 주지 못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에 우리는 동물병원을 바꿨는데, 어떤 조사에 의하면 의사들이야 말로 자기 자신과 환자들에게 무지를 고백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의사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자신의 능력과 권위, 그리고 전문성에 위협이 된다고 느낀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만약에 이 수의사가 나한테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했다면, 나는 오히려 계속 같은 동물병원에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영어에서 말하기 가장 어려운 세 단어는 “I love you”가 아니다. 실은 그 세 단어는 “I don’t know”라고 한다. 그만큼 자신의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건 힘들고, 어떤 사람들한테는 고층 건물에서 뛰어 내릴 때 보다 더 큰 공포심을 갖게 하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가장 중요한 건, 배워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그 인정의 시작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다.

프라이머 16기 데모데이

원래 오늘은 내가 벤처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악셀러레이터 프라이머 16기 데모데이였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행사가 취소됐다. 아주 아쉽지만, 안전이 최고라서 이런 힘든 결정을 하게 됐다. 과거에도 데모데이에 대해서 블로깅 한 적이 몇 번 있고, 모든 데모데이는 항상 새롭고, 항상 힘들고, 항상 설레지만, 이번 데모데이는 개인적으로 더욱더 기대가 되었던 게, 올 해 프라이머가 10살이 됐기 때문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한국 악셀러레이터 역사를 잘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창업과 투자가 시작된 지 8년 정도 밖에 안 됐다고 생각한다. 2012년도에 우리 투자사 비석세스 정현욱 대표님이랑 beLaunch라는 행사를 처음 시작했는데, 이 무렵부터 한국에 제대로 된 체계적인 벤처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전에도 좋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있었지만, 뭔가 체계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제대로 만들려고 한 노력은 8년 전부터 시작됐던 거 같다.

이보다 전에, 아마도 악셀러레이터라는 개념조차 생소했을 때, 권도균 대표님은 프라이머라는 악셀러레이터를 만들었고, YC와 같은 미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긴 했지만, 나름 독자적인 한국형 버전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fine-tuning을 많이 하셨고, 나도 일부인 프라이머 파트너십은 아직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아무도 하지 않았던 악셀러레이터를 당시 척박한 환경에서 시작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또 대단한 점은, 10년째 본인이 계속 프라이머를 굉장히 active하게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VC가 펀드를 시작하긴 하지만, 10년 동안 같은 파트너가 같은 이름을 걸고, 계속 active하게 펀드를 운영하는 사례가 한국에는 별로 없는데, 이런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프라이머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10년을 프라이머라는 이름으로 계속 좋은 회사를 발굴하고, 투자하고, 이 회사들이 잘 될 수 있도록 다양한 면에서 도와주고 ‘가속화(accelerate)’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프라이머가 정도를 걸으면서 잘 운영됐기 때문이다. 실은 스트롱도 이제 8년 밖에 안 됐는데, 나도 프라이머랑 권도균 대표님한테 배울 점이 너무 많다는걸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16기에도 좋은 회사들이 너무 많다. 이 회사들을 선발하는 과정은 상당히 힘들었고, 선발한 후에도 나는 몇몇 회사에 대해서는 과연 우리가 정말 좋은 회사를 잘 선발했을까, 그리고 선발 과정에서 더 좋은 창업가를 놓치진 않았을까, 등의 걱정도 했지만, 16기 창업가들과 3개월 이상을 같이 일해보니, 쓸데없는 고민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한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팀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열심히 하고, 가장 인품이 훌륭하고, 가장 빨리 배우고, 가장 성공하기를 열망하는 창업가임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한테는 이게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데모데이가 취소된 게 더욱더 아쉽긴 하다.

참고로, 프라이머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우리 프라이머가 의미하는 건 DNA 합성과 복제가 되는 기초 유전자를 뜻한다. 즉, 10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기업가 정신의 합성과 복제가 되는 기반을 초기 창업팀과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Happy 10th Birthday Pri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