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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고객이 아니다

최근에 만난 회사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점들을 적으려 한다. 정부과제를 몇 번 수행하면서 매출도 좀 만들었고, 개발과제를 통해서 제품도 만든 회사들 이야기다. 나는 정부과제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은 없었는데, 이런 정부 프로젝트에 선발되고 과제를 수주한 걸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표이사들이 많다는 걸 새롭게 배웠다.

이분들은 어마어마한 경쟁을 이기고 정부과제 수행 업체로 선정된 게 마치 회사의 기술력, 제품의 상품성, 그리고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런데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초부터 정부만을 대상으로 B2G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시장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다. 정부과제를 선정하는 심사위원이나 위원회도 시장과 고객을 대표하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시장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분들일 확률이 더 높다. 나도 자세히 조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정부과제를 통해서 개발된 산출물 중 시장에서 제대로 먹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과연 존재하는지 생각해보면 없는 거 같다.

정부과제가 좋냐 안 좋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정부과제는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과제 수행 업체로 선정된 그 사실 자체로 우리 회사나 기술에 대해서 자만감을 느끼거나 시장에서의 성공을 확신하는 건 좋지 않다.

정부과제가 약보다는 독이 될 수 있다는 내 의견은 전에 한번 포스팅한 적이 있다.

불쌍하지만 부러운

우리가 2번째 펀드에서 투자를 시작한 지가 이제 약 1년 3개월 정도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45개 정도의 회사에 투자했다. 며칠 전에 나도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프라이머 10기 대상 첫 번째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자료를 조금 정리하면서 계산을 해보니,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절반 정도가 프라이머 출신 한국과 미국의 스타트업이었다. 프라이머와 초기에 같이 투자한 회사들도 있지만, 주로 후속 투자를 스트롱이 많이 했는데, 프라이머 회사들과 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이 중 몇 회사들과는 정기적으로 교류함으로써 발생한 결과인 거 같다. 물론, 대부분 회사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다.

나도 이제는 실제 스타트업 운영에서 손을 뗀 지가 7년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회사와 만나면서 시장, 방향, 운영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시장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내 의견을 자신 있게 표현하지만, ‘운영’에 대해서는 나는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스타트업의 dynamic 한 운영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대표이사님이 훨씬 더 잘 알기 때문이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고객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대표보다 나 같은 뜨내기가 이 비즈니스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투자하는 초기 기업들과 같이 일하는 게 즐겁고 재미있다. 새로운 분야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스타트업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프라이머 10기 약 20개 스타트업이 참석한 워크숍에서 창업가들을 보고 ‘불쌍하다’와 ‘부럽다’라는 두 가지 감정이 교체하는 걸 느꼈다. 프라이머 투자와 acceleration을 통해서 이제 막 힘차게 시작하는 분들을 보고 불쌍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이제 그 힘든 전쟁터에 입문해서 고생할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창업자분들이 단단히 각오하고 시작하겠지만, 내가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느꼈던 건 회사를 시작해서 운영하면서 느끼는 스트레스와 힘듦은 내 예상보다 5배~10배 정도였다. 이분들의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엄청 힘들겠지만, 나는 잘 하기 때문에 우리 회사는 잘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할 것이지만, 이 회사 중 90%는 5년 후에는 어쩌면 죽는 게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에 모두 단단히 육체적/정신적으로 중무장을 해야 한다. 하여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분들이 너무 부러웠다. 일단 나 같은 투자자는 할 수 없는 진정한 변화를 창업가들은 만들 수 있다. 대기업에서 일하거나, 남의 밑에서 일을 하면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내 사업을 하면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도록 100% 모든 노력과 자원을 투자할 수 있다. 내가 뭔가를 직접 만들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고 싶어도 나는 직접 하지 못하지만, 창업가들은 할 수 있다. 이게 너무 부러웠다.

또 한가지는, 성공은 힘들고 확률적으로 낮지만, 성공하면 이분들은 돈을 엄청 벌 수 있다. 나 같은 투자자들은 좋은 회사에 투자해도 엄청난 대박이 아니면 – 그리고 한국은 exit 시장이 미국만큼 크진 않기 때문에 이런 초대박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 큰돈을 벌수가 없다. 나도 투자를 시작할 때는 좋은 회사에 많이 투자해서 개인적으로도 돈을 좀 벌어보자는 기대를 했지만, 현실적으로 벤처산업에서 정말 큰돈을 벌 수 있는 분들은 창업팀밖에 없다. 연초에 올린 “부자의 대열에 끼기“라는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조 원대의 재산을 축적해서 정말로 부자의 대열에 끼고 싶다면 기술 창업을 통한 성공이 가장 빠르고 유일한 방법이다. 참고로, 삼성전자 사장을 10년 동안 하면서 150억 연봉을 그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다 저축을 해도 1,500억 원밖에 못 모은다. 1조 원의 7분의 1 이다.

어쨌든 프라이머 10기 모든 회사들에 행운을 빌고, 앞으로 3개월 동안 나도 많이 배우길 기대한다.

새로운 제2외국어

programming-languages얼마 전에 초등학교 아이의 아빠인 내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아이한테 본격적인 제2외국어 교육을 하려고 하는데 메인으로 배워야 하는 게 영어인가 중국어인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중국은 잘 모르지만, 미국은 좀 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지식이나 한정된 경험에 의하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무조건 영어를 메인으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지금부터 코딩을 가르치라고 했다.

전 세계 12억 명이 중국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인구수가 영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코딩’이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래밍이나 코딩이라고 하면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이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나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코딩을 단순하게 보면 사람과 기계를 연결해 주는 일종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기계들이 더욱더 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할 것이다. 과거에는 고도의 판단력이 필요하지 않고 반복적인 일들을 수행하면서 로봇과 같은 기계들이 사람을 대체했지만, 앞으로는 고도의 사고력과 결정력이 필요한 업무 또한 기계들이 대체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공지능, 로보틱스, 자율주행 자동차 등…. 이 모든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으며, 페이스북,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세계 최고의 기술 회사들이 수조 원의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기계들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될수록 우리는 이 기계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기계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코딩이다.

미국 못지않게 한국도 이러한 추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 거 같다. 최근에 검토한 많은 회사가 이 분야에 있는데, 언어교육과 마찬가지로 코딩도 어릴 때 시작하는 게 좋으므로 어린이들을 위한 코딩 교육 게임이나 학원 비즈니스를 생각하고 있는 창업가들이 많은 거 같다. 내 또래 분 중 80년 후반 – 90년 후반에 유명했던 비트 컴퓨터 학원과 같은 물리적인 코딩 학원에 다니면서 실력을 키운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코딩’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프로그래밍’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도 C++를 배우러 컴퓨터 학원에 몇 달 다녔던 기억이 나는데, 자리마다 컴퓨터가 한 대씩 있었고 교실 앞에서 선생님이 수업하고 과제를 시켰던 전형적인 강의실 포맷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5.25″ 나 3.5″ 플로피 디스크에 과제를 담아서 제출했었던 기억도 난다.

이후 물리적인 학원은 없어지고 Codecademy나 Lynda와 같은 인터넷 강의의 시대가 왔다. 더는 칙칙한 학원에 직접 가지 않아도 집이나 사무실 또는 내가 편한 그 어느 곳에서 내 페이스대로 코딩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인터넷 동영상 강의는 아직도 인기가 많다. 하지만, 인터넷 강의를 통해 100% 자율적으로 학습하다 보니까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진도와 실력의 향상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새로 등장한 포맷이 물리적 학원의 강제성과 인터넷 동영상 강의의 자율성을 잘 혼합한 하이브리드 코딩 학원이다. 한국도 이미 이런 비즈니스들이 창업되어서 잘 운영되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몇 군데 있다.

애가 있는 친구들한테 나는 항상 제2외국어로써 코딩 교육을 권장한다. 국어·영어도 중요하고, 그 이후의 토익이나 토플 시험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가장 많은 세계인이 사용할 언어는 코딩이 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내 주변에 엄마와 아빠가 모두 개발자인 많은 가족조차 애들한테는 코딩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서 개발자의 삶은 배고프고 대우를 못 받는다고 하면서, 아이들한테는 변호사나 의사의 길을 권장하고 있다. 이분들이 코딩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사람과 기계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미지 출처 = http://www.serendipity35.net/index.php?/archives/3278-Coding-as-a-second-Language.html>

당신이 누굴 아는지 난 관심 없다

6a00d834516b3c69e2015437f86d20970c-500wi나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싫다. 1시간짜리 미팅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1시간 내내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 이야기는 듣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랑 만나면 굉장히 피곤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저 누구 알아요”로 모든 대화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다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은 주변에 있을 텐데, 이상하게 나는 이런 사람들을 최근에 많이 만난 거 같다. 나도 꽤 바쁜 사람이라서 나랑 미팅하려면 그래도 며칠 전에는 약속을 잡아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나랑 약속을 잡은 분을 얼마 전에 우리 사무실에서 한 시간 가량 만났다. 그런데 나한테 스스로와 현재 하는 비즈니스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설명을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이 분은 자기가 아는 사람들 이름만 줄줄이 읊다가 미팅을 끝냈다. 뭐, 들어보면 굉장히 유명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아는것 같고, 그중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 분들 이름도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이 분이 아는 사람들보다는 이 분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고, 왜 이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한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누가 옛날 직장 동료였고, 지금 이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 대학교 동아리 선배고, 같은 아파트에 상장한 인터넷 기업의 부사장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미팅의 절반을 이런 ‘이름 들먹이기(name dropping)’ 하는데 허비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는데, 역시나 땅도 좁고 바닥이 좁은 한국이 더 심한 거 같다. 특히 내가 누구냐 보다는 내가 누굴 아는 게 더 중요한 한국의 ‘보여주기’ 문화는 이런 현상을 심화시키는 거 같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는데 누군가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요새 너무 많다. 그리고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을 잘 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취급해주는 사회 분위기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정작 본인은 내세울 게 없고, 내실 없고 껍데기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이렇다는 걸 자주 경험한다.

그런데 어차피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업계 분들이라서 이들이 안다고 주장하는 많은 분을 나도 안다. “나는 그분을 아는데, 그분은 날 모르죠”가 아니라 그래도 서로 알고 지내는 그런 관계이다. 이 중 정말 친한 분들도 있고, 행사 같은 곳에서 정기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내가 누굴 안다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괜히 말했다가 그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안 그래도 바쁜 사람들한테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누굴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이 간다. 정말로 아는 것인지, 아니면 명함 한 번 교환한 것인지.

나는 당신한테 관심이 있지, 당신이 누굴 알던 관심 없습니다. 당신이 아는 남들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자랑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세요.

<이미지 출처 = https://asheathersworldturns.wordpress.com/2015/03/13/name-dropper/>

종이 위의 잉크

%ea%b0%84%ec%9d%b82012년도에 Strong Seed Fund 1호로 공식적인 벤처투자를 시작한 우리는 지금까지 약 4년 동안 60개가 넘는 한국과 미국의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정확한 계산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중 약 40개 정도의 회사에 스트롱은 최초로 투자했다. 지금도 계속 남들보다 먼저 회사를 발굴해서 가장 먼저 투자하는 first investor 전략을 고집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공동투자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과거에도 좋은 회사들이 많았고, 지금도 많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요새 초기 스타트업들은 대부분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동투자를 하면 스트롱 보다는 다른 투자사들이 라운드를 lead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우리는 계약서를 따로 사용하지 않고 리드 투자사의 계약서를 그대로 사용한다. 즉, 남의 투자계약서에 우리 이름과 투자 금액만 추가해서 묻어간다. 이렇게 하는 게 우리도 편하지만, 투자를 받는 회사들에도 계약서 검토 시간과 비용면에서 훨씬 더 수월하다. 특히 우리가 투자하는 단계에서는 많은 대표이사가 법률용어와 익숙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하거나, 아니면 법률검토에 과도한 비용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능하면 우리는 두 회사 간 법적 서명을 해야 하는 계약서의 프레임은 유지하되, 세부 항목들은 스탠다드하게 유지한다.

공동투자를 하면 다른 투자사의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기회가 있는데, 가끔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계약서를 빡빡하게 만드는 투자사들도 있다. 어떤 항목들은 굳이 계약서에 넣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만드는데, 물어보면 두 회사가 하는 계약이기 때문에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무조건 다 포함해야 한다고 한다. 이분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이 벤처 업계는 다른 산업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같이 초기회사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비즈니스나 시장보다는 대표이사와 창업팀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표이사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믿을 수 있는지, 나랑 교감이 가능하며 비즈니스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이분들을 100% 믿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투자를 한다(물론, 이런 내 생각과 감이 항상 맞지는 않는다. 이상한 인간들한테 투자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단계까지 오면 계약서는 투자하기 전에 자동으로 작성하는 기계적인 문서이지, 상대방을 불신하기 때문에 각 항목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작성해야 하는 문서는 아니다. 이때부터는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같이 가는 모드로 전환되어야 하고, 우리가 투자한 팀이 잘해서 서로 이길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위에서 말한, 계약서가 존재하는 이유인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회사가 잘 안돼서 망하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냥 서로 손해를 보는 거다. 만약에 대표이사가 딴 맘을 먹고 계약을 위반하면 참으로 짜증 나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법정으로 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투자한 금액보다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도 서로 손해를 보고 끝날 확률이 높다. 즉, 스탠다드한 계약서이든 엄청 깐깐한 계약서이든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투자자나 피투자 기업이나 둘 다 손해를 보고 끝나는 것이다.

한국 투자자와 공동투자를 하면 50장에 육박하는 계약서에 간인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최근에 만난 투자사 대표이사는 도장 찍느라고 손목을 다쳤다고 했는데, 공동투자사들이 2개만 넘어도 50장짜리 계약서에는 도장을 100번 이상 찍어야 한다. 거기에다 요새는 무슨 펀칭까지 하는 걸 봤다. 이렇게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원래 그렇게 하기 때문에 한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간인을 하지 않으면 혹시나 중간에 있는 페이지를 누가 몰래 바꿔서 계약 내용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경우 스트롱이 단독으로 투자하면 전자서명을 하고, 이렇게 하면 서명해야 하는 페이지는 단 한 장이다. 투자자나 피투자사는 단 한 번의 클릭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전자서명이 아니라 스캔을 해서 PDF를 교환할 때도 우리는 서명을 해야 하는 페이지만 스캔해서 PDF로 만든 후에 나머지 계약서에 PDF로 붙여서 통합해버린다. 계약서가 아무리 길어도 실제로 서명해야 하는 페이지는 단 한 장인데, 모든 페이지에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는 건 정말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페이지마다 간인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계약이라는 건 당사자들이 그 계약을 서로 인정하면 법적 효력을 갖는 걸로 알고 있고, 투자자와 피투자 기업 간 깊은 신뢰와 믿음이 있다면 이건 충분히 가능하다. 나중에 서로 딴소리를 한다면 그 투자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랑 존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계약서는 결국 종이 위의 잉크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자체가 비즈니스라는.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정말 멋진 말이고, 모든 계약 관계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우리가 일하는 멋진 스타트업 세계에서는.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sallimnea/130137902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