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분위기

우린 매주 화요일 오전에 전체 주간 미팅을 하고, 이때 현재 투자 검토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결정하는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 미팅도 같이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알게 된 회사들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투자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모든 사업이 다르고, 비슷한 사업이라도 창업자가 다르기 때문에, 결정의 결과는 항상 다르다.

내가 얼마 전에 어떤 회사에 대해서, “비즈니스모델은 괜찮은 것 같은데, 그 창업가의 분위기가 좀 별로였다.”라는 굉장히 애매모호하고,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발언을 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이 말에 동의하는 분이 몇 명 있었다. 어쨌든, 꼬집어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었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던 그런 미팅이었다. 결국 우린 이 회사를 더 이상 검토하지 않았는데, 이 전에도 우린 분위기가 이상하거나, 이보다 더 애매모호하게 “느낌이 쎄해서” 그냥 겉으로 보면 괜찮은 사업 같은데 한 번의 미팅 이후에 더 이상 검토를 하지 않은 곳들이 꽤 있었다.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이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어떤 사람은 이게 인상에서 어느 정도 보이고, 어떤 사람은 말투에서 이분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고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대략 느껴진다. 그리고 조금 더 미팅하면서 더 다양한 말을 섞어보면, 옷차림, 인상, 눈빛, 몸짓, 목소리, 단어 하나하나 등을 통해서 이 사람의 에너지와 분위기가 느껴진다. 우린 온갖 종류의 창업가들을 매일 다양하게 많이 만나는데, 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이분들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정확도가 향상되진 않는다. 이렇게 되면 너무 좋겠지만, 사람은 정말 복잡한 생명체라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판단이 틀리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의 분위기가 좋은지 안 좋은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창업가들과 10분 정도만 이야기해 봐도 이분들이 정말로 본인이 하는 사업에 확신이 있는지, 모든 사람들이 반대해도 계속 이 사업을 할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정말로 투자를 받고 싶은 의지가 있는지 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위에서 내가 말 한 그런 다양한 외부의 시그널이 이 창업가의 내면의 의지를 꽤 정확하게 반영하는데, 이런 걸 통틀어서 종합한 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분위기이다. 내가 전에 우린 창업가들의 거창한 것보단, 매우 작은 것들을 관찰한다고 했는데, 이 작은 것들도 분위기랑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도 투자자들을 만날 땐, 평소보다 이 내면의 에너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가 창업가들과 10분만 이야기해도, 분위기를 금방 느낄 수 있듯이, 우리 같은 펀드에 출자하는 LP들도 나랑 10분만 이야기해 보면, 내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는 바이브를 형성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파악 가능할 것이고, 실은 거기서 우리에게 돈을 줄지 안 줄지 바로 결정이 나는 것이다. 참고로 에너지 레벨이 높다는 게, 동작이 과격하고 목소리가 큰 게 아니다. 조용하고 차분해도 긍정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래서 나는 모든 중요한 일을 할 때, 내가 기분이 좋아야 하고, 내 내면의 분위기가 긍정적이어야 하고, 내 에너지 레벨이 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루틴을 반복하는 것이다. 잘 자고, 잘 운동하고, 잘 먹어야 한다.

자신감에 대해서 – part 1

요새 나는 한국보단 해외 투자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서 이들에게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에게 돈 받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고, 특히나 요새 같이 이자율이 높고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불경기엔 펀딩이 더욱더 힘들어 진다.(VC들의 펀딩이 이렇게 어렵다 보니, 우리 같은 VC에게 투자받아야 하는 창업가들의 펀딩은 더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몇 년 전과 비교해 보면 좋아진 점도 있는데, 그건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한국의 벤처 시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전에는 잠재 LP들에게 왜 스트롱 같이 한국에 투자하는 VC에 출자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데만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이 설명의 기간이 어떤 경우엔 수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젠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한국이라는 시장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은 없을 정도로 한국의 벤처생태계가 그동안 많은 발전을 했다.

내가 잠재 LP들에게 최근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이렇게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안에 한국의 스타트업 시장이 좋아졌냐인데,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은 아주 간단하게 그냥 한국 창업가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럼, 왜 한국 창업가들의 수준이 이렇게 좋아졌을까?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 생각, 그리고 각자의 경험이 있지만, 내가 딱 한 가지만 강조하자면, 그건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창업가의 자신감은 정말 중요하다. 내가 하는 사업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 내가 만들고 있는 제품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안 되는 사업도 되게 하고, 못 받던 펀딩도 받게 한다. 평소에 잘 안되던 것들이 자신감과 이로 인한 파급 효과로 인해서 하나씩 만들어지는 걸 경험하는 순간, 잠재의식 속에서는 더 큰 자신감이 무의식적으로 생기고, 이건 결국엔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창업가들이 이렇게 자신감으로 무장되면, 기업가치 300억 원의 회사를 만들겠다던 목표가 1,000억 원이 된다. 그리고 이 목표가 계속 커져서 결국엔 10조 원짜리 데카콘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게 창업가의 자신감이다.

비공식적인 기록이지만, 한국에는 유니콘 기업이 22개나 있다. 작은 나라치곤 엄청나게 많은 유니콘이다. 이런 사실도 한국 창업가들에겐 큰 자신감을 준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기업가치가 1조 원 이상인 비상장 회사가 이렇게 많다는 점, 이 중 몇 개의 기업은 본인이 개인적으로 아는 창업가들이 만들었는데, 그들도 그냥 나랑 비슷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 그래서 어쩌면,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수천억 원의 펀딩을 받고 유니콘 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이 창업가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수 있다.

쿠팡의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은 한국 창업가들의 마음에 큰불을 질렀다. 한국 시장만을 상대로 이커머스 사업을 하는 회사가 미국에서 IPO를 했고, 지금은 좀 내려갔지만, 한때는 기업가치가 100조 원에 육박했다는 사실은 한국 창업가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준 큰 사건이었다. 그동안 항상 한국 시장이 작고,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상장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만 들었고, 한국인들도 항상 곧 망할 거라고 확신했던 쿠팡이라는 회사를, 김범석이라는 창업가가 이런 비관론자들에게 마치 fuck you를 날리듯 보기 좋게 성공시켰다.

배달의민족 엑싯도 한국 창업가들에게 큰 자신감을 줬다. 국내에서 학교를 다녔고, 국내에서만 일 한 경험이 있는 순수 토종 창업가 김봉진 대표가 만든 한국의 스타트업이 수조 원의 기업가치에 외국 회사에 인수됐을 때, 많은 한국의 창업가들이 “아, 유니콘은 외국에서 공부한 엄친아들만 만들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나도 더 열심히 하면 배달의민족보다 훨씬 더 큰 회사를 만들 수도 있겠다.”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할 수 있다는 아주 큰 자신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창업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이들에게 투자했던 VC들에도 해당한다. 스타트업에 투자해서 큰돈을 버는 건 외국 VC에만 해당하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국내 VC들도 투자한 회사들이 유니콘이 되고, 이들이 엑싯했을 때 엄청나게 큰돈을 벌면서, 앞으로 더욱더 많은 유니콘 회사를 발굴해서 투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 자신감으로 이들은 더 큰 펀드를 만들고, 더 큰 펀드로 더 많은 좋은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들이 처음에는 작게 생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생기고, 이게 계속 쌓이면서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커지는데, 이럴 때 대단한 일들이 벌어진다.

지금이 바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앞으로 한국의 스타트업 시장은 더욱더 좋아질 거라고 확신한다.

Part 2에서도 자신감 관련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다.

노력의 부족으로 실패하지 말자

역대 최악의 성적이 예상됐지만, 반대로 한국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파리 올림픽이 지난주에 잘 마무리됐다. 나는 대부분의 올림픽 종목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국가 대표들이 열심히 경쟁하는 경기라서 그런지 매일 저녁 한국이 참여하는 대부분의 종목을 와이프랑 정말 재미있게 봤던 즐거운 2주였다. 한국은 금 13개, 총 32개의 메달을 따면서 8위로 끝났는데 너무 잘했고, 모두 너무 자랑스럽다. 안세영 선수의 발언과 더불어 그동안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여러 협회에 대한 불미스러운 일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런 과정이 체육협회와 선수들이 모두 다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다양한 이변이 많았고, 메달이 당연시됐던 선수들이 형편없는 성적으로 예선 탈락했고, 전혀 기대되지 않았던 선수들이 선전해서 메달을 따기도 했다. 우리나라 태권도 김유진 선수가 그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세계 랭킹 12위가 세계랭킹 1위와 2위를 모두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한 건, 태권도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변 중 대이변이었다.

이 선수 외에도 랭킹이 한참 아래였거나, 거의 무명의 선수들이 메달을 획득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도 몇 개 있었는데, 이 중 몇 명의 경기 후 인터뷰를 보면, 다들 하는 말이 거의 비슷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선수들의 외부 랭킹만 보고 승패를 예측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했는지 알기 때문에,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땀과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남들은 이변이라고 하는 결과가 본인에겐 전혀 놀랍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선수는 이런 말을 했는데 이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내 연습량을 내가 잘 알고 있고, 훈련의 양에 있어서는 그 어떤 선수도 나를 능가할 수 없다는 걸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메달이 전혀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당연히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질 수도 있다. 하지만, 패배의 원인이 노력의 부족이면 절대로 안 된다. 노력의 부족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진다면, 아쉽겠지만 절대로 후회는 안 한다.”

실은 내가 우리 창업가분들과 자주 하는 말과 너무 비슷해서 나에겐 더욱더 인상 깊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우린 모두가 항상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지만, 또 한 편으론 내가 봤을 때 최선을 다하지 않는 분들도 종종 본다. 물론, 이건 굉장히 주관적인 입장이고 최선의 개념은 모두에게 다르다. 어쨌든, 정말로 사업과 본인의 미션에 헌신(=commitment)을 보이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업도 올림픽 경기와 같이, 아무리 열심히 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잘 안될 수도 있다. 아니, 성공의 확률이 낮기 때문에 잘 안되는 게 오히려 어쩌면 정상적이다. 그래서 사업은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한 사업가들이 욕을 먹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실패의 원인이 노력의 부족이라면,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들이 더는 버티기 힘들어서 폐업을 결정하면, 이런 대화를 많이 한다. “최선을 다했나요? 대표님만큼 치열하고 열심히 노력한 사업가가 주위에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나요? 그랬다면 잘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이 노력의 부족이 아니었다면 편안하게 사업 접고 좀 쉬세요.”

실패의 원인이 노력의 부족이 되지 않게 모두 다 치열하게 헌신하는 하루, 일주, 그리고 일 년이 되길.

“인공” 지능

우리는 요새도 한 달에 한두 개의 신규 투자를 꾸준히 하고 있다. 스트롱은 특별히 한 분야에만 관심을 두고 투자하는 전략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우린 제품이나 시장에 투자하기보단, 창업가들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그냥 뭘 하든 상관없이 좋은 창업가라면, 가급적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다. 이들이 만드는 제품의 시장 규모는 수백조 원인 경우도 있고, 수백억 원인 경우도 있다. 또한, 매우 흔한 분야인 경우도 있고, 굉장히 독특하고 재미있는 분야인 경우도 있다. 우린 이런 건 특별히 신경 안 쓰려고 노력하고,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이 사람이 뭘 하든 아주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운이 있는지를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투자를 결정한다.

우리 같은 전략으로 투자하는 VC들도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특정 분야에만 투자하는 전문적인 투자자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그때 유행에 따라서 투자할 분야를 정하고, 이를 위한 펀드를 만들어서 투자한다. 요새 거품론이 계속 대두되고 있지만, AI는 가장 핫한 분야이고 이건 그동안 반짝하고 사라졌던 단순 유행은 아닌 게 확실한 것 같다. 물론, 너무 과열되거나, 반대로 너무 식을 순 있겠지만.

이런 이유로 AI 사업을 시작하는 창업가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고, 최근에 우리가 본 회사 자료에서 AI라는 말이 안 쓰이는 자료는 거의 못 본 것 같고, 미팅에서 AI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는 창업가들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이런 트렌드에 부응하기 위해 AI에만 투자하는 펀드가 만들어지고 있고, 몇몇 VC는 AI가 아닌 분야에는 거의 투자를 안 하는 곳들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도 AI 관련 회사들을 엄청 많이 만나고 있다. 전에 내가 ‘AI 창업가 현황’이라는 글에서 몇 자 적었듯이, 대부분 이 글의 세 가지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회사들인데 아무래도 한국이 항상 가장 잘하는 분야가 애플리케이션 레이어라서 그런지, 이 부분의 창업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우린 조금 더 이 시장을 잘 이해하고 싶은 생각에 관련 회사들을 많이 만나고 공부도 하고 있지만, 실제로 AI 분야의 회사에는 많이 투자하진 않았다.

내 생각도 계속 바뀌고 있고, 실은 스트롱 내부에서도 AI에 대한 생각과 의견이 아주 다른데, 개인적으론 AI가 사람을 완벽하게 대체해서 사람을 쓸모없게 만들 확률은 0%라는 쪽으로 점점 더 수렴하고 있다. AI는 말 그대로 ‘인공’지능이고, ‘인공’이라는 딱지를 절대로 떼지 못할 것 같다. 이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해 보면, 어쩌면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의 97%는 따라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의 위대한 창의성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남은 마지막 3% 영역에 속하고, 이 3%가 인간지능을 인공지능과 99.99% 다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마지막 3%는 기계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내가 하드코어 인공지능 과학자들과 이런 내 의견을 공유한 적이 있었는데, 이 중 몇 명은 동의했지만, 대부분 내가 아직 AI 기술을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하면서 정말로 앞으로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We will see about that.

우리가 AI에 투자하는 이유는 기계가 별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반복적인 일을 인간 대신 해주면, 인간이 더욱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인데, 인공지능이 많은 반복적인 일을 처리해 주면, 이 한정된 24시간을 인간이 극대화해서 더욱더 창의적이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요새 미국에서 많은 VC들이 관심을 두는 수명 연장 분야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인간지능은 더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사업의 기본은 영어

한국에서도 제대로 작동하고 돈을 버는 제품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시장에 바로 진출해서 4년 만에 매출을 1,000억 원 이상 하겠다는 회사의 자료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희망적이기보단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업의 방향성이나 팀이 괜찮으면, 이런 팀들은 일단 만나본 후에 내부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얼마 전에 이런 창업팀의 자료를 보다가 세 번째 페이지에서 그냥 PDF를 닫고 만나보지도 않고 pass 하기로 결정했다. 북미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팀이었고, 자료 자체도 모두 영문으로 만들었는데, 자료의 영어 수준이 형편없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나의 태도를 이해 못 하고, 그 정도 문법이나 철자는 틀릴 수도 있는데,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지 구박하기도 한다. 자료에서 영어 좀 틀렸다고 사업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오바한다고 뭐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솔직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남의 영문 자료에서 이런 실수를 잘 발견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건 그냥 넘어가도 창업팀과 그 사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에 굳이 피치 미팅의 흐름을 중간에 끊으면서 지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영어에서 문법이나 철자의 실수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굳이 흐름을 끊고 지적질을 한다. 왜냐하면, 사업을 이해하는 데 지장은 없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이 팀의 자세와 태도에는 이런 사소한 실수가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사업을 하고 싶다면, 가장 기본 중 기본은 영어라는 그 언어 자체이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사용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면, 그 누가 보더라도 이 제품은 비영어권 창업가들이 만들었다는 티가 전혀 나면 안 된다. 그런데 내가 만난 미국 시장을 공략하고 싶어 하는 많은 한인 창업가들이 만든 회사의 자료나 제품을 보면, 엉터리 영어가 너무 많다. 이 자료를 미국 VC들이 봤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 이 창업가들은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봤을까. 엉성한 영어로 만들어진 이 제품에 미국인들이 과연 돈을 낼지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봤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도 영어가 이 수준이면 팀의 역량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다면 이 팀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실은, 요샌 AI가 발달해서 번역의 수준은 좋아졌고, 특히나 문법적으로 틀린 영어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영어라는 게 단순히 단어만을 번역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이 단어들이 어떻게 문장을 만들고, 이 문장들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 잘 파악해야지만 진정한 영어가 완성되는데, 아직 AI는 이걸 완벽하게 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기계로 번역한 문장을 보면 단어들은 잘 번역됐지만, 미국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라고 하기엔 굉장히 어색한 게 많다.

이 현상을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자. 유럽인들이 한국 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이 응용 제품을 받아주세요.”라는 한국어를 보면 누구나 다 이건 이상한 번역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각각의 단어는 잘 번역됐지만, 한국에서 실제로 이런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 앱을 설치해 주세요”가 훨씬 더 컨텍스트에 맞는 우리말이다. 전에 한 회사의 한글 자료를 봤는데 어떤 현상이 바이럴하게 퍼진다는 문장을 단어 그대로 번역해서 “바이러스같이 퍼진다”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물론, 의미상으론 번역이 틀린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그냥 ‘바이럴’이라는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걸 모르고 번역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이 자료는 한국인이 안 만들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싶다면, 일단 영어부터 제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