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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팍스

우리는 2013년도에 한국 최초의 암호화폐거래소 코빗에 첫 투자를 했다. 스트롱과 비트코인/암호화폐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한국에서 최초로 비트코인 거래소에 투자한 VC”인데, 우리가 코빗에 투자할 때는 약간 이상하고 정신 나간 투자자 취급을 받았지만, 이후 시장이 생기고, 미친 듯이 과열되고, 그리고 4년 뒤에 넥슨이 코빗을 인수하면서, 이 분야를 잘 아는 VC로 인식이 바뀐 거 같다. 우린 비트코인이 잘되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코빗 팀이 좋아서 투자했고, 이후에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타이밍도 당연히 좋았다.

내가 버릇처럼 말하지만, 암호화폐를 나한테 소개해줬고, 이 분야에 대한 내 시각을 넓혀준 코빗에 나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코빗에 투자하면서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 계속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고, 그동안 이상한 ICO들이 너무 많이 생기면서 시장이 과열되기도 해서, 관심의 수준은 조금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허상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 중 하나가 제대로 된 거래소라고 생각한다. 이 시장의 게이트웨이이자 문고리 역할을 하는 게 거래소이기 때문에, 최신 소식을 접하려면 거래소와 항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코빗을 완전히 엑싯한 후에, 다른 거래소에 투자하고 싶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거래소야말로 이 시장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모이는 교차로이며, 스트롱도 계속 블록체인/암호화폐 쪽에 투자하려면, 거래소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에는 아직도 200개가 넘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중 우리랑 철학과 결이 가장 잘 맞는 팀에 투자하고 싶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고팍스를 운영하는 스트리미가 가장 맘에 들었다. 실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니라, 투자하고 싶었던 유일한 거래소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이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고, 거래소에 투자를 해야겠다면, 다른 곳은 고려할 필요도 없고 고팍스에 투자하자는 믿음은 존이랑 나랑 아주 일치했다.

얼마 전에 고팍스 투자 소식이 기사화됐다. 항상 강조하지만, 투자 받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거래소에 대한 믿음이 계속 하락하고 있는 이 시점에, 국내외의 좋은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Handshake와 도메인 네임

웹사이트 도메인 네임을 구매해본 경험이 있다면, DNS(Domain Name System)라는 단어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만약에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 블로그에 접속하기 위해서 브라우저에서 thestartupbible.com을 입력했을 텐데, 브라우저는 영문으로 된 thestartupbible.com을 DNS라는 컴퓨터 네트워크로 보내고, DNS는 이 웹사이트 이름을 숫자로 된 IP 주소로 바꾼다. 이 숫자가 마치 주소와 전화번호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 IP 주소를 기반으로 복잡한 인터넷 네트워크에 있는 thestartupbible.com 서버를 브라우저가 찾는 것이다. 실은 이 IP 주소는 아무도 안 외우고, 대부분 관심이 없다. 그냥 브라우저 하나 열어서 가고 싶은 웹사이트 이름을 치면, 그 이후에 브라우저 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터넷의 주소와 이름을 정하는 이 중앙통제된 방법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정부가 인터넷을 통제하고 검열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한 단체 또는 한 회사만 통제하면 우리 모두의 free internet이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DNS에 대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단체는 LA에 있는 ICANN(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이다. 이 단체가 하는 일은 DNS 서버 네트워크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DNS 루트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독하고, .com, .org, .net, 그리고 한국의 경우 .kr과 같은 국가 코드를 할당하는 것이다. 나도 전에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ICANN과 같은 단일 기관이 DNS 루트를 감독하고 도메인 이름을 할당하는 막강한 권력을 갖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오래전부터 내왔다. 예를 들면, 미국 정부가 ICANN에 압박을 가해서 DNS에서 특정 단체의 웹사이트 이름을 제거하거나, 특정 단체나 기업에 특정 이름을 할당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 중 대표적이다.

우리가 투자한 Handshake라는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전에 한번 설명한 적이 있다. 메인넷 출시가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그동안 여기 엔지니어들이 정말 열심히 개발을 해왔고, 이제 몇 달 있으면 메인넷 출시가 드디어 될 것 같다. Handshake Network 프로젝트는 그 어떤 단일 기관이나 개인이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도록, 인터넷 네이밍 시스템을 탈중앙화하려는 대체 인터넷 네이밍 시스템이다. 핸드쉐이크 소프트웨어는 비트코인을 아주 많이 수정/포킹한 코드인데, 제대로 출시가 된다면 그 누구도 소유하지 않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DNS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을까 싶다.

실은 Handshake Network는 미국보다는 중국과 같이 정부의 통제가 심한 곳에서 더 큰 빛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웹사이트 소유자 실명인증 제도를 실시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싫어하는 사람이나 기관이라면 그냥 DNS를 통제해서 그 웹사이트를 닫아버릴 수 있는데, 핸드쉐이크가 적용된다면 웹사이트를 익명으로 등록할 수 있고, 특정 서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서 그 누구도 내 웹사이트를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실은 이런 시도가 전에도 몇 번 있었고, Namecoin이라는 프로젝트가 그중 가장 유명한데, Handshake는 Namecoin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다양한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입찰이나 데이터 저장과 같은 중요한 프로세스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 계획이다.

블록체인, 암호화폐, 그리고 코인과 같은 용어를 요샌 들어보기 힘들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대중과 스타트업의 관심도 식었는데, 그래도 할 사람들은 계속하고 있고, Handshake와 같이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드디어 출시된다는 건 이 기술과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희소식이다.

상장 시장과 비상장 시장

우리는 비상장 초기 회사에 투자하는데, 이 분야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 딜들을 접하게 된다. 간혹, 상장 바로 전의 회사의 pre-IPO 주식 투자 기회도 시장에서 돌다가 우리한테까지 오는 경우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상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그동안 회사에 도움을 줬던 분들한테 보답?의 차원에서 실제 상장 예상되는 가격보다 조금 싸게 투자 기회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인 거 같다. 또는, 상장하기 전에 갑자기 회사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IPO 예상 가격보다 조금 싸게 투자를 받는 경우도 있다.

실은, 전에 이런 기회가 나한테 주어졌다면, 고민을 좀 했을 거 같다. 우리는 이런 큰 딜과는 거리가 너무 멀지만, 앞으로 우리도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펀드에 조금이라도 실적이 일찍 생기면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앞으로 6개월 후에 IPO 예정인 회사의 주식을 조금이라도 싸게 구매한다면, 대박은 아니겠지만, IPO 이후에는 가치가 몇 배 오를 것이고, 그리고 public 시장에서 팔면, 펀드의 LP들한테 조금이라도 수익을 만들어서 돈을 돌려줄 수 있고, 이렇게 하면 꽤 빠른 시간안에 펀드에 약간의 실적이 생긴다(투자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실적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샌 이게 기회인지 아닌지가 좀 헷갈린다. 최근에 IPO 한 유니콘들의 기업가치가 꼬꾸라지고, IPO 자체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걸 보면서, 업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IPO가 회사의 목적이 돼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자금 조달의 측면에서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며, 그 외에 뭔가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또한, 기존 투자자들이 exit하고 유동성을 확보하기에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 투자자들이 IPO를 하라고 압박하는 경우도 있다 – 많은 기업이 IPO를 회사의 큰 마일스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IPO 한 회사들의 실적을 보면, 명암이 명확하게 갈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비상장 시장의 투자자와 상장 시장의 투자자들이 회사의 가치를 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 매우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새삼 깨닫고 있다. 일단, 잘 알지만, 비상장 시장에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는 매출, 이익, unit economics와 같은 객관적인 지표에 기반하기보단, 창업가의 비전과 회사의 잠재 가능성에 투자자들이 부여하는 가격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여기에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와 같은 대형펀드가 등장하면서, 투자자 간에 경쟁이 더해지면, 이 기업가치는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 있다. 손실이 아무리 많이 발생해도, 탄탄한 매출과 이익이 나는 중견 회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밸류에이션을 자랑하는 비상장 회사들이 너무나도 많다. 유니콘들이 대표적이라고 생각된다. 뭐,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이 중 정말 미래에 세상을 바꿀 회사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비상장 시장의 기업가치 산정 방법이 맞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상장 시장의 경우, 투자자들이 기업을 보는 관점은 매우 다르다. 가능성도 당연히 보지만, 이들한테 당장 중요한 건, 아주 명확한 숫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더 빠른 시점에 조금 더 저렴한 밸류에이션에 투자하길 선호하는 우리 같은 VC와는 달리, 더 비싸게 투자해도 상관없으니, 본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매출과 이익이 모두 좋게 나올 때까지, 그리고 본인들이 원하는 가격이 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IPO 이후에 주식가격이 급등해도, 동요하지 않고 가격이 정상화되길 기다리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회사의 비즈니스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모든 회사에 비슷한 기준과 배수를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우버와 같은 택시라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온라인 기술을 적용한 온디맨드(=O2O) 회사의 외형적인 수치는 클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손실도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워낙 unit economics를 맞추기 어려우니까. 이와는 반대로 Zoom과 같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SaaS 비즈니스는 우버보단 외형이 작을 수밖에 없지만, 100% 소프트웨어 기반의 비즈니스라서 마진은 O2O 비즈니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VC는 Zoom보다는 우버의 기업가치를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 상장 시장의 투자자는 회사들이 높은 배수를 원한다면, 그만큼 높은 마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버와 같은 회사는 현재 상장 시장에서는 고전하고 있지만, 그나마 줌은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실은, 상장 시장의 투자자들이 이런 객관적이고, 감정에 덜 치우치는 기준으로 투자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너무 높은 단위의 투자금과 난무하는 유니콘 때문에 잠시 이런 사실을 잊어버린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긴 하다. 너무 많은 스타트업이 너무 많은 투자를 받았는데, 손실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외형적 성장에만 너무 집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고, 실은 우리 같은 VC도 여기에 큰 일조를 했기 때문에 나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긴 하다.

얼마 전에 이런 농담을 들었다. 실리콘밸리에 호프집이 새로 생겼는데, 개업하는 날 6,000명의 고객이 방문했다고 한다. 이 중 실제로 술은 아무도 사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엄청나게 성공적인 술집이라고 주위에서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젠 그래도 술을 좀 팔아야 하고, 술의 원가보다는 높은 가격으로 팔아야지만 성공적인 술집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시장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B2B SaaS 비즈니스 지표

전에 내가 B2B SaaS 비즈니스에 대해서 썼듯이, 나는 앞으로 한국에서도 좋은 B2B 스타트업이 생길 것이고, 이 회사들이 성공하면, 더욱더 많은 한국 창업가들이 B2B SaaS 스타트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린 요새 B2B 분야에 투자를 더 많이 하려고 하고, 나도 계속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얼마 전에 테크크런치에서 B2B SaaS 회사에 대한 좋은 내용을 읽었는데, 미국에서 상장한 B2B SaaS 회사 중 현재 가장 시가총액이 높은 회사들을 분석해서, B2B 회사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표를 파악해본 것이다. 솔직히 아직 우리나라와는 조금 요원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빨리 이 시장이 한국에서도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됐을 때 B2B SaaS 스타트업이 어떤 지표를 목표로 삼아야 할지에 대한 간접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B2B 대표들도 한번 읽어보면 좋을 거 같다.

테크크런치에서 사용한 상장회사 리스트는 확보할 수 없었지만, 전체 리스트에서 현재 기업가치(시가총액)가 2019년도 예상 반복 매출(run rate revenue)의 20배 이상 되는 회사들만 선별했고, 이 회사들의 다양한 숫자를 기반으로 몇 가지 의미 있는 지표를 계산한 후, 전체 평균값을 내봤다. 다음과 같다:

–2019년도 반복매출 대비 기업가치(시가총액): 26.3배
–2020년도 반복매출 대비 기업가치: 20.3배
–최근 12개월 FCF(Free Cash Flow: 잉여현금흐름) 마진율: 19%
–반복매출 연성장률: 48%
–효율(Efficiency): 66%
–매출총이익률: 73%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효율(Efficiency)은, 회사의 FCF(Free Cash Flow) 마진율에 성장률을 더한 값인데, 상장 이후에 효율이 40% 이상이면 상당히 좋은 비즈니스라고 판단한다고 한다. 즉, 미국에서 가장 시가총액이 높은 B2B SaaS 상장회사의 FCF 마진율은 약 20%이고, 해마다 매출이 50% 정도 성장한다. 그리고 효율도 매우 높다.

이제 시작하는 한국의 B2B 스타트업이라면, 이런 지표가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참고하면서 사업을 하면 좋을 거 같다. 아무래도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B2B 소프트웨어 시장이고, 그만큼 축적된 데이터와 노하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 직면하기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서는 세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다. 문제로부터 멀리 도망가는 사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 그리고 문제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가 있다. 실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냥 어떻게 되거나, 누군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방치하는 동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 이유는 그냥 전 세계 대부분 사람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골치 아프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해야 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 들어야 하고, 고장 난 걸 내 손으로 고치려고 시도하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웬만한 사람은 그냥 이런 상황을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혼자 뭉개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다가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아예 문제에서 등을 돌리고, 그냥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는구나잠수 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데, 어쨌든 둘 다 사회나 집에서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극소수지만,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고 커도, 절대로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해결하려고 하는 go-getter형의 problem solver들도 가끔 만나는데, 이런 사람들이 집이나 직장에서 성공할 확률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실은, 그렇다고 이런 분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본인들이 실수한 걸 인정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남한테 하기 싫은 소리도 많이 하고, 필요 이상으로 욕도 먹고, 정말로 몸과 마음이 불편한 행동과 말을 해야 하기도 하다.

나도 굳이 어떤 사람인지 분류를 하자면, 그래도 문제로부터 도망가기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돌진하는 스타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말만큼 쉽진 않다. 가끔은, 별거 아니지만,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남한테 전화 한 통 거는 것조차 너무 하기 싫고, 전화가 오면 정말로 받기 싫고, 진짜로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내 과거 경험에 의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게 그냥 가만히 있거나 도망가는 것보단 좋은 결과를 만든다. 당장은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정신과 육체 건강에 훨씬 좋다.

며칠 전에 소프트뱅크가 실적 발표를 했는데, 14년 만에 처음으로 분기 영업손실을 냈다. 자그마치 7조 원 이상의 적자가 발생했는데, 비전펀드에서 투자한 위워크 같은 회사의 밸류에이션 폭락이 주원인이라고 한다. 적자가 발생한 거야 놀랍진 않지만, 나는 손정의 회장이 기자 간담회에서 현실을 아주 객관적으로, 그리고 똑바로 직시하고, 아주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발표하는 자세에 감명받았다. “내 판단에 문제가 있었고, 이건 제가 정말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 “변명 없이, 있는 그대로 실적을 설명하겠습니다” , “이만큼 적자를 낸 것은 창업 이래 처음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등과 같은, 어떻게 보면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잘 하지 않는, 그런 발언과 행동은 나한테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나도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문제가 있으면 도망치지 말고, 포장하지도 말고, 그냥 그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라고 자주 조언한다. 실은 스타트업 하는 분들은 대부분 problem solver지만, 간혹 현실로부터 도망가려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의 특징은, 회사의 실적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고, 변명이 많고, 이런저런 관련 없는 수치들을 대충 섞어서 얼버무리는 건데, 이러면 그 순간은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결국엔 이게 훨씬 더 큰 문제가 돼서 돌아오고, 그땐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도 상황이 매우 어려워질 수가 있다.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현실이 내 뒤통수를 친다. 그것도 아주 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