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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 현황

ICO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난리다. 전에 올린 글에서 말했듯이 ICO는 어쩌면 앞으로 VC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는 전통적인 펀드레이징 구조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면이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ICO와 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진정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기 전에 겪는 혼란스러운 격동에 더 가까운 거 같다.

나도 여기저기서 ICO에 대한 백서들을 많이 받는다. 그만큼 요새 유행인 거 같고, 그 수가 워낙 많아서 이제는 어떤 ICO가 언제 진행되는지 트래킹도 못 하겠다. 물론, 이 중 이더리움과 같이 혁신적이고 성공적인 coin offering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사기성이 짙다고 생각한다. 실은 ICO를 통해서 모든 비즈니스가 펀드레이징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요새는 돈이 필요하면 그냥 이상한 토큰을 만들어서 ICO를 진행하는 걸 워낙 많이 접하게 된다. 블록체인 기반의 제품이 회사의 메인 서비스라면 ICO는 의미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토큰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은 회사와 큰 상관관계가 없는데, 최근에 내가 본 ICO의 절반 이상이 그냥 펀드레이징을 하기 위해서 억지로 블록체인을 비즈니스 모델에 집어넣고 있다. 이런 토큰에 투자하면 돈을 날릴 확률이 매우 높다. ICO를 진행하는 회사도 본인이 뭘 하는지 정확히 모르고, 여기에 투자하는 투자자도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토큰을 발행하는 회사에 법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아직 없다. 그래서 대부분 수십장짜리 백서 하나로만 투자자를 모집하는데, 대부분 투자자는 이 백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수십 개의 ICO에 대한 백서를 읽어보고, 읽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나도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나마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투자를 하는 사람이 이 정도면, 일반인들은 그냥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따라서 투자한다고 보면 된다. 잘 알고 투자해도 돈을 날릴 확률이 큰데, 이렇게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투자하면 결과는 뻔하다. 물론, FOMO 또한 한몫 단단히 한다.

약간 충격적인 건, ICO를 진행하는 몇 팀들과 이야기를 좀 해보면, 이 사람들도 블록체인과 ICO에 대해서 며칠 또는 몇 주 정도 책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이 분야와는 전혀 상관없는 쪽에서 일하다가 ICO가 뜬다니까 그냥 이 분야에 들어와서 한탕 해보려는 사람들도 꽤 많다는 이야기다. 이 중 일부는 스마트컨트랙트의 코드를 GitHub이랑 스택오버플로우에서 카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ICO 자체를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실은 ICO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앞으로 더 많은 혁신을 가져올 수단이 될 거라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 기존 VC 모델로는 불가능했던 많은 걸 ICO는 가능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면 투자자들은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좋은(too good to be true)’ 투자라는 건 없다. 있다면 그건 100% 사기일 뿐이다. 내 주변에서 누가 토큰을 10원에 구매했는데 이게 몇 개월 만에 100만 원이 됐다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는 소문일 확률이 높다. ICO에 관심이 있다면, 백서를 자세히 읽어보고 스스로 공부를 충분히 한 후에, 어떤 팀인지도 가능하면 reference check을 한 번 정도 해는 게 좋다. 그리고 나서는, 냉정한 머리와 시각으로 상식선에서 생각을 해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투자가 그렇듯이, 이 중 성공하는 코인 오퍼링은 10% 미만일 것이라는 것도 염두해두면 좋을 듯.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

big-fish-little-pond과거에 ‘서울만 중요한가?‘ 라는 포스팅에서 나는 굳이 모든 회사가 서울로 올 필요가 없다는 걸 강조했다. 아직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우리가 투자한 몇 안 되는 지방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상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내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지방의 열악한 환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러다 보니, 회사의 위치에 대한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지방에서 완전히 뿌리를 박고, 회사가 커지면 서울에 지사나 사무실을 하나 만들자는 내 주장과 지방에서 시작하지만, 조금만 회사가 성장하면, 본사를 서울로 옮기자는 팀의 주장이 극과 극으로 충돌하고, 답이 없는 대화로 끝난다. 물론, 내가 강압적으로 이런걸 강요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결정은 대표이사와 경영진이 하는 거고, 대부분 회사는 돈을 어느 정도 벌면, 지방을 떠나서 서울로 이사하는 결정을 한다.

그래서,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인에 대해서 생각해봤고, 이에 대한 내 입장을 한번 정리해본다. 지방에서 창업했는데, 사업 규모가 커지면 서울로 본사를 옮길 생각을 하는 창업가를 지금까지 꽤 많이 만났는데, 이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보, 네트워크, 벤처캐피털, 공간, 그리고 채용이다. 간혹 겉멋에 사업하는 창업가들이 본사 주소가 강남이 아니면 파트너나 고객이 무시한다는 이유로 서울, 그것도 강남으로 이전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가짜 창업가들이다. 우리는 이런 인간들을 주로 fauxpreneur라고도 한다.

하나씩 짚고 넘어가 보자. 지방에 있으면 서울보다 정보의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아마도 다음 항목인 네트워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 같다. 일단, 단순 정보에 대해서는 이건 무조건 틀린 말이다. 대부분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널려있는데, 서울에 있든 지방에 있든, 그 접근성은 똑같다. 의지만 있다면, 그래서 충분한 시간만 투자하면, 전 세계 모든 정보는 손가락 하나로 접근할 수 있다. 충분한 의지와 끈기만 있다면,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도, 구글 검색으로만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아마도, 지방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지방에는 서울과 같은 좋은 네트워킹 모임이나 행사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 같다. 즉,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과 투자자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반만 동의한다. 서울에는 지방보다 네트워킹 모임이 많은 거지, ‘좋은’ 네트워킹 모임이 많은 건 아니다. 솔직히 서울의 네트워킹 행사나 모임 대부분 별로 영양가가 없다. 새로운 사람 또는 이미 아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는 건 맞지만, 이게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나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낮다. 오히려 제품을 만들고, 고객한테 집중해야 할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그러니까 회사를 서울로 옮겨서, 이런 화려한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하면, 갑자기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거라는 순진해 빠진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나만 잘하면, 서울이든 지방이든, 좋은 정보와 좋은 사람에 대한 접근성은 저절로 생긴다. 오히려 이들이 나를 찾아온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시각에서 본 것이다.
지방에는 VC가 거의 없다. 이건 사실이다. 그리고 지방에는 서울만큼 쉽게 투자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의 스타트업이 투자받을 수 있는 확률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투자자도 좋은 회사 냄새는 금방 맡고, 좁은 투자자 커뮤니티 내에서는 잘 나가는 회사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진다. 지방에 있는 회사가 좋은 실적을 내면서 잘 성장하고 있으면, 투자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서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럼 왜 우리 회사는 투자자가 안 찾아올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당신의 회사가 후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은 디캠프, 마루180, 구글캠퍼스, 카우앤독 등 코워킹스페이스가 많은데, 지방은 이런 공간이 전혀 없어서 창업이 활성화되기 힘들어요.”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아주 많이 듣는다. 스트롱도 구글캠퍼스 안에 사무실이 있고, 디캠프와 마루180에도 나는 가끔 가는 편인데, 이런 공간이 지방에 없어서 창업하는 데 불리하다는 생각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공간이 있든 없든, 창업은 할 수 있고, 회사를 키울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서울로 이사 오면, 이런 코워킹공간에 누구나 다 입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후진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서울이든 지방이든 대접받지 못한다.

실은, 채용에 대해서만 나는 서울로 오고 싶어하는 창업가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대한민국의 좋은 인재들이 서울로 많이 몰리는 건 사실이다. 좋은 대학교도 서울에 많고, 좋은 직장도 서울에 많기 때문에, 서울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 하지만, 그래서 무조건 서울로 와야겠다는 대표이사들은 채용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울에 너무 꽂혀서, 처음부터 지방대학 출신이나, 그 지역의 인재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걸 나는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이다.
채용에 대해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좋은 인재를 데려오려면, 큰 물의 작은 고기가 되기보다는 작은 물의 큰 고기가 돼야 하는데, 이게 서울로 올라오면 쉽지가 않다. 서울에 오면 우리 회사는 수많은 벤처기업 중 하나가 될 텐데, 과연 최고의 인재를 채용할 수 있을까? 한국 최고의 회사, 그리고 간혹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회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에서 우리가 이들과 경쟁해서 더 좋은 인재를 데려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경쟁이 덜 치열하고, 그나마 우리가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지역이나 시장에서, 그 지역 최고의 인재들을 채용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CNBC의 2017년도 조사에 의하면, 서울은 전 세계에서 6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이다. 이 결과의 신빙성은 좀 떨어지지만, 어쨌든 서울은 물가가 높은 도시다. 아직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스타트업이 서울로 이사 오면, 비용 구조는 최악이 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활주로(runway)가 엄청나게 짧아진다. 이렇게 비싸다 보니, 사무실은 서울에 있지만, 직원들은 서울에서 멀리 살 수밖에 없고, 여기에 서울의 교통지옥이 합쳐지면, 출퇴근 시간이 짜증 나게 늘어난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언급한 인재 채용의 문제는 실은 지방보다는 서울이 더 심각하다.

그런데도 굳이 우리 회사를 서울로 이사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우리의 본사이고, 내가 제품을 만들고 있는 곳이 우리의 본사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Shout It Out Design>

보람찬 직업

일요일 밤 11시 SBS에서 하는 ‘SBS스페셜’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내용이 괜찮아서 나도 꽤 즐겨 보는데, 얼마 전에 2주 연속 ‘사교육 딜레마’라는 2부작을 방영해줬다. 한국 사교육의 현주소, 그리고 과연 한국의 교육, 입시, 대학, 졸업 후 진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나름 의미 있는 내용이 많았다. 솔직히 나는 애가 없어서, 사교육에 대해서 잘 모른다. 대치동 학원가로 이렇게 많은 사교육비가 투입된다는 건 나한테는 충격적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돈 처들여서 사교육 받아서, 좋은 대학 들어가면 뭐하는데?”라는 질문을 스스로 계속 물었다. 비싼 등록금 내면서 좋은 대학 나와서 취직도 못 하는 후배들이 내 주변에는 수두룩 하고, 취업해도 학자금 대출받은 걸 갚느라고 허덕거리는 후배들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학은 안 갔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걸 일찍 찾거나, 뭔가 유용한 기술을 배워서 대학 졸업생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면서, quality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사교육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사교육과 대학,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직업’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한테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직업을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고귀한 소명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죽지 못해 회사에 다니는 사람한테는 직업은 그냥 월급 받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직업은 나한테 어떤 의미일까 하는 질문을 과거에도 여러 번 했다. 아마도 항상 달랐던 거 같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급망관리솔루션 업체 자이오넥스에서, 팀이 크지 않을 때는 나한테 직업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게,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곳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코리아와 같은 대기업에서 직업은 나한테는 월급을 주는 곳이었다(입사 2년 차부터는). 그리고 뮤직쉐이크는 나한테는 직업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스트롱벤처스 또한 존이랑 내가 만든 펀드이고, 매일매일 재미있게 일하고 있는 일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느끼는 보람은 일반 직장과는 조금 다른 거 같다. 펀드의 특성상, 우리도 운용보수라는 걸 통해서 월급을 가져가지만, 펀드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버는 보람을 위해서 일 하는 건 아니다. 실은 좋은 창업가와 좋은 출자자들과 일할 기회가 매일 제공되는 VC라는 직업이 가져다주는 성취감과 보람은 상당히 많지만, 다른 직업과 극명하게 차이 나는 부분은 바로 “나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그 만남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는 직업”이라는 점인 거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직업은 별로 없는 거 같다. 고속 승진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능력보다는 줄타기와 정치 플레이를 잘 해야 하는 대기업에서는 실은 나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으면, 보람보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이런 큰 조직에서는 주로 사람을 채용할 때 자기보다 능력 없고 멍청한 사람을 채용한다. 그래야지만 본인이 더 돋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실은 그 반대지만).

하지만, VC라는 직업 자체는 좀 다른 거 같다. 나보다 능력 있고, 똑똑한, 그런 좋은 사람들로 나 자신을 둘러쌓아야지만 모두가 잘 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의 가장 큰 보람은 매일 매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거다.

애벌레와 나비

metamorphosis지난 3주 동안 프라이머 12기 후보 회사 47개와 미팅을 했다. 참고로, 이 47개 회사는 지원한 수백 개 회사 중 서류심사를 통과한 후보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회사와 만나야 하므로, 그리고 나도 바쁜 일정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각 회사와 30분씩만 미팅을 했다. 늦은 오후까지는 나도 항상 다른 일이 있어서 평일은 주로 5시부터 7시까지, 30분 단위로 4개 후보 회사들과 만나고, 금요일은 6~7개 회사와 미팅을 했다. 짧은 미팅이 실은 긴 미팅보다 사전 준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정말 많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지난 3주 동안은 매일 평균 7~8개 팀과 미팅을 한 거 같다. 프라이머 12기 후보 회사, 스트롱 기투자사, 새로운 회사, 이렇게 하루에 많은 미팅을 소화하고 집에 가면, 목은 맛이 가고, 몸은 녹초가 돼서 쓰러질 거 같다. 항상 새로운 회사를 만나고, 뭔가 하려는 창업가들을 만나는 건 즐겁고 흥분되는데, 이번엔 정말 힘들었던 걸 보면, 나이와 함께 체력의 한계도 같이 오는 거 같았다.

미팅 시간이 짧다 보니, Y Combinator 스타일로 딱 다섯 가지만 질문했다:
1/ 우리 회사는 뭘 만드는지
2/ 왜 이걸 만드는지
3/ 우리 제품을 누가 사용할지
4/ 제품이 있다면, 현재 수치들
5/ 어떤 팀인지

매 기수가 특별하지만, 이번 12기 후보 회사도 매우 다양했다. 이미 수천만 원의 월 매출을 달성한 회사도 있었고, 작년 매출이 50억 원인 회사도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몰래 창업한 분도 있고, 아직 학생인 창업가, 그리고 40대가 훌쩍 넘은 시니어 창업가도 있었다.

아직 외부 투자를 유치하지 않고, 나름 잘 성장하고 있는 팀 중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자칫 거만해 보이는 팀도 있었는데, 이런 팀한테는 일부러 비즈니스의 여러 가지 허점을 지적했다. 이 정도를 일구었다고, 벌써 자만하는 건 앞으로 비즈니스의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냉정한 현실을 자각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양한 사업을 시도해봤는데, 지금까지 모두 처참하게 실패한 팀도 있었다. 이런 팀한테는 본인들이 하는 걸 정말로 믿는다면, 계속 시도해보라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정말로 이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만드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47번째 마지막 팀과 미팅이 끝났다. 이 중 몇 개가 프라이머 회사가 될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미팅한 모든 회사에 이야기했듯이, 프라이머 선발이 되든, 안 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실은 대부분의 회사는 잘 안될 것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팀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의지는 우리 모두한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소중한 마음가짐이다.

애벌레를 보면, 이렇게 희한하게 생긴 곤충이 나중에 화려한 나비가 될 거라는걸 예측하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같은 극초기 투자자의 역할이 더욱더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고 있다. 수천억 원이나 수조 원의 펀드를 운용하면서, late stage의 회사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펀드도 당연히 중요하고 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엄청나다. 하지만, 씨앗을 계속 뿌리면서, 토양을 기름지게 만드는 걸 도와주는 초기 투자자들은 정말로 독특하고 독보적인 존재들인 거 같다.

<이미지 출처 = eFinancialCareers>

첫 경험, 첫 인상

사진 2017. 9. 13. 오후 6 25 43구글캠퍼스 임정민 센터장의 역작 ‘창업가의 일’을 얼마 전에 읽었다. 워낙 내가 잘 아는 분이고(나랑 스탠퍼드에서 같이 공부했다),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결과물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훌륭했다. 나도 책을 써 본 경험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스타트업같이 복잡한 분야의 이야기를 누구한테나 재미있고 읽기 쉬운 글로 쓴다는 건 고난도의 작업인데, 제프리의 그동안 경험과 통찰력이 녹아있는 ‘창업가의 일’은 한국 스타트업계에서 오랫동안 애독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 물론, 내가 쓴 스타트업 바이블 1권과 2권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인터넷에는 자세한 서평이 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여기서 다 나열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책의 머리말을 시작하는 “1999년 스탠퍼드 대학에 등교한 첫날은 내 인생이 바뀐 날이다.”라는 첫 문장은 내가 1999년 스탠퍼드 유학 첫날의 느낌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내용이라서 격하게 공감했다. 인생을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학교에서 좋은 학점 받아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안정적인 월급쟁이 생활을 하는 거라고 믿고 있었던 내 인생 철학을 스탠퍼드 대학원과 실리콘밸리는 완전히 바꿔버렸다. 나는 학교를 공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많은 스탠퍼드 학생들은 캠퍼스는 공동창업자를 찾을 수 있는 좋은 ‘인력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졸업 후에 어떻게 하면 Cisco에 – 당시 Cisco는 실리콘밸리 최고의 tech 회사 중 하나였다 – 취직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많은 스탠퍼드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Cisco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스탠퍼드 대학의 첫인상과 경험은 지금 내가 스타트업 분야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스타트업 분야로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Vinod Khosla라는 전설적인 VC의 강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과거에 자세히 블로깅 한 적이 있다. 실은, 스탠퍼드 대학과 비노드 코슬라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대기업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첫 경험, 그리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첫인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첫 경험이나 첫인상을 접할 기회는 살다 보면 누구한테나 한두 번쯤은 찾아온다. 이 기회를 그냥 놓치냐, 또는 잡느냐는 전적으로 본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