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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돌파

나이키를 대표하는 슬로건이 Just Do It인데, 언더아머를 대표하는 슬로건은 The Only Way is Through이다. 나는 두 회사 모두 너무 좋아하고, 두 회사의 작은 주주이기도 한데, 그래도 언더아머보단 항상 나이키의 팬이긴 했다. 작년까진. 올해는 언더아머의 The Only Way is Through라는 슬로건을 거의 매일 최소 한 번씩 스스로 중얼거리면서 이 말을 뇌에 박는 노력을 해서 그런지, 올해는 나이키 보단 언더아머의 팬으로 살았고, 운동용품도 언더아머 제품을 더 많이 구매했다.

‘정면 돌파’를 뜻하는 The Only Way is Through라는 슬로건이 2023년 내 삶을 대변할 정도로 올해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정면 돌파라는 말 자체는 상당히 멋있고 박력 있지만, 실제 삶과 직장에서 정면돌파하는건 굉장히 불편하고, 껄끄럽고,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그런 자세다. 평화주의자가 순탄한 직장생활의 표본이 됐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이 너무나 만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면서 정면돌파 하는 사람들은 점점 멸종동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나마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바닥에도 되도록 정면 돌파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나는 올해 쉬운 길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찾더라도 이 쉬운 길을 되도록 택하지 않았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던 게 절반이고,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게 절반인데, 그래도 올해의 수많은 선택은 피해 가기보단 정면돌파를 해야겠다는 다짐의 산출물이었다.

정면 돌파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은, 일을 처리할 때 잔머리를 안 굴리기 때문에 머리가 덜 복잡하고, 정면 돌파 한다는 의미 자체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doing the right thing)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결정에 대해서 나중에 정신적으로나 양심적으로 갈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어떤 일을 하든, 정면을 돌파하는 게 맞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만, 막상 이렇게 행동하려는 용기도 없고, 이렇게 했을 때 예상되는 순간적, 그리고 단기적인 큰 스트레스와 타격 때문에 항상 피해 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피해 가는 방법을 만들기 위한 잔머리에 투입되는 에너지와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정면돌파하면 이런 쓸데없는 낭비와 복잡함이 없다.
그리고 누구나 다 정면돌파하는게 맞는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즉, 머리와 몸이 따로 놀 때 큰 양심적 죄책감이 들면서 정신적으로 갈등하게 된다.(이게 반복되다 보면 그냥 피해 가는 게 디폴트가 되긴 하지만). 정면돌파하면 순간적으로는 괴롭고 일시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지만, 결국 나중에 이런 어려운 결정을 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단점은, 정면 돌파는 어떤 어려움을 뚫고 직진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엄청난 공포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돌아서 가거나, 위로 가거나, 또는 아래로 피해 가면 그 누구의 심기도 안 건드리고, 그 누구와도 껄끄러워지지 않고, 그냥 좋은 게 좋은 데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그 누구도 굳이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면서 정면돌파하고 싶지 않다. 결국 올바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정면돌파하면 단기적으론 여기저기서 문제들이 터지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계속 정면돌파하다보면 죽을 것 같은 스트레스가 생긴다. 하지만, 이 죽을 것 같은 괴로움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고, 결국엔 최선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나는 장담한다.

지금은 몸과 마음이 상대적으로 편하지만 – 실은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나중에 올 더 큰 문제를 잘 알고 있기에 더 불편하다 – 나중에 훨씬 더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리기보단, 그냥 지금 몸과 마음이 불편해도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바로바로 해결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관성 때문인지, 우린 대부분 항상 이와 반대의 결정을 하고 문제를 피해서 반대 방향으로 간다.

이럴 때일수록 정면 돌파를 나는 항상 권장한다.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정면돌파하면 순간적으로는 괴롭고 일시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지만, 결국 나중에 이런 어려운 결정을 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이런 경험을 했다.

The Only Way is Through. 유일한 길은 정면 돌파, 진짜로 이거 하나밖에 없다.

제품, 영업, 그리고 시장

한국의 B2B 시장에 대해서는 내가 이 블로그에서도 여러 번 글을 썼는데, 나는 그동안 전형적인 B2C 강국이었던 한국에서도 앞으로 5년 안으로 여러 개의 B2B 유니콘이 – 특히 B2B SaaS 회사 –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우린 지난 몇 년 동안 꽤 많은 한국의 B2B 회사에 투자하면서 이런 우리의 믿음과 가설을 직접 테스팅해보고 있는데, 기대가 매우 크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은, 이 시장이 활짝 커지려면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시장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걸 우리가 투자하는 B2B 창업가들과 우리 같은 투자사들이 서서히 바꿔 나갈 수 있길 바란다.

우리 B2B 회사들과 올해는 꽤 많은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사업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바이럴을 타면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일반소비자를 대상으로 사업하는 B2C 서비스와는 달리 기업을 대상으로 영영업해야 , 의사결정 과정도 복잡하고, 막상 구매 결정을 해도 여러 단계의 결제 과정을 거쳐야 하는 B2B 솔루션은 생각만큼 잘 안 팔린다. 아니, 생각만큼 잘 안 팔리는 게 아니라, 그래도 사용할 만한 제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1년 동안 단 한 개의 제품도 판매하지 못한 회사들도 있다.

왜 안 팔릴까? 이 부분을 우린 집중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팔리지 않는 문제를 제품의 문제, 영업의 문제, 그리고 시장의 문제로 구분해 봤다.

일단 우리 제품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뜯어봐야 한다. 우리 잠재 기업 고객의 문제점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해주는 솔루션을 우리가 제대로 개발하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잘 만들었더라도 다른 경쟁사보다 더 싸고, 더 좋고, 더 빠른 솔루션을 만들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만약에 어느 정도의 시장이 존재하는데 우리만 판매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건 우리 제품이 후졌거나, 아니면 우리가 영업을 못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팔릴만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위에서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우리 제품에는 전혀 문제가 없고, 이 제품을 살 수 있는 고객들도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면, 영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B2B 제품은 B2C 제품과 같이 제품만 잘 만들어 놓고 메타나 구글에서 유료 광고를 하면 바로 입소문이 나서 바이럴을 타는 성격이 없다. 기업 고객 면전에서 우리가 만든 제품을 보여주고, 사용법을 알려주고, 직접 홍보를 해야지만 판매가 된다. 그것도 여러 번을. 즉, 영업을 아주 잘해야 한다. B2B 영업은 상당히 특별하고 독특한 기술이 필요하고, 한국에 스타트업의 B2B 영업을 제대로 하는 인력은 상당히 귀하다.(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 출신 B2B 영업 인력은 스타트업 영업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 내가 여기서 몇 자 적어봤다). 어느 정도의 시장이 존재하고, 우리가 아주 기깔난 제품을 만들었는데 매출이 없다면, 우리의 영업 실력을 의심하고 영업 프로세스를 전면 재검토해 봐야 한다.

제품도 잘 만들었고, 영업도 잘하는데, 판매가 안 된다면, 시장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 시장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방향을 잘 못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은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더 잘 기획하고 개발해서 제품력을 개선하면 되고, 영업력이 약하면 이 또한 어느 정도 보강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을 잘 못 선택했다면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시장이 생길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하는데, 스타트업은 그 전에 현금이 고갈되어서 망할 확률이 높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시장의 문제라면 그냥 피봇하는걸 나는는 권장한다. 물론, 한국에서만 존재하지 않고 옆나라 일본이나 먼나라 미국에는 수조 원의 시장이 있다면, 글로벌 시장 진출로 전략을 바꿀 수도 있지만, 이건 또 완전히 다른 레벨의 고민거리라고 생각한다.

B2B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잘 안되고 있다면, 제품, 영업, 또는 시장 중 정확히 어디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하는지 잘 파악해 봐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지 말자

투자와 관련해서 다른 분들과 이야기할 때 초기 투자만 하는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미래를 예측해서 투자하냐이다. 우리가 워낙 초기에 집중하는 편이고, 많은 경우 제대로 된 제품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없고, 시장도 불투명한 단계인데, 이 중 잘 된 회사들을 보면 몇 년 만에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 누구나 다 아는 국민 브랜드가 된 곳들이 많아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큰 사업이 된 회사는 우리 전체 투자사 중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은 잘 안되고 있거나 조용히 사라진 경우가 훨씬 많다.

이제 시작하는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가 몇 년 뒤에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나라도 이 회사에 투자한 초기 VC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회사가 잘될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 투자했냐?” , “그런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고 예측했냐?”와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제일 당황스럽고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나도 이 회사가 이렇게 잘될 거라는 걸 전혀 상상하지 못했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긴커녕, 있는 데이터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투자를 집행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 내가 투자를 시작할 때 자주 들었던 게 벤처 투자는 과학이라기보단 예술의 영역에 가깝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은 초기 투자의 설명에 꽤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은 단계와는 무관하게 벤처 투자는 어느 정도는 예술의 영역에 가까운데 이게 초기 투자일수록 예술에 가깝고, 후속 투자일수록 과학에 가깝다. 초기 투자는 정량화할 수 있는 수치보단 정성적인 요소와 감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고, 스타트업을 하는 것 자체가 똑똑한 사람들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인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고, 상상도 못 하는 일들도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그냥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린 일찌감치 제품이 어떻게 진화할지,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고객이 어떤 행동을 할지, 즉 미래를 예측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가 터지고 이에 따라 스타트업의 내부, 외부 환경이 지속적으로 바뀔 때, 이런 어려움과 변화에 대해서 이 창업가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예측해 보려고 노력한다. 인간이라는 게 참 복잡한 동물이라서 이런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예측하기도 매우 어렵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것 보단 난이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창업가와 계속 대화하면서 교류하고, 이 사람의 작은 것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래도 이분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우린 미래를 예측하기보단 이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이 사람이 다양한 내,외부 자극에 어떻게 대응하고 반응할지를 예측해 본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는 게, 미래는 오히려 똑똑한 사람들이 예측하면 되는데, 창업가들이 투자자들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라서 이분들이 미래는 알아서 잘 예측한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투자자들은굉장히 똑똑하지만, 투자자가 굳이 똑똑할 필요는 없다. 우린 똑똑한 사람들을 찾아서 이 사람들에게 투자만 하면 된다.

변명 없는 한 해

나는 신년 계획이나 연간 계획 같은 걸 안 세운다. 내가 하는 모든 건 12개월 동안 고치거나, 완성해야 하는 단기 과제들이 아니고, 평생 노력해서 고치거나 개선해야 하는 일들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연초에 이런저런 연간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이런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움직이지만, 그래도 다른 개인적인 목표보단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들이 해마다 조금씩 바뀌는데 올해 내가 많이 집중했던 게 하나 있다. 바로 “이거 해야 하는데…”라는 말을 되도록 안 하는 거였다.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내가 지금도 가장 많이 듣는 말, 그리고 나도 너무 자주 했던 말이다. “운동 해야 하는데…” , “담배 끊어야 하는데…” , “술 그만 먹어야 하는데…” 등 우린 이런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데, 결국 “뭐 해야 하는데…”라는 말은 변명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후회까지 더해진 말이다. 누구나 다 변명도 싫어하고, 후회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이 두 가지 감정이 혼합된 말이라면,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과 말이 아닐까 싶다.

올해 나는 의식적으로 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새벽에 “오늘도 후회하거나 변명하는 말을 하지 말자. “뭐 해야 하는데…”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지 말자.”를 스스로 되새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대신, 정말로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거나, 지금 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행동으로 옮겨서 시작하거나 또는 아예 하지 않았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어릴 적 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정말 오랫동안 못 만났고 카톡이나 전화로만 수년 동안 연락을 하고 있다면,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야 하는데….”라는 말만 수년 동안 하면서 실제로는 안 만나고 있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항상 “언제 한번 봐야 하는데…”라는 말만 하고 안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올해는 이런 변명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정말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면, 그 말을 하는 대신, 바로 약속을 잡아서 만났다. 모두 다 가능한 시간을 잡기가 힘들면, 그냥 시간 되는 친구들만 만났고, 이후에 계속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지인들이라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고 싶지 않고, 안 만날 사람들이라면 굳이 “아, 우리 언제 한번 봐야지…”라는 실없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내년에도 변명도 안 하고, 후회도 안 하는, 그런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

육감

우린 일주일에 한 번 전체 미팅을 하고, 여기서 어떤 회사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 미팅도 한다. 워낙 많은 딜들을 보고, 그리고 다른 VC보다 많은 회사에 투자하기 때문에 우리의 투심위는 간결하다. 특정 회사에 대해 투자팀원 모두의 의견을 취합해서 투자하지 말지, 투자할지, 또는 조금 더 검토할지 빠르게 결정하는데, 모두 다 그동안 워낙 많은 회사를 봤기 때문에 각각 본인의 결정을 뒷받침할 만한 한두 개의 명확한 주장과 논리를 팀과 공유한다.

나도 그동안 많은 창업가와 회사를 만났기 때문에, 회사를 한두 번 만나면 이 회사에 투자할지 안 할지, 대략적인 방향이 나오고, 왜 그런 방향이 나왔는지 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최근에 어떤 회사에 대해서는 이런 명확한 반대 논리가 없었지만 투자하기가 싫었던 적이 있다. 실은 창업팀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사업의 수치도 나쁘지 않았고, 시장도 괜찮아서, 내 기준에 딱히 걸리는 건 없었는데, 그냥 왠지 이 회사와 대표에겐 투자를 꼭 해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 우린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콕 집어서 나열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 또한 없고, 왠지 이 회사의 대표에 대한 강한 확신이 없고 느낌이 별로라면 과감하게 투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돈을 제공하는 한 LP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분이 이런 우리의 방식이 너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지 않냐고 지적한 적이 있다.

실은, 표면상으론 맞다. 테크에 투자한다는 VC가 ‘감’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건 어떻게 보면 시대를 역행하는 태도인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지표와 논리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케미와 느낌/감이 더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초기 투자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실은, 이런 방식에 논리와 과학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스트롱 모든 멤버들의 누적 투자 경험은 30년이 넘는데, 이 30년 동안 차곡차곡 축적된 크고 작은 것들이 정교하게 순간적으로 프로세싱되는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큰 데이터보단 작은 데이터이다. 그동안 경험한 작은 것들, 즉 정량화할 수 없는 감정, 느낌, 관찰, 직관 등이 작은 데이터인데, 초기 투자할 땐 그 어떤 인공지능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것들 때문에, 회사를 검토할 때 딱히 크게 걸리는 건 없지만, 뭔가 투자하기가 꺼려진다면 우린 다시 검토하고, 또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도 크게 걸리는 게 없지만, 투자하고 싶은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그냥 과감하게 패스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린 회사를 검토할 때 우리가 싫어하거나 우리 기준에 미달인 부분들이 명확하게 파악되는 걸 선호한다. 이런 경우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탈락시킬 수 있어서, 더 이상의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육감에 의존해서 투자하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잘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우린 확신을 갖고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후회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