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을 한다는 것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B2B API 사업을 하는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 블로그의 ‘창업일지’ 시리즈를 추석 연휴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9편이지만, 짧기도 하고 그냥 쉽게 잘 읽혀서, 집중하면 한 25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내가 페이지콜 최필준 대표님을 처음 만난 게 2017년이고, 프라이머 투자 이후 스트롱도 투자하면서 나름대로 서비스 창업 초기부터 봤기 때문에 이 팀과 회사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페이지콜에 투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7년만큼 긴 시간 동안, 이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개고생을 이미 많이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실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글로 적힌 기록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뭔가 더 짠하기도 했다.

이 블로그의 내용은 최근에 내가 읽은 창업가들의 글 중 가장 스타트업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스타트업한다는 것이 드라마 ‘스타트업’과 조금은 유사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다. 물론, 이분들은 본인들이 직접 창업하거나 스타트업에서 일해보지 않은 분들인데, 인구의 대부분이 스타트업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스타트업 드라마의 시각으로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이 시각은 그냥 틀린 게 아니라, 너무나도 왜곡됐다. 초기 스타트업에는 잔잔하고 감성적인 OST도, 낭만도, 감동도,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냥 주구장창 개고생밖에 없고, 정말로 대단한 체력, 정신력과 각오가 없으면 일반 사람들은 2년을 버틸 수가 없다.

후반부에 스트롱과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등장하는데, 나를 만난 이후 페이지콜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만나기 전의 이 회사와 창업팀의 여정에 대해서 읽어보니, 스스로가 겸허해질 정도였다. 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지금도 쉽지 않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제정신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최필준 대표님과 페이지콜 팀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그 정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 다 힘든 자신만의 전쟁을 지금, 이 순간에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게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력과 체력이 약한 분들에겐 정말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다.

모든 해피 엔딩은 멋지고 감동적이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재난과 같은 엔딩으로 참혹하게 끝난다. 단지,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해피 엔딩으로 끝난 스타트업도 지나온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면, 더 이상 ‘해피’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스타트업은 인간의 최선을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최악을 보게 된다. 이게 스타트업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린 창업가들의 최악과 최선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결국 이 모든 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오늘도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기는 하루가 되길. 모두 파이팅.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진화

얼마 전에 꽤 오랫동안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이런저런 글들을 읽고 있었다. 한 글을 읽으면, 이게 또 다른 글로 나를 인도했고, 이 글을 읽으면, 또 다른 유사한 글을 읽게 됐는데, 굉장히 웃기게 내가 2012년 5월에 쓴 ‘씨앗 뿌리기’라는 글이 추천되어서, 이 글을 클릭하고 11년 만에 다시 읽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게 다듬어진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1957년도에 창업된 Fairchild 반도체로부터 시작됐는데, 이 회사에서 성공과 큰돈을 맛본 창업가와 직원들이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이 새로운 스타트업의 성공으로 인해서 수많은 백만장자가 또 탄생했고, 이 백만장자들은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벤처투자자가 되면서 자본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선순환 고리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인데, 이 생태계의 원리가 마치 오래된 숲의 나무가 씨를 뿌리는 원리와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오래된 고목은 그 옆의 토양으로 씨를 뿌리고, 이후에 썩어서 죽으면서 새로운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이 된다. 뿌려진 씨들은 원목이 제공해 준 풍부한 토양을 기반으로 더 크고 강하게 자라고, 다시 씨를 뿌리고 썩어서 토양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숲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글을 썼던 2012년은 스트롱벤처스를 시작했던 해이고, 아직 한국에는 이렇다 할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국에서 이런 좋은 선순환 벤처생태계가 안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벤처 1세대들의 과욕을 지적하긴 했는데, 지금 와서 조금 더 성숙한 투자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다시 평가해 보면, 나의 그런 지적은 절반만 맞았던 것 같다. 일부 벤처인들의 과욕이 있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2012년은 이제 막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글을 쓴 지가 이제 11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한국의 벤처생태계에는 엄청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창업가와 직원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과거와는 달리 이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다시 스타트업 생태계로 재투자했다. 어떤 분들은 다시 창업해서 연쇄 창업가가 됐고, 어떤 분들은 후배 창업가들을 양성하는 VC가 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자본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면서 자발적으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토양과 비료가 되고 있다.

나는 스트롱도 이런 씨앗 뿌리기 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한다. 우리가 투자한 몇 회사는 그 초기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서 아주 믿을만하고 능력 있는 미래의 창업가와 투자자를 배출하고 있고, 이들 또한 아낌없는 씨앗 뿌리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작은 선의들과 행동들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한국도 그 어떤 나라 부럽지 않을 견고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슈퍼앱의 위험

스타트업 경기가 요새 상당히 안 좋지만, 오히려 우린 질 좋은 창업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스트롱에겐 호경기라고 생각한다. 투자받는 게 힘들고, 스타트업하기엔 어쩌면 최악의 타이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회사를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굳은 의지와 자신감으로 중무장하여 있다. 그리고 앞으로 본인들이 인생 최악의 시나리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 두려움보다 뭔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자신감이 더 크기 때문에 창업하는 건데, 이런 사람들이 대단한 사업을 만드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에 우린 요새 오히려 기분 좋은 미팅을 많이 하고 있다.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비전도 강하고, 꿈도 큰 창업가들을 많이 만나는데, 이들 중 많은 분들이 그 어려운 대형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하고, 궁극적으론 본인들이 사업하고 있는 버티컬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슈퍼앱’을 만들고 싶어 한다.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슈퍼앱은 너무 좋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특정 버티컬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이런 제품,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버티컬로 확장해서 vertical – horizontal 시장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슈퍼앱은 잘만 실행하면 유니콘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모든 투자자들이 이런 회사와 제품에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잘 만들면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 서비스의 공통점은 바로 잘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도 지난 11년 동안 250개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궁극적인 목표가 슈퍼앱인 회사들이 엄청 많다. 실상은, 대부분 슈퍼앱을 만들다가 망했거나, 슈퍼앱을 만들기 위해서 수년째 고생하고 있다. 그래서 요샌 아직 제대로 된 product market fit도 찾지 못 한 창업가들이 계속 슈퍼앱을 만들겠다고 하면, 약간의 색안경을 쓰고 보고, 듣게 되고, 결국 이분들과 미팅을 하고 나면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겠다고 억지를 쓴다는 느낌만 받는다.

이런 분들에게 내가 항상 조언드리는 건, 모든 걸 하겠다는 슈퍼앱을 목표로 하지 말고, 그냥 아주 작은 기능 하나로 시작하고, 이 작은 기능을 그 어떤 시장의 대체제보다 뾰족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라고 한다. 머릿속에서는 엄청나게 큰 비전이 꿈틀거리고, 세상을 씹어먹어 버릴 수 있는 슈퍼울트라앱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겠지만, 잠시 이런 허상을 접어두고, 그냥 지금 내가 하는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기능에서 뾰족한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게 슈퍼앱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렇게 작은 기능을 그 누구보다 잘 만들다 보면, 조금 더 큰 기능을 그 누구보다 잘 만들 것이고, 이 큰 기능들이 합쳐지면 특정 버티컬에서 가장 product market fit을 잘 충족시키는 버티컬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절차를 밟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버티컬로 확장하면서 슈퍼앱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슈퍼앱을 만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모든 걸 여기에 구겨 넣다 보면 죽도 밥도 안 되고, 실제로 우린 이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슈퍼앱인 네이버와 카카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앱을 만들겠다는 목표보단, 검색과 메신저라는 기능을 그 누구보다 뾰족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더라도 원래 본인들의 기반이 되는 이 검색과 메신저 기능을 다른 경쟁사가 절대로 더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제야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슈퍼앱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슈퍼앱의 가장 큰 위험은 첫 문장도 완성하지 않았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는,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플랫폼이 되겠다는 창업가들의 허무맹랑한 비전인 경우가 많다.

AI 창업가 현황

요새 글로벌 벤처 시장 관련 자료를 보면, 시장이 바닥을 쳤고 서서히 반등하는 트렌드가 보이지만, 막상 내가 시장에서 느끼고 있는 건 오히려 이 반대이다. 바닥은커녕 아직도 내려갈 공간이 너무 많아서 2024년 하반기에는 경기가 좀 좋아지지 않겠냐는 개인적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다. 그래서 글로벌 벤처 시장 수치를 조금 자세히 보니까, 전체적인 시장이 리바운드하기보단, 특정 섹터와 회사에 일시적으로 돈이 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특정 섹터가 바로 AI이다.

다른 섹터의 스타트업은 정말 어렵게 펀딩하고 있고, 대부분 펀딩을 못 받고 있는데, AI 분야의 회사는 내가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에 큰 투자를 받고 있고, 이런 트렌드가 전반적인 벤처 시장의 수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다. 테크 분야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 큰 파도를 잘 타면 엄청난 회사를 만들 수 있는데, 1960년 대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왔던 파도들을 보면 반도체, PC, 인터넷, 소셜, 모바일 등이 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파도를 잘 탔던 창업가들과 스타트업들은 이제 어마어마한 기업들이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AI가 이 새로운 파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걸 부인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파도가 블록체인이나 크립토라고 믿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틀린 것 같고, 오히려 나도 AI가 앞으로 10년 동안 엄청난 기회를 만들고 이 기회를 잘 포착한 창업가들은 거대한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요새 만나는 AI 관련 스타트업을 보면, 이런 큰 기회의 파도에 몸을 싣고 과감한 사업을 하기보단, 그냥 AI 분야에 돈이 많이 집중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AI라는 키워드를 잘 활용해서 투자 받아보겠다는 회사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나는 AI 전문가는 아니라서 이 분야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장을 3개의 큰 그룹으로 보고 있다.

가장 바닥에서 인공지능의 초석을 깔고 있는 기업들은 칩을 만드는 회사들이다. GPU의 대명사가 된 NVIDIA와 같은 회사가 대표적인데, 이들이 만든 칩이 없으면 AI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학습이 불가능해진다. 이 기업들은 AI 세상을 위한 배관을 만들고 깔아주는 회사들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매우 어려운 기술과 사업이기도 하다. 대규모 투자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AI를 위한 GPU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에서도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몇 개 있는데, 잘 되길 바란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들이 계속 개발되고 출시되고 있다.

이 칩들 위에 있는 회사들이 AI를 위한 언어모델(LM: Language Model)을 만들고 있는 곳들이다. ChatGPT를 만든 OpenAI가 LLM의 대명사가 됐는데, 구글, 네이버, 카카오, 그리고 중국의 대형 스타트업 등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과 큰 스타트업들도 이 분야에서 맹활약 중이다. 이런 언어 모델이 있어야지만 인공지능이 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언어모델을 만들고 학습시키는 작업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작업 또한 돈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고, 데이터와 엔지니어링 전문가들이 대거 동원되어야 하므로 작은 스타트업이 하기엔 쉽지 않다. 더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을 통해, 사람의 뇌와 더 비슷한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언어모델을 광범위하고 깊게 만들기 위한 전쟁을 이 분야의 회사들은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윗단에는 다른 회사들이 만들어 놓은 언어모델을 활용해서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consumer application을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있다. 굉장히 많다. 아니, 불필요하게 너무 많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AI 스타트업은 여기에 속한다. 실은, 일반 소비자들은 칩이니 언어모델이니,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원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AI의 도움을 받는 거라서, 우린 이 분야에 큰 기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다른 회사들이 만든 모델과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껍데기만 만들어 놓고, 이게 대단한 AI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홍보하는 창업가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게 요새 내가 느끼는 AI 창업가 현황이다. 물론, 이렇게 회사를 포장하고, 공부 좀 많이 한 분들을 회사에 영입하면 그나마 다른 분야의 회사보단 투자는 수월하게 받는 것 같다.

B2C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과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AI 레이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요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회사들은 이 반대의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 일단 AI라는 매력적인 주제로 투자를 받은 후에, 그다음에 제대로 된 사업에 대해서 생각해도 된다는 창업가들이 너무 많은데, 어쩌면 이 사이클이 끝난 후에 남아 있는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직원 사기를 위한 펀딩

얼마 전에 만난 창업가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유니콘은 아니지만, 꽤 좋은 스타트업을 만들어 가고 있는 분이고, 무엇보다도 이 어려운 시기에 수익이 발생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잘 만들어서, VC 투자를 받은 지 3년이 넘었는데도 회사 통장에는 30개월 이상의 런웨이가 있었다. 모든 창업가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의 회사이고, 모든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의 회사라고 생각했다.

현금은 충분히 확보해 놓았고, 매달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큰 투자를 하거나 갑자기 사업의 위기가 오지 않으면 계속 현금 보유량이 늘어갈 게 거의 확실한 사업이지만, 우리가 아는 주변의 유니콘 스타트업같이 매달 두 자릿수 성장을 하거나, 혁신적인 사업이라서 언론에서 자주 비치거나,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섹시한 회사라서 모든 개발자들과 PO들이 가고 싶어 하는 그런 회사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빈 깡통 회사들보다 오히려 이렇게 겉은 덜 화려하지만, 속이 꽉 찬 회사들이 제대로 된 사업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특히 요새같이 쉽지 않은 시절에는 이런 회사들을 좋아하는 투자자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 회사의 대표는 투자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이분한테 좋은 조건에 투자하겠다는 좋은 VC가 있으면 고려해 보겠지만, 현금이 충분히 있고 사업도 잘되고 있는데, 굳이 이 안 좋은 시장에 나가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투자받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조언했다. 대규모 투자를 지금 받아서 특별하게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것도 없었고, 큰 자본이 필요한 물리적인 공장 같은 게 필요한 사업도 아닌데, 그냥 사업에 신경 쓰지 투자에 신경 쓰는 이유를 물어봤다.

실은, 회사는 돈이 필요 없고, 앞으로도 큰 투자가 필요하지 않고, 큰 투자가 필요해도 계속 돈을 벌면서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있는데,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 투자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이 대표이사가 직원들과 1대1 면담을 했는데, 경영진이 아닌 다른 많은 직원들이 회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걱정과 불만을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회사는 잘 되고 있는건가요? 우린 투자도 못 받는 것 같고, 네이버 검색해 보면 회사에 대한 기사도 없는데 다른 스타트업에 뒤처지는 게 아닌가요?”
“제 친한 친구가 토스에서 일하는데, 얼마 전에 몇천억 투자를 받았데요. 그리고 스톡옵션도 받았는데, 우린 잘 성장하고 있는 건가요?”
“주변에 좋은 분이 있어서 우리 회사에 오라고 했는데, 검색해 봤는데 최근의 투자받은 소식도 없고, 특별한 기사도 없어서 망설이더라고요. 혹시 조인하자마자 현금 떨어져서 회사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고…”

이 면담 이후 대표는 생각이 매우 많아졌고, 나도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분이 왜 계속 투자에 대해 고민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일반 직원분들은 회사의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없으니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할 수도 있고, 한국같이 남들이 나를 정의하는 사회에서는 내가 다니는 회사가 언론에 자주 언급되고, 투자를 얼마큼 받았는지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야, 너희 회사 이번에 500억 원 투자받았다면서? 와, 대박 부럽네!” 이런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너무나 듣고 싶어 하는 그 직원의 내면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돈을 잘 버는 양질의 스타트업의 대표이사가 사업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 불필요한 펀딩에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이렇게 낭비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해졌다. 뭐, 이 또한 대표이사의 숙명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