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깊이와 너비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창업하기 전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설문조사이다. 우리 투자사 모아폼과 같은 전문 서베이 제품을 사용하거나, 간단한 구글폼을 이용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하게 되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다. 내가 만난 많은 창업가에게 혹시 제품을 만들기 전에 잠재 고객과 이야기하거나, 시장 조사를 해봤냐고 물어보면, 이런 설문 결과를 보여준다. 대부분 현재 시장에 있는 제품의 더 편한 대체 솔루션이 있다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바꿀 의향이 있거나, 이런 게 나오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돈을 지불하고 사용해볼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설문 결과를 보여준다.

일단 설문 조사는 아이디어를 검증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설문을 작성할 때, 작성자는 본인이 원하는 답변을 얻기 위해 설문을 만든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바가 있고, 설문 결과에 대해서 본인은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고,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잠재 고객의 입과 손가락에서 나온 결과는 믿으면 안 된다. 뭐, 그래도 아예 이런 설문 조사를 하지 않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해보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80% 이상의 설문 응답자들이 우리 제품이 나오면 사용할 의향이 매우 크다고 했는데, 막상 출시하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 많던 잠재 고객은 어디 갔고, 왜 아무도 설문에서 말한 대로 우리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까?

일단, 설문 조사는 시장과 고객의 진짜 지불용의를 반영하지 않는다. 입을 여는 거와 지갑을 여는 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문조사를 정말 제대로 했고, 여기서 나온 80%라는 결과가 진짜인데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포스팅의 주제인,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깊이와 너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설문 대상의 80%가 현재 시장에 있는 솔루션이 불편하다고 하면, 뭔가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는 상당히 넓은 문제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제품보다 더 뛰어난 대체 솔루션을 제공했는데도 불편함을 호소하던 80%의 고객이 더 빠르고, 더 좋고, 더 싼 우리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이 문제가 넓긴 하지만, 깊진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즉,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기엔 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완전히 새로운 제품으로 갈아탈 정도로 불편하진 않다는 뜻이다. 문제가 더 깊어야지만, 대부분의 고객이 지갑을 열고, 기꺼이 돈을 쓸 지불 의사가 생기는데, 이렇게 애매하게 불편하면, 우리가 바라던 반응이 안 일어날지도 모른다. 새로운 제품의 switching cost보다 혜택이 (월등히) 더 커야 하는데, 문제가 깊지 않고 넓기만 하면, 혜택보단 switching cost가 더 크고, 결과적으로는, 좋은 대체 솔루션을 제공하는 게 어렵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신용카드를 긁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게 이 포스팅에서 말하는 문제의 너비와 깊이이다. 카드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 카드 수수료, 플라스틱이 환경이 미치는 영향, 카드가 안되는 상점, 마그네틱 손상 등의 플라스틱 신용카드의 명확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결제 솔루션을 많은 창업가들이 연구한다. 그리고 이미 시장에 모바일 결제 등의 다양한 대체 솔루션이 존재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갑에서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서 단말기에 긁는다. 왜냐하면,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신용카드 기술이 좋고, 인프라가 너무 잘 만들어져서, 카드를 긁는 것만큼 편한 결제 방법이 없다.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신용카드의 문제점이 당연히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인정해서, 이게 굉장히 넓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모바일 결제와 같은 대체 방법으로 갈아탈 정도로 그 문제가 깊진 않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당장 대체할 수 있는 솔루션이 한국에서 대중화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건 넓고 깊은 시장의 문제를 파악해서 이걸 공략하는 건데, 이런 시장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문제 자체의 너비는 적당하지만, 굉장히 깊은 걸 선호하는 편이다.

The Long Game

Marques Brownlee라는 20대 유튜버/인플루언서가 있다. 이 친구의 취미는 전자제품을 리뷰하는 건데, 유튜브 초기 시절부터 리뷰 동영상을 꾸준히 올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업계에서 굉장히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크리에이터가 됐다.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글의 부사장이 이 친구에 대해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테크 리뷰어라고 한 걸 보면, 얼마나 이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지 알 수 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자제품 리뷰 동영상을 업로딩 했냐 하면, 2009년부터 했으니까, 12년 동안이다.

얼마 전에 이분의 인터뷰를 봤는데, 크리에이터 경제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미래의 유튜버들이 보면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 중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았던 건 꾸준함에 대한 부분이다. 너도 나도 “폭발적인 성장” , “제이 커브” , “유니콘” , “블리츠스케일링”과 같은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우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마르케스가 현재 1,400만 명의 팔로워가 있는데, 아마 대부분 1,400만이라는 숫자에만 관심을 두지, 이 정도의 팔로워를 확보하는데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건 간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공개한 1,400만 팔로워의 비법이 있었는데, 이건 바로 꾸준함이었다. 취미생활이 이젠 작은 기업이 됐는데, 큰 위기와 기복 없이 12년 동안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본인은 정작 순간적인 제이커브나 폭발적인 성장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가 100번째 리뷰 동영상을 올렸을 때 74명이 그의 채널을 팔로우했고, 이후에도 굉장히 더디게 성장을 했다고 한다. 요샌 웬만한 유튜버들은 팔로워 수가 이렇게 느리게 올라가면, 진작 포기하고 동영상을 더는 안 올렸을 것 같은데, 마르케스는 그냥 본인이 하고 싶고, 나름 잘한다고 생각하는 리뷰 동영상을 계속 꾸준히 올렸다고 한다.

당시엔 크리에이터와 인플루언서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시기였고, 동영상을 유튜브에 정기적으로 올리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서, 솔직히 74명의 팔로워가 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고, 74명이나 내가 만든 동영상에 관심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튜버 초기 시절에 만약에 대박을 경험했다면, 아마도 오늘의 마르케스는 없었을 거라고 한다. 그 이후에는 이 대박, 그리고 오로지 대박만을 위해 동영상을 만들 텐데, 이건 실력보단 운이 크게 작용을 하므로 자주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아서 대박 난 건데, 이후에 대박을 노리고 사업을 하면, 그렇게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계속 실망할 것이고,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낄 것이고, 그러면 꾸준함과는 멀어지고,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두 다 인생 한방, 인생 역전, 욜로 등을 외치는 혼란스러운 한방 세상에 단비 같은 통찰력이다.

창업가의 미안함

지난 9년 동안 우린 꽤 많은 회사에 투자했다. 이미 투자사 수가 150개를 훌쩍 넘었는데, 정확한 숫자를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워낙 초기 회사에 투자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이 중 많은 회사가 폐업한다. 스타트업의 실패율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연구결과가 있지만, 통상적으로 창업 1년 안으로 10% 정도가 망하고, 2년~5년 안에 70% 정도가 망한다고 한다. 우리같이 초기에 투자하면, 이 실패율은 더욱더 올라간다.

이런 생리를 잘 알고, 매일 이런 사례를 접하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가 폐업한다고 해도 우린 그렇게 놀라진 않는다. 물론, 안타깝고, 우리도 손실 처리를 해야 하는 거에 대한 걱정은 당연히 있지만, 실패와 폐업 자체는 투자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젠 VC 초년 시절같이 스트레스받고, 잠을 설치진 않는다.

하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는 상황은 다를 수가 있다. 우린 이미 이 경험을 9년 동안 많이 했기 때문에 면역력이 어느 정도 생겼지만, 대부분의 창업가들에게는 신체의 일부와 같은 스타트업의 폐업은 창업 인생 최초의 실패이고, 최초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아프다. 창업하고 스타트업 운영하는 거 자체가 큰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의 연속인데, 이게 망하면 그 스트레스는 10배가 된다는 이야기를 우리 투자사 대표들에게 자주 들어서 나도 이게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는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투자사 대표랑 이 힘든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고생했고, 이분도 스스로 잘하고, 웬만하면 본인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나한테 어느 날 할 이야기가 있다고 연락 왔을 때, 직감적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 미팅을 했다. 역시, 그동안 정말 모든 걸 다 해봤지만, 회사는 성장하지 못했고, 펀딩도 안 됐고, 이젠 이 상태에서는 본인이 제대로 된 생활을 못 하기 때문에 그만해야겠다는 말을 했다.

위에서 말 한대로, 내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그 말을 하면서 울먹거리는 걸 보니까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안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순간적으로 나도 속으로 울컥했다.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실은, 우리한테 미안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투자금을 날렸다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이, 몇 년 동안 본인의 인생을 걸고 한 스타트업이 망했을 때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더 무겁게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다.

투자를 받고, 이 돈을 헛되게 쓰지 않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사업이 잘 안 됐으면, 창업가들이 투자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는 창업가와 비즈니스를 보고 자신 있게 투자한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한테 투자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투자하고 싶어서 돈을 투입했으면, 사업이 잘 안돼서 회사가 망해도 우린 별로 할 말은 없다. 이건 창업가의 잘못도 아니고, 투자자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실패 확률이 훨씬 높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창업가도 최선을 다했고, 투자자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면, 실은 그 누구도 미안할 필요는 없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여기에서의 값진 배움을 기억하고, 다시 사업을 하면 같은 실수를 최대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한다(그런데, 내 경험에 의하면, 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긴 한다. 이 또한 스타트업의 일상이며, 인생이다).

끈질김

주말에 영화채널을 기웃거리다가 Dark Waters라는 법정스릴러 영화를 보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앤 해서웨이가 나와서 잠깐 보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본,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한국에서는 작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법정스릴서라는 장르도 별로 인기 없고, 아마도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 있거나, 화제가 되진 않은 작품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뉴욕타임즈의 2016년 기사 “The Lawyer Who Became DuPont’s Worst Nightmare“를 읽어보면, 이 사건의 내용이 꽤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세계적인 화확회사 듀폰이 독성이 강하고, 어떻게 보면 발명되지 말았어야 하는 인체에 정말 해로운 C8이라는 인공 화학물질의 독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이 사실을 은폐했고, Rob Bilott이라는 변호사가 20년 이상 끈질기게 조사하고 쫓아다니면서 결국엔 듀폰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이기는 내용이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탁월했고, 감독의 연출도 너무 좋았지만, 이 영화의 핵심 내용은 한 인간의 끈질김과 본인이 시작한 일에 대해서 끝을 보려고 하는 의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듀폰이라는, 어떻게 보면 힘없는 변호사가 상대하기엔 너무나 큰 거인 같은 기업을 상대로, 20년 동안 벌인 법적 싸움을 2시간 영화로 보여줘도, 보는 사람은 정말 애가 타고, 화가 나고, 답답했는데, 실제 20년 동안 그 싸움을 벌인 변호사의 속은 다 타버렸을 것 같다. 솔직히 나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소명의식, 이거 다 좋은데, 그렇다고 인생을 망쳐가면서까지 불가능한 싸움을 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긴 싫기 때문이다.

그래도 끈질기게 버티고, 끈질기게 싸우고, 때로는 울고, 웃고, 떼를 쓰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끝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등지고 나만의 길을 간 이 변호사에게, 나는 영화가 끝나자, 거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혼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일을 하다 보면, 또는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내가 가진 확신이 맞는지,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속으로는 맞고, 단지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조건 끈질기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크워터스의 끈질긴 변호사 생각을 하면서 버텨야겠다.

기술의 진보

4월에 여의도에서 하는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 내가 행사같은거 별로 안 좋아해서, 원래 참석을 잘 안 하고, 코로나19 이후로는 아예 사람들 모이는 장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날 행사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고, 직접 만나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던, 업계의 유명하고, 통찰력 깊은 투자를 한 해외 VC들이 참석해서, 거의 1년 반 만에 30명 이상 참석한 행사에 물리적으로 직접 갔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해외 VC는 직접 참석하는 게 아니라 줌을 통해서 원거리로 패널 토의를 하고, 이 패널토의를 보는 청중만 직접 참석하는 행사였다. 실은, 가서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했던건데,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다. 바쁜 사람들이 굳이 위험하게 2주 격리까지 하면서 이 행사에 오기 위해서 한국으로 올리가 없는데, 내가 너무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초대형 화면을 통해서 멀리 실리콘밸리에 있는 VC들이 줌으로 이야기하는걸 보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화질과 음질 너무 좋았고, 중간에 일시적인 에러가 발생해도, 금방 다시 조절하고, 행사를 진행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화상 행사를 하기 위해서 무대 오른쪽에 마련된 장비를 봤는데, 정말 간단했다. 노트북 한 대가 전부였고, 여기에 연결된 음향 기기는 모두 행사장에 기본적으로 준비된 스탠다드 장비였다.

이걸 보면서,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고,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가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20년 전만 해도 이런 헤비한 화상 행사를 진행하려면, 폴리콤 장비나 시스코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구비해야했고, 이걸 운영하고 관리하는 인력 또한 별도로 필요했다. 2000년대 초반 실리콘밸리 보안 스타트업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은행과 컨퍼런스 콜을 자주 했었는데, 큰 회의실 중앙에 시커먼 폴리콤 장비를 통해서 국제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화상 솔루션까지 도입해서 회의실 하나를 화상회의 전용 룸으로 만들었는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비하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데 혹시나 연결이 끊기거나 에러가 발생하면 즉시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에 기술지원팀 또한 별도로 필요했다. 그리고 회의하는 모든 참석자가 이런 무겁고 비싼 장비가 있어야 했다.

저 멀리 실리콘밸리의 VC가 줌을 통해서 한국 여의도의 청중에게 말하는 걸 보니, 20년 전의 폴리콤 회의실이 계속 떠올랐고, 이젠 이런 거추장스럽고 비싼 장비 대신, 노트북, 헤드셋, 그리고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저렴한 SaaS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이게 가능하다니, 기술이 정말 좋아졌다는 생각을 행사 내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