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l

참 어려운 상장 시장

우리는 쿠팡의 매우 작은 주주이다. 스트롱이 쿠팡에 직접 투자하진 않았지만, 스트로의 포트폴리오였던 Recomio라는 회사가 쿠팡에 주식교환으로 인수되면서 쿠팡의 주주가 됐고, 상장 주식을 대부분 팔았지만 아직 소량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1호 펀드의 포트폴리오인데 이미 이 펀드의 나이는 14살이 되어 간다. 청산 시점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의 LP들이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물어봤던 질문이 남은 쿠팡 주식 처분 시점이다.

이분들에게 나의 한결같은 답변은 “한국에 살면 직접 체감할 수 있는데, 쿠팡은 한국의 이커머스를 완전히 다 먹어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현재 쿠팡 주가는(당시 $30 ~ $35 정도)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가격이 더 오르면 팔 건데 그게 최소 $50 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였다. 실은 매우 확신에 찬 자신 있는 답변이었다. 솔직히 겉으로는 $50라고 했지만, 내 마음속엔 쿠팡은 $100까지 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개인정보가 유출됐을 때만 해도 잘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쿠팡이 보여준 태도와 중요한 순간에 했던 결정들의 질이 상당히 실망스러웠고, 그 결과 때문에 현재 쿠팡 주식은 $20를 하회하고 있다. 역시 어떤 LP 분들은 나에게 과연 쿠팡 주식이 앞으로 $50 가 될 수 있을지 물어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포트폴리오사가 상장하면, 스트롱은 어떤 기준으로 상장 주식을 처리할지 물어보는 분들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몇 주 동안 시간 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데, 내 결론은 상장 시장은 참 어려운 시장이고,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는 VC에겐 – 특히나 우리 같이 극초기 회사에 투자하는 – 제3외국어와 같이 이해하고 배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쿠팡 사업 자체의 펀더멘탈이 무너져서 주가가 하락한다고 볼 순 없다. 쿠팡의 펀더멘탈은 실은 매우 강하다. 이 정도로 물류 인프라를 잘 운영하고, 이 정도로 세상 온갖 제품을 잘 판매하는 회사는 한국에 없고, 전 세계에도 몇 개 없을 정도로 사업은 잘 한다. 물론, 그 물류와 이커머스 사업의 인프라를 비인간적으로 운영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업 자체만 봤을 땐 굉장히 탄탄한 회사다. 주가가 폭락하는 이유는 시장의 정서와 감정의 문제이고, 흔히 이 바닥에서 말하는 FUDGE(Fear, Uncertainty, Doubt, Greed, Emotion)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번에 미국에서 만난 어떤 투자자는 중국의 VC에 오래전에 투자했는데, 이 VC가 초기 투자했던 중국 회사가 상장하면서 당시의 시총에 의하면 거의 2,000배의 돈을 (서류상으로) 벌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VC는 마치 내가 쿠팡에 대해서 확신했듯이, 그 회사의 펀더멘탈이 강하고 시장이 더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몇 년 후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상장 주식을 안 팔고 계속 보유했다고 한다. 그래서 4년을 더 보유했는데, 그동안 부침이 있었지만, 현재 가격은 4년 전과 똑같다고 한다. 서류상으로 돈을 크게 잃진 않았지만, 이 VC에 투자한 LP들은 4년 동안 실제 배분받은 건 한 푼도 없었고, 막대한 기회비용이 발생해서 굉장히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실은 이 회사는 그동안 매출은 많이 증가했지만, 중국 정부의 규제와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주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상장 시장은 비상장 시장과 많이 다르다. 남들은 비상장 시장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상장 시장이 더 비이성적인 것 같다. 논리보단 감정, 두려움과 욕심이 주가를 움직이는 시장인데, 솔직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이 비이성적이라서 이게 고스란히 상장 시장에 전체적으로 반영되는 것 같다.

쿠팡 사태로 내가 배운 점은 – 그리고 아직도 이 배움은 계속 되고 있다 –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상장하게 되면,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한 시점에 파는 게 어쩌면 VC들에겐 더 맞는 전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속 보유하면서 상장 시장을 공부하고 예측하는 방법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요소 때문에 상장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건 우리 같은 초기 VC들이 잘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닌 것 같다.

정치적 사업

미국 출장 중에 어떤 미국 VC가 혹시 스트롱이 이런 회사에 투자 관심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 분은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어떤 시장에, 어떤 조건으로 투자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딜을 공유해 준 것 같다. 희토류 관련 사업을 하는 미국 회사인데 현재 약 3조 원 밸류로 여러 VC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투자하기엔 너무나 비싼 회사였고, 분야도 좀 그렇고, 시장도 한국이 아니라서 듣자마자 바로 패스이긴 했는데, 그냥 희토류 시장 자체가 좀 궁금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15분 정도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희토류 시장의 90%가 중국에 있어서 우리가 이야기하던 이 3조 원 밸류의 회사는 남은 10%의 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현재 실제 매출은 전혀 없고, 예약된 매출만 있다는 것이었다. 예약된 매출이란 중국과 미국의 마찰 때문에 미국 정부가 희토류 확보를 위해서 이 회사를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어서 미국 정부로부터 부킹?된 매출이다. 나는 이 사업이 과연 잘 될지, 그리고 매출 0원인 회사의 기업가치가 3조 원이라는 게 말이 되는지, 도대체 이 회사에 이미 커밋한 투자자들은 누구이고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짜 궁금하긴 했다.

미래에 예약된(=부킹된) 매출이 발생하는 영역에서 사업하는 우리 투자사들도 있는데, 이 부킹이 된 매출 중 실제 매출로 전환되는 금액은 대부분 0이거나 매우 작다. 아마도 위에서 이야기한 희토류 회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부킹된 매출이라서 전환율은 조금 더 높을 것 같지만, 현재 미국 정부가 하는 걸 보면 이 또한 불확실성 투성이다.

이런 사업을 우리는 정치적인 사업(political business)이라고 한다. 상업적인 사업(commercial business)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업이고,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제대로 된 사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과의 마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밀어주는 분야라서 갑자기 떴고, 주목받는 사업이라서 이런 회사에 3조 원 밸류에이션에 돈을 쏘는 투자자도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미중 관계가 좋아지거나, 또는 미국 정부의 희토류에 대한 기조가 바뀐다면 하루 만에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사업이다.

한국에서도 가끔 이런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을 만난다. 자생할 수 있는 기술, 제품, 서비스는 없고 정부의 기조 때문에 운 좋게 큰 계약을 하거나 큰 매출을 만드는 정치적인 사업이 실은 한국에도 꽤 많다. 워낙 한국 정부가 과감한 드라이브를 많이 걸고, 특정 분야가 뜬다고 하면 이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온갖 정부 과제와 보조금이 갑자기 생기기 때문이다.

창업자나 투자자도 본인들이 하는 사업과 투자 검토하는 사업이 정치적인 사업인지 시장의 논리로 돌아가는 상업적인 사업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 관건은 이 사업에서 정치적인 부분이 없어져도 자생할 수 있는 제품, 매출, 그리고 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인지 여부다.

지금 제대로 해라

작년 연말에 따뜻한 방콕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가졌다. 말이 휴식이지만, 우린 워낙 적은 인력이 많은 일을 하고, 각자 맡은 일이 있어서 일하면서 쉬는 일정이었는데, 일보다는 휴식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이 기간에 골프를 몇 번 쳤는데, 골프 라운딩이 끝나고 점수표를 보면 매번 이런 아쉬움의 말들을 했다. “1번 홀 파 5에서 물에 두 번 빠져서 4오버만 안 했다면 80대 쳤을 텐데.” , “13번 홀에서 퍼팅을 두 개로 끝냈다면 그 홀은 파했을 텐데. 오늘 퍼팅이 별로네.” , “아이언은 완벽했는데 드라이버가 오늘 협조를 안 해주네.”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업무를 처리하면서 몇몇 투자사 대표님들과 이메일, 카톡, 통화를 했는데, 이들이 이런 말들을 했다. “아쉽네요. 런웨이가 3개월만 더 있었다면 잘했을 텐데요.” , “그때 그 투자가 됐어야 하는데” , “굳이 그 기능을 개발하는데 시간, 사람, 돈을 그때 안 써야 했는데” , “그때 그 정도의 매출을 해야 했는데”

실은 위에서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하는 말은 1년 내내 너무 많이 듣는 말이고, 들을 때마다 나도 같이 아쉬워하는데, 이날은 대표님들의 아쉬움과 오전의 내 골프 라운딩의 아쉬움이 머릿속에서 겹치면서 한 가지의 작은 깨달음과 배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게 인생이고, 인생에서 ‘그때’는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그때, 또는 지금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났다면, 결과에 대해서 다시는 생각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고, 그냥 바로 다음 수를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 골프 라운딩에서 공이 물에 빠지지 않았다면, 모든 퍼팅을 세 개 대신 두 개로 마무리했다면, 그 칩샷을 삐직하지 않았다면,,,그러면 당연히 점수가 훨씬 더 좋았을 것이고, 최고의 골프 경기를 했을 텐데. 이런 후회는 시간 낭비다. 그때 티박스에 올랐을 때, 그린 위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야 했다. 왜냐하면 기회라는 건 여러 번 오지 않고, 다시는 ‘그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런웨이가 3개월만 더 있었다면 새로운 기능을 출시해서 회사를 흑자전환 시켰을 텐데, 아쉽지만, 지금은 런웨이가 끝났다. 몇 달 전에 런웨이가 남아 있을 때, 그때 제대로 잘 해야 했다. 그때 그 투자를 받았다면 회사는 반등했을 텐데, 아쉽지만, 투자를 못 받아서 은행 잔고는 바닥났다. 그럼 그때 투자를 받았어야 한다. 그때 그 돈을 쓰지 말아야 했는데, 아쉽지만 이미 돈은 썼고 우린 장래가 어두운 돈 없는 스타트업이 됐다. 아쉽지만, 그때 잘 해야 했고, 그때 제대로 된 판단을 해서 돈을 안 썼어야 한다.

이게 인생이다. 다시는 ‘그때’가 오지 않는다. 지금 제대로 해라. 그때 제대로 안 했다면, 지금 제대로 해라. 그때에 대한 아쉬움과 불평은 도움이 안 된다.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해라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몇 번 인용했는데, 내가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고 썼던 이런 시가 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일주일을 계속하면 성실한 것입니다.
한 달을 계속 한다면 신의가 있는 것입니다.
일 년을 계속 한다면 생활이 변할 것입니다.
십 년을 계속 한다면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큰 일
아주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강미정 작가의 ‘아주 작은 일’이라는 시인데, 내가 살고 싶은, 그리고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잘 압축한 몇 줄의 문장이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내가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주옥같은 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와중, 내가 자주 듣는 전직 특수부대원의 팟캐스트(Jocko Podcast) 인터뷰에서 어떤 군인이 본인의 인생철학은 “be big in the little things”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 또한 내 마음가짐을 완벽하게 정리해 주는 주옥같은 단어들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짐과 결심을 한다. 나는 새해 다짐은 없고 그냥 인생 다짐만 있는데, 매년 1월 1일 많은 분들이 대단한 다짐들을 한다. 아주 거창하고 거대한 다짐들인데, 이런 거창한 다짐을 하는 분 중 실제로 실행하는 분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앞으로는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해라(be big in the little things)”라고 말해줄 것이다.

새해가 되면 또 헬스장에 인간들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며칠 전에 친구가 “새해가 되면 꼭 운동 끊어서 일주일에 최소 4번은 헬스장 가야지”라고 했는데, 나는 이 친구에게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당장 등록해서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라고 했다. 그렇게 거창하게 신년에 열심히 운동하겠다고 결심할 시간에 그냥 오늘 당장 가서 운동 시작하는 게 더 쉬운 일이다. 그리고 헬스장 등록할 필요도 없고 그냥 매일 스쿼트 하면서 양치하고, 양치 끝나고 푸쉬업 5개씩만 하면 된다. 작은 것에서 완벽함을 추구하고, 이 작은 일을 계속하면 아주 큰 일이 되는데, 처음부터 너무 큰 일을 하려고 하면 잘 안된다.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큰 일도 완벽하게 하는데, 나는 이걸 매달 월말에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포트폴리오사 대표들에게 매달 업데이트를 공유해달라고 한다. 뭐, 그렇게 대단한 내용을 요구하는 건 아니고, 월간 리포트를 위해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사업을 하는 분들이면 매달 정기적으로 사업 내용을 검토하고 잘한 것과 못 한 것을 복기하면서 조금씩 더 좋은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온갖 어려움이 닥치는데, 월간 업데이트를 투자자들과 공유하는 건 정말 작은 일 중에서도 가장 작은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대표들이 너무 많다. 한 달에 한 번, 월 마감하면서 투자자와의 최소한의 약속이자 예의인 간략한 리포팅도 못 하는 분들이 무슨 사업을 하고, 펀드레이징을 하고, 영업을 하고, 채용을 제대로 하겠다고 하는지 가끔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분들의 특징 중 하나가 항상 큰 한 방을 노리고, 큰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작은 것부터 완벽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완벽함과 위대함을 추구해라. 그러면 크고 원대한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