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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기

이 공간을 통해서도 과거에 몇 번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내가 2012년에 스트롱을 시작하고 첫 2년 동안 투자자로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건,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창업가보다 내가 그 사업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내가 그 사업을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표가 항상 내 생각과 말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였다. 아마도 이걸 보면 공감하는 투자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B2C를 해야 하는데 B2B를 하고 있거나, 아주 좁고 깊게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데 넓고 얕게 공략하거나, 싸게 많이 팔아야 하는데 비싸게 적게 팔고 있거나, 뭐, 이런 것부터, 제품을 만드는 방법, 펀딩 전략, 채용 전략 등과 같은 중, 장기적인 회사의 방향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지금도 많지만, VC 초창기 시절에는 투자하는 회사마다 이런 갈등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나는 VC가 아니라 VC 흉내를 내는 거였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누우면, 엄청난 고민과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왜 저분은 사업을 저렇게 할까? 내가 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내 말을 안 들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참 괴로웠다.

그런데, 더 많은 회사에 투자하고, 훨씬 더 많은 창업가들을 만나면서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점점 더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VC 초창기에 스트레스받았던 이런 고민이 쓸데없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게 점점 더 증명되고 있어서 다행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과거에 투자한 회사들의 실적과 결과가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는데, 잘되고 있는 회사들은 실은 내가 주장했던 이 회사들이 가야 하는 방향과 취해야 하는 전략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즉, 내가 창업가들에게 “사업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훈수했던 내용과 완전히 다른, 창업가들이 주장한 방식으로 사업한 회사들이 잘 되고 있다. 내가 주장했던 방식으로 사업을 했다면, 아마도 망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내가 너무 세게 주장해서, 내 말을 듣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업했던 창업가들은 지금은 회사가 망했거나 잘 못 하고 있다. 나 때문에 사업이 잘 안됐다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분들이 내 말은 무시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만 사업을 했다면, 어쩌면 더 잘 할텐데라는 생각을 요새 가끔 한다.

내가 맞을 확률보단, 틀릴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요새 나는 내가 창업가들보다 사업을 더 잘 한다는 틀린 믿음으로 인한 고민을 잘 안 하고, 스트레스도 거의 안 받는다. 이건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나는 VC 초반에는 정말 아마추어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같이 수백 개 회사에 투자해서 한 회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짧고 얕은 초기 VC가 어떻게 1년 365일, 하루 24시간 한가지 사업과 제품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창업가보다 그 사업을 더 잘 알거나, 잘할 수가 있겠는가? 솔직히 과거에 내가 몇몇 대표님들에게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은데요” , “그 사업은 이렇게 해야죠” 등의 발언을 했던 걸 생각해 보면 얼굴이 약간 화끈거린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선을 명확하게 긋기 시작했다. 나는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업을 운영하는 믿을만한 창업가들에게 투자하고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선을. 흑백논리로 따져보면 이건 네 사업이지, 내 사업이 아니라는 사고다. 그리고 이렇게 선을 명확하게 그으니까 긍정적인 일들이 생기고 있다. 일단, 내 스트레스 관리 차원에서 너무 좋다. 투자한 회사 대표가 사업을 잘 못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다고 명확하게 구분하니까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다. 그리고, 내가 창업가들보다 사업을 못하는 게 명백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그들이 듣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없다. 이런 생각으로 창업가들을 대하다 보니, 서로 웃는 얼굴로 할 말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professional 한 관계가 오래 유지되는 걸 요새 직접 경험하고 있다.

주주총회나 이사회에 가보면, 아직도 내가 투자한 회사의 대표보다 내가 사업을 더 잘할 수 있고, 시장을 더 잘 알고, 제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VC가 있는데, 이들에게 같은 조언을 드리고 싶다. 투자자와 창업가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고, 그 선을 되도록 넘지 않길 바란다. 왜냐하면, VC가 창업가보다 사업을 더 잘 알고,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100% 착각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는 방법을 찾는다

2월 26일 엔비디아가 4Q 실적 발표를 했다. 이렇게 큰 회사가 아직도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면서 AI 시장을 장악하는 동시에 스스로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출장 중이었는데, 호텔에서 CNBC의 실적 발표 후 젠승황과의 인터뷰를 봤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 젠슨황의 자신감, AI가 가져올 큰 변화 등이 그대로 느껴지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젠슨은 일도 잘하고, 영어도 완전히 미국인처럼 유창하게 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서 언론에 나오면 항상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CEO라고 생각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항상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소프트웨어는 알아서 방법을 찾는다(software finds a way)”

대충 무슨 말인진 모두 다 알 것이다. 엔비디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GPU 칩을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일찍이 GPU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너무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GPU 하드웨어에 대한 독보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했다. 실은, 이 하드웨어 경험만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텐데, 여기에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실력도 그동안 연마할 수 있었다. 결국엔 하드웨어를 잘 구동 시켜서 같은 환경에서 더 높은 성능을 뽑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동안 배웠기 때문에, 내가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엔비디아의 높은 기업가치는 하드웨어보단 이런 소프트웨어 실력 덕분인 것 같다.

하드웨어는 한 번 만들면 고치기 힘들고, 그 구조 자체가 경직되어 있어서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소프트웨어는 추가 비용 없이 초기 버전을 얼마든지 수정하면서 비약적인 개선이 가능하다. 유연한 소프트웨어는 물과 같이 흐르면서, 물리적으로 제한된 하드웨어, 나라마다 다른 산업적 규제, 그리고 계속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기술을 진화시키고 최적화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제자리를 항상 찾아간다.

그런데, 젠슨의 이 말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서 해석해 본다면, 아마도 이분은 항상 방법을 찾는 소프트웨어를 찬양한 게 아니라, 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드는 엔지니어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 창업가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면, 항상 많은 걸 배우면서 느끼는데, 역시 가장 놀라운 건 이들의 생존력과 적응력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이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서 찾는다. 내가 이런 분들을 보고 바퀴벌레 같다는 존경의 비유를 자주 하는데,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바퀴벌레를 가두어도 결국엔 방법을 찾아서 탈출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큰 위기에 봉착해서 더 이상 길이 안 보이는데, 우리의 창업가들은 무조건 방법을 찾는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젠슨이 말 한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이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 것이다. 나는 젠슨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분이 엔비디아의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찬양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은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고 투자하는 창업가들이야말로 항상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덜 약속하고; 더 해주어라

우린 어쩔 땐 하루에도 열 개가 넘는 회사 자료를 검토한다. 관심이 가는 사업은 조금 더 자세히 보고, 그렇지 않은 사업의 자료는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보는 부분 – 예를 들면, 창업팀의 이력이나 매출과 같은 수치가 있는 페이지 – 외엔 빠르게 스캔하고 스크리닝하는 편이다. 모든 회사는 다르고, 모든 비즈니스는 다르므로, 자료의 내용은 회사마다 다르지만, 웬만한 자료는 공통으로 3년 또는 5년 치 매출 추정이 들어간 페이지가 한두 개 있다.

솔직히 우린 이 예상 매출 슬라이드는 잘 안 본다. 어떤 대표들은 이 슬라이드의 숫자를 만들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예측치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서 상당히 복잡한 엑셀을 돌리거나, 아주 무거운 number crunching을 한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땐, 초기 스타트업의 미래의 매출 수치는 거의 90% 정도 디스카운트 하거나, 아예 무시해도 된다. 솔직히 다음 달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사업인데 3년 후의 매출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억지이고, 아무리 정교하게 모델링을 해도 대부분의 수치는 목표와 말도 안 되게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대부분 첫 2년은 큰 성장이 없고 손실이 많이 발생하다가 갑자기 3년 차부터 매출이 20배씩 뛰면서 흑자가 발생하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솔직히 대표들도 이런 그림을 투자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본인들은 속으로 민망한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시간 낭비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아직 1,000만 원의 매출도 못 하는 회사가 3년 후의 매출을 예측하는 건 실용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 숫자를 시뮬레이션해 봤다는 건, 대표가 회사의 전략, 비즈니스모델, 고객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는 의미라서 이 사실 자체는 투자자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주긴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서 계산해 본 숫자를 투자자들이 믿는가에 대해선 나는 매우 부정적이다. 나도 투자자지만, 3개년 프로젝션 등의 수치가 보이는 슬라이드를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 버리는 편이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미래의 목표 매출을 투자자들에게 제시할 때, 이 목표가 투자금이 있어야지 달성 가능한지, 아니면 투자금 없이 현재 자원만으로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펀딩을 돌 때, 그 투자금을 받았을 때 달성 가능한 목표를 자료에 기재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작년 매출이 1억이었는데, 올해는 30억을 하겠다는 약간 비현실적인 추정치를 제시하는 대표들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면, 현재 펀딩하고 있는 10억 원의 투자를 받으면 사람도 채용하고, 마케팅도 하고, 영업도 더 하고 해서 목표 30억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말이다.

이분들에게 그럼 이번에 10억 원보다 적은 5억 원만 투자받거나, 아니면 아예 투자를 못 받으면 매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생각해 봤다면 훨씬 낮은 수치를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목표 매출의 절반도 못 하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때부턴 이 창업가와 회사를 약간의 의심과 디스카운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모든 VC를 대변해서 말할 순 없지만, 회사 자료에 3년~5년 매출 추정치를 넣으려면, 기본적으로 외부 투자 없이 현재의 인력과 돈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산정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또는, 아주 명확하게, 얼마의 투자를 받으면 달성할 수 있는 공격적인 수치와 투자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확실히 구분해 주면 좋겠다. 투자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보면 너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을 것이고, 투자 없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매출을 계산했는데, 이게 너무 초라해 보인다면, 그냥 우린 현재로서는 외부 투자에 의존하는, 형편없고 초라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VC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서, 뭘 어떻게 표시하더라도 결국엔 이런 현실을 잘 파악할 것이다.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번 강조했듯이, 올해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현재 우리가 가진 돈, 인력, 캐파를 150% 돌렸을 때 달성 가능한,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를 투자자들에게 제공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화하는 게 서로에게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투자를 받았을 때 달성할 수 있는 공격적인 목표도 솔직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돈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회사들은 대규모 투자를 받은 후에 매출이 역성장하는 경우도 많고, 이미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회사 상황이 안 좋아서 대규모 감원을 한 회사는 오히려 매출이 두 배 성장한 경우도 있다.

우리 투자사에 내가 항상 조언하는 건, 투자자들에게 약속하는 목표는 되도록 보수적으로 산정하고, 이 보수적인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사업을 잘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underpromise; overdeliver들의 대가들이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잘할까? 이 세상은 허세와 뻥카로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더 강해 보이고, 어려운 상황을 얼렁뚱땅 넘어가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overpromise 하는데, 결국 이들은 모두 다 underdeliver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이들의 신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만 더. 책 읽고 책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하기 좋아하는 대표들이 사랑하는 전사 OKR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전사 목표를 정할 땐, 최소 90%는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해야 하는데, 내가 아는 너무 많은 회사들이 1년 내내 60% 도 달성 못 하는 비현실적으로 빡센 목표를 설정한다. 이렇게 overpromise; underdeliver 하려면 뭐 하러 전사 워크숍을 가고, 바쁜 임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가?

덜 약속하고, 더 해주어라. 사업이든, 인생이든, 우정이든, 연애든.

내 제품의 첫번째 고객은 나

이 블로그에서 ‘개밥 먹기’에 대해서는 지난 18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만큼 제품을 만드는 창업가들에겐 본인이 만든 제품을 1부터 100까지 직접 다 사용해 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만든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내가 하나씩 사용해 보고, 혹시 이상한 건 없는지, 치명적인 버그는 없는지, 이런 점들을 남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발견하고, 매일 우리 제품을 사용하면서 조금씩 개선하는 작업은 창업가들이 절대로 소홀히 하면 안 되는 필수 작업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챙겨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특히, 요새 같이 어려운 시기엔 회사에 피 같은 자금이 고갈되지 않게 대표이사는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서 직원들 월급이 밀리지 않게 해야 하고,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여러 가지 동기 부여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이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돌아버릴 지경이지만, 아무리 바빠도 대표를 비롯한 전 직원이 절대로 하루도 멈추면 안 되는 게 우리 제품 사용하기, 즉, 우리 개밥 먹기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가 고객을 위해서 만들고 있는 제품을 매일 실행하고, 매일 사용해야 한다. 혹시나 기능이 잘 못 되지 않았을까, 숨은 버그가 있지 않을까, 서버가 다운되지 않았을까 등, 하루 종일 우리 제품을 사용하면서 모니터링 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개밥 먹기는 너무나 당연한 스타트업의 첫 번째 법칙인데, 또 이만큼 잘 안 지켜지는 원칙도 없는 것 같다. 실은, 스트롱의 포트폴리오들도 이 비난을 피해 가기가 어렵다. 얼마나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을 안 쓰면, 아주 심각한 에러가 발생한 것도 모르다가 나 같은 투자자가 그 제품을 사용하면서 한참 후에 발견한 오류를 제보해 주면, 그제야 “아, 그런가요?” 하면서 원인 파악을 시작해 본다. 새로운 기능이 출시됐다고 언론에 PR까지 때리면서, 막상 대표에게 그 기능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면 본인도 잘 사용 안 해봤다면서 PM과 나를 연결해 준 경우도 있다.

소프트웨어 회사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밥 먹기’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마이크로소프트 다녔던 짧은 기간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오피스 제품을 담당하는 글로벌 부사장이 오피스 제품의 기능을 하나씩 데모하면서 청중의 질문에 모두 답변했던 기억이다. 그만큼 이분은 본인이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구석구석 다 사용하면서 개밥을 열심히 먹었다는 의미다. 실은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다 핥아먹었는데, 그때 정말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대표와 그 회사의 모든 직원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 어떤 작가라도, 본인 책의 첫 번째 독자는 작가 그 자신이다. 작가가 쓴 책을 스스로 읽었는데 본인이 그 책이 맘에 안 든다면, 다른 독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첫 번째 고객은 이 제품을 만드는 우리 회사의 임직원들이다. 우리가 만든 제품을 우리도 사용해 보지 않았는데, 이걸 어떻게 자랑스럽게 고객에게 보여주고 심지어 돈을 받고 판매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든 제품을 구석구석 꼼꼼히 사용해 보면, 분명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이 있을 것이고, 수많은 버그를 발견할 것이다. 내가 만든 제품의 첫 번째 고객인 내가 수많은 버그를 발견한다면, 이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제품의 첫 번째 고객인 우리 회사 사람들도 우리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우리조차 우리 제품을 사랑할 수가 없다.

이런 개 허접한 제품을 우린 어떻게 시장에 출시하고, 어떻게 주위 사람들에게 사라고 강요하겠는가? 절대로 이렇게 해선 안 되는데, 실은 너무나 많은 스타트업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매일 한다. 너무 많은 스타트업이 본인들도 제대로 사용해 보지 않은 거지 같은 제품을 출시한다. 그러면서 모두 다 대박 나는 유니콘을 꿈꾼다. 모두 다 꿈 깨시길.

에어비앤비의 공동창업가 Brian Chesky 대표가 요샌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2022년까지 집 없이, 에어비앤비에서 여기저기 숙소를 예약하면서 1년 내내 살았다. 이 세상 모든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이 그에겐 있지만, 사장은 회사가 만드는 제품을 눈감고도 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그가 항상 농담처럼 하던 말이 “저는 말 그대로 아직도 우리 사이트에서 살고 있습니다(I still live on the site).” 였는데, 에어비앤비 사장이 집이 없고 회사 웹사이트에서 살고 있다는 건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훨씬 더 작은 대부분의 한국 스타트업의 대표와 임직원들은 눈 감고도 본인들의 제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UI와 UX를 거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줄줄 외워야 한다.

내가 만든 개밥의 첫 번째 고객은 나 자신이다. 내가 만든 개밥을 내가 맛없어서 못 먹는다면, 그 누구도 이걸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등잔 밑은 항상 어둡다

(이 블로그에 쓰는 글은 당연히 다른 사람이 다 읽을 수 있지만, 이 글은 남보단 내 스스로의 반성, 배움, 그리고 성장을 위해서 쓴다.)

우리가 2018년도에 투자한 Norae라는 미국 스타트업이 있다. Ryan이라는, 한국 분은 아니지만,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좋아하는 창업가가 시작한 회사다. 회사 이름 Norae(노래) 자체가 이 팀이 얼마나 케이팝을 좋아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데, 첫 번째 비즈니스는 틱톡의 모태가 된 Musical.ly랑 동일했다. 립싱크하는 동영상과 커버댄스 동영상을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였는데, 여기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콘텐츠가 케이팝이었다.

콘셉트는 재미있었지만, 사업 자체는 썩 잘되지 않았다. 아니, 잘 안된 게 아니라 진짜 별로였다. 똑똑한 창업가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워낙 작은 회사라서 돈도 없었고, 나도 뮤직쉐이크를 통해서 배웠지만, 음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소셜 미디어가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건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작은 투자금은 다 썼고, 팀원은 대부분 떠났고,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스타트업 폐업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이 창업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동 창업가와 방법을 찾아서 계속 서버비를 벌고 앱 자체는 운영이 되게 정말 열심히 허슬했다. 중간에 한 명씩 차례로 다른 회사 업무를 해주면서 외주비도 벌고, 하여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동원해서 바퀴벌레같이 살아남았다.

그런데 틱톡이 너무 커지자, Norae의 가능성은 점점 더 없어졌고, 아마도 이 시점에 다다르면 대부분 창업가들이 그냥 회사 문을 닫을 텐데, 이 회사의 코파운더들은 피봇을 시도했고, Coverstar라는 어린이들을 위한 안전한 TikTok과 유사한 앱을 만들어서 출시했다.

미국 회사라서 한국 창업가만큼 자주 연락하거나 만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계속 이야기하고, 상의할 게 있으면 조언도 하면서 이 팀의 변화를 나는 계속 지켜봤다. 내가 항상 바퀴벌레같이 절대로 죽지 말고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맘속에서는 그냥 회사 문 닫는 게 모두를 위해서 맘 편할 텐데 또 안 될 앱을 새로 만드는 게 안쓰럽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꾸역꾸역 조금씩 진도를 나아갔고, 우리가 첫 기관 투자자이기도 하지만, 초반부터 창업가의 허슬과 노가다를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사업 관련 모든 내용을 지속적으로 투명하게 공유해줬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우리에게 추가 투자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개인적으로 친한 주관적인 감정과 느낌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이 사업, 제품, 팀을 – 팀이라고 해봤자, 코파운더 두 명밖에 안 남았다 –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판단하면 잘 될 가능성이 너무 낮은 사업이라고 판단해서 이 회사에 스트롱이 단독으로 추가 후속 투자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매번 내렸다. 여러 번 검토했지만, 매번 우리 팀에서는 pass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최근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a16z에서 이 회사에 투자한 것이다. 그것도 단독으로. 이 투자자에게 피칭했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실제로 텀싯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을 때, 즉시 내 머릿속에 “왜 우린 투자하지 않았지?” , “우리만 뭔가 못 봤던 건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크고 유명한 VC에게 투자받는다고 해서 사업이 잘되는 건 아니고, a16z가 잘 못 판단한 투자도 수두룩하게 많다. 그래도 이렇게 크고 경험이 많은 VC가, 우리가 수년 동안 잘 알고 있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매번 투자하지 않은 우리 포트폴리오사에 후속 투자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기쁘기도 했지만, 뭔가 아쉽고 허전했다. 우리가 만약에 이전에 이 회사에 추가 투자했다면, 훨씬 더 싸고 좋은 조건에 투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배가 아프기도 했다.

전형적으로 등잔 밑이 어두웠던 케이스였다.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포트폴리오사를 실은 우리가 제일 잘 몰랐던 것이다. 아니, 몰랐던 건 아니고, 오히려 너무 잘 알고, 너무 오랫동안 본 팀이고, 이 팀이 그동안 어떤 고생을 했는지 샅샅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어쩌면 우린 그 뒤에 숨은 장기적인 가능성을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크고 유명한 VC에서 투자했다고 그 회사가 장기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난 스스로 이번 계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역발상적인 생각과 반성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지난 13년 동안 투자했던 모든 포트폴리오사를 다시 한번 검토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팀 전원이 좋은 창업가와 회사를 남보다 먼저 찾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어쩌면 스트롱 포트폴리오에 이런 분들이 있는데 등잔 밑이 어두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친하고, 너무 잘 알고, 너무 당연한 것들의 진가를 우린 못 알아볼 때가 있는 것 같다. 우리 투자사의 후속 투자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이는 투자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서 생각해서 봐야 하는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