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한 방은 없다

스타트업은 린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실패해도 그냥 다음 새로운 시도로 넘어가면 된다. 대기업은 관료주의적이고 느리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기 위해서 내부 승인 과정을 거치다 보면, 그 새로운 건 이미 옛날 것이 되어 있다. 하지만, 대기업은 스타트업이 가지지 못한 자본력과 유통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협업을 종종 본다. 물론, 서로 DNA가 다른 조직이라서 대부분의 협업은 실패하지만, 잘하는 사례도 아주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대기업과의 협업에 너무나 큰 자원을 할당하고, 너무나 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한다. 큰 오프라인 리테일 유통망을 가진 대기업을 통해서 제품이 마케팅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면 매출이 10배 이상 증가할 거라는 시장 조사와 분석 자료를 너무나 굳게 믿으면, 이 협업을 되게 하기 위해서 회사의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수년 동안 자체적으로 매출을 이렇게 크게 만들지 못한 회사인데, 남과의 협업을 통해 큰 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너무 굳게 믿으면, 우리 사업의 핵심이 우리의 제품과 고객에서 다른 회사와의 협업으로 바뀐다.

모든 개발력은 우리에게 폭발적인 성장을 말로 보장하는 파트너사의 요구를 맞추는 데 다 투입되고, 우리 마케팅 담당자들은 우리 자체 마케팅이 아니라, 다른 회사와의 파트너십을 그 회사의 기준에 맞춰서 홍보하기 위해서 바빠진다. 그리고 회사의 핵심인 대표이사 또한 이 협업이 한 방에 우리 회사의 운명을 180도 바꿔 놓고, 그 이후에 우리 회사는 제이 커브 성장을 그릴 수 있다고 굳게 믿어서, 실은 더 중요한 모든 일들은 이 협업 이후로 미룬다.

그런데 대기업과의 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나는 봤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한 후에 잔뜩 기대하면서 시작한 파트너십은 대부분 잘 안된다. 실은, 대부분 재앙의 수준으로 마무리되고, 이 협업 때문에 그동안 날렸던 시간, 돈,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대가는 작은 스타트업을 그대로 파산시킬 수 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한국에선 스타트업의 성공이 “대박”과 “한 방”과 같은 단어로 포장되기 시작했고, 내가 만나는 일부 창업가들은 스타트업에 한 방이 없으면 절대로 제이 커브를 만들 수 없고, 제이 커브를 못 만들면 유니콘 기업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실은, 방금 쓴 문장에 내가 싫어하는 스타트업 단어가 다 들어가 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한 방”, “유니콘”, 그리고 “제이 커브”다. 아직도 이런 한 방 신화를 믿고 있는 창업가들은 이전 글의 AuditBoard와 같은 회사들의 성장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한 방으로 크게 성공하는 대박 성공은 절대로 없다. 특히, 요새 같이 경쟁이 심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한 방에 성공하는 사업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게 아직도 있다면 그건 사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업가들은 특정 기업과의 협업, 특정 기능, 특정 업데이트, 특정 인력이 그동안 회사에 없던 성공을 한 방에 가져올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되고, 여기에 올 인 하면 안 된다. 모든 일들엔 시간이 걸린다(TTT=Things Take Time).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게 되는 복리의 힘, 그리고 복리의 힘을 움직이는 원동력인 나만의 견고한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이다.

절대로 대박은 없다. 이 대박에 올 인하지 마라.

작은 시장, 작은 사람들, 큰 결과

5월 말에 테크크런치에 한 M&A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Hg라는 투자사가 AuditBoard라는 스타트업을 한화로 4조 원($3B)이 넘는 금액에 인수한다는 내용인데, 업계 분들도 이 기사를 보고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인수자인 Hg도 낯선 이름이었고, 이 투자사가 인수한 AuditBoard라는 회사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수 금액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딜이었다. 관련 기사도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찾을 수 있는 기사를 읽어보면 대부분 “당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의 가장 큰 인수 소식”과 비슷한 부류의 내용이다.

AuditBoard는 LA 주변 오렌지카운티의 두 한인 중학교 친구인 Daniel Kim과 Jay Lee가 2014년도에 창업한 회계/감사/리스크 관리 관련 B2B SaaS 스타트업이다. 다니엘이 중견 기업의 CFO 였는데,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회사의 회계 관리 업무를 하면서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시작은 미국 회계/감사 관련 법인 Sarbanes-Oxley 법 준수를 위한 소프트웨어였다. 그래서 창업할 때 회사 이름도 SOXHub이었는데, 회사는 점점 더 그 시장과 제품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회사가 그동안 계속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두 공동창업자가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그런 전형적인 유니콘 창업자들이 아니다. 둘 다 회사를 창업했을 때 나이도 있었고, 그 전에 스타트업 경험이 전혀 없었고, 소프트웨어로 뭔가를 해본 사람들도 아니고, 어쨌든 투자자들이 만났을 때 “이 친구들한테 당장 투자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팀은 아니었다. 또한, AuditBoard의 본사는 Cerritos라는 오렌지카운티의 도시였는데, 내가 알기론, 이 도시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특히나 유니콘 회사를 만들기엔 약간 뜬금없는 지역이긴 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이 풀고자 했던 포천 1,000 기업의 회계/감사 시장을 잘 아는 투자자들이 거의 없고, 알아도 일반적으로 이 시장은 그렇게 큰 시장이 아니라 그냥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틈새시장 정도로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투자자라면 창업가들에게 수십번도 말했을 전형적인 “너무 작은, 스케일이 불가능한 시장”으로 인식되는 틈새에서 이들은 창업했는데, 이런 회사는 투자받는 게 정말 힘들다.

세 번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AuditBoard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첫해부터 만들 수밖에 없었고, 투자도 거의 안/못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고, 정말로 이런 회사를 일부러 찾으려고 하는 투자자가 아니라면 VC의 레이더망에 안 잡혔다. 또한, 너무 틈새시장으로 알려진 분야라서, 경쟁사도 거의 없었고, 이렇다 보니 이 분야는 더욱더 안 알려졌고, 이 회사 또한 더욱더 안 알려졌다.

창업 후 거의 10년 만에 인수되는 AuditBoard의 수치는 굉장히 놀랍다. 일단 연반복매출(ARR)이 한화로 거의 3,000억 원이다. 시장이 가장 좋을 때, B2B SaaS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ARR의 20배 정도였는데,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데도 거의 15배 기업가치로 인수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지금까지 받은 총투자금이 한화로 600억 원밖에 안 된다. 600억 원의 투자를 받아서 3,000억 원의 연 매출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했고 – 참고로, 창업 2년 차부터 흑자 전환했다 – 4조 원에 인수됐는데, 투자 금액 대비 매출 창출 능력이나 엑싯 비율이 이렇게 좋은 스타트업은 드물다. 말 그대로 진짜 유니콘이다.

마지막으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던 이 회사의 인수가, 올해 북미 시장에서 벤처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엑싯 중 가장 큰 메가 엑싯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몰랐던 회사의 엑싯이 올해 북미 시장에서 가장 큰 엑싯이라니,,,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Daniel과 Jay를 2014년도에 처음 만났고, 2015년도에 투자했다. Mucker라는 LA의 액셀러레이터로부터 첫 투자를 받은 후, 스트롱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 투자자였다. 실은,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나도 그땐 세리토스라는 창업불모지에서, 스타트업과는 거리가 너무 먼 두 명의 한인교포 창업가들이, 내가 아예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시장 규모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분야에서, 돈 벌기가 그렇게 어려운 B2B SaaS 사업을 하는 이 회사를 만났을 때 전혀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끈질기게 찾아와서 설득했고, 반은 설득당했지만, 반은 그냥 “이거 투자할 테니까, 더 이상 나를 좀 귀찮게 하지 마세요.(=제발 이거 먹고 떨어지세요)”라는 생각으로 투자했다.

그 누구도 – 나도, 스트롱도, 이 회사의 시리즈 B를 리드한 Battery Ventures도, 그리고 심지어는 두 명의 공동창업가들도 – AuditBoard가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진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이렇게 큰 결과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2014년도의 Daniel과 Jay의 모습과 2024년도의 $3B 엑싯이 계속 머릿속에서 겹치는데, 뭔가 계속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왜 우린 이렇게 더디게 가고 있을까. 왜 우린 남들같이 투자를 못 받을까. 왜 우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까. 왜 우린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니치한 사업을 하고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는 창업가들에게 AuditBoard 이야기를 꼭 공유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느끼는 점도 많을 것이고, 어쩌면 더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겠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길 희망해본다.

내가 하는 일을 굳게 믿고,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결과로 폭발할 수 있는 복리를 믿고, 투자에 의존하지 말고 자생하는 법을 배워라. 이런 마인드로 최소 10년 정도 한 우물만 파면, 어쩌면 뭔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위대한 것들은 TTT라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자.(TTT = Things Take Time).

향 후 25년

우리 아파트 지하에는 헬스장이 있는데, 아파트 헬스장 치곤 꽤 괜찮은 나름 full-sized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나는 주로 아침에 운동하는데, 수년 동안 이 시설을 이용하다 보니, 자주 보이는 주민들이 있고, 이 중 나이가 좀 많은 분도 몇 명 있다.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지만, 그냥 볼 때마다 인사만 하는데, 이분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잡담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옆에 있다 보니 들렸는데, 요새 젊은이들에 대한 욕이었다. 요새 애들은 어딘가 좀 이상하고, 갈수록 세대와 세태가 더 나빠져서 한국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그런 별로 영양가 없는 노인네 잡담이었다. 내가 VC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요새 젊은 친구들 욕을 했을 텐데, 나는 20대와 만나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VC라는 업에 종사하고 있고, 내 경험에 의하면 나는 오히려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보단 희망이 훨씬 더 크다.

얼마 전에 25살 창업가와 미팅했었는데, 이날 내가 느꼈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겠다. 일단 25살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여자라면 졸업해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것이고,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이제 대학교를 졸업했을 나이다. 나는 26살에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학생이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고, 그냥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 편안하게 살았다. 뭔가 내 손으로 직접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그런데 나랑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던 이 젊은 창업가는 25살의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분의 인생철학은 어떻고, 왜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고, 본인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미팅에서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 그리고 또 생각했던 게, 그러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이 25년 후에 25살이 되고 이들이 창업하면 과연 어떤 창업가가 나올지였다. 내가 만난 25살 창업가가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과 모바일을 사용했다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은 AI는 기본이고, 자율주행하는 자동차를 탈 것이고(어쩌면 나는 자동차), 어쩌면 비트코인을 화폐같이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창업하면 도대체 어떤 흥미로운 세상이 펼쳐질까?

이분들이 어떤 창업가가 되든, 확실한 건 나보다 3배는 더 똑똑하고, 창의적이고, 여러 단계 레벨업 된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다. 우리 같이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기대되는 미래다.

마지막으로, 나는 젊은 세대를 욕하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당신들이나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내가 보기엔 어린 것들은 너무 잘하고 있고, 늙은것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잘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한국의 어른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계 건설

올해 3월, 4월에 미국에 거의 한 달 동안 출장을 갔다. 여행 가방 안의 살림살이로 한 달을 외국에서 버티는 것도 어렵지만, 이 한 달 동안 미국에서 9개의 도시를 방문했고, 미국 내에서만 비행기를 13번 탔다. 동부에서 시작해서 서부에서 끝났는데,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비행기 연착도 자주 발생하고, 직항이 없는 곳이 많아서 뒤로 후퇴했다가 전진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아주 피곤했다. 가장 힘든 건, 미국 내에서도 시간 차이가 있다 보니, 귀국 후 한국에서 약속을 잡을 때 시간 계산이 잘 안되는 점이었다. 그래서 약속을 잡은 후에 다시 시간을 변경하는 걸 여러 번 반복했다.

나도 웬만하면 잘 안 지치는데, 이렇게 호텔과 비행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몸도 힘들고, 마음도 많이 지쳐갔다. 특히, 우리가 하는 일이 남을 설득해서 돈을 받고, 이 돈을 다른 분들에게 투자하는 건데, 둘 다 결과가 바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수년이 걸리는 과제라서, 이렇게 한 달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도 단기적인 변화나 결과는 기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앞으로 계속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지쳤다.

출장 중간마다 내가 도대체 이 먼 나라에 와서 뭘 하고 있느냐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데, 그때마다 여기저기 미친 듯이 달아나는 원숭이 마음을 다잡으면서 초심으로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했던 생각이 있다. 나는 평생을 해도 완성하기 힘든 관계들을 만들고 있고, 이 관계 만들기엔 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꾸준히 평생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동시에 완성되지 않는 이 관계가 그나마 완전히 끊기지 않게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그냥 꾸준히 평생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계속 이동하면서, 아는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고, 또 낯선 사람들을 새로 만나는 게 그렇게 스트레스받는 일로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이 관계 만들기를 영어로는 나는 “relationship building”이라고 한다. “Relationship making”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building”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만큼 관계라는 게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고층 건물을 건설하는 것과 비슷하다. 땅을 깊게 파서, 건물의 토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 위에 좋은 재료로 만든 구조물을 하나씩 차곡차곡 올려야 한다. 이렇게 건물을 올리는 일은 큰 노력과 시간이 필수인데, 그 견고함과 오래감은 공들인 노력과 시간에 직접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에 좋은 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지름길 같은 건 없다. 그냥, 꾸준히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번 술 먹고 밥 먹는다고 탄탄한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서로를 알아가야 하고, 그러는 동안에 힘들게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더 탄탄하게 토대를 만들어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관리도 해야 한다. 그래서 관계를 만드는 건 making이 아니라 building이다. 그리고 이는 평생을 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힘든 출장 기간에, 내가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고,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고, 끈기, 뚝심, 그리고 집요함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키니,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지면서 힘이 났다. 그래도 앞으로 한 달짜리 출장은 웬만하면 가지 말아야겠다.

워라밸은 없다

요새 젊은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다양한 걱정과 여러 가지 불안감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특히 직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꽤 많은 분들이 직장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워라밸을 손꼽는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워라밸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도 균형 있는 삶을 좋아한다. 일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니므로,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은 꼭 필요하고, 일도 적당히 하고, 삶도 적당히 즐기든지, 일도 열심히 하고, 삶도 열심히 즐기든지, 어떻게든 이 두 가지를 잘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 특히 스타트업의 현실은 – 이렇게 하는 게 정말 힘든 것 같다. 미안한 말이지만, 스타트업에서 워라밸은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스타트업을 창업했거나, 아니면 스타트업에서 현재 일하고 있다면, 이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경기를 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이 분야에서 오랜 세월 동안 물이 고인 절대 강자가 존재하면, 이 공룡들이 수십 년 동안 쌓아 놓은 만리장성을 단시간 내에 파괴해야 한다. 절대 강자가 없는 분야라면, 더 안 좋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고 뭔가 가능성이 보이는 분야라면 순식간에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것이다. 어쨌든, 우린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의 내려간 부분에서 시작하는 거라서, 빨리 체력과 근력을 키워서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거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빠르고 힘차게 올라가서 이겨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남들이 일할 때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남들이 쉴 때도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이 짓을 길게는 10년 넘게 해야 한다.

일을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우린 자주 한다. 이건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당연히 모든 종류의 회사와 업무에 적용되지만, 스타트업의 경우 약간 특수하다. 스타트업은 일을 잘 하는게 중요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일에 투입하는 절대적인 시간 또한 중요하다. 즉, 진짜 열심히 일해야 하고, 진짜 일을 잘 해야 한다.

내가 쓴 글이지만, 이렇게 보면 워라밸이 불가능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건 참 불공평한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잘 엑싯하고, 남들이 평생 일해도 못 만져보는 돈을 10년 일해서 벌면, 아마도 주위에서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불평을 또 할 것이다.

워라밸이 없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우리 같은 VC도,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완벽하게 찾는 건 쉽지 않다. VC는 워라밸이 없는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람을 지원하는 업무는 9시에 시작해서 6시에 끝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일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선 우리도 항상 대기 전원 상태여야 한다. 포트폴리오 대표가 금요일 밤 11시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당장 도와줘야 하고, 주말에 이들을 지원해야 하면, 주말에도 당연히 일해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VC라는 직업에 따라다니는 책임이자 의무이다.

워라밸이 불가능한 이런 스타트업 라이프가 싫으면, 스타트업에서 일을 안 하면 된다. 간단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기고 싶은데, 남들과 똑같은 페이스로 달릴 순 없지 않을까?